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춘 시집 『죽편(竹篇)』이 나오게 된 사연 / 한용국
죽편(竹篇) 1
— 여행
여기서부터, —— 멀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년이 걸린다
30년 전
— 1959년 겨울
어리고, 배고픈 자식이 고향을 떴다
— 아가, 애비 말 잊지 마라
가서 배불리 먹고 사는 곳
그곳이 고향이란다
————
서정춘 1941년 전라남도 순천 출생. 1968년 〈신아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으로 《죽편(竹篇)》 《봄, 파르티잔》이 있다. 박용래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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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보고, 오래 참고, 끝까지 가라
서정춘 시인의 첫 시집 《죽편》은 등단한 지 28년 만에 낸 첫 시집이다. 60편에서 70편으로 시집을 편집하던 당시 문단의 관행을 깨고, 어느 시인의 회고에서 언급된 바처럼 “극약같이 짧은” 시 35편으로 엮인 시인의 시집은 출판되자마자 그야말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야 말았다.
28년 만의 첫 시집 탄생 비화는 이 짧은 지면에 옮겨 놓기 힘들 정도로, 시인의 가난했지만 철저하고 치열한 삶과 혼연일체가 되어 있었다. 특히 겨울이면 차비를 아끼기 위해서 마장동에서 북창동까지 걸어 다니던 동화출판공사 직장생활은 시인으로 하여금 시에 대한 생각을 새롭게 벼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시인의 육성을 들어보자.
“동화출판공사 그 회사에 입사를 했는데, 햐. 이 회사가 알고 보니 다크호스 회사야. 대가들 황순원, 김동리, 서정주 등의 대가들, 한학자들, 고미술사학자들이 드나들기 시작하는데 그분들 얘기를 들어보면 도대체 처음 듣는 얘기들이 너무 많은 거야. 그분들을 만나면서 과연 나는 시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 나는 어항 속의 금붕어였던 거야. 하다못해 연못에 가서 금붕어가 되든가, 호수에서 잉어처럼 뛰놀든가, 아니면 망망대해에 가서 고래처럼 뛰놀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살아남는 거라는 걸 알았어. 일단 어항을 깨버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 우선 신춘문예 당선한 거부터 무효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 일단 작살을 내버린 거야.”
그 후 시인은 시를 한 편도 발표하지 않고 끝없이 쓰고 고치고 버리고 다시 쓰는 작업에 몰두하면서 한편으로는 가장으로서 치열한 생활을 병행해나간다. “출판사에서 쫄병이었기 때문에 회사에 엄청난 충성을 다해야 먹고 살 수 있었던” 엄혹한 생활 속에서도 시인의 서랍에는 한 편 한 편 시가 쌓이기 시작한다. 세월이 지나자 서랍에는 버리고 또 버리고도 남은 정수 70여 편이 채워지게 된다. 그동안 시인의 머리는 희끗희끗해지고, 어느새 정년퇴직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시인이 들려준 일화 하나는 시인의 시적 염결성이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볼 수 있다. 이근배 시인은 서정춘 시인에게 왜 그 좋은 시들을 발표 안 하느냐고 독촉했다고 한다. 어느 날 예의 그 천상병 시인이 천 원을 받으러 들렀을 때, 이근배 시인이 시인의 서랍 속에서 시를 하나 꺼내 읽어보라고 주었다고 했다. 그 시를 읽은 천상병 시인은 큰 소리로 외치면서 “이 사람 누구야? 이 사람은 현대문학에 추천을 해야 해요. 햐, 좋다, 정말 좋다!”는 감탄사를 연발했다고 한다. 그래도 꿈쩍도 안 하던 시인은 정년퇴직을 맞이해서 시집을 내기로 결심한다. 다시 시인의 육성을 들어보자
“96년 3월 15일에 퇴사를 하게 돼. 명예퇴직을! 히야…… 회한이 그득해…… 내가 28년을 처자식 먹여 살리고, 부모형제 먹여 살리고 하느라 내 시는 뭔가 하는 차제에 유재영이가 내 시를 좋아했어. 형님 동학사 첫 시집 스타트로 형 시집 만듭시다. 나는 시 없어! 그랬지. 그랬더니, 아 형님! 그러면은 1번 비워놓을 테니까 기다릴 테니 꼭 만듭시다. 한 이 년을 기다렸을 거야 그 1번을. 유재영 시인이 내 시를 좋아했고, 또 좋은 사이였고. 세월이 흘러서 정년퇴직에 임박했어. 한두 달 있으면 정년퇴직이야. 이러면 안 된다…… 생각이 들었어. 발표는 안 했지만 썼겠지? 세상에 28년 동안의 시편을 추슬러 보니까 70편 남짓 돼. 그 70편을 봤더니 약 40편이 작품성이 없어. 