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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시의 방 /강인한 (밍기의 방) (김명규 수필)

법정 2013. 1. 17. 20:29

숏 컷 스타일

 

 

    김명규

 

 

 

 

 

   눈을 감았다. 체념이었다. 그대로, 평온 속에 묻혔다. 싸악싸악 내 몸의 일부가 힘없이 날리고 있다.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고 하였던가. 그러나 내 몸은 절대자의 손에 승복하듯 그 앞에 몸을 고정시켰다. 운명에 손을 놓는 것처럼.

   사람의 직업이나 수준 정도를 감지하는 눈썰미가 능숙한 미용사의 날렵한 가위와 양손이 내 모습을 그려 낼 것이다. 미용실 전면의 유리창에 내려앉은 초가을 볕은 촘촘한 필터에 걸러낸 듯 맑고 정갈하다. 거울 속에 서있는 가위를 든 사내가 몇 마디 중얼거렸지만 알아듣지 못한 나는 그저 히죽이 웃고 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다만 그의 손에 맡긴다는 의미였다. 부드럽고 리드미컬한 가위질 소리에 나는 금방 달콤한 졸음을 따라갔다. 질척한 삶 속에서 흐물대듯 비척거리는 나를 그가 가끔씩 붙들어주곤 하였다. 머릿이가 전염병처럼 창궐하던 어린 시절 할머니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우면 곧 이 타작이 시작되었다. 할머니의 손가락이 머릿결을 더듬어 오면 잠을 못 이겨 나는 시든 풀처럼 무력해지곤 하였다.

   청량한 가위 소리가 멈추고 미용사의 손이 내려졌을 때 육신을 빠져나와 떠돌던 영혼이 제 몸속으로 돌아온 듯 번쩍 눈을 떴다. 웬 스님이 거울 속에 있다. 나는 어디 가고 스님이 앉아있단 말인가. 황당하였다. 바닥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삭발이었다. 어디서 나를 찾아 내 가족과 함께 할 속세로 끌어온단 말인가. 어이없는 눈길로 그를 보았다. 사십대 후반, 살짝 긴 구레나룻과 곱슬머리를 한 다발 뒤로 묶은 그 사나이는 알려진 헤어드레서다. 내 잘못인 것 같았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싶다 말하였던 것이. 그렇다고 이렇게 삭발을 할 줄은 상상도 못하였다. “어쩜 좋아, 노인 병원 할매 같으네…” “무슨 말씀을…”

   그를 원망스럽게 보고 있을 때 지레 변명인지 칭찬인지 이해할 수 없는 말로 그는 그 순간을 모면하려 하였다. “개성이 좀 강하신 분 같아서 숏커트를 해봤는데 잘 어울리시네요”

   잘려나간 머리털을 보면서 발을 동동 굴러도 다시 붙일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재단사의 가위와 미용사가 든 가위는 실수 없는 재단을 위해 신중히 생각해야 할 것이다. 삭발한 머리를 들고 나오니 세상이 낯설고 나는 이방인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누가 나를 비웃거나 쳐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이웃이 죽어도 무심한 세상인데 하물며 내가 미용실에서 삭발을 하고 헤맨들 누가 눈여겨보기나 하겠는가. 아는 이라도 만나면 어쩌나 싶어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하고 잰 걸음으로 돌아왔다.

   집안으로 들어서면서 안도의 숨을 쉬었다. 숨기고 싶은 허물을 감싸주고 은밀한 내면을 다 들어내어도 평온하고 두려울 것 없는 내 집. 그렇게 편안한 둥지가 있다는 것을 나는 축복으로 여긴다. 문밖출입을 삼가고 집안에 우렁이처럼 들어앉아 있노라면 세월은 어김없이 흐르고 머리카락은 자라날 것이 분명함에 나는 우선 당혹스런 마음을 부축하였다. 부딪히는 거울 속마다 웬 남자가 내 의식을 들고 서있었으며 웬 스님이 속세로 들어와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서있는지 자아의 탈이 이렇게 저렇게 바뀌면서 혼동을 일으켰다.

   해 저물녘 남편이 돌아왔다. 얼핏 술 냄새가 코끝에 건네왔다. 그는 나를 보자 잠시 멈칫하더니

   “아니, 이게 누구야 우리 마누라는 어디 가고 아우슈비치 포로수용소에서 유태인이 하나 와 있어!” 하며 정색을 한다. 그렇잖아도 속이 상해 돌파구를 벼르던 참에 만만한 남편이 걸려들었다. “퍼머 값도 비싸고 커트 값도 비싼 게 미장원 안 다닐라고 삭발해버렸소. 무슨 시비요 시비가…”

   서슬 퍼렇게 부라리는 내게서 슬그머니 돌아서던 남편은

   “당신허고는 인자 암디도 못 다니것네, 꼭 가야할 디는 저만치 떨어져서 나 모른 체하고 다니소…” 진심인 듯 침착한 목소리로 비꼬았다. 곰곰이 생각할수록 약이 올랐다. 남편은 내 부아에 불을 지른 격 이었다. 남편의 서재로 쫒아 들어갔다.

   “테레비에 나오는 가수 이은미도 나처럼 머리를 깎아서 세련되고 멋있는 것 안 봤소?”

   취기가 남아 약간 졸린 듯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돌아본다.

   “아따 그 쎄련이 배급 나왔던갑네, 그려 그리여 참말 쎄련되었고만, 우리 각시 삭발헝게 쎄련되았어”

   그의 말에 웃음이 나올 것 같아 나는 얼른 등을 돌려 방을 나왔다. 언제나 남편과의 입씨름은 알맹이가 없고 타산이 없어 깨소금 국이다. 남편이란 나와 한 개체의 분신으로 여겨진다. 오래 신던 구두처럼 편안하고 잘 맞는 옷처럼 편한 존재다. 주말이면 손자들을 데리고 모여드는 두 사위를 볼일이 걱정이었다. 대놓고 말은 못하겠지만 속으로 장모가 망령든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것 같아서였다. 다음날 아침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오는 길에 단지 안에 살고 있는 교우와 만났다. 나의 과감한 변화에 그는 용기를 불어넣었다. 너무나 잘 어울린다는 둥 화가 같다는 둥, 정명훈 씨의 부인이 젊은 날 내 머리처럼 짧게 한 걸 보았었는데 자신도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어 자르지 못하였다고, 이만저만 부러워하는 게 아니었다. 칭찬을 받은 어린이처럼 나는 의기양양한 자신감이 생겼다. 사람이 갖는 자신감이란 그 어떤 모습에서도 아름다운 것 아니겠는가. 나는 당당하다. 요즘 젊은 남자들의 머리보다 더 짧은 숏 컷 헤어스타일에 자신을 들고 못 만날 사람이 없다. (*)

 

 

홍옥

 

   김 명 규

 

 

   상자 속 왕겨를 헤치면 빨갛게 웃고 있던 사과. 물에 띄워 씻는 동안 벌써 입 안 가득 침이 괸다. 첫아이 입덧 때 모든 음식이 메스꺼운데 먹을 수 있는 건 오직 사과뿐이었다. 그때의 사과 맛을 평생 잊을 수 없다. 지금은 사과 품종이 개발되어 홍옥이 귀하지만 그 시절엔 값도 싸고 맛이 있었다. 자잘하여 나는 한 자리에서 대여섯 개씩을 먹어댔다. 홍옥은 껍질이 얇고 새콤달콤하면서 연하고 부드러웠다. 그 매혹적인 붉은빛과 향기를 나는 입속 가득 삼키며 행복했다.

