그림자 건축술 혹은 불가해한 것들의 직관
—최호일 시집『바나나의 웃음』서평
박성현 | 시인
상상해보자. 웃어야 하는데 갑자기 ‘입’이 사라졌다면. 우리는 감각이 작용하는 뼈와 살에, 마치 개미가 끓는 것 같은, 이상한 당혹감을 느낄 것이다. ‘이미 없어진 것’에 대한 향수나 일말의 죄책감이 아니며, 또한 불편이나 이질감에서 오는 분노나 증오가 아니다. 그것은 갑작스럽게 죽음에 내몰린 자들이 느끼는 충격과 공포에 가깝다. 당연히 있어야 할 기관이 사라진 몸의, 예기치 못한 참혹한 덩어리들 앞에서 인간과 세계의 숙명적인 관계는 내파(內波)되기 시작한다.
「매트릭스」나 「양들의 침묵」 등 숱한 판타지나 스릴러에서 다양하게 변주되기도 한, 이 ‘기관-의-없음’은 감각의 붕괴에 직면한 사람들의 불가해한 내면 풍경에 다름 아니다. 세계와 주체 사이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기관은, 양자의 연결 고리를 끊어버림으로써, 주체를 혼돈 가운데 내던져버린 것. 이제 시간은 전혀 예기치 않은 방향에서 주체에게 집중되고, 끊임없이 침윤하며, 그의 몸을 재배치한다.
이를테면, ‘바나나’는 불안해지면서 ‘생선’으로 변이되는데(“불안해지는 바나나 // 드디어 생선이 되는 바나나”, 「바나나의 웃음」), 이때 ‘불안’은 거의 모든 타자들을 사건의 발생 지점으로 끌어당겨 압착하고, 분해하여 이질적인 덩어리로 만들어버린다. 눈앞에 있기는 하지만, 전과 결코 동일하지 않은 ‘그것’이 표면을 뚫고 나와 무대를 장악하는 것이다. 하나의 주제가 서로 다른 화성에 의해 변주되고, 종국에는 생경한 음색을 내게 되는 경우처럼, 불안은 타자를 반복해서 불러오고 침식하면서 기관들을 사라지게 하거나 새롭게 배치한다. 주체는 불안 속에서 자신을 관통하는 무수한 ‘가면-기관’들을 생산하는 것이다.
‘냉소’라는 미학적 태도
다시 상상해보자. 입이 사라진 얼굴에서 웃음은 어디에서 나타나는가. 우리가 찾는다 해도 그것은 웃음과 형태적 유사성을 간직한 기관들의 미세한 움직임일 뿐이다. 입이 사라지면서 웃음을 파생한 얼굴의 회로는 변형되고, 생각하지도 못한 기관들─눈의 찡그림, 이마의 주름 등─을 중심으로 ‘웃음’의 구조가 변형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느끼는 당혹은 웃음이 정체불명이 ‘어떤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웃음’이라 생각했던, 그리고 그렇게 믿어왔던 것에 대한 관습적 인과의 붕괴. “그대가 그대 몸을 잠시 바꿔 입고 나온 것”(「춤추는 신데렐라」)과 같은 부자연스러운 어떤 것이 꿈틀거리는. 하여, 우리가 느끼는 충격과 공포는 일상-언어를 파괴하여, 낯설고 기괴하며 심지어는 불가능한 현실들(혹은 환상들)을 파생한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느끼는 감정의 일반이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최호일 시인의 독특함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웃음’이란 우리가 알고 있던 웃음-모델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효과다. 그리고 이 효과는 ‘입’이라는 기관을 통해 고정되며, 우리는 그것이 노출되는 빈도와 소리의 강도, 얼굴 전체의 일그러짐 등을 통해 의미를 맥락화한다. 그런 의미에서 ‘입’은 웃음의 언표적 층위인 것. 때문에 ‘입’이 없는 ‘웃음’이란 얼굴의 표면에서는 불가능하며, 가능하다 해도 상상력이 물질화되는 층위로 한정된다(이때의 한정성이란 무한에 가깝다). 예술가의 손이 직조하는 표정은 그 어떤 형태도 가능하다는 말인데, 그것인 이질적인 것들의 접속이라는 능동적 변신를 따른다. 예컨대, 씨앗은 햇빛과 접속해 ‘환한 중심’을 만들고, 그 중심은 꽃(의 얼굴)로, 또한 내면의 ‘불’로 이어진다; “금의 틈새에 마악 도착한 햇빛이 묻고 이제 싹 틔울 / 씨앗 하나 즐겁게 접속된다 꽃이 피고 그것은 언제나 환한 중심이 / 되었다 꽃의 얼굴은 늘 개폐의 원리를 따른다 // 신나게도 / 그리움의 회로를 타고 와 / 내 안에 불이 켜지는 그”(「스위치」)
문제는 이러한 접속을 통해 만들어지는 형상이 최호일 시인의 내면에서는 그로테스크한 표정을 갖는다는 점이다. F. 베이컨의 3면화(「Three Figures in a Room」, 1964년 作 등)를 마주할 때와 같은 그로테스크 효과. 시인이 “기성품인 이런 손을 매일 씻고 말려서 가지고 다닌다”(「손에 관하여」)고 고백할 때, 손은 인간적인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 물신(物神), 혹은 자본주의의 폐쇄 회로가 된다. 이것은 “당신이 미리 만들어놓은 내 몸”(「위험하다」)이라는, 주체의 죽음까지 예고한다. “만 년 전에 사라졌던 내가 지금은 내 몸속으로 들어와 희고 차가운 물질이 된다”(「로봇들의 약속」)면, 인간의 이성과 감성이란 ‘레디메이드’에 불과하지 않는가. 뒤샹은 이를 예술의 내부로 재배치해 새로운 미학을 만들었지만 최호일 시인은 거꾸로 인간을 컨베이어벨트에 올려놓고, 상품으로 만들어버린다. 물론 인간이 기성품과 다를 것이 없다는 사고방식은 그리 새롭지 않지만, 시인은 그것을 좀 더 기괴하게 풀어놓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된다. “자신의 몸을 다 삼키고 조금 난감해하는 눈동자”(「머리카락이 자라는 시간」), “비누가 자라서 어른이 되고”(「비누」), “아가미 없는 참치”(「저 곳 참치」), “나의 가족은 유리컵과 의자와 진부한 뭉게구름 / 동일한 식탁을 사이에 두고 / 우리는 일제히 사이좋은 사물이 된다”(「「필라멘트」)라는 생경한 풍경의, 방향이 뒤틀려버린 등고선의 이물질과 냉소들. 따라서 그로테스크를 최호일 시인이 가진 가장 능숙한 감각이라 단언해도 틀리지 않는다.
그로테스크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삶에 대한 공포’다(카이저). 그것은 사유의 방식 곧 세계관의 문제이며, 예술가의 창작 태도에 직결된다. 세계를 냉소적이고 기괴하게 묘파함으로써 낯설게 만들고, 세계의 규범과 질서를 어긋나게 함으로써, 인간의 원형에 천착하는 것.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은 최호일 시인이 이질적인 이미지들을 접속시키는 것은 그의 숙명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물신성을 통찰하는 시인의 직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거리는 심각하고 당신은 표정이 없네
가까운 종이에 눈과 입술과 계절을 그려 넣고
돌과 사람과 나무의 이름을 지우고
사물들은 분실한 그림의 뒷면같이 가벼워진다
우리는 검은색을 추구하고 다른 방향을 사랑해
포르노 배우의 이름처럼
공기의 지난 이름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까
간밤이 내게
여러 통의 편지를 쓰고 잊어버린 얼굴로 지나간다
어느 골목으로
가을이 유령처럼 지나다닌다는 문장처럼
당분간 우리는 이렇게 살아갈 것이다
백 통의 편지를 쓰고 나서
지금 이곳에 없는 인형처럼
내게 가장 알맞은 사람들이 지나간다
— 「행인」 전문
거리는 심각한데, 사람들은 그와 무관하다는 듯 표정이 없다. “가까운 종이에 눈과 입술과 계절을 그려 넣”어, 빈자리를 메우지만, 그것은 만들어진 풍경일 뿐이다. 검은 도화지에 신문의 사진들을 오려 붙인, 부자연스러운 형태들. 여전히 “사물들은 분실한 그림의 뒷면같이 가”볍고, 사람들은 동일한 미적 취미에도 불구하고 생활의 지향점은 모두 다르다(“우리는 검은색을 추구하고 다른 방향을 사랑해”). ‘포르노 배우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공기의 지난 이름을 기억”하는 것처럼 쓸모없다. 지난밤의 기억들도 마찬가지. 일회적 관계로 형성된 ‘그들’에게 항구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때의 시간들은 쓰다만 편지처럼 구겨져 있고, 사람과 사람, 혹은 사람과 사물의 관계는 고장 난 시계처럼 망가져 있다. 행인들의 어긋난 시선에서 위악(僞惡)을 발견하는 시인의 통찰은 얼마나 놀라운가.
이 같은 ‘관계의 망가짐’은 ?바나나 웃음?에 폭넓게 펼쳐져 있다. 예컨대, “가까이 있는 행성같이 조금씩 움직이지만 우린 가깝지 않다”(「태어나는 벽」), “빗방울을 세기 위해 열 개의 손가락이 생겼고 / 맥주를 따다가 손을 발견했다”(「기분으로 된 세계」), “아침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사랑한다는 말을 치약처럼 짜내고 있다”(「내 입속은」), “몸통은 공중에 정지해 있고 날개만을 움직이는 새처럼 / 마침내 사라지는 몸통처럼 // 누가 모르게 바라보고 있나 / 가장 잊을 수 없는 나를 만들어놓고”(「정전」), “누군가 이름과 가격표를 적어 아름다운 심장에 핀을 찔러 벽에 붙여 놓았다”(「고통의 메뉴」) 등 많은 시들이 이 왜곡된 관계를 암시하고 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영화처럼 / (중략) / 여름에 내리는 눈송이처럼 // 내 몸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엑스트라」)는 구절도 마찬가지. 거의 모든 시들이 “어느 골목으로 / 가을이 유령처럼 지나다닌다는 문장처럼 / 당분간 우리는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불편을 정확히 지시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인생은 죽은 사람이 씹다 버린 껌 같지 / (중략) / 아직도 시간이 천천히 죽지 않는 이유를 / 아침이 날마다 저녁과 시계 방향으로 헤어지는 이유를”(「당신의 시계」) 아무리 설명하려 해도, 우리는 입이 없다.
