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 모으기 1

문순태 (소재로서의 '고향상실')

법정 2010. 11. 19. 11:53

           소재로서의 '고향상실'

 

 

  통상적인 고향의 개념은 우리가 태어나서 자란 장소를 말한다.

그러나 나는 고향을 단순히 현살적 공간으로만 파악할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인간존재양식의 개념으로 이해하고자 하였다.

즉 고향은 우리가 태어나서 자라난 곳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존재의 본질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말해서 고향의 철학적 개념은 '인간 본래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고향을 상실하였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들이 태어났던 곳으로 되돌아가자는

것보다는 우리의 본래 모습, 즉 인간성을 되찾자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소설을 통하여, 현실적인 공간을 무대로 삼되, 결국은 우리의 본래 모습을 되찾는

 이상의 현실을 목표로 삼는다고나 할까.

이런 뜻에서 나는 (징소리)를 통해 고향을 잃어 버렸던 사람들의 아픔과 그들이 다시

고향을 찾기 위하여 방황하고 고통을 겪어온 과정들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연작 장편소설 (징소리)의 소재는 바로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나는 (징소리)의 소재를 찾기까지 실제로 댐 공사 때문에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여러 차례 만날 수가 있었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구성하기 위해 수몰지의 현장을 답사하기도 하였다.

나는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쳐서 (징소리)를 소재로 택하게 되었으며 스토리를 엮었다.

 

첫 단계 :  광주은행에서 주최한 어린이 저축 작문 심사를 하는 과정에서 수몰지 어린이의

              고향을 잃어버린 사연을 읽게 되었다.

   

--------나는 다른 친구들처럼 저금통장을 갖고 싶었다.

             그러나 용돈을 탈 수 없는 가정 형편 때문에  지금까지 저금을 해 본 일이 없었다.

             아버지 에게 저금통장을 갖고 싶다는 말을 하였더니 아버지께서 벽에 걸린 징을

             가지고 나가시더니 고물상에서 팔았다면서 내게 돈을 주셨다.

             아버지는 우리의 마을에서 이름난 징채잡이셨다.

             댐이 생겨 마을이 물에 잠기게 되어 고향을 떠나올 때 아버지께서는

             다른 것은 몰라도 징은 버릴 수 없다면서 손수 들고 오셨다.

             아버지는 그 징을 팔아서 내가 저금통장을 갖게 해 주신 것이었다.----------

 

 

위와 같은 국민학교 5학년 소녀가 쓴 작문을 읽는 순간, 내 가슴이 징처럼 울리는 듯싶었다.

어린 딸한테 저금통장을 마련해 주기 위해, 물에 잠겨 버린 한 마을의 뭉화와 역사의 한이

한데 뒤엉켜 있음직한 징을 팔아 버린, 그 소녀의 아버지 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혀왔다.

나는 이때 그 징에 얽힌 이야기를 소설로 쓰고 싶었다.

 

두번째 단계 : 어느 날 국민교육헌장 사건으로 해직이 된 전남대학교의 이홍길 교수를 만났다.

                    이 교수는 그동안 장성댐  상류에 방을 얻어 책을 읽으며 지냈다고 하면서 댐이 생길 때

                    고향을 떠났던 수몰민 들이 상당수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서 댐의 상류에서 매운탕을 끓여

                    팔며 살아가도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순간 나는 잠시 잊고 있었던, 징을 팔아 저금통장을 갖게 된 수몰지 소녀의 작문이

                    다시 떠올랐다.

                    이 교수로부터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장성댐에 가 보고 싶은 춘동을 느꼈다.

 

세번째 단계 :  나는 장성댐에 가 보았다.

                     거대한 콘크리트의 구조물을 구경하기 위해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왔다.

                     버스를 대절하여 몰려온 관광객들은 댐 아래 잔디밭에서 오디오를 크게 틀어놓고 술에

                     취해흐느적거리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콘크리트 구조물 위에서 바라다보이는 푸른 물 위에 부서지는 모습이 황홀하기까지 하였다.

                     구경온 사람들은 드넓은 장성호를 바라보면서 '멋지다'라는 감탄사를 늘어 놀았다.

 

 

나는 수몰이 되어 버린 그곳에서 태어나서 53년을 살아오고 있다는 우체국장의 안내를 받아,

보트를 타고 호수를 한 바퀴 돌아 보았다.

콘크리트 구조물 위에서 바라보았던 호수와, 호수의 한가운데서 내려다본 물 속은 충격적일 만큼 엄청나게 달랐다.

맑은 물 속에 마을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마을 앞 팽나무며,좁고 홰똘홰똘 구부러진 고샅과 두껍다리, 우물,돌담, 불에 그을린감나무와 세모진

안마당, 그리고 부엌의 부뚜막이며 구들이 깔린 방과 돌로 쌓아올린 굴뚝이며 장독대, 물 속에 모든 마을이 무덤처럼 잠들어 있었다.

어쩌면 그 물 속에, 아이들의 자지러진 울음소리며 해가 져도 집에 돌아오지 않는 아이들의 이름을 거칠게 불러대는 어머니들의 지친 목소리, 컹컹 개짖는 소리, 낮닭 우는 소리, 움메 하는 송아지 울음까지도 그대로 물 속에 잔겨 있는 듯싶었다.