소위 증발을 해버렸고 퇴색을 해버렸어. 이거는 안 된다, 그래서 40편을 버렸어. 그러고 나서 35편을 유재영한테 만들자 그랬지, 니가 만들고 박제화해뿔자, 나도 한때 시 썼다. 까짓 거, 대신 페이퍼북이 아니고 하드카바야. 그랬더니 유재영이가 섭섭해 허드라고. 그거 돈이 많이 들 텐데 하더라고. 그래서 알았다. 제작비의 반은 내가 댄다. 거기에 서른다섯 편을 주면서 유재영이 보고 그중에서 유재영이 안목으로 다섯 편을 빼라, 삼십 편 가지고 만들어라, 그랬지. 그런데 필름 교정하러 가보니까 서른다섯 편을 다 실었어. 그래서 아이 그거 참! 자네 안목으로 그거 좀 빼라니까, 그랬더니, 아이 다 좋아요! 다 좋아! 그냥 내요. 해서 28년의 정년퇴직 하는 날 비슷하게 책이 나온 거야. 인쇄는 삼성인쇄소에서 했어. 나는 동화출판공사에 있을 때 거래한 적이 있었으니까, 인쇄는 좀 그냥 해주라, 해서 나온 거야.”
시인은 진정한 시란 무엇인가? 어떻게 시인으로 살아남을 것인가? 이런 고민과 함께 시라는 짐승에 쫓기듯이 살아온 28년간을 정리하면서, 중국 문인화의 거장인 오창석과 제백석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멀리 보고 오래 참고 끝까지 가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말씀을 덧붙였다. 문학을 넘어선 삶의 화두와도 같은 말씀이었다. 시 〈죽편 1―여행 〉의 시구처럼 시인의 시는 첫 행에서 마지막 행까지 백 년이 걸렸고, 어쩌면 첫 행이 쓰이는 데조차 백 년이 걸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시인의 아버님께서 주셨던 짐승 같은 사랑을 가족에게 그리고 시에 주면서 살아온 시인의 첫 시집 《죽편》의 탄생 비화는 여기까지다.
아쉬운 점은 제한된 원고매수로 인해 여기 넣지 못한 시집 출간 후의 후일담이며, 서정춘 시인의 짧은 시의 전략과 근원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다른 지면에라도 풀어놓고 싶다. 하지만 시인의 말씀을 듣는 내내 때로는 할아버지 같았고, 때로는 엄한 스승 같았던 애정과 배려는 평생 혼자 가지고 가려고 한다.
—《유심》2013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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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국 / 시인. 2003년《문학사상》으로 등단. calliid@naver.com
겨울 나무로부터 봄 나무에로
황지우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 13도
영하 20도 지상에
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나목으로 서서
아 벌 받은 몸으로, 벌 받는 목숨으로 기립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魂)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 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에서 영상으로
영상 5도 영상 13도 지상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 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시집『겨울-나무로 부터 봄-나무에로』(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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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우 시인 개인의 현실적 고통과 시대의 아픔이 공존했던 80년대 초에 발표한 시다. ‘새벽은 밤을 꼬박 지새운 자에게만 온다.’고 주장했으나 흥청망청 밤을 낭비한 자에게도 새벽은 왔다. 뒷날 그는 자청한 그때의 고난을 ‘그 누구를 위한 헌신’도 아니었다고 술회했다. 고문을 견디다 못해 친구를 밀고해야 했던 상황이었기에 시대의 모순과 절망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체험했던 그였다. 그의 <뼈아픈 후회>에서는 ‘나를 위한 헌신, 한낱 도덕이 시킨 경쟁심’이라고 했다. 그런 사회가 자신을 시인의 길로 들어서게 한 걸 후회하기도 했다.
당시 그의 작품 대개가 세상에 대한 야유와 풍자, 증오와 환멸, 그리고 냉소로 가득 채워졌다. 이 시는 그나마 나무와 계절이란 상징적 이미지를 통해 시련을 견디고 꽃을 피우는 존재의 생명력을 긍정의 시선으로 그렸다. 스스로의 주체적 의지와 끈기로 혹독한 ‘겨울’을 극복하고 ‘봄’을 수확하는 인간의 힘을 증명해 보인 것이다.