   사과를 먹을 때면 금단의 열매를 훔쳐 먹었다는 하와가 생각났다. 아마 이런 홍옥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지 싶다. 맛이 좋아 창조주 몰래 남편에게 따다주었을 열매, 훔친 사과를 먹다 목에 걸렸다는 결후(結喉)를 아담스애플이라 한다. 사과에 얽힌 이야기들은 많다. 독재에 맞서 싸운 빌헬름 텔의 사과 이야기, 백설공주를 꾀었던 마법의 사과, 스피노자의 사과나무 등등…. 그 중에서도 황금사과에 얽힌 트로이전쟁의 이야기는 인류 역사에 영원할 것이다. 세 명의 여신 헤라, 아프로디테, 아테나의 싸움은 여성의 본질적 질투가 화근이 되어 십년 동안의 전쟁이 계속되었다. 예술적 가치를 타고나는 것이 여성이기도 하지만 요염하면서도 요사스러움을 지닌 것 또한 여성 아닌가. 나도 여자이지만 여자로 태어난 것에 후회는 없다.

   가을 사과밭은 철조망 안에서 순례자의 마음과 발걸음을 붙잡는다. 가을 햇살을 만나 홍보석(루비)이 달린 듯, 붉은 보석 같기에 홍옥이라 불렀는지 모르겠다. 아기의 귀여운 볼기처럼 포동포동 살이 오른 홍옥이 주렁주렁, 어느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채 순결에 싸여있다. 나는 그 유혹에 사로잡히고 싶어 사과밭을 찾곤 한다. 혼이 나간 듯 하염없이 서 있노라면 실려 오는 바람결에 스치는 향기에 취하게 된다. 여학교 시절 이십 리 길을 걸어서 친구네 과수원엘 종종 갔었다. 사과를 얻어먹는 재미도 있었지만 친구의 사촌오빠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친구의 고모 아들인 오빠는 고아였다.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었지만 부모를 잃게 되어 아홉 살이 된 조카를 친구 어머니는 입양하였다고 한다. 그는 과수원 일을 하면서 실업계 야간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오빠는 나를 보면 하얀 얼굴이 사과 빛깔로 붉어졌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가족들과도 별로 대화가 없었고 말수가 적은 남학생이었다. 어느 날 그 오빠는 저만치 모퉁이에서 식구들 눈을 피해 나에게 손짓을 하였다. 다가가보니 책 한권을 건네주고는 얼른 달아나버렸다. ‘학원’ 잡지였다.

   잡지에는 오빠의 시가 실려 있었다. 시도 쓰는 문학소년 이라는 걸 알고부터는 그가 좀 달라보였다. 자세히 기억은 못하지만 시 속에는 삶의 고뇌가 녹아 있었던 걸로 나는 기억한다. 과묵한 사춘기 소년의 정신세계는 어른처럼 성숙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장애를 가진 오빠의 앞날은 동굴처럼 어둡고 시든 풀처럼 무기력해 보였었다. 친구의 방에서 우리끼리 도란도란 얘길 나눌 적이면 오빠는 사과나무 그늘 아래 앉아 하모니카를 불었다. 그 소리를 들으면 황량한 벌판에 외로운 양치기 목동이 떠올랐다. 베이스를 넣어 부는 능숙한 연주는 왠지 모르게 서글픔이 배어 있었다. 오빠는 왼쪽다리를 심하게 절었다. 나를 향한 오빠의 순정은 연민이었을 뿐 그 감정을 이해하기엔 나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탐스럽게 홍옥이 매달린 과수원에서 들려오는 하모니카 소리는 아련하였다.

   벌레에 물린 것이나 상품 가치가 없어 선별하여 놓은 사과를 친구 엄마는 한 보자기씩 싸주시곤 하였다. 그런 사과나마 대나무로 엮은 소쿠리에 담아 방안에 둘 때면 그윽한 향기가 집안 가득 퍼져나갔다. 내가 어른이 되면 저 사과처럼 향기가 나는 사람이 되리라. 그때의 내 소망도 누구 못지않게 화려했을 것이다. 헐렁한 낡은 바지에 황토 흙물이 든 메리야스를 입고 일하던 착한 오빠가 문득 떠오른다. 오빠는 내게 때때로 절실한 편지를 보내왔지만, 그런 글들을 나는 문학의 꿈을 가진 한 소년의 습작 글로 읽었을 뿐이었다. 부디 지치지 않기를, 삶의 의지를 딛고 훌륭한 문필가가 되기를 빌어 마지않았었다.

   사과에서 풍기는 단 냄새에 나는 또 매혹되고 만다. 이 아침, 그 향기로운 것과의 입맞춤으로 건강한 하루를 연다.

 

 

 코

 

    김명규

 

 

 

 

   생명의 뿌리입니다. 절로 터진 구멍이라서 무심했습니다. 세상의 온갖 진선미를 두뇌와 시각으로만 감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물질에 구멍이 방해를 받으면서 나는 그것의 소중함에 눈떴습니다. 맞습니다. 구멍을 통하여 미추와 삶의 애환까지도 들여다 볼 수가 있더라고요. 참으로 오묘하고 신기합니다. 직경이 불과 이 센티도 안 되는 그것에 우리의 목숨이 걸려있기도 하지요.

   때로는 시각과 미각을 대신합니다. 나는 오늘도 그 구멍을 곧추세우고 일상을 시작합니다. 뱀허물처럼 벗어놓은 가족들의 땀 전 의복들을 하나씩 살피면서 그들의 삶을 점검하고 읽어냅니다. 먼저 남편의 인생이 요즘 달라졌습니다. 가족의 생계에 쇳덩이만큼이나 무거운 책임에서 벗어나서 옳아, 이제 남은 인생이 꿀맛 같나 봅니다. 어제는 퇴직한 동료들과 국내 여행을 다녀오더니 여흥이 옷가지에서 아직 펄럭입니다. 거나한 술판에 녹아들었었나 봅니다. 자식들의 학비걱정, 입에 풀칠할 걱정, 그때에 그의 누렇게 찌들었었던 허물은 고양이도 코를 돌리고 달아났었습니다.