그리고 두껍다리를 건너 사립짝 안으로 들어서는 마을 사람들과 쟁기를 지고 들로 나가는 농군들의

모습도 눈에 어른거리는 것만 같았다.

우체국장의 말로는 집을 헐기도 전에 다급하게 담수를 하느라고 마을이 그대로 물에 잠기게 된 것이라고 하면서, 헤어져 버린 고향 사람들이 그리워질 때면 가끔 보트를 타고 물에 잠긴 마을의 물 위에 머물렀다가 돌아간다고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물 속에는 그가 26년동안 근무했다는 우체국 건물도 그대로 있었다.

물속을 들여다보고 나서 다시 먼발치로 호수를 바라보았을 때 장성호는 나에게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였다.

햇살이 눈부시게 반사되는 푸른 물결 대신에 물 속에 무덤처럼 고즈넉하고도 을씨년 스럽게 잠들어 있는 마을의 모습만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내 귀에 수몰민들의 울부짖음과 한숨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네번째 단계 : 나는 다시 댐의 상류로 올라가서 물가에 판자로 가건물을 짓고 댐에서 잡은 고기로

                    매운탕을 끓여 파는, 돌아온 수몰민 몇 사람을 만났다.

                    그들은 얼마 안 되는 보상금을 받아서 인근 도시로 나가 사글세 방을 얻고 남은 돈을

                    밑천 삼아 포장마차를 내 보았으나, 평생릉 흙파는 일만 해 온 그들로서는 일 년을 

                    넘기지 못하고 알거지가 되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농사품을 팔고 살더라도 고향산천 곁에 있고 싶어 돌아왔다고 하였다.

                    나는 고향에 돌아와서 농사품을 팔거나, 장성호를 찾아오는 낚시꾼들을 상대로

                    매운탕을 끓여 팔아서 목줄을 지탱하고 있는 수몰민들을 만나 뿔뿔이 헤어진

                    그들의 옛날 이웃들의 소식을 물었다.

                    그리고  광주에 나와서 고향을 떠나온 수몰민들을 찾아 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자취는 보이지 않았다.

                    먼지처럼 도시의 밑바닥으로 철저하게 침잠해버리고 만 것이었다.

                    어쩌면 그들의 모습만이 가라앉아 버린 것이 아니라, 그들의 대대로 고향에서

                    가꾸어 왔던문화와 역사까지도 흔적 조차 없이 도시의 밑바닥으로 

                    매몰되어 버린 것인지도 몰랐다.

 

 

다섯번째 단계 : 마지막으로 징을 팔아서 저금통장을 갖게 된 소녀의 아버지를 찾아보기로 했다.

                       소녀의 아버지는 수몰지에서 태어나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으며,

                       마을에서는 이름난 징채잡이로, 고향을 떠나올 때 마을 소유인 징을 가지고 나왔다.

                       그 역시 얼마 안 되는 보상금을 받아 가까운 도시 관주로 나왔으나,

                       일정한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날품팔이로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술을 좋아하지 않았던 그는 고향을 떠나온 후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하여,

                       그즈음에는 취하지 않는 날이 없다시피 하였다.

                       그의 소원은 다시 고향에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  이상 다섯 단계를 종합하여 소설의 소재가 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우리 주변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산재해 있다.

#  그러나 모든 이야기가 다 소설 소재가 될 수는 없다.

#  우선 이야기를 종합해 보고 나서, 그 이야기를 소재로 선택하여 소설을 쓰고자 하는 작가의 정서와

#  맞아떨어지는지 재고해 봐야 한다.

그 이야기의 배경과 작가의 정서가 어느 정도 맞아떨어져야만이 충분하게 소화해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  즉 그 이야기를 소재로 선택하여 그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력을 통해

#  ,독자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할수가 있어야 한다.

#   이 문제는 바로 주제와 연결된다.

#   그러니까 작가가 어떤 소재와 만났을 때, 먼저 그 소재 속에서 주제를 끄집어낼 수 있을 것인가를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  이것을 동기의  구체화라고도 한다.

#  작가가 어떤 소재에서 느끼는 충동에 대해 구체적으로 제시할 문제를 생각하는 단계를 말한다.

#  즉 소재라는 올로 주제라는 천을 짜는 단계,

#  소재를 발견하고 주제를 유출해내는 과정이다.

#  그러나 여기서 주제를 추상적 관념으로 규정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 단계에서 작가가 생각 해야 할 것은 주제란 작가가 쓰려고 한 소재를 통해서 인생의 의미를

구체와 시켜보려는 입장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  여기서 잘못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 주제와 소재는 다르다는 사실이다.

         비록 소재 속에서 주제를 찾아낸다고 해도 그것을 올과 천처럼 차이가 있다.

 ###        주제를 작가가 제시하려고 하는 인생관 즉 작가의 사상이라고 한다면

###          소재는 다만 소설을 만들어내는 재료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먼저 주제를 정해 놓고 나서 소재를 구한다든가,

                 주제 안에서 소재를 찾아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    주제는 소재 안에서 찾아내야만 한다. #

 

그러나 소재는 많으나 주제를 창조할 만한 소재는 그리 흔하지 않다는 사실도 알라야 한다.

소재는 작가의 직접적인 간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얼마든지 얻어질수 있으나,

주제응 작가의 깊은 세계관, 철학관, 인생관, 작가 정신을 통해서 창조되기 때문이다.

