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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읽기 /강인한

법정 2013. 1. 22. 18:29

 

외박(外泊) (외 1편)

 

 

   김수복

 

 

 

 

 

좀 더 쉬었다 갈게요. 하느님!

 

 

늦게 핀 들꽃도 꽃이잖아요.

 

 

골목 안, 평생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핀

 

 

이 개망초꽃 두고 갈까요?

 

 

저 분도 바르지 않은 눈물 보이지 않으세요?

 

 

전 이 골목 안, 저 오래된 국숫집 담 밑에 핀

 

 

어머니 살아 돌아오신 꽃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하느님 좋아하시는 사람꽃도 피었네요.

 

 

아직도 갈 곳 없어 다가오는 구름도,

 

 

아, 그 아득한 첫사랑 파도도 아직 피어 있잖아요.

 

 

저 해가 바다 너머 고요히

 

 

잠들기 전에 가지 않을래요.

 

 

아무리 부르셔도 이 골목 안

 

 

저 사람꽃 질 때까지

 

 

복종하지 않을래요

 

 

하루만,

 

 

딱 하루만 사람꽃으로 피어 있을래요!

 

 

 

 

겨울 메아리

 

 

 

 

 

죽고

 

 

다시 사는 일이란

 

 

아침에서 저녁으로 건너가는,

 

 

이 나무에게서 저 나무에게로 건너가는,

 

 

나의 슬픔에서 너의 슬픔으로 건너가는,

 

 

너에게서 나에게로

 

 

나에게서 너에게로

 

 

죽음에서 이승으로 건너오는 일인 걸

 

 

새벽 눈발을 맞으며

 

 

새벽 산허리에 감기는,

 

 

훨훨, 죽음을 넘나드는 눈발이 되어

 

 

한 며칠 눈사람이 되어 깊이 잠드는 일인 걸

 

 

 

 

                      —시집 『외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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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 / 1953년 경남 함양 출생. 1975년《한국문학》으로 등단. 시집 『지리산타령』 『새를 기다리며』『모든 길들은 노래를 부른다』『사라진 폭포』『달을 따라 걷다』『외박』

 

 

백일홍을 건너는 동안 (외 1편)

 

 

   한영수

 

 

 

 

 

단 하나의 이름을 발음하는 여정

오늘은 연못을 판다

연못을 건너는 동안

꽃이 흐른다

흐르면서 고인다

길 하나가 끊어진다

붉은 소리가 공중에 번진다

조금씩 건너편에 전해지는 동안

구름이 되었다가

바람이 되었다가

살이 다 닳은 등뼈가 말해준다

오늘의 원인이고 결과이고

건너도 건너도

맨 처음 그 곳

선 채로 연못에서

백일홍을 건너는 동안

혀끝이 타드는 개심사(開心寺) 배롱나무는

말을 더듬는

말과 말 사이의

긴 묵음

꽃이 고인다

고이면서 흐른다

문이 없는 심검당(尋劍堂)을 짓는 것이다

 

 

 

 

 

아흔아홉 다정

 

 

 

 

 

하루살이가 모였다

소구니강에 해가 지려할 때

눈 하나가 말한다

없는 두 눈의 눈이 되자

귀 하나가 말한다

없는 두 귀의 귀가 되자

흉터 하나씩은 덜컥거리는 숨들이

걸게 소리친다

잡아먹히진 말자

가슴으로 가슴을 괸다

아흔 아홉 다정이

안개꽃다발처럼 부풀어오른다

다행이야,

남아있는 시간은 아직도 한 뼘 반

하모니카를 불 듯 한 음 자리에서도

날숨과 들숨으로 곱을 살자

내 말이 네 말이야

네 말이 내 말이야

아흔 아홉 우주가 둥글게 간다

그중에 눈빛이 긴 놈은

다음 생을 귀띔하기도 한다

물 비린 소구니강에

해가 아주 지려할 때

순서 없이 왕 왕 왕

돌아가는 궁리가 한 아름이다

 

 

 

 

 

                      —시집『케냐의 장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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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수 / 1957년 전북 남원 출생. 10여년간 중고교 국어교사. 2005년 '제1회 최치원신인문학상' 당선. 2010년《서정시학》신인상 당선으로 등단. 시집 『케냐의 장미』.