그늘은 점점 자라 우리를 먹어치운다
인간을 둘러싼 환경 곧 사물들에 대해, 인간은 얼마만큼 다가갈 수 있고, 또 어떠한 속도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받아들인 그 사물들의 총량을 ‘의식적으로 지각’할 수 있을까. 이것은 무의식의 층위가 아니므로,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인간의 의식은 ‘집중한 만큼’ 지각한다는 것. 우리 주위에는 수없이 많은 지각대상이 존재한다. 대상은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의지와는 상관없이 스스로 작동한다. 감각된 것은 (칸트의 지적처럼) 인간의 오성에 의해 논리적으로 분류된다. 인간의 의식이며, 집중이고, 논리적 회로다. 감각은 의식과 상관없이 스스로 작동한다. 그러므로 개인이 그 환경의 모든 것을 인식하기란 불가능하다. 의식적인 지각은 늘 단편적이다.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은 통제 불가능하고, 지속적이며, 서로 겹쳐져 있으므로(하나의 감각은 무의지적으로 다른 감각과 연결된다) 의식은 그 대부분을 동시에 다룰 수 없다.
최호일 시인이 냉소의 미학적 태도(그로테스크)와 더불어 시작(詩作)의 전략으로 삼은 것은 이 같은 ‘감각의 아이러니’를 활용한 ‘몸’(대상 일체)의 형태적 변신이다. 의식과 관계없이 작동하며, 동시적으로 집중되는 감각에 대해, 시인은 단절과 접속을 순차적으로 연결하면서 문장을 구성한다. 다시 말해, 시인은 감각을 아코디언처럼 펼치고 내부에 감춰진 물질 이미지를 꺼낸다. “음식 냄새가 사라지고 속도가 사라졌다 소파와 부부싸움이 문으로 사라졌다 / 옷을 벗고 아침과 저녁이 부부처럼 살았다”(「아파트」)에서 ‘속도’는 ‘냄새’에, ‘소파’와 ‘부부싸움’은 ‘문에, 그리고 ’아침과 저녁‘은 ‘옷’에 접속되면서 물질화된다. “밤이 오고 / 달빛 아래라면 몰라도 어느 오후는 / 도화지에 그려놓고 잡아당기면 주욱 찢어질 것이다”(「음부꽃」)라는 구절도 마찬가지다. ‘오후’는 ‘도화지’에 접속되면서 ‘잡아당기면 찢어지는’ 물리적 속성을 부여받는다. 이뿐인가. ‘기분’이라는 매우 주관적인 감정도 ‘다섯 장의 종이’에 접속돼 물리적 실체를 갖는다(“다섯 장의 종이를 오려 기분을 만들었다”, 「기분으로 된 세계」).
때문에 냉소는 ‘사라진 입’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다른 감각적 물체들과 접속되면서 확산되는 ‘오류’까지 포괄한다. 불가능한 것들을 직관이라는 이름으로 결속하는 바, 모든 갈라지고 내파되고 찢어진 언어들은 시 속에서 구원된다.
웃으면서 커피를 마시려고 하는데 입이 사라졌다
이른 아침부터 눈이 온다 그러므로 아침부터 사랑한다고 말하거나 욕을 하고 싶은데 아침이 사라진 것
당신과 커피와 커피를 마시지 않은 생각이 삼각관계처럼 아무도 모르는 쪽으로 기우뚱한다
커피를 대신 마셔드립니다
대신 웃어드릴게요
— 「웃음의 포즈」 부분
시인은 위 시를 통해 충격과 공포를 웃음으로 치환하고, 메타포로 변형하는 발군의 능력을 발휘한다. “웃으면서 커피를 마시려고 하는데 입이 사라”지는 상황과, 그리고 “아침부터 사랑한다고 말하거나 욕을 하고 싶은데 아침이 사라”져버린 상황에 대해, 늘 있는, 그리고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사건으로, “커피를 대신 마셔드립니다 / 대신 웃어드릴게요”라며 가볍게 지나친다. ‘당신’에게 입이 없으니, 대신 커피를 마시고, 대신 웃어주면 그만이다. 지나치게 무겁고 두려운 순간이겠지만, 그것은 관습적 인과들이 과감히 깨지는 순간, 곧 “어린 나비 한 마리가 바위의 가슴에 앉는 찰나 바위”에 금이 가버린 “찬란한 생성의 힘”(「스위치」)이 아닐까.
“여기는 입이 없는 세계구나 // 수수꽃다리가 수수와 꽃과 다리가 되지 않으려고 // 잠깐 말을 멈추고 있다”(「수수와 꽃과 다리」)라는 진술이 가능한 것은 이 때문이다. ‘수수꽃다리’가 더 이상 자신이기를 멈추고 변신하고자 할 때, 입은 사라진다(이때 입은 묘하게도 사회적으로 규범화된 말들, 혹은 시간의 ‘리토르넬로’Ritornello와 연관된다). 뿐만 아니다. “내 입속은 하지 않은 말로 가득하다”, “내 입은 내 입속을 먹지 못한다”, “나의 입안은 약간 미쳤다”(「내 입속은」)라는 식의 반복 구조를 통한 언어유희도 이에 해당한다.
의자가 어느 것을 뱉어낸다
꾸벅꾸벅 졸던 중년 남자를 분홍색 여자의 분홍색 엉덩이를
모르는 할머니를 도둑놈을 불편한 가방을 뱉어낸다
(중략)
의자가 없다면 분홍이 없겠지
도둑이 없겠지
모든 이야기가 없겠지
우리는 이야기가 없어서 웃을 수가 없다
의자가 날아온다 웃음을 참을 수 없다
— 「의자 이야기」 부분
‘중년 남자’나 ‘분홍색 여자’, ‘모르는 할머니’, ‘도둑’이 의자에 앉은 것이 아니라, ‘의자’가 이들을 “뱉어낸다”라는 진술에서도 변신을 발견할 수 있다. 사물에 불과한 ‘그것’이, 오히려 모태가 되어 인간들을 생산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의자가 없다면 분홍이 없”고, ‘도둑’과 ‘모든 이야기’가 없다고 한다. 인과율은 여지없이 어긋나버리는 세계의, 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같은 시인은 대상을 산산이 조각내 그것을 다시 붙인다. “나무는 직업적으로 아이를 낳고 / 아이의 엄마가 그것을 어린 새로 만들어 즐거운 코끼리로 키운다”(「연기자들」)에서처럼, ‘나무’와 ‘아이’, ‘엄마’와 ‘어린 새’, ‘즐거운 코끼리’가 만드는 무대 효과는 큐비즘의 그것과 유사하다. 그 속에서, 우리는 시인이 불가능한 것들에 대한 직관을 감지할 수 있지 않은가(‘의자가 날아와서, 웃는다’라는 ‘웃음’의 역진화도 읽을 수 있다).
과연 우리는 이 낯설고 기묘하기만 한 세계를 무엇이라 명명해야 할까. 공포와 충격이 유머와 아이러니로 바뀌는 과정에서, 최호일 시인이 쌓아올린 언어의 성좌(星座)는 도대체 어떤 지도를 그리고 있는 것일까. “세상의 헛간을 잠시 들여다본 이후로 그는 영원히 죽었겠다”(「감은 눈」)라고 노래하는 시인의 닿을 수 없는 아득한 말(言)을 우리는 어디서 또 찾을 수 있을까. 여기서 우리는 시인의 농밀한 건축술이 투영된 「오늘 그림자」를 만나야 한다.
햇빛 말짱한 대낮에도 그림자 없는 것이 있다
바로 그림자
열 살이 되기 위해 길을 건너는 아이도
깨지지 않은 유리창도 모두 조심스럽게 그림자를 거느리고 있다
사실 그림자도 다가가 옷을 벗겨보면
양파 껍질처럼 냄새나는 그림자가 또 있을지 모르지만
태양은 본질적인 것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어느 땐 우리 집 개가 몸을 부르르 떨며 먼지를 턴다
가끔 혼자 넘어진다
그러면 그림자도 같이 일어난다
땅을 가만히 들춰보면 거기 그림자 없는 사람이 누워 있다
그가 신문을 읽고 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오늘자 스포츠 신문을 읽고 있다는 생각은 편견이다
오늘은 문이 잘 열리지 않아
그림자 도둑놈이 그림자를 한 개 훔치러 왔다가
제 그림자를 벗어놓고 갈지도 모른다
내가 종일 걸치고 다닌 옷의 팔다리에 달라붙어
질긴 곱창 그림자를 씹고 있는 그림자들
— 「오늘 그림자」 전문
사실, 빛은 반드시 어둠과 상관한다. “빛을 어둡고 축축하게 보관한다”(「민달팽이」)는 것이 용인될 수 있는 이유는 빛의 영역에서만큼은 어둠이 동시적이기 때문이다(우리는 끝도 없는 암흑을 상상할 수 있어도, 어둠이 없는 빛은 상상할 수 없다). “햇빛 말짱한 대낮에” ‘그림자’가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다; “열 살이 되기 위해 길을 건너는 아이도 / 깨지지 않은 유리창도 모두 조심스럽게 그림자를 거느리고 있다.” 또한 ‘그림자’란 빛이 사물을 투과하지 못할 때 발생하는 물리적 현상(효과)이므로, 그림자에 ‘그림자’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시인은 의뭉스럽게도 “그림자 없는 것이 있다 / 바로 그림자”라며, “그림자도 다가가 옷을 벗겨보면 / 양파 껍질처럼 냄새나는 그림자가 또 있을지 모”른다고 말한다. 게다가 “태양은 본질적인 것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단언하기도 한다. 달리 말하면, 그림자가 자신의 ‘그림자’를 거느리지 못하는 것이, 지극히 현상적인 것에만 신경 쓰는 태양 때문이라는 것.