 

수몰지에서 가지고 나온 징에 대한 이야기며, 장성댐의현지취재를 통해 알게 된 수몰지구의 실향민에 대한 현실적 삶의 아픔,

농촌에까지 불어닥친 산업화의 거센 바람으로 인해 문화적으로 황폐해가는 농촌의 모습은 좋은 소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나는 그 소재 속에서 주제를 찾아내려고 하였다.

 

 

 

              주제로서의 '고향상실의 한'

 

 

  나는 (징소리)라는 소설을 통해서 거대한 댐 건설로 인해 고향을 잃어버린 수몰지구

농민들의 '고향 상실의 아픔'을 그려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들이 잃어버린 것은 그들이 태어나고 자라온 공간적 '고향'이 아니라

그들이 겪어온 역사, 문화, 정서, 인간관계까지도 포함된다고 생각했다.

 

그 무렵 도시 산업화가 빚어낸 모순들에 대해서 많은 작가들이 관심을 가지고 소설로 다루었다.

황석영의 (객지)를 비롯하여 조세히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윤홍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가 도시 산업화의 병폐를 다룬 대표적인

소설들이다.

고속도로가 뚫리고 도시의 대단위 곤장들이 들어서게 되면서, 새로운 일자리를 찾게 된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 조건과 값싼 임금에 시달리게 되고,

이같은 노동의 문제점들은 닫힌 사회 안에서 조심스럽게 새로운 사회문제로 대두되었으며, 작가들은 이 같은 구조적인 모순을 소설로 다루었다.

또한 산업화는 이농 현상을 가져오게 되어 농촌이 공동화되기 시작하였으며,

소위 농촌 근대화 작업의 일환으로 여러 곳에 대규모 댐을 만들어 농업용수와

공업용수를 해결하였다.

그러나 댐이 들어서게 되면서 수몰민들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그들은 실향의

아픔을 감당해야만 했다.

처음에 나는 수몰지 실향민들의 아픔을 단편소설 (징소리 1978년 창작과비평)에

담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아픔을 단 한편의 단편에 모두 담아내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79년도에 단편 (저녁 징소리)와 중편 (말하는 징소리) (무서운 징소리)를

쓰게 되었으며 80년대에 단편 (마지막 징소리와 중편 (달빛아래 징소리)를 써서

그해 여름에 (징소리)라는 제목으로 묶어서 출간했다.

그러니까 연작 장편 (징소리)는 단편 3편과 중편 3편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연작 장편 (징소리)를 내놓자, 평론가들이 내 소설에 대해 '한'을 이야기하였다.

이어령 씨는 '푸는 한'을 이야기하였고, 김열규 씨는 '징소리의 한은 원한 맺힌우리

민족의 혼'이라고 하였으며,

김윤식 씨는 '한의 사상적 계보를 정통적으로 잇는 작품' 이라고 평하였다.

 

내가 (징소리)에서 한을 소설미학으로 수용한 것은 실향민의 역사와 그들이 안고 있는 아픔을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내 보이고자 했을 뿐이었다.

장성 수몰지구의 살향민들이 엮어가는 고달픈 삶의 궤적을 구체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농촌에까지 불어닥친 산업화 바람이 야기시킨 문제점들을 부각시킴과 동시에, 오늘날의

황폐한 삶이 6 . 25의 비극과 얼마나 깊숙히 접맥되어 있는가를 보여주고 싶은 것이었다.

 

(징소리)를 쓰고 난 후, 나는 비로소 한의 개념에 대해 정리해 보고 싶어졌다.

내가 소설미학으로 수용한 한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왜 자꾸 한을 이야기 하는가.

내 소설에서 한은 무엇인가.

문학에 있어서 미학적 특질의 하나인 한은 무엇인가.

              #   문예미학은 감정의 철학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일찍이 # 주자가 밝힌 #  오성,

            ### 즉 기쁨, 분노, 욕심, 두려움, 슬픔의 감정이며,

                  한국문학의 특질로서의 문예미학적 감정은

                  애처로움, 가냘픔,체념등의 패배주의적 감정과

                  은근, 끈기 등 의지적 감정으로 구별된다.

 

   나는 (징소리)를 통해서 한을 이원적 감정으로 파악하였다.

소극적 으미, 즉 패배주의적 감정으로서의 한은뉘우침, 소원, 불평, 한숨, 탄식, 체념에 해당되고, 적극적 의미, 즉 의지적 감정으로서의 한은 원통, 원한에 해당된다고 생각했다.

패배주의적 한은 곧 정한 감정이며, 이갓은 한의 대상이 자기 자신에 향한 것으로 ㅈ기 내부에 쌓이는 감정으로 자학적이다.

그리고 의지적 감정으로서의 한은 원한으로서의 한이며, 그 대상이 다른 사람에게 향한 타학적인 감정이다.

그러니까 정한 감정이 자신을 향한 마음일 때, 패배주의적 한은 뉘우침, 한탄,체념으로 끝나지만, 원한 감정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향할 때,

그것은 억울함, 원통함, 증오심, 복수 의지로까지 발전한다.