   아들이 군 복무를 마치고 대학에 복학하기 전, 포클레인이 건물의 멱살을 잡고 뒤흔드는 공사현장에서 학비를 벌고자 쏟은 짠 얼룩에 나는 얼굴을 묻곤 하였습니다. 먹어도 또 먹어도 봄눈 삭듯 할 장정의 뱃가죽이 그믐달처럼 홀쭉해져서 쓰러져 잠든 모습은 어미의 시름이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시절, 여대생이던 두 딸의 수줍은 꿈도 비밀스럽게 펼쳐보는 것은 내 젊은 날을 보듯 설레곤 하였습니다. 서툰 바느질로 기운 내의를 보면서 뭉클한 사랑이 어둔 밤하늘의 별빛처럼 내려앉곤 하였지요. 먼 훗날 나와 같은 어미가 될 딸들이 그렇게도 안쓰러웠습니다. 낳았을 때 서운하고 시집보낼 때 서운하다는 딸들의 전설은 두고두고 서글펐습니다.

   두 구멍은 혀의 기능도 문제없이 해내지요. 과일가게에서 과일을 고르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구멍에 대면 단내를 맛볼 수 있거든요. 사람들은 단물 스민 과일을 들고 아주 흐뭇한 표정을 짓습니다. 이웃들은 대문을 굳게굳게 잠그고 내왕 없이 살고 있지만 나는 구멍을 통해 앞집이나 위 아래층의 경제적인 정도를 대충 짐작할 수 있습니다. 윗집에 오늘 밤 누군가의 기일이 다가왔나 봅니다. 여느 때와 달리 모인 사람들의 얘기 소리가 들려오더니 오전부터 전을 지지고 다음엔 나물을 몇 가지 볶는 냄새가 나더라고요. 점심시간이 지나자 이제는 찜기에 생선 찌는 냄새가 연기처럼 새어들잖아요. 그 다음엔 탕국 끓이는 내가 창을 넘지 않겠어요.

   평소에 주방의 창을 열어 놓으면 끼니에 무엇을 먹을까 걱정했던 메뉴를 얻을 수 있죠. 누구 집에서 꽁치를 굽고 조기를 굽고 갈치를 굽고 고등어조림을 하는지 다 보여요. 더불어 생활 정도의 차이를 알게 되는 거죠. 만날 된장국이나 콩나물국만 끓이기도 하고 누구네 집에선 사골 국이나 갈비찜을 종종 식탁에 올리죠. 밥이라고 다 똑같은 백미 밥이 아니에요. 현미밥 잡곡밥 보리밥 무밥, 그 집에 들어가 솥뚜껑 안 열어 봐도 다 안답니다.

   조물주가 최초에 흙으로 인간의 모형을 만들고 구멍 두 개를 내어 거기에 생명을 불어 넣으니 사람이 된 것 모르는 이가 없잖습니까. 구멍 외에 사람은 오장육부를 가졌지만 그것들이 제아무리 제 할 일을 다 한다고 해도 그 좁은 구멍 두 개가 기능을 잃으면 우린 다시 흙이 되는 겁니다. 신비로운 구멍에 절이라도 해주고 싶을 때가 있지만 며칠 전 우리 집에서 구멍으로 말미암아 옥신각신 싸움이 벌어졌어요. 우리 집 영택(영감태기의 준말)씨가 밤늦게 고주망태가 되어 들어왔어요. 그 지독한 술 냄새와 생마늘 냄새를 입에서 뿜는데 구역질이 올라와 잠을 잘 수가 있어야죠. 환장하겠는데 구멍이 빨아들이니 악을 안 쓸 수가 없었어요.

   하여튼 편리한 재주를 부리는 구멍을 나는 잘 다스려 봅니다. 된장찌개가 간이 맞는지 짜게 졸았는지 안방에 있어도 맛을 압니다.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도 눈만으로 보는 게 아니고 구멍으로 느끼는 게 많습니다. 꽃향기, 두엄 삭는 냄새, 그것들은 우리의 기분을 올려놓기도 하고 노하게도 합니다.

   그밖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에 처했을 때 사람들은 그것이 석 자나 빠졌다고 말합니다. 구멍을 지키고 있는 지붕이 서양 사람처럼 높은 사람이 있고 좀 내려앉은 사람들도 있지요. 그 지붕이 사람의 인상이나 미모를 좌우하기 때문에 요즘은 병원에서 지붕을 올리기도 하고 고치는 것이 유행하고 있더구먼요. 참으로 중요한 부분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으면 하느님께서 얼굴의 한가운데에 뚫으시고 눈비 맞지 않도록 배려하여 지붕까지 마련해 주셨겠어요.

   지붕이 너무 높아 불행한 것이었을까요.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한 치만 낮았더라면 세계 역사는 바뀌었을 거라고 했지요. 성형외과에서 지붕을 고치는 사람들은 이제 그 운명도 바뀌지 않을까 모를 일이네요. 지어주신 대로 사는 것이 순리일 텐데 말입니다.

 

 

 

    <계간 수필> 2012년 봄호

 

못 가본

 

 

   김 명 규

 

 

 

 

 

 

   어린애 달래듯하였다. 때로는 독설로 윽박질러도 보았다. 그러나 주저앉아버린 황소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숙제를 하지 않고 노는 초등학생 같아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테이블 위에 널브러져 있는 그것들을 내동댕이쳐 버리고 싶었다.

   남편은 명예퇴직을 서두르고 있었다. 정년이 두 해나 남아있는데 퇴직을 하겠다니 마음이 착잡하고 부담스러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내 심중을 눈치 챈 그는 퇴직하고 어려서부터 하고 싶었던 그림을 그려보겠다며 나를 위로하였다. 남편은 37년 간 몸담았던 교직을 청산하고, 고달픈 교단에 미련이 없다며 훈장을 들고 돌아왔다.

   다음날, 나는 서둘러 화방을 찾아 나섰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놓아버렸던 그림을 이제 시작하려면 하루가 급하다는 마음에서였다. 아이들 기뻐하는 운동회 때나 소풍가는 날을 위해 엄마가 맛난 것을 사러 시장에 가듯 내 기분은 풍선처럼 떠올랐다. 유화보다는 수채화를 그리겠다고 한다. 시내버스 유리창에 아름다운 색감이 번져 나갔다. 새로운 꿈 새로운 도전, 그것은 미각을 깨우는 신선한 드레싱 소스처럼 감칠맛을 돋우었다. 화가의 아내, 남편의 개인전, 앞으로 다가올 일들이 화려하고 고상한 품위로 내 미래를 치장해 줄 것 만 같았다.