이 부분이 중요하다. 태양이라는 전능한 신이 전혀 제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표피에만 매달린, 어쩌면 이미 죽어버린 신. 그것은 사물과 사물의 관계를 왜곡시키는 자본주의의 전 지구적 시스템이라 해도 틀리지 않는다. “땅을 가만히 들춰보면 거기 그림자 없는 사람이 누워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태양이 만들어내는 효과에만 집중했다는 뜻이다. 시인은 말한다; “그림자가 사라졌으므로 나는 유일하게 되고 // 가깝고 선명한 모습으로 당신과 건너편이 보인다”(「정전」)라고. “내가 종일 걸치고 다닌 옷의 팔다리에 달라붙어 / 질긴 곱창 그림자를 씹고 있는 그림자들”에서 암시되듯, 그리고 “어둠을 빛의 오른쪽 얼굴로 이해한다”(「민달팽이」)라는 구절에서 나타나듯, 태양의 본질은 그림자에 있을지 모른다.
‘그림자’의 두께를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대상의 굴곡에 따라 자신의 형태를 바꿀 수 있는 완벽한 2차원의 세계이기 때문. 하지만 그림자는 시인의 사유 속에서 입체의 어떤 것으로 전환되며, 다양한 사회적 관계와 접속한다. “그림자 도둑놈이 그림자를 한 개 훔치러 왔다가 / 제 그림자를 벗어놓고 갈지도 모른다”라는, 그림자 속에서 또 다른 차원을 발견하는 건축술이 향하는 곳은 어디일까. 답은 자명하다. 바로 우리의 현실이다. 시인은 말한다; “저녁이 오는 쪽으로 사람들은 죽고 / 여우가 여러 번 울어서 밤이 오면, 아무도 그것이 어둠을 열고 사라진 검고 이상한 사람인 줄 모른다 그늘이 조금씩 먹어치우고 있다는 것을”(「이상한 그늘」). ‘그늘’(그림자)은 점점 자라 우리를 먹어치울 것이다. 이것이 ‘바나나’가 아주 차갑게 냉소하는 이유이다.
--------------
박성현 / 1970년 서울 출생. 2009년 중앙신인문학상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현재 서울교대에서 강의 중이다.
—《현대시》2014년 4월호
김용택의「강천산에 갈라네」감상 / 황인숙
강천산에 갈라네
김용택(1948∼ )
유월이 오면
강천산으로 때동나무 꽃 보러 갈라네
때동나무 하얀 꽃들이
작은 초롱불처럼 불을 밝히면
환한 때동나무 아래 나는 들라네
강천산으로 때동나무 꽃 보러 가면
산딸나무 꽃도 있다네
아, 푸르른 잎사귀들이여
그 푸르른 잎사귀 위에
층층이 별처럼 얹혀
세상에 귀를 기울인 꽃잎들이여
강천산에 진달래꽃 때문에 봄이 옳더니
강천산에 산딸나무 산딸꽃 때문에
강천산 유월이 옳다네
바위 사이를 돌아
흰 자갈 위로 흐르는 물위에
하얀 꽃잎처럼 떠서
나도 이 세상에 귀를 열 수 있다면
눈을 뜰 수 있다면
이 세상 짐을 다 짊어지고
나 혼자라도 나는 강천산에 들라네
이 세상이 다 그르더라도
이 세상이 다 옳은 강천산
때동나무 꽃 아래 가만가만 들어서서
도랑물 건너 산딸나무 꽃을 볼라네
꽃잎이 가만가만 물위에 떨어져서 세상으로 제 얼굴을 찾아가는 강천산에
나는 들라네
...................................................................................................................................................................................
김용택은 고향인 섬진강 강변마을에서 작은 초등학교의 선생님으로 살며 그 산천과 사람들을 순박하고 아름답고 싱싱한 시어로 길어냈다. 삶과 시가 어우러진, 이 행복한 시인에게도 그늘이 있었던가. 답답하기도 했던가. ‘유월이 오면/강천산으로 때동나무 꽃 보러 갈라네’,라 한다. ‘하얀 꽃들이/작은 초롱불처럼 불을’ 밝힌 때동나무 아래서 건너다보이는 산딸나무도 하얗게 꽃이 만발하고, 그 꽃잎들 하염없이 ‘바위 사이를 돌아/흰 자갈 위로 흐르는 물 위에’ 떨어질 때란다. 유월이 오면, ‘아, 푸르른 잎사귀들이며/그 푸르른 잎사귀 위에/층층이 별처럼 얹혀’ 하얗게 마음을 밝히는 때동나무 꽃이여, 산딸나무 꽃이여! 아래에 흰 자갈 구르고 위로 흰 꽃잎 흘러가는, 맑은 개울이여! 하얗게, 하얗게 부서지는 유월이여!
세상의 그름에 마음 다친 이들에게 시인은 함께 가잔다. 옳고 옳은 유월 강천산, 맑고 깨끗한 거기서 귀를 씻고 눈을 씻잔다. ‘옳다’는 건 저절로 우러나는 호감이며 사랑일 테다. ‘그름’은 무겁고 칙칙한 감정,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유월이 오면, 어디라도 산딸나무 꽃 핀 개울에 가서 꽃잎처럼 마음을 띄우고 흘러가보고 싶다. 그러면 ‘가만가만’, 제 마음이 돌아올까….
황인숙 (시인)
김완하의「발자국」감상 / 반칠환
발자국
김완하
너는 항시 뒤에 남아
길 위에서 생을 마친다
네 온기를 남김없이 길 위에 비운다
마을 하나에 닿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너의 목숨을
길 위에 묻어야 하는가
어두워 집에 돌아온 밤
부르튼 발 씻으며
이제야 나는 바닥에 가 닿는다
돌아보면 내 몸 구석구석
네 그리움으로 커 온 길이 있다
발자국이여,
네가 먼저 마을에 가 닿았구나
...................................................................................................................................................................................
항시 뒤에 남지만 항시 먼저 디뎠던 자국이다. 발자국은 살아 있는 존재가 남기는 필연의 흔적이다. 천년바위도 구르기 전까지는 한 발자국도 남기지 못한다. 사람은 두 발로, 호랑이는 네 발로, 지렁이는 온몸으로 남긴다. 발자국은 새로운 세상으로 갈 때마다 제출하는 이력서요, 자서전이다. 발자국은 곧 그 사람이다. 발바닥의 모습을 한 마음의 지문이다. 망설임과 두려움과 설렘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종종종종, 휘적휘적, 비틀비틀, 뚜벅뚜벅, 자박자박, 성큼성큼-당신은 어떤 의태어로 하루를 건널 것인가?
반칠환 (시인)
모멸을 위하여
원구식
1
여기 모멸이라는 이름의 칼이 있다.
이 칼은
칼날도 칼자루도 없다.
그러나 한 나라의 대통령이었던 노무현도
대기업의 회장이었던 정몽헌도
모두 이 칼을 맞고 죽었다.
아니, 맞기도 전에
스스로 뛰어내렸다.
한 사람은 높은 절벽 위에서.
한 사람은 겁 많은 빌딩 12층 창틀 위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칼은
형상이 없으니
사람을 죽여도 처벌받지 않는다.
모멸이여. 안심하라,
너는 신이다.
(랄랄라, 죽은 자는 말이 없다)
2
그러니까, 모멸은 알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칼로 죽는 것이 아니라
자존심이 무너져 죽는다는 것을.
그러니까, 모멸은 모멸을 위해서
절대로 손에 피를 묻혀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저 조그만 욕설과 반말로
치욕감을 주면
너무 억울하고
기가 막혀서 죽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을 포승줄로 묶을 수 있는
이 칼의 섬뜩함은
오로지 그 방향성에 있는 것이다.
이 칼이 가리키는 순간
천하의 조폭도
돈 많은 재벌도
갑자기 오금이 저리며
말이 어눌해지고
질금질금 오줌을 지리다가
시름시름 오한에 몸을 떨며
시들어가는 것이다.
(랄랄라,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문학·선》2015년 봄호
------------
원구식 / 1955년 경기도 연천 출생. 1979년 〈동아일보〉신춘문예 당선. 시집 『먼지와의 싸움은 끝이 없다』『마돈나를 위하여』등. 현재 월간 《현대시》와 격월간《시사사》발행인.
詩人 고영민의 시작법
1. 자기의 핵심역량을 찾아라!
- 누구나 가장 잘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걸 찾으면 됩니다. 남을 따라하면 절대 최선을 다해도 최고가 될 수 없습니다. 내가 가장 잘 하는, 잘 쓸 수 있는 것이 뭔지를 찾아야 합니다. 자기와 맞는 글쓰기를 찾으세요! 거북이와 토끼가 경주를 합니다. 산에서 경주를 하면 백이면 백, 토끼가 이깁니다. 거북이가 이기는 방법은 바다에서 경주를 하는 것입니다. 내가 토끼인지, 거북이인지 먼저 판단을 해야 합니다. 바다로 갈지 산으로 갈지 판단해야 합니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글쓰기를 하세요! 그걸 찾는 것이 우선입니다.
앵두 / 고영민
그녀가 스쿠터를 타고 왔네
빨간 화이바를 쓰고 왔네
그녀의 스쿠터 소리는 부릉부릉 조르는 것 같고, 투정을 부리는 것 같고
흙먼지를일구는 저 길을 쒱, 하고 가로질러왔네
가랑이를 오므리고
발판에 단화를 신은 두 발을 가지런히 올려놓고
허리를 곧추세우고,
기린의 귀처럼 붙어 있는 백미러로
지나는 풍경을 멀리 훔쳐보며
간간, 브레끼를 밟으며
그녀가 풀 많은 내 마당에 스쿠터를 타고 왔네
둥글고 빨간 화이바를 쓰고 왔네
2. 차별화 해라
- <시창작 1>에서 자신의 핵심역량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토끼인지, 거북이인지 먼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하여, 내가 거북이라고 판단을 해서 바다로 갔습니다. 그런데 바다에 갔더니 나 말고도 날고 기는 거북이들이 수두룩 한 것입니다.