 

                 #   정한은 자학에서,

                 #   타학에서 만들어진다.

 

자학적 한은 별리의 슬픔이나 기다림이 자탄, 자한, 정한으로 발전하며, 기다림과 슬픔은

고통이고, 그 고통을 당하면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을 때, 한의 생명은 유지된다.

그러나 희망을 버리면 체념으로 끝나며, 끝까지 희망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원망이 생기게 된다.

그리고 타학적인 한은

버림당함, 미움받음, 짓밟힘, 빼앗김, 억눌림을 통해서 원한으로 발전하는 감정을 말한다.

           #   소극적 한인 정한 감정은 주로 시에 나타나고,

           #   적극적인 원한 감정은 소설에 수용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원한 감정은 판소리, 가면극, 무당의 풀이, 동학농민전쟁과 같은 역사적 운동을 통해 풀어지는데, 이것을 해한이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고대소설에는 이같은 원한 감정이 대부분 복수를 통해 풀어지지만, 현대소설에서는 복수로써 해한되는 것이 아니고, 의지력이나 생명력과 같은 소설미학으로

수용된다.

 

소설문학에서 원한 감정이 만들어지는 경우는 (운영전) , (사씨남정기) , (장화홍련전)과

같은 개인적인 원한관계에서 비롯되며,

이 경우 주로 여자들이 원한을 품게 되고, 원수를 갚음으로 하여 해한에 이른다.

또한 (한중록) , (인현왕후전), (서궁록)과 같이 궁중에서 만들어지는 한이 있고,

(홍길동저) , (춘향전)과 같이 사회의 제도 때문에 만들어지는 한이 있는데,

개인과 사회와의 갈등구조 때문에 만들어지는 한은 현대소설에서도 많이 나타난다.

 

또한 이광수의 (무정)이나 채만식의 (탁류), 염상섭의 (태평천하)와 같은 소설은

민족적 원한이 나타나는데 이것을 망국의 한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같은 민족적 원한은 50년대 이후 조국분단의 한으로 이어지며,

분단소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나의 경우 한을 고향상실의 한, 남북분단의 한, 일제 망국의 한으로 수용하였으며,

(징소리)에서는 고향상실의 한과 남북분단의 한을 소설미학으로 받아 들였다.

고향상실의 한은 단순히 고향을 잃어버린데 대한 앞ㅁ만이 아니라, 고향의 역사와 문화와의 단절에서 오는 위기의식과 절망감, 그리고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인 댐 앞에 뿌리뽑힌 인간존재에 대한 원한 감정까지도 포함된다.

댐이 샌겨 수몰지에서 떠나야만 했던 그들은 모든 것을 잃어버렸으며, 그것으로 인하여 자신들의 존재까지도 상실하고 말았다는 절망감에 빠져, 그들로부터 역사와 문화를 단절시키고 존재의 뿌리까지도 뽑힘을 당한 대상에 대해서 원한 감정을 갖게 되었다.

 

 

또한 남북분단의 한에서는 이데올로기의 갈등과 대립에서 생겨난 원한이 아니고, 동족상잔의 민족적 비극을 드러낸 것이었다.

소설에 나오는 무이념적 인물들이 뚜렷한 이유도 없이 서로 미워하고 죽이는 민족적

비극은 결국 분단의 근원적 원인이 몰인식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분단의 원인을 인식하면 할수록 그 한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나는 이 소설에서 원한 감정을 복수 의지로 발전시키지 않고,

끈끈한 생명력의 의지, 용서와 화해로 풀어 보려고 하였다.

수몰지에서 쫓겨난 사라들은 결코 끝까지 좌절하지 않으며, 한으로 헤어진 사람을 다시 만나기 위해 노력하며,

다시 고향에 돌아가기 위한 의지력으로 키워나갔다.

그리고 6 .25때 죽이고 죽임을 당한 원한관계에 있어서도 용서와 화해를 시도하였다.

 

나는 내 소설을 통해서 감정을 휴머니즘(인도주의, 인문주의, 인본주의)으로

극복하려고 하였다.

원한을 안겨준 쪽도 원한을 받은 쪽도 공동의 아픔과 이해를 통해, 건강하게

희망을 버리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한국적인 한이야말로 생명의 미학이며 의지의 미학인 것이다.

만일 우리에게 한이 없었더라면, 이처럼 끈질기게 우리 자신을 지켜오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한은 결코 패배주의자의 한숨이나 체념, 비관주의적 민족정서가 아니다.

한은 한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생명력이며

싸워나갈 수 있는 힘과 의지의 원천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원한을 푸는것, 즉 해안은 한을 버리자는 의미가 아니다.

한을 갖고 있는 사람이 한을 버리면 그것은 곧 히망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한을 증오와 복수로 풀지 말고 한을 품고 살되 이해하고 용서하면서, 그것을 생명력으로 혹은 희망으로 키워 나가자는 것이다.

#   소설에서 한은 한으로 풀게 되면 한이 없어지기는 커녕 더 큰 한이 생겨나게 되며,

     이렇게 될 때, 한이 소설미학적으로 살아남지 못한다.

#  한을한으로 풀기 위해 무당이 언월도로 한을 싹뚝 잘라 버리듯 한다면, 한이 잘려진 그

자리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싹이 돋아나게 되고, 다시 몇 번이고 한을 가르는 복수만이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  그렇게 되면 우리 소설문학은 다시 고대소설로 되돌라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의 뿌리를 자르는 대신에, 화해와 용서라는 것을 생각해 보기로 한 것이다.