 

분홍색의 행방

 

 

   박정남

 

 

 

 

 

 

 

작은 분홍색 알약을 먹는 가을 아침에

분홍색은 아프다

분홍색 하늘을 나는 나비들이 하나 둘

자개 껍질처럼 쪼개지며 날개를

파닥이고 있다

아득히 하늘에 떠 있다

 

 

가을에 분홍색은 구석으로 구석으로

몰리고 있다

대빗자루로 쓸어간 가을의

그 넓은 뜰에는 분홍 꽃잎 한 장

떨어져 있지 않다

 

 

쇠약해진 분홍색들이

병원에 가니 푸른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누워 있었다

 

 

 

 

 

                      —《현대시학》2012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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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남 / 1951년 경북 구미 출생. 1973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숯검정이 여자』『길은 붉고 따뜻하다』『이팝나무 길을 가다』『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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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書

 

 

   임희숙

 

 

 

 

 

 

자해의 흔적을 본 적이 있다

손목을 그은 비장한 심장의 혈구들은 소통을 멈추고 비어졌다

임진강 암벽에 불거진 칼날 자국들

빛나는 직선과 오묘한 곡선을 읽는 강물의 碑文 낭독은

캄캄한 밤마다 울어대는 짐승 소리에 섞인다

 

 

고된 길을 느리게 돌아나가는 물살이

몸을 구부려 쓰고 나간 은밀한 답문

아름다운 꽃과 뱃사공의 노래와 죽은 여자의 푸른 치마

이야기를 만드는 건 사람들의 힘이다

 

 

물은 무르고 아찔한 손톱을 가졌다

강이 품은 수천 년의 유서는 대필되었다

문장은 산화되고 박리되어 꽃처럼 피고 지고

죽은 꽃과 새로 뜬 별이 강물에서 하늘로 옮겨 다녔다

 

 

암벽의 유적들을 핥는 일은 강물이 얻은 최초의 노릇

새로 神書를 쓰는 핏빛 저녁이다

 

 

 

 

 

                       —《현대시학》2013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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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희숙 / 1958년 서울 출생. 명지대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한국미술사 전공. 1991년 《시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격포에 비 내리다』『나무 안에 잠든 명자씨』.

 

 

겨울 과메기 (외 1편)

 

 

   송은영

 

 

 

 

 

낡은 외투를 걸친 초라한 노숙자같이

설한풍 되받아치며 그렇게 견디고 있다

치욕의 모서리를 뽑아 코뚜레를 만들었다

난무하듯 헝클린 덕장 곳곳에서

내장까지 훑어낸

납작한 뱃가죽을 드러내고 바다를 버린다

바람은 제자리에서 숨을 거두고

좀처럼 요약되지 않는 몸은

공복을 채워줄 누군가를 위한 것인가

밤새워 내리는 눈발을

미친 듯이 받아내며

완성된 또 다른 생

뼈를 추려낸 몸은 찬란한 지느러미를 키운다

축문처럼 지나가는 파도 소리에

살갑게 지나온 길

돌아볼 새도 없이

등 푸른 육신을 쫀득쫀득하게

해탈한 겨울 과메기

풍경만 남은 수행자가 된다

 

 

 

 

 

거꾸로

 

 

 

 

 

딱똑,

뒤로 가는 분침

뒤로 가는 시침….

거꾸로 타는 보일러가 연료비도 싸고

福도 거꾸로 부쳐야 잘 들어오고

거꾸로 읽는 세계사가 재미있고

연어도 강을 거슬러 오르고

고래도 거꾸로 새끼를 낳고

참새가 거꾸로 날아 새참이 되고

아 좋다 좋아와 다시 합창 합시다는

거꾸로 읽어도 같은 글자고

불운이 거꾸로 행운이 되고

용의 긴 목에 거꾸로 박힌 비늘을 건드리면

그 누구라도 용에게 잡아먹히고

영국에서는 왕이나 여왕이 그려진

우표를 거꾸로 붙이면 반역죄가 되고

나이를 거꾸로 먹은 사람들이

거꾸로 엎어놓은 항아리처럼

위아래 구분 없이 살아가고

철봉에 거꾸로 매달린 어른들이

아이처럼 내려다보며 살고

물속에 물구나무선 달이

고무신 거꾸로 신고 달아나기 바쁘고

새장 속 새는 어항 속에 있고

어항 속 물고기는 새장 속에 있고

땅은 하늘에 펼쳐져 있고

하늘은 땅에 거꾸로 처박혀 있고

 

 

 

 

 

                        —시집『별것 아니었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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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영 / 1969년 경북 포항 출생. 2007년 《시와 상상》으로 등단. 시집 『별것 아니었다』

 

 