그럴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저 역시 바다에 갔더니, 나와 비슷한 함민복 거북이, 이정록 거북이, 손택수 거북이, 문태준 거북이들이 먼저 장악을 하고 있더군요. 이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바로 차별화입니다. 이들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지고 글쓰기의 승부를 거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차별화의 전략으로 위트, 해악, 쉽게 쓰기, 12남매의 가족사 등을 가지고 승부를 걸었습니다. 이것이 내가 그들과 차별화 될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여러분이 토끼라고 판단을 했다면 토끼가 있는 곳을 한번 가볼까요? 그곳엔 이미 황병승 토끼, 김행숙 토끼, 김민정 토끼, 강정 토끼 등이 이미 토끼 마을을 장악했군요! 당신이 만약 조금 늦게 토끼 마을에 갔다면 어떻게 차별화 시킬 예정입니까? 산토끼 토끼야~ 어디를 가느냐? 깡총깡총 뛰면서 어디를 가느냐? 자~ 당신을 차별화 하시기 바랍니다!!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 - 고영민
겨울산을 오르다 갑자기 똥이 마려워
배낭 속 휴지를 찾으니 없다
휴지가 될만한 종이라곤
들고 온 신작시집 한권이 전부
다른 계절 같으면 잎새가 지천의 휴지이련만
그런 궁여지책도 이 계절의 산은
허락치 않는다
할 수 없이 들려 온 시집의 낱장을
무례하게도 찢는다
무릎까지 바지를 내리고 산중턱에 걸터앉아
그분의 시를 정성껏 읽는다
읽은 시를 천천히 손아귀로 구긴다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이 낱장의 종이가 한 시인을 버리고,
한권 시집을 버리고, 자신이 시였음을 버리고
머물던 자신의 페이지마저 버려
온전히 한 장 휴지일 때까지
무참히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펼쳐보니 나를 훑고 지나가도 아프지 않을 만큼
결이 부들부들해져 있다
한 장 종이가 내 밑을 천천히 지나간다
아, 부드럽게 읽힌다
다시 반으로 접어 읽고,
또다시 반으로 접어 읽는다
계란 한판 - 고영민
대낮, 골방에 쳐박혀 시를 쓰다가
문 밖 확성기 소리를 엿듣는다
계란 …(짧은 침묵)
계란 한 판 …(긴 침묵)
계란 한 판이, 삼처너언계란 …(침묵)…계란 한 판
이게 전부인데,
여백의 미가 장난이 아니다
계란, 한 번 치고
침묵하는 동안 듣는 이에게
쫑긋, 귀를 세우게 한다
다시 계란 한 판, 또 침묵
아주 무뚝뚝하게 계란 한 판이 삼천 원
이라 말하자마자 동시에
계란, 하고 친다
듣고 있으니 내공이 만만치 않다
귀를 잡아당긴다
저 소리, 마르고 닳도록 외치다
인이 박혀 생긴 생계의 운율
계란 한 판의 리듬
쓰던 시를 내려놓고
덜컥, 삼천 원을 들고 나선다.
3. 경험을 써라! 가장 절실한 것을 써라! 줄거리(서사)를 만들어라!(공광규 시인의 시 작법과 동일)에서 한가지를 더 추가하면 '드라마틱'을 만들어라!
좋은 시에는 분명 드라마틱이 있다. 드라마틱을 만들기 위해서는 3미를 창출해야 한다. 3미란 바로 흥미, 의미, 재미이다. 드라마틱은 경험이고, 진실함이고, 줄거리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속에 독자의 관심을 끌 수 있는 흥미, 그리고 그 안에 의미를 집어넣을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재미를 주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 흥미를 추구하면 소재주의에 빠진다 너무 의미만을 추구하면 잠언에 빠진다. 너무 재미만을 추구하면 꽁트가 된다. 이 상태를 얼마나 적절하게 간을 맞출 수 있는가가 시인의 관건이다.
시를 잘 쓰는 사람은 대체로 간을 잘 맞춘다. 당신이 만약 음식 솜씨가 없고 간을 잘 못 맞춘다면 시쓰기를 일찍 포기하는 것이 좋다^^ 우리 딸이 귓속말로 하는 말 “엄마가 끓인 라면보다 아빠가 끓인 라면이 훨씬 맛있어요!” 결국 시도 간을 맞추는 것이다. 얼마나 면발을 꼬들꼬들하게 할 것인지!, 냄비에 물을 얼마만큼 넣을 것인지! 불의 세기를 얼마만큼으로 조절할 것인지!!
퍼진 글을 내 놓는 것은 퍼진 라면을 독자에에 먹으라고 내놓은 라면가게 주인처럼 무책임한 것이다.
공손한 손 - 고영민
추운 겨울 어느날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갔다
사람들이 앉아
밥을 기다리고 있었다
밥이 나오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밥뚜껑 위에 한결같이
공손히
손부터 올려놓았다
너와 동침을 한다 - 고영민
시외버스를 탄다
운주사행 표를 들고 자리를 찾으니 한 여자
내 옆자리에 다소곳이 앉아
슬며시 다리를 비킨다
창문은 계속 풍경만을 버릴 뿐
말 한마디 붙이지 않고
순간 여자가 불상처럼 잠들어
나도 그녀의 이불 속에 입정한다
아, 너였구나
문득 내 어깨에 얹혀지는 머리
여자는 내 어깨 위 열반인 양 들고
삼천의 인연이었을 이 옷깃의 여자
등받이를 적당히 눕혀
외간 남자와 나란히 잠이 들었다
잠든 사이, 이불은 계속 울음을 틀어막지만
한 계집아이가 붉은 이불 속에서 기어나오고
미륵의 사내아이가 기어나오고
기어나오고,
날은 저물어 버스는 오체투지로
들녘을 넘고 고개 능선을 지나
마을마다 돌 하나를 올려놓는다
그녀와 하룻밤 천불천탑을 쌓고
와불을 일으켜 세울 즈음
누군가 어깨를 흔들어 깨운다
어쩌나, 첫닭이 운다
그러나 아, 진정 용화세계가 너였구나
헝클어진 머리와 옷매무새를 다시 추스르며
와불은 스스로 일어난다
성급히 차문 밖으로 나오니,
일주문 안으로 사라지는 여자
천천히 불상 속으로 들어가 천년을
그 자리에 누워 있다
4. 끊임없이 펌프질을 해라
펌프질을 안하고 반나절만 그냥 놔두면 펌프속의 물은 다시 땅속으로 잦아든다. 그럴 땐 한바가지 마중물을 붓고 다시 열심히 펌프질을 해야 한다. 처음엔 탁한 물이 나오다가 나중에 차고 맑은 물이 나오기 시작 한다.
시도 마찬가지이다. 펌프질을 안하면 뻔한 내용의 글을 쓰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시상이 떠오르면 계속 파고 들어가야 한다.
일전에 시창작 강의를 한번 한 적이 있다. 5팀으로 나뉘어 학생들을 대상으로 게임을 해보았다. “당신에게 소포가 배달되었습니다. 도장을 찍지 않으면 배달된 소포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도장은 있고 인주가 없네요! 인주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을 3분 동안 최대한 써보시기 바랍니다”
3분 동안 대략 각 팀마다 30개 정도 인주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을 써냈다. 하여, 각 팀마다 처음 생각한 것 5가지를 불러보라고 했다. 대답은 거의 비슷했다. 물감, 피, 흙, 봉숭아꽃, 김칫국물....뭐 이런 식이었다.
그럼 제일 끝에 나온 5가지를 불러보라고 했다. 대답이 가관이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대답들이 나왔다.
제가 드리고 싶은 것은 바로 처음 생각한 5가지는 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내가 생각한 것을 남도 똑같이 생각한다는 것이다. 뻔한 시가 된다는 말이다. 결국 시가 되는 것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상상을 초월하는 가장 밑의 것을 끄집어 낼 때 가능한 것이다. 펌프질을 하면 처음엔 흙탕물이 나온다. 하지만 계속 펌프질을 하면 차고 맑은 물이 나온 것과 동일하다. 상투성을 벗는 것이 시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꽃눈이 번져 - 고영민
잠이 오지 않을 때면
누군가 이 시간, 눈 빠알갛게
나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꾸만 나를 흔들어 깨운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을 만나기 위해
눈 부비고 일어나 차분히 옷 챙겨 입고
나도 잠깐, 어제의 그대에게 멀리 다니러간다는 생각이 든다
다녀올 동안의 설렘으로 잠 못 이루고
소식을 가져올 나를 위해
돌을 괸 채
뭉툭한 내가 나를 한없이 기다려준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순간, 비 쏟아지는 소리
깜박 잠이 들 때면
밤은 더 어둡고 깊어져
당신이 그제서야
무른 나를 순순히 놓아줬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도 지극한 잠속에 고이어 자박자박 숨어든다는 생각이 든다
그대에게 다녀간 내가
사뭇 간소하게 한 소식을 들고 와
눈 씻고 가만히 몸을 누이는
이 어두워
환한 밤에는
5. 쓰고, 또 쓰고, 또 써라! 그 외에 어떤 방법이 없다.
나는 시인이 되는 게 꿈이 아니었고 소설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시인이 되어 버렸다. 생각지도 않게 시인이 되어버렸을 때 나는 시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청맹과니였다. 어떤 것이 좋은 시인지도 어떤 것이 좋지 않은 시인지도 구분할 줄 모르는 상태였다.
한마디로 나는 공짜로, 눈먼 잉어가 걸린 격으로 시인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너무 무섭고 떨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미친 듯이 쓰는 방법 밖에 없었다. 나는 새벽에 일어나 시가 될만한 것이 있을까 일어나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 사연을 소개한다. 지금 여기에 들어와 이 글을 읽는 모든 분은 당시의 나 보다 훨씬 시에 대해서 많이 알고 경험이 있으리라 본다. 그래서 용기를 갖고 자신에게 도전을 해보길 권한다. 누구나 가장 잘 쓸 수 있는 자기 만의 핵심역량을 갖고 있다. 그걸 찾아 쓰고, 또 쓰고 또 쓰길 바란다. 시가 당신에게 넙죽 절을 하며 찾아 올 것이다. 자신을 믿어라! 불안해도 믿어라!