   여느 화가의 화실 같지는 않지만, 방 하나를 치우고 스케치북과 물감을 늘어놓고 그림을 그릴 만한 널찍한 테이블도 구입해 놓았다. 그러나 일주일 이주일 한 달이 되어도 남편은 인터넷 바둑 게임에만 빠져들어 갔다. 미술도구 위에는 먼지만 쌓여갔다.

   오늘이나 내일에나 그 방으로 들어갈까 눈치를 보았지만 눈만 뜨면 컴퓨터 속으로 파고들었다. 끼니마다 차려놓은 밥이 식어빠질 때까지 먹지 않아 성화에 지친 나는 혼자 먹기 일쑤였다. 자식 같으면 닥치는 대로 때리면서 분을 풀었을 것이다,

   감언이설로 나를 속였다는 분한 생각이 치솟아 오르기 시작하였다. 딱 딱 딱, 바둑알 놓는 소리도 나에겐 공해였다. 오늘도 여전히 바둑알과 실랑이를 하고 있는 남편의 등 뒤로 다가섰다. 애써 감정을 짓눌렀다 치지만 내게서 말씨가 곱게 나올 리 만무했다.

   “도대체 그림은 그릴 거여 말 거여? 물감이랑 모조리 내다버릴 테니까, 남은 세상 바둑이나 두다가 죽든지 말든지 해욧!”

   “아따 나 좀 쉬게 하소, 당신이 좀 그려보든지“

   이러는 것이었다. 그는 바둑을 두려고 명퇴를 한 사람이 틀림없었다. 우렁이처럼 박혀 앉아 자기를 찾아온 손님이 와도 나에게 말상대를 맡긴 채 돌아앉아 바둑판만 보고 있었다. 날이면 날마다 나는 부아가 끓어올랐다.

   재능이란 신의 선물인가, 축복인가. 나는 그림 그리는 재주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된 사람이다. 그러기에 내가 가장 존경하고 부러운 사람이 화가다. 남편과 처음 만나 데이트를 할 적에 그는 언젠가 꼭 화가가 되고 싶다는 말에 나는 결혼을 결심한 것도 사실이다. 온 집안을 갤러리처럼 꾸미고 살았으면 싶었다. 미술품을 갈망하고 여유만 생기면 사고 싶었다. 그러나 우리 형편에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수백 수천씩 하는 그것들을 만져볼 수도 없었다. 그런데 남편이 뒤늦게나마 내 욕망을 채워 주리라 믿어 얼마나 기뻤던가.

   퇴직하고 일 년이 지난 뒤, 그림에 대하여는 나도 마음을 덮었다. 장롱 위에 깊숙이 수채화 도구를 밀쳐둔 지 오래였다. 어느 날 남편이 그것들을 꺼내어 펼쳐들었다. 겨우 삼사십 분씩 데생을 하다 말고 담배를 물거나 다시 바둑을 두는 것이었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 이라는 시가 생각난다. 두 갈래의 갈림길에서 한 길을 선택해야 했을 때, 남은 길에 대한 것은 미지의의 세계로 남겨 두었지만 끝내 그 길을 못 가고 인생의 판도가 바뀌고 말았다는 내용의 시가. 어쩌면 남편도 못 갔던 길에 대한 애착을 일생 동안 버릴 수 없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갖고 싶은 것은 기필코 얻어야 만하는 내 집착에, 그도 못 견디고 이년 동안 일곱 점의 수채화를 그려내었다. 그림을 그리게 하기 위한 내 정성과 노고도 어찌 일일이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작가들의 그림 값이 왜 비싸야 하는가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던 기회였다. 모든 예술가가 그러하듯이 혼을 불어넣지 않고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정녕 예술가들이야말로 신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남편의 수채화가 미술관에 걸려있는 작품처럼 수려하지 않지마는 우리 집 곳곳에는 어설픈 추억처럼 걸려 있다. 그의 손을 빌려, 사실은 내 입으로 그린 그것들이. 비록 유명 화가들의 작품을 인터넷 검색에서 꺼내어 모작하였지만 나는 원화 못지않은 감상에 젖곤 한다. 그림의 구석에 찍은 빨간 낙관이 나를 보고 선명하게 웃고 있다.

 

 

김명규 수필의 자존가치自存價値 / 김형진|밍기의 방
강인한 | 조회 301 |추천 0 |2009.03.29. 08:26 http://cafe.daum.net/poemory/FwE3/97 

끌어내려 다지기 또는 끌어올려 펼치기
  ― 김명규 수필의 자존가치自存價値  

              김   형   진
              (수필가·문학평론가)



1. 김명규 문학의 토양 

  한 편의 뛰어난 작품을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기름진 토양이 있어야 한다. 하물며 한 사람의 우수한 작가를 탄생시키는 데 소요되는 시간과 자양을 어찌 숫자로 헤아릴 수 있겠는가.  
  수필집 《당신의 이름은》과 《귀부인 연습》을 통해 본 김명규 문학의 토양은 소읍에서의 성장기와 가난한 시인과의 결혼 생활이다. 성장기의 어머니, 할머니, 오빠, 그리고 신혼기의 시어머니, 남편, 세 자녀. 이들은 모두 그들 특유의 모습과 체온으로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많든 적든 김명규 수필이 싹터 자라게 한 토양이었다.  
  그곳에는 실 떨어진 연을 찾으러 먼 하늘나라로 간 것이라 생각했던 여섯 살에 사별한 오빠가 있고, 달밤이면 애조를 띤 콧노래가 울음이 되어버리곤 하던, 고향 청진에서 아버지를 만나 혈혈단신 월남하여 향수에 젖어 살던 어머니, 이별의 한을 품은 채 끝내 하늘나라로 떠난, 열 살 적 어머니가 있다. 집 앞 미루나무 아래에 서서 거지들의 안부를 걱정하고, 눈이 많이 내린 날이면 ‘거지들 다 얼어죽었것다…’ 탄식하던 할머니, 어머니보다 더 뜨거운 눈물이었고, 따뜻한 품안이었던 할머니가 있다. 그리고 동네에서 가까운 기차역 대합실을 찾아가 열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까치발로 살펴보던 소녀의 동경이 있다.   
  열 살 이전에 예사 사람들이 평생에 겪을 만큼의 마음앓이를 한 김명규는 그 속에서 연이 날아가는 하늘을 볼 줄 알았고, 어머니가 울 때면 소리 죽여 따라 울 줄을 알았고, 미루나무 아래 쓸쓸히 서서 무엇인가를 안타까워하는 할머니의 표정을 읽을 줄 알았다. 그리고 열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의 보따리 안에 들어 있을 선물을 상상할 줄 알았다.    
  사윗감이 몸이 약하다는 이유를 내세운 친정 아버지의 반대로 친정이 먹을 만큼 사는데도 포마이카 이불장 하나와 이불 두 채를 가지고 결행한 결혼. 보통 처녀였다면, 몸이 약해 보일 뿐 아니라 홀어머니를 모시고 전셋집에 사는 신랑감이 비록 읍내 고등학교 교사였다고는 하나 탐탁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쌓아온 그의 문학에 대한 동경은 중고등학교 적에는 문학소녀를, 성인이 되어서는 가난한 시인의 아내를 택하게 했다. 그리고 결혼하여 만난 자상한 시어머니, 섬세한 남편, 그리고 세 자녀는 김명규의 문학적 토양에 뿌려진 씨앗이며 거름이었다. 그 문학적 토양에 뿌려진 씨앗을 튼실하게 기르기 위해 무려 오십 년을 기다려야 했다.     