김요아킴의 「나의 연봉」감상 / 황인숙 |비평/에세이
강인한 | 조회 52 |추천 0 |2013.04.20. 06:20 http://cafe.daum.net/poemory/H5qF/1804 

 

김요아킴의 「나의 연봉」감상 / 황인숙

 

 

나의 연봉

 

    김요아킴(1969∼)


 


세상의 모든 가치는 몸이다
월요일 새벽 출근을 서두르는
신문 가판대로 비싼 몸을 보았다
FA 시장에 나온 거물급의 한 타자
프로가 뭔지를 보여 주는 값을
1면으로 채웠다
땀으로 퇴적된 실력은 범접조차 힘든
연봉으로 관중들을 불러 모으고
아쉽게 어제 경기를 비긴 나는
얼핏 내 몸값을 더듬어 보았다
한국인 평균보다 모자라는 키에
약간 넘쳐나는 몸무게
어린 시절 동네 야구에서 틔운 싹을
석삼년 사회인 팀에서 꽃 피우는
나의 연봉은 마이너스
유니폼을 맞추고 글러브를 사고
꼬박꼬박 회비를 부으며
경기의 승패에 상관없이 기울이는 술잔의 수
덤으로 일요일을 차압당한
마누라의 잔소리와 딸들의 원성
나의 통장에 찍히는 몸값은 확실한 마이너스
여전히 세상의 가치는 몸이 지배하지만
센터를 가르는 시원한 안타와
역동적으로 아슬하게 아웃시킬 송구를 꿈꾸며
다음 경기가 또 설레어지는 나에겐
사실 연봉이란 말은 사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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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리사에게 인생은 요리다. 등산가에게 인생은 등산이고, 건축가에게 인생은 건축. 인생은 포커라고 부르짖는 도박사도 있을 테다. 우리는 저마다 제가 몸 바쳐 사랑하는 것에 인생을 비춰본다. ‘야구를 통하여 인간의 한계와 비애, 희망과 기쁨을 노래한’ 시집 ‘왼손잡이 투수’에 의하면 인생은 야구다. 삶의 면모들을 야구에 빗대 보여주는 이 야구시집은 꽤 재밌다. 나는 야구에 아무 관심이 없어서, 텔레비전 앞에 아버지랑 남동생이 앉아 야구 경기를 볼 때면 내내 방을 들락거리면서 ‘왜 이렇게 오래 하느냐!’며 절망적일 정도로 지루해했던 기억밖에 없는 사람인데도 말이다. 사회인 야구팀 선수가 신문 1면에 실린 거물급 프로야구 선수 기사를 보고 그와 저의 몸값을 재보는 모습을 그린 ‘나의 연봉’도 얼마나 웃음을 자아내는가? 시인 김요아킴은 사회인 야구팀 선수이면서 야구를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이다. ‘오타쿠’가 됐든, 아마추어가 됐든 이렇게 사랑하는 게 하나쯤 있으면 사회생활의 웬만한 아픔이나 고달픔은 의연히 이겨낼 수 있을 테다.
   “시인이 시 쓰기를 그만두면 무엇이 될까? 스포츠맨이 되리라.” 알베르 카뮈가 한 말이다. 예술과 스포츠는 닮았다. 순수한 집중으로 희열을 느끼면서 초라한 삶을 낭만적으로 고양시킨다. 승부와 연봉에 매일 수밖에 없는 프로 선수보다는 아마추어 선수가 진정한 스포츠에 더 가까울 테다.

  황인숙 (시인)

 

겨울날의 모든 저녁은 슬프다

 

   우대식

 

 

지옥을 유예하는 꿈을 꾸었다
내가 원한다면 다음 생애를 이어가며
지옥을 영원히 유예할 수 있다는 꿈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영원 너머 한 번은 그곳에 가야 한다는
괴로움에 몸을 떨었다
지상의 소시민이
이렇듯 큰 생각을 하며
지옥 아래 마을을 떠돈다는 사실이
조금은 쓸쓸했다
추운 겨울 저녁
들기름 바른 김을
숯불에 굽던
옛집으로 돌아가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눕고 싶다
오한 속에서 만나는
지옥의 야차와 일대의 싸움을 끝내고
오랜 잠을 자고 싶다
겨울날의 모든 저녁은 슬프다
봉당에 켜진 알전구처럼
겨울날의 모든 저녁이 나를 기다렸다


 

                        —《유심》2013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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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대식 / 1965년 강원도 원주 출생.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늙은 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다』『단검』『설산 국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