<2006. 2월 문학사상 400호 기념특집- 문학사상과 나>
“안녕하세요? 문학사상사입니다.”
“축하합니다.”
봄날 오후 화장실에 가서 끙, 누런 뱀 한 마리를 풀어주고 자리에 앉자마자 핸드폰으로 이런 연락이 왔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이제 드디어 10년 가까이 써온 나의 소설이 대한민국 문단에 인정을 받게 되는구나, 순간 생각했다. 그렇잖아도 바로 전년, 나는 모 신춘문예 최종심과 <문학사상>의 소설 부문 본심에서 고배를 받아든 선례가 있었던지라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그 축하합니다, 라는 목소리에서 전해지는 감회라는 것은 더더욱 남다를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그래도 혹시, 하는 생각에 전화를 준 문학사상사의 여직원 분에게 이렇게 물었다.
“소설입니까? 시입니까?”
그러자 답변이 걸작이었다.
“소설도 내셨어요?”
전화기를 내려놓은 다음 나는 기쁨보다는 시에 당선되었다는 당혹스러움에 어찌할 바를 몰라 그해, 먼저 등단한 친구 윤에게 전화를 했다. 그는 이건 정말 쾌거가 아닐 수 없다며, 학교 동기들의 인터넷 카페에 이렇게 대문짝만하게 글을 올려놓았다.
“고영민 문학사상 신인상 당선(소설 아님. 진짜 시 부문이라고 함)”
이렇게 하여 나는 <문학사상>과 인연을 맺고 소설가가 아닌 시인이 되어 버렸다. 마치 뭘 어떻게 첫날밤을 치러야 할지 모르는 꼬마 신랑을 신방에 밀어 넣고 불을 꺼버린 그런 형국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학교에도 소문이 퍼져 한동안 나를 가르치신 교수님들 사이에서 웃지 못 할 한 사건으로 회자되기도 했다고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몇 달 후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소설 지도교수님으로부터 다짜고짜 “너 도대체, 뭐 하는 놈이야, 임마”라며 드잡이에 꾸지람(?)까지 들어야 했다.
2002년 6월 <문학사상>은 나의 인생에 그렇게 일대 변혁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이었다. 당시 나는 단편소설 2편과 시 12편을 문학사상사에 보냈다. 대학시절 소설과 시로 전공이 나눠지기 전까지 잠깐 끄적거려 보았던 시가 10년이 넘은 2002년 3월쯤 느닷없이 나에게 다시 찾아와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걸 꼼꼼히 받아 적었고 소설 2편과 함께 동봉하기에 이르렀다.
“파블로 네루다가 시가 어느 날 길을 가는 자신을 불렀다고 말했듯이 나에게도 그런 시간이 찾아왔다. 그건 목소리도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고 침묵도 아니었다. 그냥 어느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였다. 세상의 모든 것이 잘 보이고, 나를 들어 올리고 통과하곤 했다. 그게 시라고 일러주었다”
당시 당선 소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그 후, 나는 미친놈처럼 습작에 매달렸다. 시가 될 만한 것이라면 연주창 앓는 놈 갓끈이라도 핥아줄 듯 무작정 덤벼들었다. 남들처럼 습작 기간이 많았던 것도 아니고, 시가 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공짜 시인이 된지라 내가 나한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은 나무에 타이어를 매달아놓고 야구방망이질을 하듯 끝없이 써내는 일뿐이었다. 변변한 청탁 한번 제대로 받아보지도 못한 채 1년이 지나자 나는 여하튼 볼품없는 것들이지만 300편이 넘는 습작시를 써낼 수 있었다. 2년이 지나자 500편이 넘는 습작시가 나에게 남겨졌다. 그러자 조금씩 “아, 이게 야구구나! 이게 시구나!”라고 스스로에게 조금씩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내 스윙이 조금씩 보이는 것 같았고, 날아오는 공도 조금씩 커 보이고, 몸 쪽으로 오는 공은 당겨 치고, 바깥쪽으로 빠지는 공은 툭, 밀어 치는 방법도 조금씩 터득이 되는 듯 했다. (후략)
깻대를 베는 시간 - 고영민
깻대는 이슬이 걷히기 전에 베는 법
잘 벼린 낫으로 비스듬히 스윽, 당겨 베는 법이라고 당신은 말했네
무정한 생각이 일기 전
밤이 다 가시기전, 명백한 낮빛이 다 오기 전
조금 애처롭게
슬픔의 자리를 옮겨놓듯 천천히 베는 법이라고 말했네
아침밥을 먹기 전의 시간
곤한 숨소리가 남아있어 세상이 아직은 순정해져 있을 때
쓸쓸하게 낫에 베이는 깻대여
하지만 이슬은 사라지고 마는 것
깻대를 베는 것은 어쩜 내 안에 와 있는 당신을 가르는 것과 같아서
가만히 와서 가만히 가는 것을 일부러 가르는 것과 같아서
터지는 슬픔 같은 것이어서
깻대는 마음 축축하게 베는 것이라고 당신은 말했네
이 밭에 첫 모를 옮길 때를 생각하며
그늘 속에 잠든 당신을 탁탁탁 두드려 털 때를 생각하며
싸락싸락 깨알이 바닥에 쏟아질 때를 생각하며
덜 아프게 덜 아프게 베는 법이라고 말했네
아침 햇살이 큰 수레를 끌고 와 비로소 한 계절 가만히 저물다간 것들을 옮겨 싣고
깻대를 베는 것은
여기 있는 나와 저만큼의 당신 같은 것이어서
베인 깻대를 묶어 밭가에 세워두는 일은
이슬이 걷히기 전,
꼭 그 때에 해야 하는 것이라 당신은 간곡히 말하고
6. 대상을 새롭게 의미부여하라.
기존에 부여된 의미를 새로운 눈으로 접근하는 것이 좋다. 나쁜 것을 좋은 쪽으로, 좋은 쪽을 나쁜 쪽으로, 아름다운 것을 추한 것으로, 추한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숭고한 것을 천박한 것으로, 금기시되는 것을 일상적인 것으로, 일상적인 것을 금기시 하는 것으로.....
이러면서 시가 새롭게 환기될 수 있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추한 것을 추하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한 것으로 의미부여 하라. 그곳에 바로 시가 있다.
즐거운 소음 - 고영민
아래층에서 못을 박는지
건물 전체가 울린다.
그 거대한 건물에 틈 하나를
만들기 위해
건물 모두가 제 자리를 내준다.
그 틈,
못에 거울 하나가 내걸린다면
봐라,
조금씩, 아주 조금씩만 양보하면
사람 하나 들어가는 것은
일도 아니다.
저 한밤중의 소음을
나는 웃으면서 참는다.
7. 시를 쓰는 것은 집을 짓는 것과 같다.
시를 쓰는 것은 집 짓는 것과 같다. 누구나 집을 지을 수 있다. 하물며 개미도 집을 짓고, 까치도 집을 짓고, 벌레도 집을 짓는다. 사람이야 말하여 무엇하겠는가? 당연히 집을 잘 짓는다. 이 말은 누구나 시를 쓸 수 있다는 말이다. 문제는 집을 짓는 순서를 모를 뿐이다.
집을 짓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기둥을 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시에서 기둥은 바로 줄거리이다. 처음부터 고대광실을 지으려고 하지 말고 먼저 기둥부터 세워라. 기둥만 세우면 반은 집을 지은 것이다. 기둥만 세우면 비닐만 올려도 집이 되고, 양철만 올려도 집이 되고, 짚을 얹혀 놓아도 집이 된다. 먼저 기둥을 세워라. 기둥은 줄거리이다. 자기가 접한 대상에 줄거리를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제 트럭에 소나무 두 그루가 실려 가는 장면을 보았다. 자, 그럼 이걸 가지고 줄거리를 만들어 보자.
“뽑혀 실려 가는 나무 두 그루를 보니, 살던 집을 버리고 이사를 가는 가난한 내외 같다. 어디로 옮겨질지 불안하다. 잔 뿌리들은 어린 새끼들 같다. 트럭에는 살던 낡은 가재도구도 있다. 늦은 저녁 옮긴 자리에서 두 소나무는 가재도구를 정리하고 늦은 저녁밥을 짓는다. 두 내외(소나무)가 어둑한 집에서 밥을 먹는다.”
그대로 쓰면 된다.
이사
고속도로 밀리는 찻길,
옆 차선에 커다란 소나무 두 그루가 트럭에 실려간다
짐칸에 웅크리고 있는 가난한 내외 같다
잔뿌리들은 잘리고
먼저 살던 곳의 흙을 동그랗게 함께 떼어
얼기설기 새끼줄로 묶여 있다
흙이 말라 있다
저 흙도, 잘린 뿌리도 저 나무의 낡은 살림도구다
어디로 옮겨 심어질까
근근 어느 곳에 뿌리를 내릴까
가재도구를 정리하고
어디에서 늦은 저녁밥을 지어 먹을까
일단 이렇게 기둥을 세워놓고, 그 다음엔 창문도 달고, 침실도 만들고, 부엌도 만들고 문고리도 달면 된다.
많은 사람들이 시 쓰기에 대해서 어려운 하는 것은 기둥도 세우지 않고 처음부터 큰 집을 지으려고 욕심을 부리기 때문이다. 기둥 서까래도 올리지 않고 인테리어까지 하면서 집을 지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먼저 기둥을 세워라. 커튼을 달고, 도배를 하고, 장식장을 놓은 것은 그 다음의 문제다. 시쓰기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 맘대로 줄거리(기둥)부터 만들어 놓아라.
또 하나 얘기를 만들어볼까?