 

                      #  불교의 법구경에

                          '원을 마음에 새기면그 원한은 끝내 쉬지 않는다.'

                           라는 말이나

                          '원한으로 원한을 갚으면 마침내 원한은 쉬어지지 않고, 오직

                           참음으로써만이 원한이 쉬는 것이다.' 라는

                           구절을 생각해 본 것이다.

 

그것은 마치 불로 불을 끌 수 없고, 칼 뒤에 칼이 있다는  논리를 받아들여 보잔는

것이었다.

그러나 화해니, 용서니, 사랑이니 하는 것 따위로 한을 풀 수는 없다.

ㄱ것은 곧 한을 약화시키는 것과 같다.

한을 품고 있는 사람이 한을 약화시키게 되면 그것은 생명을 약화시키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 소설을 통해서, 한이 폐쇄적인 공간에 갇혀 비관주의로 귀착되지 않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    그리고 소설에서 한으로써 한을 풀려고 한다면 그것은 결과적으로 복수 의지만이

      남아서 소설이 행복결구의 평면적인 이야기의 전개로 끝나게 되어,

#    소설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성격이나 심리, 개성의 미학이 무시되기 쉽다는 

      것도   확인하였다.

 

한을 소설의 사건진전 도구로 사용한다면 인물의 행동이 필연성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한풀이를 통한 행복결구를 위하여, 작가가 미리 예정한 # 플롯 : ( 소설, 희곡

,설화 따위의 이야기를 형성하는 줄거리, 또는 줄거리에 나오는 여러가지 사건을 얽어짜는 일과 그 수법. 구성, 결구) 에 인물의 행동을 배치하여, 이른바 고대소설에서와

마찬가지로 권선장악의 교훈을 나타내는 것으로 끝나고 말기 때문이다.

 

(징소리)에서 드러내려고 하였던 분단의 한 역시, 남북의 냉전 논리를 극복하고,

통일을 앞당기는 것만이 한을 푸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리고 1차적인 해한은 분단상황의 철저한 인식이며 동질성의 회복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2차적 해한인 통일을 실현시키기 위해 먼저 분단의 민족적 입장부터

인식해 보자는 생각이었다.

분단시대에 살고 있는 작가의 한 사람으로서, 이 시대 작가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과제는 너무나 분명하다.

나는 6 . 25의 비극을 소설로 다룸에 있어서, 전쟁의 극한 상황이나 생명의 존엄성,

상처받은 전후 시대들의 갈등과 방황의 주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분단상황을 민족적 입장에서 보다 철저하게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분단소설이란 분단상황의 총체적인 인식에서부터 역사의 상처 속에서 오늘의 자신을

확인시키는 것이라야 한다.

우리에게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은 분단의 비극적 현실이 존재하게 된 역사적 연유의

탐구와 남북의 이질감을 해소시키는 일이다.

 

물론 이와 같은 과제는 이념적 입장에서나 창작의 측면에서 쉽게 극복되어질 문제는 아니다.

#    자칫하다가 용공소설의 지목을 받게 되기 때문에, 분단문제를 소설로 하여

      문학의 순수성이나 역사의 객관성을 유지하기란 어렵다.

      내가 쓴 분단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거의 이년적 무장이 안 된

      무식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대부분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우익과 좌익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채 죽음을 당하고 만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비롯 자신들이 저지른 행위를 뼈져리게

      후회하기에이른다,

      나는 이들의 아픔과 뉘우침을 통해서 해한을 시도해 보았다.

      뉘우치는 사람만이 잃어버린 자신을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징소리)의 주인공 허칠복 역시 철저하게 무이념적 인간으로 6 . 25의

      한가운데 역사를 꿰뚫고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뿌리까지도 뽑아 버린 대상과 배신한 아내에 대해서도

      미움 대신에 용서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그가 끝까지 아내를 포기하지 않는 것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대,

      고향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음으로써 가느한 것이었다.

---------그가 둑에서 멀리 떨어졌을 때,

       갑자기 징소리가 방울재 하늘을 줴흔들었다.

       칠복이의 징소리는 멀고먼 불귀의 북망산천으로 가는 사여소리처럼

       슬프게 울었다.

       해가 떠오르지 않았지만 하늘과 땅은 다시 밝아왔다.---------

     

    

(징소리)의 마지막 부분에서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칠복은 아내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것은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조인간 허칠복이라는 인물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는 소설가는 인물을 창조한다는 말이 있다.

#      소설에서 인물의 창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는 말이다.

 

#      소설은 주제가 창조적이어야 하는 것처럼

        인물 역시 창조적이어야 한다.

 

나는 이 소설에서 허칠복이라는 이조적 인물을 만들어냈다.

허칠복은 이 시대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다 어쩌면 그는 현실의 사람이 아닌지도

모른다.

1970년대를 사는 이조인간이다.

오늘에 살면서 이조적 의식에 갇혀 있고,

오늘에 살면서 미래를 꿈꾸는 과거형이면서도 현실 속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이상만을 꿈꾸는 비현실적인 존재이다.

 

-----방울재 허칠복이가 고향을 떠난 지 삼 년 만에 미쳐서 돌아와

       징을 두들기며 댐을 막은 뒤부터 밀려드는 낚시꾼들을  쫓아댔다.