2. 끌어올려 펼치기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게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의 것’이라는 성서의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김명규에게 가난은 희망이었다. 그래서 작은 읍 허름한 전셋집에서 신혼생활을 하면서도 행복할 수 있었다.   

  홀어머니와 둘이 살던 신랑의 집은 아이들의 장난감처럼 작았다. 하지만 나는 그 시절의 겨울이 유난히 좋았다. 내륙지방인 산정읍은 겨울 내내 눈이 많이도 내렸다. 긴 겨울밤 이른 저녁을 먹고 따뜻한 방에 몸을 녹일 때면 싸락눈이 함석대문과 마루를 때렸다. 바람이라도 세찰 때는 그 소리가 격자문 창호지를 뚫고 사르락사르락 좁쌀을 흩뿌리는 듯 가늘게 들려왔다.
  아궁이에선 연탄불이 활활 타고 우리의 작은 방은 쩔쩔 끓었다. 누워 있으면 뱃속의 아기가 엄마에게 발길질을 해댔고 마음은 끝없이 평온하였다. -〈그해 겨울 이야기〉중에서

  야속하기만 했던 친정아버지도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고, 새어머니의 품에 있던 어린 동생들도 가여운 대상이 되었다. 이 가난한 신혼생활 속에서 찾은 평온과 화해는 김명규 문학의 주축인 ‘끌어올려 펼치기’의 바탕이 된다. 
  김명규의 86 편 수필 대부분은 가정사를 다룬 것이다.   
  결혼 전에는, 시골 살림으로는 풍족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열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재혼한 아버지가 서울로 이사하여, 조부모 밑에서 성장하였다. 결혼해서는, 세무서장까지 하신 시아버지가 집 한 칸 남기지 않고 돌아가셔 셋집에서 홀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남편과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예사 눈으로는 불행하다 해야 마땅한 형편인데도 그의 수필에서는 불행의 그림자를 찾을 수 없다. 남편은 세상사와는 담을 쌓고 사는 젊은 시인이었다. 넉넉지 않은 남편의 월급으로 살림을 꾸리자니 집에도, 세간에도, 옷에도, 입에도 가난이 붙어 다녔다. 그러나 김명규에게 젊은 시절의 가난은 부끄러운 게 아니었다.  
  그래서 동창모임에서 친구들이 과시하는 남편 승진이나 부에 대한 화제 속에 내놓을 것이 없어 풀죽어 지내다가도 귀가 길에 시장에 들러 떨이로 고등어를 사다가 졸여 식구들과 함께 맛있게 먹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텔레비전에서 흐르는 ‘온리 러브’의 매혹에 사로잡힐 수 있었다.       

  내가 붙잡으려는 것은 멀리 있어서 나를 애태우지만, 나를 사로잡는 것들에 의하여 나는 생의 환희를 맛본다. 나의 삶은 비록 가난하여 쓸쓸할지라도 작고도 아름다운 것들에 의해 사로잡히며 살고 싶다. -〈일상, 아주 작은 매혹〉중에서  

  돌아가신 시아버지에게 시어머니가 받은 유일한 선물 돌 냄비. 길에다 버려도 누가 주워갈 것 같지 않은 그 볼품 없는 것을 이사할 적마다 남편의 영혼을 간직하듯 분홍 보자기에 싸들고 나서던 시어머니.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부터 이사할 적이면 시어머니를 모시듯 그 투박한 돌 냄비를 싸안고 다녔다. 아이들마저 제 일을 찾아 객지로 나가고 두 내외만 남게 되자 아무 짝에도 쓸데가 없을 것 같던 그 돌 냄비가 진가를 발휘한다. 

  내가 돌 냄비에 밥을 짓고 있을 때 퇴근하여 돌아오는 남편은 아이처럼 좋아한다. 밥알이 쫘악 퍼져서 기름을 바른 듯 윤기가 도는 밥을 남편과 오순도순 먹으면 어머니 생각이 난다. 시아버님과 어머니가 못 다한 정분을 남편과 내가 대신 나누는 것 같다. 돌처럼 차가운 듯하지만 한 번 더워지면 쉬이 식지 않는 진지함에서 돌 냄비를 볼 때마다 냉철하고 엄격하신, 그렇지만 깊은 정을 지니신 아버님을 뵙는 듯하다. 돌 냄비 하나를 선물로 남기신 아버님은 부부간의 사랑까지도 대물림하고 가신 분이셨다. -〈오십 년 뒤의 선물〉중에서   

  예사스런 눈에는 짜증스럽고, 가치 없어 보이는 것들이 김명규의 수필에서는 가슴 울리는 것으로, 고귀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재생산된다. 
   이러한 재생산의 힘은 자녀교육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그래서 청빈한 교사인 남편의 봉급으로 첫째아이는 일류대학을 졸업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로펌에 재직 중 하버드에 유학하여 로스쿨을 졸업하게 했으며, 둘째아이도 미국 주립대학을 졸업시켰고, 셋째아이는 유수한 국립대학에 다니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살림살이에서도 소읍의 전셋집에서 광역시 자가 주택으로, 광역시 아파트에서 특별시의 아파트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김명규에게는 몸에 밴 기준이 있었다.    

  청빈을 포용하고 사는 이는 아름답고 그 내면이 오히려 수려하게 보인다. 가난한 예술인들의 그 기개가 표본일까. 나도 때로는 본색을 감춰보고 싶어서 연극배우가 분장을 하듯 덧칠을 해볼 때도 있지만 역시 나는 나인 것을 벗어날 수 없다. 서민으로 살아온 한평생의 찌든 냄새를 무엇으로 덮을 수 있겠는가. 나는 그저 빈티도 귀티도 우러나지 않는 평범한 아주머니일 뿐이다. -〈티〉중에서  

  이것은 어린 시절부터 길들여온 김명규의 삶의 바탕이요 기준이었다. 따라서 문학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낮은 것은 끌어올리고 높은 것은 끌어내려 몸에 밴 자기 기준에 맞추는, 그러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를 되돌아보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다.  