오늘 아침 출근하려고 보니, 아파트 앞 화단에 분꽃 씨가 까맣게 여물고 있었다. 여름내 화사하게 피었던 분꽃이 지고 까맣게 씨앗에 매달려 있다. 저 까만 씨를 이빨로 깨물면 그 속에 하얀 분가루가 나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저 씨앗속에 얼굴에 분을 바르고 있는 어머니가 있다고 얘기를 만들어본다. 어머니가 저 까만 씨앗속에서 친척 결혼식이 있어 얼굴에 분칠을 하고 있다. 여름내 밭에서 검게 그을린 얼굴. 아무리 분칠을 해도 분이 먹지 않는 얼굴, 희어지지 않는 얼굴, 그래도 연신 어머니는 코끝과 이마 볼에 톡톡톡 분을 두드리고 있다. 그대로 쓰면 된다.
분꽃
여름내 활짝 피었던 꽃이 가을이 되자 까만 씨앗으로 여물고 있다.
씨앗을 털어 이빨로 깨무니, 하얀 분가루가 나온다.
분칠을 하는 까만 어머니가 나온다.
어머니는 친척 결혼식이 있어
거울 앞에서 검게 그을린 얼굴에 연신 분칠을 한다
아무리 분칠을 해도 희어지지 않는다
일단 이렇게 써놓고 도배도 하고, 장식장도 놓고, 문고리도 달고, 창문도 달고, 장판도 깔고, 액자도 걸고 하면 된다. 참 쉽지 않은가?
8. 시를 쓸 때는 門을 어떻게 낼 것인지 고민해라
시도 집을 지을 때와 같이 문을 어떻게 낼 것인지 고민을 해야 한다. 독자들이 들어갈 수 있는 문을 어떻게 낼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대문을 얼마나 크게 낼 것인지, 쪽문을 몇 개를 달 것인지.
요즘 시는 문이 너무 작다. 하여 독자들이 쉽게 그 집에 들어갈 수 없게 만든다. 집이 아니라 일종의 감옥 같은 시들이 많다. 들어가도 나올 수도 없다. 시가 아니라 미로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너무 문을 많이 내는 것도 문제다. 이런 시는 속이 훤히 들여다보여 너무 적나라하고 필요이상의 바람이 들이쳐 집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만든다.
시는 집이라고 했다. 집은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풍경이다. 그러면서 밖이 안과 적절하게 내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바로 드나들 수 있도록 해야한다. 시에는 안방의 역할을 하는 부분, 대청마루의 역할을 하는 부분, 부엌, 헛간의 역할, 마당의 역할을 하는 부분이 필요하다. 이는 적절하게 시의 문을 닫아놓느냐 열어놓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시를 쓸 때는 문을 어떻게 낼 것인지? 얼마의 크기로 낼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숨의 기원 - 고영민
1.
이불 밖으로 나온 딸아이의 다리를 슬며시 이불 속으로 넣어줍니다. 아이는 슬며시 눈을 떠 나를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잠이 듭니다
저렇게 보는 것은 보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할 수 없습니다,
잠결입니다
잠은 다시 딸아이의 눈을 감기고 가슴을 부풀려 숨을 고르고 세월을 만듭니다 숨소리는 영혼이 나갔다가 갈 곳이 없어 다시 제 집을 찾아오는 아득한 소리입니다 날숨은 어제 같고 들숨은 오늘 같습니다
2.
팔을 뻗어 딸아이가 제 어미의 옷섶에 손을 찔러 넣습니다 아내가 잠결에 슬몃 눈을 뜨고는 벽에 기댄 채 무릎을 안고 있는 나에게 왜, 안자고 있어? 라고 물어보고는 다시 잠이 듭니다
저렇게 묻는 것도 묻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할 수 없습니다,
잠결입니다
우리가 손을 내밀어 무언가를 가만히 그러쥘 때 얼마나 많은 시간들이 그 안에 웅크리고 있을까요 무언가를 가만히 쥐고 싶어 부러 빈손을 한번 움켜쥐는 밤입니다 나는 등으로 전해오는 냉기와 이불 밖으로 잠깐 삐져나왔던 딸아이의 한쪽 다리와 작은 손에 쥐어진 아내의 따듯한 유방을 생각합니다
3.
딸아이도, 아내도 숨이 깊어집니다 일순 겹치기도 하고 어긋나기도 합니다 아이의 숨은 짧고 아내의 숨은 더 멀리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발품입니다
이제 앞강으로 물을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들이 차갑게 알을 슬어놓고는 한 生을 전해주려 떠내려 올 시간입니다 방안은 온통 숨소리뿐입니다 나는 딸과 아내의 숨소리 사이로, 내 숨소리를 유심히 들여다봅니다
어디를 갔다 오는 곡절입니까,
기척입니까
9. 가장 쉬운 시쓰기는 자기 얘기(추억, 기억)를 쓰면 된다. 이 안에 진솔함이 있다. 그리고 자기만의 얘기는 남과 가장 차별화되는 얘기이기도 하다. 멀리서 시를 찾지 말고 자기안에서, 일상에서 찾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과수원 - 고영민
내가 하는 일은 농약이 바닥에 가라앉지 않도록 하루 종일 약통을 저어주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중간에서 호스를 당겨주는 어머니의 도움으로 1만평 과수원의 사과나무 한 그루 한 그루 빠짐없이 농약을 쳤는데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햇빛에 앉아 막대기로 커다란 농약 통을 젓는 것이 여간 지루하고 심심한 일이 아니어서 나는 그 긴 막대기로 약통 안에 영어 스펠링도 쓰고, 씨발이라고도 쓰고, 보지라고도 쓰고, 막대기를 빠르게 휘저어 회오리를 만들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양인순의 이름도 썼다가 지우기도 하고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한나절 사과나무에 약을 친 아버지가 물큰 농약냄새를 풍기며 내게 걸어와 마스크를 벗으며 하시는 말이, 너 하루 종일 약통에다 뭐라 썼는지 내 다 안다! 라며 내 머리통을 어루만지며 웃으시는데
내가 저은 약통의 농약이 어머니가 당기던 길고 긴 호스를 타고 흘러 아버지가 들고 있는 분무기 노즐을 빠져나올 때 ~발씨발씨발, ~지보지보지 이렇게 나왔던 걸까, 아버지랑 어머니는 농약에 취해 회똘회똘 집으로 향하고 나는 국광처럼, 홍옥처럼, 아오리, 부사처럼 얼굴이 자꾸만 빨개졌다
10. 대상의 고유한 특성을 잡아라.
한 대상의 고유한 특징을 잡아 의미를 확장시켜 전혀 다른 대상으로 만들어라. 아래 시에서 갈대를 개꼬랑지로, 머루를 유두로 만들 듯.
갈대가 흔들리는 것이 개꼬랑지가 사람을 반겨 흔들리는 것 같고, 머루는 애를 낳은 여자의 유두와 같지 않은가? 분홍빛 처녀의 유두와 달리, 검은 유두엔 일종의 한과 서글픔이 있다.
이처럼 전혀 다른 대상으로 의미를 확장했으면 그걸 가지고 나만의 기억을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라. 그러면 원 대상은 굳이 내가 상징을 부여하지 않아도 저절로 상징성을 갖게 된다.
갈대 - 고영민
어머니가 개밥을 들고 나오면
마당의 개들이 일제히 꼬리를 치기 시작했다
살랑살랑살랑
고개를 처박고
텁텁텁, 다투어 밥을 먹는 짐승의 소리가 마른 뿌리 쪽에서 들렸다
빈 그릇을 핥는 소리도
들려왔다
이 마른 들판 한가운데 서서
얼마나 허기졌다는 것인가, 나는
저 한가득 피어있는 흰 꼬리들은
뚝뚝, 침을 흘리며
무에 반가워
아무 든 것 없는 나에게 꼬리를 흔드는가
앞가슴을 떠밀며, 펄쩍
달려드는가
머루 - 고영민
새끼를 두 번 지우고 유두가 검어졌대지
유두가 검은 년은 남자 복이 없다는데,
봐라, 네 년도 나처럼 남자 복은 글렀네
넝쿨에 기대 앉아
눈 감고 생각하건대
한때 네 눈(目)이 생기던 그 곳을
머루라 하고,
아예, 캄캄한 네 이름을 머루라 하고
너도 나처럼
유두가 검고,
머루는 익고,
너는 새끼를 두 번 지우고
유두가 검어졌대지
11. 시를 받아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시는 쓴다, 가 아니라 받아낸다, 는 말을 많이 한다. 시는 늘 온다. 길을 가다가도 오고, 잠결에도 오고, 밥을 먹을 때도 온다. 하지만 받아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시는 오다가도 사라진다. 그렇기에 마음과 손이 하나가 될 수 있도록 항상 준비를 해야 한다. 예를 들면 야구에서 투수가 직구를 던지고 싶은 마음으로 공을 던졌는데, 평소에 연습을 하지 않으면 자꾸만 엉뚱한 방향으로 공이 가는 것과 매한가지이다. 생각과 손이 따로 노는 것이다. 시를 쓰는 경우도 똑같다. 내가 어떤 대상을 보고 쓰려고 했는데도 처음 생각한 것과 달리 이상하게 써지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평소에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볼 컨트롤이 되지 않는다. 계속 공을 던지는 연습을 통해 내가 직구를 던져야지 생각하면 손이 직구를 던질 수 있게, 커브를 던져야지 생각하면 손이 커브를, 슬라이더를 포크볼을 던질 수 있게끔 몸과 마음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좋은 시상이 떠올라도 공이 엉뚱한 곳으로 던져지듯 제대로 써낼 수가 없다. 포수가 새를 발견했다고 치자. 꿩을 잡기 위해서는 항상 총알이 장전이 되어 있어야 한다. 꿩은 어디에서 튀어나올지 모른다. 꿩을 발견하고, 어, 꿩이네! 생각하고 주머니에서 총알을 꺼내 장전하고 방아쇠를 당기려고 하면 그 사이 꿩은 시야에서 사라지게 마련이다. 꿩을 발견하면 바로 겨냥해서 떨어뜨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시적인 상태로 먼저 만들어 놓아야 한다.