       덩실덩실 춤을 추며 징을 두들기는 칠복이의 모습은 나무탈을 쓴 도깨비 같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된 것은 고향을 잃은 서러움, 아내를 빼앗긴 원한

       때문이라고들 했다.

       아무도 기다리는 사람이 없는고향에 여섯살 난 딸아이를 업고 불쑥 바람처럼

       나타난 그는 물에 잠겨 버린 지 삼 년째가 되는 방울재 뒷동산 각시바위에

       댕돌같이 앉아서는, 목이 터져라고 마을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대는가

       하면, 혼자서 고개를 끄덕거려 가며 오손도손 귀신 씨나락까먹는 소리를

       중얼거리다가도, 불컥 고개를 쳐들어 하늘을 찔러 보고, 창자가 등뼈에

       달라붙도록 큰 소리로 웃어대고, 느닷없이 징을 두들겨가며 도깨비춤을 추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의 성질이 염병을 앓아 귀머거리가 된 사람처럼

       물렁해지고, 바보처럼 느물느물해진 거였다.

       황소같이 힘이 세고 성깔이 왁살스럽던 그는, 도깨비 춤추듯 징을 두드리다가도

       방울재 사람들이 쫓아와서 한 마디만 질러대도 슬그머니

       징채를 감추고 목을 움츠리는 거였다.-----------

 

(징소리) 첫머리에 소개된 주인공 허칠복의 모습니다.

그는 패배자이며 피해자다.

6 . 25와 산업화로 인해 철저하게 뿌리 뽑힌, 꿈을 꾸듯 살고 있는 사람이다.

황소처럼 힘이 세고 성질이 왁살스럽던 그가 왜 이렇듯 바보처럼 물렁한 사람으로 변해

저린 것일까.

주인공 허칠복은 고향이 물에 잠기자 보상금을 받아 생명처럼 아끼던 정을 가슴에 안고 아내 순덕이, 딸 금순이와 함께 광주로 이주해 나온다.

그는 얼마 안 되는 보상금을 까먹고 나서 식당에 취직한 아내의 작은 수입으로 연명을 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순덕은 식당 주방장 강만식의 유혹에 빠져 버리고, 칠복은 금순이와 함께

아내를 찾아 방황한다.

세월이 흐른 뒤에, 자신의 잘못을 크게 뉘웆친 순덕은 남편을 찾아 고향 방울재로 돌아오지만, 부정한 몸으로 남편 앞에 다시 설 수가 없어, 옛날에 그녀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댐에 몸을 던져 죽음으로써 속죄한다.

이상이 이 소설의 줄거리이다.

그리고 주인공 허칠복은 고향이 물에 잠기게 되어 도시로 이주해 온 뒤에 아내까지 잃고 마는 비극적 삶을 살아왔다.

독자가 보기에 허칠복은 완전히 폐인에 가깝다.

그러나 막상 허칠복 자신은 희망을 버리지 않은 채 다시 고향에서 아내와 함께

행복하게 살아갈 날만을 기다린다.

           #   작가가 소설에서 인물을 창조할 때는 입체적이어야 한다든가,

               성격의 발전이 있어야 하며,

               성격의 부면이 잘 나타나야 하고,

               일차원적 인물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또한 주인공이 특징이 없고 따분하며 보잘것없는 인물이면

               독자가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도 잘 안다.

               작가는 자기가 만들어 내는 작중 인물을 개성의 눈을 가지고

               보아야 하며, 작중 인물의 행동은 각기 성격으로부터

               연유되어야 한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징소리)의 주인공 허칠복은입체적 인물도 아니며, 성격의 발전도 크게 눈에 띄지 않고, 일차원적 인물에 머물고 마는, 특징도 별로 없고 보잘것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독자들로부터 흥미를 끌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이름 자체가 수십 년 전에 어느 시골에서나 흔히 찾아볼 수 있는데다가, 그의 정서와 의ㅣㄱ은 한 세기 전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구시대적 인물의 전형이다.

내가 일부러 이같은 인물을 설정한 것은 주인공이 지금의 부조리하고 인간성이 황폐해 버린 현실 속에서는 살아갈 수 없음을 암시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2차원적으로 구분하였다.

그 하나의 유형은 오늘의 모순투성이인 각박한 현실 속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인물들이고, 또 다른 유형은 부조리한 오늘의 현실과 타협하여, 세속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인물들이다.

전자는 오늘의 현실에서 완전히 뿌리 뽑힌 사람들이고 후자는 병든 오늘의 현실에 뿌리를 박고 안주한 사람들이다.

뿌리 뽑힌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 살면서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희망을 버리지 않는 인물들이고, 부조리한 현실에 착근한 사람들은 고향을 버리고, 고향을

혐오하는 인물들이다.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갈 날을 꿈꾸듯 기다리면서도 현살 속에서는 뿌리가 뽑혀 버린 인물들은 주인공 허칠복을 비롯하여 그의 아내 순덕이, 순덕이 어머니, 그리고 아들의 권유에도 끝까지 고향을 지키는 강촌댁 등이다.

이에 대조적으로 고향을 혐오하면서 현실의 시류에 편승 세속적 처세에 능한

인물로는 장필수, 맹만수,박천도 등이다.