3. 끌어내려 다지기    

  인간의 내면에 오욕칠정이 도사리고 있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는 없다. 다만 오욕이나 칠정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과 오욕이나 칠정을 다스리며 사는 사람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서울에 있는 유명 백화점과 갤러리아 명품관 매니저로 십 년 넘게 일해 온 사촌이 모처럼 방문하여 흩뿌리고 간 달콤한 유혹―아침 식사는 토스트에 원두커피 한 잔, 화장품은 외제, 핸드백과 구두는 명품을―은 여자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우아하고 품위 있는 귀부인의 생활. 귀부인 연습을 해보고 싶어 명품관을 기웃거리고 생크림처럼 부드러운 음악을 들으며 우아하게 원두커피를 마셔본다. 그러나‘호박에 줄긋는다고 수박 된다더냐.’던 친구의 말을 되새기며 음악을 끄고 한바탕 퍼질러앉아 후련하게 웃고는 개심심한 원두커피를 설거지통에 버린다. 
  그래도 사그라지지 않는 페라가모 핸드백에 대한 동경. 그것을 딸에게서 어버이날 선물 받는다.   

  외출할 때를 기다리면서 낮은 장식장 위에 가방을 올려놓고 틈만 나면 손에 들어보았다. 모임에 나갈 때나 성당에 갈 적에도 페라가모 핸드백을 소중히 모시고 다니면서 다른 사람의 눈에 띄기를 바랐지만 그것이 명품이란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새 가방을 들었는데도 눈길조차 오지 않았다. 내가 사는 곳은 가진 자가 누리며 사는 압구정동도 청담동도 아니다. 내 주위에서 알아보지 못하는 명품은 내게도 낯설기만 하다. 화장실에 들어가면서 내 앞에 서 있던 여자가 잠시 맡겨놓은 물건처럼. 다만 그것은 내가 손에 들면 금방 귀부인이 될 것만 같았던 엄마의 환상을 깰 수 없었던 딸의 효성을 받은 것이라 여길 뿐이다.
   나는 자랑스런 핸드백을 들고 강남이 아닌 우산동 거리 시내버스 정류장에 서 있다. -〈귀부인 연습〉중에서    

  이 끌어내려 다지기에는 풍자성마저 감돈다.   
  김명규의 끌어내려 다지기는 일상생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마지막 선물〉에서는 베로니카 수녀님의 사랑을,‘김제 할머니’ 지금은 돌아가신 할머니가 선물한 낡은 스타킹을 정성스럽게 꿰매는 것으로 표출하고 있으며, 〈천장天葬〉에서는 경악을 넘어 섬뜩하기까지 한 티벳밀교의 천장 장면 사진을 보고, '나는 다만 살아 있는 내 의식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믿음을 되새긴다. 김명규는 천국에 대한 믿음도 극락에 도달하는 길도 살아 있는 내 의식 안으로 끌어내려 다진다.  

4. 김명규 수필의 특장 

  《귀부인 연습》 책머리에서 김명규는 자기의 수필에 대한 이렇게 말한다.

  문학을 한다는 대단한 각오를 다지며 쓴 글들이 아닙니다.
  살아가면서 세월과 함께 스쳐가는 내 삶의 주변을 돌아보며 친한 벗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혹은 먼 훗날 엄마의 모습을 떠올릴 아이들에게 남겨주고 싶은 이야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깊은 철학적 사색이나 꽃처럼 아름다운 글도 아닙니다. 호화로운 의상으로 눈길을 끄는 글과는 사뭇 다릅니다.              

  이는 진실일 수도 있고 겸손일 수도 있다. 그의 86 편 수필은 자신과 관계 있는 사람들의 소박의 일상의 이야기가 태반이다. 문장에서도 현란한 수식을 찾아보기 어려우며 난삽한 중문도 눈에 띄지 않는다. 평이平易한 어휘들을 평상 호흡에 맞추어 읽기 편하게 구사한 문장이다. 원래 우수한 문학작품은 살기 편한 주택과 같아야 한다하지 않던가. 편안한 주택 같아야 하는 특장을 가장 잘 살려야 하는 장르가 수필이다. 그래서 평범한 일상 속에 개성을 담으면서도 호화로운 의상으로 눈길을 끌게 하려하지 않은 게 김명규의 수필의 특장이다. 
  다음으로는 독자들의 몫을 남겨 놓은 끝맺음이다. 

  나는 자랑스런 핸드백을 들고 강남이 아닌 우산동 거리 시내버스 정류장에 서 있다. -〈귀부인 연습〉
  가엾은 내 남자여, 회갑이 자나고도 한참인 그 나이에 어느 젊은 여자가 당신에게 연정을 품어 줄까, 그대의 착각은 왜 늙지 않는가. -〈아내는 여자도 아니다〉 
  어디선가 라일락 향기가 나의 얼굴을 스치는 듯하다. -〈마지막 선물〉

  이런 끝맺음 뒤에 독자들은 한동안 책을 놓지 못할 것이다. 독자 나름의 생각과 느낌이 한동안 머릿속에서 감돌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학작품은 독자에 의해서 완성되어야 한다지 않던가. 독자의 몫을 충분히 남기는 문학작품은 우수하다. 
  김명규의 수필은 겉만 그럴싸하게 치장한 글이 아니며 아무런 치장도 없이 내용만 불쑥 내민 글은 더더욱 아니다. 어려서부터 북돋아온 문학적 토양에 우량의 씨앗을 뿌려 인생을 걸고 가꾼 치열한 문학적 산물이다. 이러한 작업과 그 성과는 우리 현대수필이 지향해야 할 방향을 가리키는 하나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에세이문학> 2009년 봄호

 

 

 



 

 

딸의 원피스|밍기의 방
강인한 | 조회 108 |추천 0 |2002.10.08. 22:16 http://cafe.daum.net/poemory/FwE3/1 
가엾은 이여, 그대 이름은 남편