<내 시의 적은 나>
나는 시를 쓴다기보다는 받아낸다는 생각에 대한 아주 구체적인 확신을 갖고 있다. 나는 시를 수신하는 일종의 안테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를 받아낼 수 있는 최적의 상태를 만드느냐, 만들지 못하느냐에 따라 시를 쓰느냐, 쓰지 못하느냐가 결정된다. 마치 라디오나 TV의 수신 안테나의 주파수가 맞으면 음악이 들리거나 영상이 보이고, 주파수가 맞지 않으면 “칙칙”거리고 영상이 보이지 않은 것과 매한가지이다.
나는 우주의 어떤 영혼이 나를 택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 안테나, 즉 수신자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그 영혼은 나한테 머물 필요성을 잃고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찾아갈 것이라고 믿는다. 하여 나는, 나를 찾아온 고귀한 영혼들을 잘 모셔야 하며, 그 방법은 내 의식의 집을 소중히 다루고 망가뜨리지 않는 것이다.
나는 가끔씩 어떤 영혼들로 인해 자신이 충만해 있는 것을 느낀다. 그 상태가 되면 시가 써지고, 그렇지 않으면 시가 써지지 않는다. 너무도 정확한 거래가 아닐 수 없다. 내가 어떤 거짓과 타락으로 마음이 망가져 시가 써지지 않을 때면 나는 몇날 며칠 반성을 하며, 시혼을 다시 부른다.
저녁에 이야기하는 것들 - 고영민
이 저녁엔 사랑도 事物이다
나는 비로소 울 준비가 되어 있다 천천히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늙은 나무를 보았느냐,
서 있는 그대로 온전히 한 그루의 저녁이다
떨어진 눈물을 주을 수 없듯
떨어지는 잎을 주을 수 없어 오백년을 살고도 나무는 기럭아비 걸음으로 다시 걸어와
저녁 뿌리 속에 한 해를 기약한다
오래 산다는 것은 사랑이 길어진다는 걸까 고통이 길어진다는 걸까
잎은 푸르고, 해마다 추억은 붉을 뿐
아주 느리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저 나무의 집 주인은 한 달 새
가는귀가 먹었다
옹이처럼 소리를 알아먹지 못하는 나이테 속에도
한때 우물처럼 맑은 청년이 살았을 터이니,
오늘 밤도 소리를 잊으려 이른 잠을 청하고
자다 말고 일어나 앉아 첨벙, 몇 번이고 제 목소리를 토닥여 재울 것이다
잠깐, 나무 뒤로 누군가의 발이 보였다가 사라진다
나무를 따라와 이 저녁의 깊은 뿌리 속에 반듯이 눕는 것은 분명
또 다른 너이거나 나,
재차 뭔가를 확인하려는 듯 혼자 사는 저 나무의 집 주인은 낮은 토방에 앉아
아직도 시선이 집요하다
날이 조금 더 어두워지자
누군가는 듣고, 누군가는 영영 들을 수 없게
나무속에서 참았던 울음소리가 비어져 나온다
주말연속극 - 고영민
팔순의 어머니 아버지 두 분만 사시는 고향집에 내려가니 그동안 그럭저럭 나오던 TV가 칙칙거리며 나오지 않는다. 늙은 어머니는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고 늙은 아버지는 대문간을 지키고 젊은 나는 세워놓은 안테나를 동서남북 돌려보다 신통치 않아 아예, 통째로 뽑아들고 감나무 옆, 뒤란 시누대밭, 장독대 뒤 곁으로 왔다갔다한다.
내가 대문간의 늙은 아버지한테 잘 나와요? 라고 물으면 늙은 아버지는 대문 앞에 서 있다가 할멈, 잘 나와? 라고 묻고 늙은 어머니가 아까보담 더 안 나와요, 하면 늙은 아버지가 다시 말을 받아 아까보담 더 안 나온다, 하고 젊은 나한테 외친다.
나는 또 자리를 옮겨 잘 나와요? 하고 묻고 늙은 아버지는 늙은 어머니에게 똑같이 재우쳐 묻고 늙은 어머니는 늙은 아버지에게 대답하고 늙은 아버지는 젊은 나에게 대답한다.
젊은 나는 반나절 팥죽땀을 쏟으며 그 기다란 안테나를 들고 뒤뚱거린다. 세 사람이 연신 묻고, 묻고 대답하고, 대답한다. 늙은 아버지가 대문간을 지키고 있기가 따분한지 담배 한 개비를 피워물며 쭈그리고 앉아 대강 나오면 그냥 저냥 보제, 하던 차 굴뚝 옆에 자리를 잡아 안테나를 돌리니 방안에서 아이구야 겁나게 잘 나온다, 라는 늙은 어머니의 목소리가 늙은 아버지를 통하지 않더라도 내 귀까지 선명하다. 돌아가지 않게 단단히 비끄러맨다. 방 안에 들어와 채널을 돌려보니 7번, 9번, 11번 다 화면이 선명하다.
저녁 늦게 서울에 올라와 마누라, 자식새끼랑 주말연속극을 본다. 늙은 아버지도 늙은 어머니도 시골집에서 주말연속극을 본다. 참, 오랜만에 늙은 아버지, 늙은 어머니, 젊은 자식놈이 안테나가 맞아 저무는 주말 저녁, 함께 연속극을 본다. 가슴 뭉클하고 선명한 주말연속극.
12. 시쓰기는 남자가 여자 꼬시는 것, 여자가 남자 꼬시는 것과 같다
글쓰기는 남자가 여자 꼬시는 것, 여자가 남자 꼬시는 것과 같다. 다들 누군가를 좋아하여 꼬시기도 하고 꼬심을 당하기도 했을 것이다.
애인(詩)을 만들려면 먼저 좋아하는 이상형을 찾아야 한다. 이상형은 찾았으면 어떻게 해야할까? 먼저 그리워해야한다. 자기 전에도 떠올려보고, 밥을 먹다가도 빙그레 웃으면 떠올리고 길을 걷다가도 떠올려야 한다. 하지만 그리워만 한다고 애인이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그 다음엔 조금씩 접촉을 해야 한다. 그가 나타나는 시간을 알아내고, 어느 길로 가는지를 알아내고, 우연을 가장한 채 만나기도 하고, 밤늦도록 문 앞에서 기다리기도 하고, 일부러 어깨를 부딪치기도 해야 한다. 한번 두 번, 접촉하면서 안면도 서로 트고, 인사도 나눠야 한다. 그 다음은 상대도 나를 좋아할 수 있도록 자신을 예쁘게 단장해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할 수 있도록 예쁘게 화장도 하고 옷장을 뒤져 좋은 옷을 골라 입기도 해라. 그러면 상대도 나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할 것이다. 상대가 나에게 관심을 보이면 그 다음엔 조금씩 유혹을 해라. 먹을 것도 갖다 주고, 선물공세도 하고, 당신의 마음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라. 그다음 적당한 때를 골라 사랑한다고 열렬히 고백하라. 몸도 주고 마음도 줘라. 서로 옷을 벗고 불 끄고 뜨겁게 하나가 되라. 그러면 생명이 탄생한다. 그 생명이 詩다.
세상에 공짜로 얻어지는 아무 것도 없다. 하나 되는 공식이라는 것이 있다. 어떻게 하면 하는가 되는가? 하나 되는 공식은 다음과 같다. “관심- 정성-신뢰-사랑- 하나” 즉 관심을 가지면 보이지 않던 것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한다. 그 보이는 것에 정성을 드리면 신뢰가 생기고 신뢰가 생기면 서로 사랑하게 되고 서로 사랑하게 되면 하나가 된다. 하나가 되면 생명이 탄생한다. 남녀 관계도 글쓰기도 마찬가지이다. 관심도 갖지 않고 정성도 드리지 않고, 신뢰도 생기지 않은 상태에서, 사랑도 나누지 않은 상태에서 글과 하나가 될 수 없으며 시가 탄생하지 않는다. 글쓰기는 남자가 여자 꼬시는 것, 여자가 남자 꼬시는 것과 같다. 사랑 후에 애가 생기는 것과 같다.
네 입속에 혀를 밀어넣듯 - 고영민
그동안 저 가지를 지그시 물고 있던 것은
모과의 입이었을까
네 입속에 혀를 밀어넣듯
나무는 저 노랗고 둥근 입속에 무엇을 집어넣었을까
부드러운 혀였을까
입김이었을까
가진 것 없이 매달린 내가
너에게 오래오래 가닿는 길은
축축하고 무른 땅에 떨어져 박히는 것
네 입속에 혀를 밀어넣듯
거부해도 네 입속에 혀를 밀어넣듯
다시 혀를 밀어넣듯
13. 스파링 파트너를 만들어라!
혼자 거울 앞에서 쉐도우 복싱을 하듯 혼자서 시를 쓰면 쉽게 늘지 않는다. 권투선수가 맞으면서 크듯 시 쓰기도 어느 시기까지는 맞아야 큰다. 맞아야 주먹이 보이기 시작한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권투와 마찬가지로 괜찮은 스파링 파트너를 선택해야 한다. 혼자 거울 앞에서 폼 잡고, 자기 폼에 취해 권투를 하다보면 실전에 올라가 몰매를 당하고, KO패를 당하기 십상이다. 자기 폼과 자기 주먹에 대한 객관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스파링파트너가 필요하다. 자기 폼이 개폼인지, 똥폼인지, 아니면 진짜 제대로 된 폼인지 스스로 느끼고 확인해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칭찬도 좋지만 아프게 때려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런 후 어느 정도 자기 폼이 잡히고, 상대의 주먹도 보이고, 실전능력이 쌓이면 그때 정말 고독하게 자기를 상대로, 거울을 보면서, 자기 그림자를 보면서 쉐도우 복싱을 해야 한다.