이후 그는 대립과 불화와 증오만 갖고는 아무런 문제해결을 할 수 없음을 깨달아서인지 점차 모순관계에 있던 만물의 조화와 화해의 길을 추구하기에 이른다. 그가 광주로 낙향하여 90년에 발표한 <게눈 속의 연꽃>은 불교적 화엄의 경지로까지 나아간다. 다시 침묵만이 미덕이라며 칩거하다가 98년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를 펴내는데 예상 밖의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과거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시절 문화예술계의 여러 자리를 넘나들며 활약을 보였고 한때 진보진영에서는 그를 서울시 교육감 후보로 눈독을 들이기도 했는데 적극 고사한 일도 있다. 지금은 ‘역임’의 이력만 남긴 채 갓도 벗겨지고 끈도 떨어져 편안한 그냥 시인의 자리로 돌아와 있다. 과문한 탓인지 그의 최근 작품을 보지 못했는데 기다려진다. 어쩌면 그는 또다시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그러면서 자신의 상처를 만지고 있을지 모르겠다. 이 봄, 부디 아프지 말고 ‘마침내, 끝끝내’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길 바란다.
권순진 (시인)
달팽이의 슬픔
고 영
눈물에 기대 잠드는 날들이 많아졌다.
지구의 중심을 짊어지고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이
슬펐다. 낙엽 더미 속에 깃들면
잠시나마 따뜻해질까.
도마뱀이 되고 싶었지만
나를 위해 기꺼이 희생해줄 꼬리가 없었고,
내 몸은 너무 무거웠다.
등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내는 일조차
내겐 고역이었다.
거추장스러운 껍질을 벗어버리기 위해
몸속에 불씨를 품고 살아야 했다.
그 불씨가 꺼지면,
뼈 한 점 남기지 않고
깡그리 녹아내릴
완전한 연소체가 되고 싶었다.
형체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평생 그림자를 지우며 살아야 했다. 그것이
슬펐다.
—《시인수첩》2014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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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 / 1966년 경기도 안양 출생, 부산에서 성장. 2003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산복도로에 쪽배가 떴다』『너라는 벼락을 맞았다』. 현재 《시인동네》발행인.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시집『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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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7일은 탑골공원 뒤 지린내 나는 심야극장의 구석자리에서 시인이 돌연 청춘을 마감한지 꼭 25년째 되는 날이다. 이쯤이면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는 아닐지 몰라도 ‘힘없는 책갈피’가 끼워둔 종이를 떨어뜨리기에는 버겁지 않을 이른바 4반세기의 세월이다. 그리고 우린 이미 그가 무언가를 골똘히 궁리하며 ‘많은 공장’을 세웠다는 것도, 탄식과 머뭇거림으로 그토록 열심히 기록해둔 비망록의 낡고 어두운 부분도 모두 기억하고 있다. 이제 그 기억으로 한줌 향을 던지면서 그대와 우리의 삶을 회억하노라.
그의 비망록을 들추어보면 들끓는 열정에도 불구하고 본의는 아니겠으나 무의미를 확대재생산 유포시키고 있다는 정황이 고루 넓게 포착된다. 뜬구름 잡듯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자신의 삶에 대한 허무와 부정적 그늘 또한 길게 드리워졌음을 본다. 결국 낙관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서 그대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꿈과 이상이 없는 젊은 날이 어디 있겠으며, 그 열망으로 채워보지 못한 젊음이 어디 있으랴. 하지만 알지 않느냐, 현실은 누구에게나 쉽게 그것을 허락하진 않는다는 것을.
사람들은 질투한다. 왜 나는 이룰 수 없는가. 왜 나는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없는 걸까. 난 왜 아무것도 못하고 이렇게 머뭇거리고만 있을까.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대 희망의 내용도 질투였다. ‘저녁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지새는 젊은 날의 힘은 질투뿐이었다. 결국 내 안의 결핍에서 발아해 자라난 질투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질투가 힘이 되어 우리를 조금이나마 전진케 하고 변화시켜나갔는지는 잘 모르겠다. 절망과 탄식의 시집이 25만 권 이상 팔렸고, 지금도 1년에 1만 권은 족히 팔려나가는 이 괴이한 현상은 또 무엇인가.
정말 그대로 날이 새는 걸까. 삶은 새로운 걸 얻기 위한 창조적인 과정이 아니라, 순전히 타인이 가진 것에 대한 시기와 질투와 부러움에 사무친 나날일까.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뒤돌아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문고리를 잠그면서 생각해보니 알겠다. 고백하노니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고. 후회할 겨를도 없이 기어이 ‘빈집’에 갇혀 돌아가지 못한다고. 돌아갈 수 없다고…….
권순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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