김명규


술을 좋아하는 남편을 둔 친구가 있다. 살림도 잘하고 성품이 얌전해서 나무랄 데 없는 친구다. 나를 만날 때마다 술을 못 마시는 남편을 둔 내가 부럽다며 취중의 남편으로부터 겪은 속상했던 일들을 털어놓곤 한다. 하루는 그 친구가 남편의 전화 내용을 문 뒤에 숨어서 엿들었다. 남편의 술친구와 주고받던 전화의 내용은 이러했다.
겨울에 폭설이 내리던 날 한밤중이었다. 시내버스도 끊기고 눈이 쌓인 큰길엔 간간이 택시 한두 대만이 지나갔다. 술에 취한 그의 남편은 금남로에서 몸을 가누지 못해 길바닥에 쓰러졌다. 한참을 누워 있다가 보니 온몸에 눈이 덮여 있고 사람인지 쌓인 눈인지 눈 덮인 길조차도 분간할 수가 없었다. 이러다가 죽는가 싶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려 몸을 움직였을 때 영업용 택시 한 대가 미끄러지면서 그 앞에서 급정거를 했다. 택시 기사가 문을 열고 심한 욕설을 퍼부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보니 차도의 한가운데에 쓰러져 있었다면서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지난 얘기를 하는 것이었다.
엿듣고 있던 친구가 가슴이 철렁 하면서 머리끝이 꼿꼿이 서는 느낌이 들더라고 말했다. 단독주택에서 살고 있는 친구는 사흘거리로 마당에서, 대문 앞에서 잠들어 있는 육중한 남편을 부축하고 거실에 나뭇짐 부리듯 하기가 일쑤였었다. 어쩌면 남편이 제 명대로 살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마음을 괴롭혔다. 그 무렵 친분이 있는 보험설계사가 찾아왔다. '그래, 맞아. 생명보험을 들어야 해.' 혼잣말로 다짐을 했다. 설계사의 설명도 듣지 않고 사망 후 보험료를 가장 많이 받게 되는 상품으로 보험 계약을 했다. 그 후로는 남편이 술을 마시고 늦게 오든 말든 밤이면 두 다리를 쭉 펴고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고 했다. 평소에 술을 마시는 남편에 대한 걱정이 얼마나 컸었던가를 짐작케 하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은 모두 자기 위주로 산다는 생각이 든다. 남편에게 보약을 먹이고 온갖 구완을 다하는 것도 뒤집어보면 내 자신을 위한 정성을 쏟는 것이다.
얼마 전 고등학교 교장직을 퇴임한 선생님이 우리 집을 찾아왔다. 차 한 잔을 함께 들면서 "아주머니는 아직 젊으니까 내외간에 좋게 사세요." 하였다. 퇴직을 하고 집에 있다 보니 사모님의 눈총과 구박을 심하게 받는 모양이었다. 행동 하나하나마다 다 간섭을 받고 지천꾸러기가 되었다고 하였다. 식사 후 얼굴에 밥알이 하나 붙어 있거나 입 언저리에 김치 국물이 묻어 있을 때 사모님은 아주 사나운 억양으로 "입 좀 딲으란 말욧!"하고 야단을 친다고 했다. 무얼 좀 생각하느라 서 있을 때에도 "또 뒷짐지네, 또! 아, 뒷짐지지 말라고 했잖아요." 라는 둥 편한 대로 서 있는 꼴도 못 본다는 것이었다. 남자는 늙으면 기가 꺾이고 여자는 늙으면 그 기가 살아나는 모양이다.
젊어서 남편의 시집살이가 없었을 것 같은 친구들도 만나면 남편 흉보는 게 일이다. 친구 중 하나가 남편이 미워 죽겠다고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친구가 젊었을 때 남편에게서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았던 모양이었다. 평소에도 그의 남편은 "자네는 옷을 입어도 왜 그렇게 촌스럽당가?"라든지 미장원에 다녀온 날 밤이면 곱슬한 파마 머리를 힐끔 쳐다보고 "넘의 각시는 미장원에 갔다오면 이뻐져 갖고 오드만 자네는 그것이 인디언 추장이당가, 피그미족이당가? 돈이 아깝네."라고 말했을 때 친구의 마음이 얼마나 섭섭했었을까. 부인이 미인이 아니라는 점에 늘 불평이 많았던 것 같다. 어찌된 일인지 미워하는 이유가 이상하게도 교장 선생님 사모님의 미움과 일치하였다. 화장실에서 큰소리로 가래를 돋구는 것까지 밉다고 했다. 내가 보기엔 그 친구는 남편을 미워할 자격이 없었다. 남편 몰래 남의 빚 보증을 서 주었던 것이 잘못 되어 남편의 월급으로 부채를 갚고 있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친구의 남편은 아내를 극진히 아꼈다.
"우리가 복이 없는 모양이네. 돈 잃고 자네 건강까지 잃을까 싶네."
그렇게 위로한다는 것이었다.
나도 남편이 미운 것은 마찬가지다. 남편은 몸도 약한데다가 담배를 하루에 한 갑씩 피운다. 내가 제발 담배를 끊으라고 성화를 대면 "각시는 끊어도 담배는 못 끊겄네."라고 말했던 사람이다. 거기다가 커피와 인터넷에 중독이 되어 있다. 나는 담배의 매연을 지긋지긋하게 싫어한다. 싫어하는 정도만큼 남편은 나에게 구박을 받는다. 위궤양 증세가 있어 병원에 가면 의사는 커피와 담배를 삼가라고 당부한다. 약을 복용할 동안만 겨우 커피를 참고 있는데 그럴 때면 세상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풀죽어 있다.
위궤양 치료 후에도 나는 커피를 못 마시게 철저히 감시를 한다. 그러면 내 눈치나 동정을 살핀다. 내가 샤워를 하지 않을까, 화장실에 들어가지 않을까 그 틈을 타서 나 몰래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다. 내가 잠시 눈에 안 보이면 도둑고양이처럼 살그머니 주방으로 들어간다. 수도에서 주전자에 물 받는 소리는 감출 수 없다. 그러나 내가 남편에게 아쉬운 일이 있어 남편의 도움을 받아야 할 일이 있을 때는 알면서도 덮어둔다. 커피를 만드는 솜씨는 전문가 못지 않다. 정년 퇴직 후 찻집 주방장으로 취직해서 돈 벌어 오라고 쏘아붙인다. 내 손으로 어쩌다 타서 마시는 커피는 싱겁거나 너무 진하다. 남편에게 내가 마실 커피 한 잔을 주문하면 의기양양해져서 두 잔의 커피를 들고 와 마음놓고 즐긴다. 찻잔 설거지도 남편 몫이다. 평소에는 식탁에 수저 한 번 놓아주지 않는 사람인데. 커피를 마시는 것이 자기의 죄인 양 소리 없이 설거지를 하고 있을 땐 가엾어 보이기도 한다. 남편이 담배를 피우는 일도, 커피를 마시는 것도 내 기분 여하에 따라 큰소리가 나기도 하고 눈감아주기도 한다. 이리저리 눈치만 살피는 것 같다.
"웬수놈의 커피, 또 커피!"
남편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곤 했다. 나의 잔소리가 항상 심해선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내 인생이 당신에게 저당 잡힌 삶인가?" 하고 대꾸한다. 나는 말없이 찻잔을 받아들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어쩐지 뒤꼭지가 간지러운 느낌이었다.
축 늘어진 어깨를 하고 남편은 밤늦은 귀가를 한다. 그들의 삶은 누구를 위한 것이겠는가.