등단 초, 나 같은 경우엔 같은 해에 신춘문예로 등단한 친구가 있어 매일 1~2편씩의 시를 써서 메일로 주고받곤 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참으로 가혹했다. 아마 그 친구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서로 시를 주고받는 일은 없다. 그냥 지면에 소개되면 어떻더라! 한마디 정도뿐이다. 그와 나는 2년 넘게 서로를 위해 실전과 같은 스파링 파트너의 역할을 했다. 그게 큰 엄청난 도움이 됐다고 말하고 싶다.
해감 - 고영민
민물에 담가놓은 모시조개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몇 번을 소리쳐 부르자 당신은 간신히 한쪽 눈을 떠보였다 눈꺼풀 사이 짠 물빛이 돌았다 마지막으로 당신은 나를 제 몸속에 새겨 넣겠다는 듯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그르렁, 그르렁 입가로 한 움큼의 모래가 토해졌다. 간조선(干潮線)을 지나 들어가는 당신의 흐린 물빛을 따라 축축한 한 생애가 패각의 안쪽에 헐겁게 담겨져 있었다 짠물을 걸러내며 당신은 물무늬 진 사구를 온몸으로 기고, 몸을 잊으려 한쪽 눈을 마저 닫자 날이 서서히 저물기 시작했다 울컥, 울컥, 검은 모래가 걷잡을 수 없이 토해졌다 나는 당신의 손을 움켜쥔 채 더 깊은 물밑까지 따라 들어갔다 여윈 갈빗대에서 해조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제 오지 마라! 따라오지 말라고 이놈아! 라는 당신의 불호령을 들었다 두꺼운 껍질 밖으로 나는 움찔, 한순간 떠밀려 나왔다 패각을 움켜쥔 채 꼭 사나흘만 더 묵고 싶다던 당신의 늙은 아내가 밀려나왔다 마지막으로 당신은 제 몸 밖으로 검은 해변을 푸륵푸륵, 싸놓았다 시끄럽던 한 생애가 말갛게 비워지고 있었다
14. 링에 올라가라. 계속 경기를 해야 한다.
축구선수나 야구선수가 경기에 나가지 못하면 경기감각이 떨어진다. 아무리 프리미어리그에 있다하더라도 벤치멤버로 있으면 그 선수를 대표로 뽑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계속적으로 경기에 나가 경기감각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운동선수가 한 달을 쉬면 숨을 끌어올리는데 최소 6개월에서 1년이 걸린다고 한다. 시 쓰기도 마찬가지이다. 쉬면 쉴수록 경기감각이 떨어진다. 1시간을 뛰던 선수가 10분을 뛰고 헉헉거리게 된다. 선수는 무조건 경기장에 나가야 한다. 축구선수라면 K리그가 없으면, N리그라도 나가야 하고, N리그가 없으면 동네 조기축구회에 나가서라도 공을 차야 한다. 공을 차고, 뛰고, 몸을 부딪치고, 골을 넣을 때 비로소 그는 축구선수가 되는 것이다. 선수는 그라운드에서 얘기하는 자이다. 마찬가지로 시인도 지면이 어떻든 간에 지속적으로 발표지면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지면 속에서 다른 시인들과 함께 놓여 있을 때 자기 시가 어느 수준인지 확연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아! 내 실력이 이 정도구나! 아! 다른 시인들의 실력이 이 정도였구나! 더 분발하고 더 열심히 해야겠다.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생각 자체가 경기감각이다.
혼자 달리기를 하다가 여럿이 출발선상에서 총소리를 듣고 달릴 때 진짜 자기의 헉헉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통증을 느끼게 된다. 권투 선수라면 링 밖에서 후두웤을 할 것이 아니라 링 위에 올라가라! 링이 없으면 새끼줄이라도 묶어놓고 권투장갑이 없으면 주먹에 수건이라도 감고 시합을 해라. 축구선수라면 그라운드에 나가 뛰어라! 그라운드가 없으면 애들을 모아놓고 초등학교 운동장에 나가서라도 공을 차라.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떨지말고 어디든, 어디든, 자꾸, 자꾸 발표를 해라! 그래야 경기감각이 생긴다. 정 발표할 곳이 없으면 블로그를 만들어 자기 시를 올려라. 그 블로그가 경기장이 된다. 그리고 그곳에 자기 시를 올려놓는 순간 그 시는 객관화되기 시작하며, 나로부터 분리되어 그 시를 객관적인 눈으로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자기 시의 문제점들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다. 이는 관객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연극을 하는 것과 관객을 앞에 놓고 연극을 하는 것과 같은 경우다. 자기 시가 관객들 앞에서 당당히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자기 동작을 내는지 볼 수 있을 것이며, 아니면 배우가 부실하여 말문이 자꾸만 막히고, 대사를 까먹고 다리가 후들거려 식은 땀을 흘리는지 스스로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선수는 죽을 때까지 그라운드에 있어야 한다. 그게 선수다! 시쓰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용접- 고영민
당신과 나는 외따로 떨어져 있다
맞대는 당신의 뼈와 나의 뼈를 붙일까
성기와 성기를 붙일까
그러면 하나가 될까
너의 살을 녹여 나에게 붙일까
나의 살을 녹여 너에게 붙일까
얼굴에 철가면을 쓰고 몰래 남의 살을 훔쳐다가
푸른 토치불꽃을 치어다보며
얼른 당신과 나를 붙일까
신음소리를 붙일까
하하하, 웃음소리를 붙일까
아이 하나를 쑹덩 낳아
잠든 사이 그 아이를 녹여 이음새에 붙일까
살만큼 사신 팔순의 노모를 홀려
두 눈 딱 감고 이음새에 붙일까
冬至와 夏至의 긴 밤낮을 붙일까
그 하늘을 돛단배처럼 날던
반딧불과 하루살이와 잠자리와 비와 눈
해와 달을 붙일까, 우뢰를 붙일까
불시에 찾아오던 침묵,
초조와 불안의 두꺼운 상판을 붙일까
그러면 얼싸안고 하나가 될까
이 튀는 불똥에 눈은 까맣게 죽고
나는 끝내 무엇을 녹일까
당신과 나, 영영 붙을까
15. 자기를 믿고, 자기를 사랑하라
두서없이 썼는데, 이 글이 마지막이 될 듯합니다. 같잖은 글이지만 나름 조금이나마 제가 갖고 있는 것을 나누고자 마음을 내보았습니다.
자기의 시작법이나 시론, 문학관과 많이 다른 부분도 있으리라 봅니다. 가져갈 부분은 적당히 취하시고, 전혀 가져갈 것이 없다고 보시면 그냥 무시하고 다 버리면 됩니다.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은 자기를 믿고, 자기를 사랑하세요!
시 쓰기는 자기를 정말 사랑하는데서 비롯된다. 먼저 자신을 믿어라!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라. 나는 누구보다 뛰어나다. 감수성이 예민하다. 아직 때를 만나지 않았을 뿐이다. 나에게는 시적인 무한 광맥이 있다. 나는 지금도 잘 쓰지만 앞으로 세상을 놀래킬 멋진 시를 써낼 것이다.
이러한 자기 확신이 필요하다. 세상은 생각하는 대로 된다. 겉마음과 속마음을 일치시켜라. 속에서 “너는 안돼! 너는 안돼!” 이런 소리가 들리면 다시 자신에게 사랑과 믿음을 줘라. 내 몸과 마음이 열려야 그때부터 뭔가가 들어오기 시작한다. 너는 잘 쓸 수 있다고. 너는 멋진 시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해라!
힘들고 좌절감이 올수록, 눈물이 나올수록 자신에게 그렇게 말해라. 그러면 분명 멋진 시를 쓸 수 있다! 고 나는 믿습니다.
“페루 인디언들은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기 전 낚싯대와 대화를 한다. 너는 바다에 나가면 고기를 많이 잡게 될 거야. 이 말을 통해 그 낚싯대는 고기를 잘 잡는 낚싯대가 된다. 남태평양 어느 섬의 원주민들은 나무를 쓰러뜨리기 위해 이런 방법을 쓴다. 그들이 쓰는 무기는 날이 선 톱이 아니라 아우성이다. 모든 주민들이 쓰러뜨릴 나무 주위에 둘러서서 3일 밤낮 나무를 향해 고함을 쳐댄다. 그러면 나무속에 깃들어 있던 혼이 빠져나가면서 나무가 쿵, 하고 쓰러진다.”
푸른 고치
시골집에서 박스에 찰옥수수를 담아
소포로 보내왔다
포장이 단정하다
옥수수를 내려다보니
옥수수는 단단히 스스로를 포장하고 있다
몇 겹 포장지에 겹 싸여 있다
포장지를 벗기니
그 안, 다칠까
또, 실뭉치가 가득하다
자신이 얼마나 귀하여
옥수수는 이토록 스스로를
꼭 감싸 안았을까
나는 나를
이만큼 사랑하지 못했다
허밍, 허밍 - 고영민
해질녘 저 밭은 무엇인가
해질녘 저 흐릿한 논길은
해질녘 밭둑을 돌아 학교에서 돌아오는 거미 같은 저 애들은 무엇인가
긴 수숫대
매양 슬픈 뜸부기 울음
해질녘 통통통 경운기의 짐칸에 실려 가는
저 텅 빈 아낙들은 무엇인가
헛기침을 하며 걸어오는 저 굽은 불빛은 무엇인가
해질녘 주섬주섬 젖은 수저를 놓는
손(手)
수레국화 옆에서 흙 묻은 발목을 문지르는 저 고단함은
해질녘 내 이름 석 자를 적어온
이 느닷없는 통곡은 무엇인가
해질녘, 해질녘엔
세상 어떤 것도 대답이 없고
죽은 사람은 모두 나의 남편이고 아내이고
해질녘엔 그저 멀리 들려오는
웃는 소리, 우는 소리
허밍, 허밍
[출처] 고영민 시인의 시작 방법
'소재 모으기 1'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할머니와 생선 / 이규성 (0) | 2013.08.19 |
---|---|
문순태 (소재로서의 '고향상실') (0) | 2010.11.19 |
늙으신 어머니의 향기 (문순태) (0) | 2010.10.24 |
저녁의 꽃들에게 (류시화) (0) | 2010.08.20 |
2010년 칠월 이십 오일 (0) | 2010.07.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