재벌사회의 간부인 장필수는 세속적 처세에 능한 인물로 늘 고향을 혐오하고 있으며,

맹만수 역시 도시 상류층에 속한 안물로 어머니의 생명과도 같은 땅을 아버지를 죽인 박천도 사장에게 팔아 버린다.

그리고 고향을 떠나 온갖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번 박천도는 계속 고향을 배신하면서 물질적 삶만을 추구한다.

이처럼 후자의 인물 유형은 고향을 버리고 고향을 배신하며 오직 개인적인 이익만을

추구하며,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부도덕한 일이라도 서슴치 않는, 철저하게

물신화된 인물들이다.

고향을 배신한 인물 유형은 반인간적이며, 고향을 지키고 고향을 되찾으려고 하는 인물 유형은 철저하게 인간적이다.

그러나 이 두가지 유형의 인물들이 선과 악으로 대치되는 도시적 한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로 반목이나 대립적 갈등구조를 만들지 않았다.

고향을 포기한 사람들과 고향을 빼앗긴 사람들 사이에는 갈등문제보다 삶의 가치관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즉 고향을 포기한 사람들은 고향에서 스스로 멀어지려고 하는 가치관에, 고향을 빼앗긴

사람들은 다시 고향으로 회귀하려는 가치관에 충실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주제와도 연결된다. ###

즉 나는 이 소설에서 고향을 양면적으로 그려보고 싶었다.

그 하나는 현실적인 의미의 고향이며 다른 하나는 근원적이고도 존재론적 고향을

의미한다.

고향을 현실적 의미로 받아들이려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현대문명과 산업사회를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그 이익을 추구하려는 입장의 물신주의적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이와

반대로 고향을 존재론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현대 산업사회를 거부하며,물질보다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기를 꿈꾸고 있다.

그래서 현실을 받아들이는 쪽은 세속적인 행복에 만족해 힜고 현실을 거부하는 쪽은 불행하다.

              그렇지만 나는 두 가지의 유형 중에 어느 쪽에도

      ###  강음부를 찍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다만 주인공 허칠복의 '징소리' 그 소리를 통해서 인간다운 삶에 대한 간절한 꿈을

외쳐대고 있을 따름이었다.

 

 

 

 

                                   

 

 

 

                                      징소리의 상징성

 

 

#  나는 (징소리)에서 그 소리를 인간다운 인간의 외침으로 생각하면서 소설을 썼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금속성의 울림이 아니라,

방울재 사람들의 혼의 울음이며, 동시에인간다운 혼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그 혼을 다시 일깨우려는 깨우침의 소리이기도 한 것이다.

고향을 스스로 포기해 버린 사람들에게 다시 고향을 일깨우려는 외침으로 생각하였다.

주인공 허칠복은 방울재에서 소문난 징채잡이 허쇠의 아들로 태어나며,

자라서 그도 아버지에게 이어 징채잡이가 된다.

그리고 순덕이는 허칠복의 징소리에 반해 그의 아내가 된다.

고향에서 쫓겨난 허칠복은 징을 마음대로 칠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그리고 남편을 배신하고 가출해 버린 아내를 찾기 위해 그는 계속 징을 쳐댄다.

그 소리는 아내를 부르는 소리이기도 한 것이다.

또 그의 아내 순덕이는 도망쳐살면서도 문득문득 징소리의 환청에 괴로워한다.

적어도 그녀가 징소리의 환청에 괴로움을 당하고 있을 때는 잘못을 뉘우친 후였던 것이다.

뉘우침이 없었을 때는 환청이나마 들을 수가 없었다.

칠복이는 타향을 떠돌음하면서, 아내가 더욱 간절하게 보고싶을 때,그리고 자신이 외로울 때나 고향 사람들을 만나고 싶을 때, 고향이 그리울 때 미친듯 징을 쳐대는 것이었다.

이렇듯 징소리는 바로 인간의 소리 그 자체인 것이다.

 

------그 징은 보통 징이 아닙니다요.

         우리 방울재의 혼이 들어 있는 징입니다요.

 

수백명, 아니 죽은 사람까지 합치면 수천 명이 들어 있습니다요.

징이 있어야 마누라도 찾고, 고향 사람들도 다시 만날 수가 있습니다요.----(말하는 징소리) 중에서

 

               ###  이상의 (말하는 징소리)의 표제가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이 소리는 금속성의 울림이 아니라 인간의 말이다.

 

그리고 죽은 사람들의 혼까지도 그 징에 들어 있다고 한 것은,

징의 역사성을 암시해 주고 있다.

그 죽은 사람들이란 6 . 25 때 죽은 영혼들을 말한다.

산자들의 영혼뿐만 아니라 죽은 자들의 영혼까지도 담고 있는 그 징은 또한  허칠복의 생명이기도 하다.

 

------징은 내 생명이나 마찬가지라요.---------(무서운 징소리) 중에서

          상징성으로서의 징소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먼저 고향을 부르는 소리이다.

 

------ 지금 이 세상 어디에 방울재가 있다든가.

           자네 면사무소에 가서 방울재라는 마을이 있나 물어 보소.

           아니면 우체국에 가서 방울재로 편지를 부쳐 보소.

           그 편지가 가는가 되돌아오는가 말이여.

           시방 방울재 찾기란 천당가기보담 어렵다는 것을 알아야지.

           방울재는 삼 년 전에 시푸런 물 속에 잠겨 버렸내--------

 

------ 어떻게 잊을 수가 있단 말인가.

           물에 잠겨 버렸다고 해서 고향이 없어져 버린 것은 아니네.

           이지 않는다면 고향은 없어지지 않네.

           고향을 잊은 것은 부모를 잊은 거나 마찬가지일세.--------

 

이상은 야간에 댐을 경비하는 고향 친구 손판도가 고향을 잊지 못해 자주 댐에 찾아와서 징을 쳐대는 것을 보고 고향을 잊으라고 타이르자,

허칠복이 반론을 펴는 대목이다.

비록 고향은 현실적 공간에 존재하지 않고,

그 상실의 아픔 또한 큰 것이었으나,

주인공 허칠복은 '잊지만 않는다면 고향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그 고향은 현실적 공간의 고향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원초적 상황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향은 모든 것을 용서하고 화합하는 새로운 세계인 것이다.

 

----고향은 사랑과 믿음이 충만하고 정이 넘치고 자유와 정의가 바로 서 있고,

      거짓이 없고, 부와 권력에 매달림이 없고, 콩 한 조각도 둘이 나눠먹을 정도로 인심이

      포실한 가장 인간적인 고향......(작가 후기 중에사)-------

 

내가 후기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고향은 바로 인간적인 사람들만이 사는 이상적인 공동체인 것이다.

나만 행복하면 온 세상이 행복해 보인다는 이기적이고 황폐한 고향이 아니라

네가 행복해야 나도  행복하며 우리 모두가 행보ㄱ하다는 공동체적 이상을 갈망하고 있다.

 

잊었던 고향을 불러 일으키는 징소리는 인간존재의 본성을 일깨우는 소리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곤동체적 이상을 갈망하는 소리인 동시에 산업화의 뒤안길에 밀려 뿌리 뽑힌 쌂으로부터

인간회복을 간절히 소망하는 부르짖음이기도 한 것이다.

나는 여기서 징소리와 대치되는 소리로 기계 돌아가는 소리와 6 . 25 때 사람들을 무참히 살상한

총소리를 상기시켰다.징소리가 인간회복을 소망하는 소리라면, 총소리는 이에 대처하여

작위적인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인간 파멸의 소리인 것이다.

 

두번째의 상징은 불의에 대해 항거하는 소리이고 정의를 외치는 소리이며,

                       폐쇄된 사회에서 자유로운 삶을 외쳐대는 소리이다.

(무서운 징소리)에서 개인의 이익을 위해 마을을 파괴한 박천도를 타도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몰려갈 때

                             징소리가 울렸다.

 

징소리가 박천도 사장의 타도를 외쳤고 마을 사람들이 그 소리를 알아들은 것이다.

여기서 징소리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불법과 비리에 대항하는 민중의 선언인 동시에

정의의 절규 바로 그것이다.

 

결국 징소리의 상징성은 고향을 인간존재양식으로 파악하는 소리,

산업사회가 빚은 물신주의를 거부하는 소리,

헤어진 사람과 다시 만나고자 하는 부름의 소리,

비인간화된 사회에서 인간화를 부르짖는 소리인 것이다.

 

 나는 연작장편 (징소리)에서 고향상실, 인간상실, 그리고 그 때문에 생긴 한과 징소리의 상징,

오늘의 현실에 어울리지 않는 이조인간의 설정 등을 통해서 산업사회에서의 고향이라는 의미를 생각해 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역사에 대한 총체적 인식이 다소 부족하였고,

고향을 빼앗긴 사람들이 고향을 되찾기 위한 투쟁적 의지가 약할 뿐만아니라,

감상주의에 빠져 버린 경향마져 있으며,

인물설정이 도시적이었다는 점에 ㄷ해서 반성도 해 본다.

 

내가 이 작품에서 얻어낸 것이 있다면 한에 대해 내 나름대로의 절리를 할 수가 있었고,

한의 미학이야말로 우리 문학의 특질의 하나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한은 패배주의적 넋두리나 체념의 한숨이 아니라,

싸우며 지켜나가는 투쟁의 의지인 동시에 끈질긴 생명력이라는 것도 터득하게 된 것이다.

 

(징소리)가 고향을 빼앗긴 사람들의 이야기라면

장편 (타오르는 강)은 고향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나는 (타오르는 강)에서 고향을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노비출신들이 자유의 몸이 되어

공동체적 삶을 통해 고향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그려 보았다.

그리고

(징소리)에서 개인적 갈등구조 속에서 만들어진 한을 수용했다면

(타오르는 강)에서는 여럿의 한이 한데 뭉쳤을 때,

그것이 민중의 한이 되었고,

민중의 한이 역사 속에서 어떤 힘을 발휘했는가를 표현해 보았다.

 

나는 앞으로도 '고향'이나 '한'에 대해 보다 철저하게 친착해 보고싶다.

관념적 공간이 아닌 현실적 공간으로서의 내 고향을 통해서 우리의 역사를 보다 총체적으로 드러내면서,

역사 속에서 한이 어떤 생명력으로 우리 스스로를 지켜 왔는가에 대해 관심을 갖고

소설을 쓰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