딸의 원피스


김명규




문득 나는 내 나이를 거부하고 싶을 때가 있다. 내 나이를 십 년만 되돌

릴 수 있다면 그 때엔 정말 모든 꿈을 이루어 낼 것만 같은 아쉬움이 크

다. 모래톱에서 썰물이 빠져나가듯 빠른 세월은 나를 세워놓고 멀리 흘러
가 버렸다.

내가 단골로 찾아가는 생선 가게가 있다. 주인 아주머니가 소탈하고 후

덕해 나는 항상 웃어른을 대하듯 하였다. 그 분보다 나는 한참 젊은 주부

라는 기분을 느끼면서. 그 아주머니와 내가 동갑내기라는 것을 나는 우연

히 알게 되었다. 그것은 충격이었다. 그 아주머니의 모습이 바로 나 자신

의 모습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젊음이라는

것을 체념하였다. 하기야 반세기를 넘게 살아왔으니. 이제는 중늙은이가

되었음을 인정해야 했지만 그것은 팔려 가는 강아지가 주인을 떠나지 않

으려는 것처럼이나 싫었다.


외출할 일이 없는데도 화장대 앞에 앉아 나는 새삼스레 정성을 쏟아 화

장을 해 본다. 탄력을 잃은 피부는 파운데이션을 흡수하지 않고 마른 유

화 물감처럼 까칠하다. 억울한 생각이 든다. 내가 젊었을 적엔 내 젊음

이 아름답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모임에서 이순(耳順)을 넘긴 선배들을 만날 때면 살아 있을 때 집안 가

구들을 하나씩 정리해 간다는 얘기들을 한다. 그런 선배들의 얼굴에서는

바람받이에 서 있는 겨울 나무처럼 쓸쓸한 그림자가 느껴진다.


돌이켜보면 내 나이쯤에서 우리 어머니도 가실 채비를 했던 것 같다.

이불깃을 푸새하여 다듬이질하는 일이나 나 혼자서도 김치를 담글 수 있

도록 당신의 일을 하나씩 며느리인 내게 전수하던 일이 생각난다. 살림

솜씨가 서툰 나를 탓하느니 손수 당신이 집안 일을 하셨던 어머니였다.

종이를 구길 때 나는 소리처럼 바스락거리도록 홑이불을 다듬던 어머니

와 마주앉아 장단을 맞추어 다듬이질 할 때가 정겹고 그립다. 방망이질

을 할 때면 나는 팔이 아파 짜증이 났고, "나 죽으면 공동 묘지까지 찾아

와 고추장 담가 달라고 할 테냐?" 하시며 귀찮아하던 나를 가르치던 어머

니였다. 나도 내 어머니처럼 머잖아 맞이할 며느리에게 시어머니로서의

품위를 갖추며, 넘겨주어야 할 것들을 정리해 볼 나이에 이른 것을 어찌

하랴.


재작년의 일이다. 대학 4학년이던 막내딸이 예쁜 원피스를 사들고 왔

다. 거울 앞에 서서 새 원피스를 입어보는 딸의 모습이 멋져 보였다. 몸

의 곡선미가 곱게 드러나는 신축성이 강한 섬유 소재의 하늘색 원피스였

다. 나는 딸이 부러워서 큰 사이즈는 없더냐는 둥 값이 얼마였느냐는 둥

원피스를 입은 딸을 앞뒤로 돌아보며 물었다.


글쓰는 동호회 모임이 있는 날 나는 딸의 옷장 안에서 그 원피스를 꺼

내었다. 턱 밑에서 바짝 내 얼굴에 대보았다. 얼굴이 환하고 밝아 보였

다. 그 옷을 입기만 하면 나도 한 십 년쯤은 젊어 보일 것 같았다. 머리

에서부터 원피스를 꿴 후 팔을 꿰었다. 옷의 팔 소매가 뭉툭한 내 어깨에

서 팽팽하게 늘어났다. 그 순간 어디에서 이음새가 툭 터지는 소리가 났

다. 놀라서 나는 얼른 옷을 벗었다. 터진 자국이 있나 자세히 살펴보았지

만 흠이 난 곳은 보이지 않았다. 딸의 허리 치수는 25인치였다. 옷장에

다시 집어넣으면서 평소에 운동이라도 꾸준히 하지 않았던 것이 후회스러

웠다. 다음날 딸은 그 원피스를 입고 학교에 가려는 눈치였다. 제 방의

침대 위에 옷을 꺼내어 올려놓고 딸은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고 있었다.

그 때 나는 잘못을 저지른 학생이 선생님의 매를 기다리는 것처럼 가슴

이 두근거렸다. 주방에서 파를 다듬는 내 손은 제대로 그 일을 하지 못하

였다. 얼마 후 딸이 소리를 질렀다. 올 것이 왔구나 싶어 나는 마음의 준

비를 단단히 하였다. 딸은 원피스를 들고 주방으로 쫓아와 내 앞에 들이

대며 옷이 늘어나 버렸다는 것이 아닌가. 나는 남의 떡을 훔쳐먹다 들킨

듯이 엉거주춤 딸을 쳐다보았다. 울상이 되어버린 딸은 엄마가 원피스를

입어보고 옷을 망쳐놓았다는 거였다. 나는 얼떨결에 그 옷을 절대로 입어

본 일이 없다고 도리어 큰소리를 쳤다. 엄마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

을 뻔히 아는 딸은 감정이 점점 북받쳤고, 나는 이왕에 한 거짓말이므로

딸과 함께 맞서 더욱 더 윽박질렀다. 아빠와 엄마와 저랑 세 식구 중 그

럼 아빠가 원피스를 입어 보았겠느냐고 하던 딸은 옷을 방바닥에 내동댕

이치고 나갔다. 한바탕 쏟아진 소나기가 멎은 뒤의 정적이 집안에 찾아들

었다.


부엌일을 마치고 마음을 가라앉힌 후 나는 방 청소를 하려다가 원피스

를 집어들었다. 딸은 이 옷을 다시는 입을 것 같지 않았다. 옷을 뒤집어

시접을 살펴보았다. 그것을 늘이면 내 몸에 들어맞을는지….


지금 그 일을 생각하면 우습고 딸에게 속을 보인 것이 창피스럽기도 하

지만 나도 할 말은 있다. '너도 내 나이가 돼 보아라.'


생각해보면 젊음만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한낮에 이글거리던 태양

도 저녁놀 속으로 사라져 가는 순간이 더 붉고 황홀하다. 나이 들어서도

열정적인 삶을 사는 모습을 내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이제 젊은날

은 내게 다시 오지 않는다. 오늘도 나는 단골 생선가게에 찾아가 동갑내

기 친구가 열심히 일하고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넉넉하

고 따뜻한 미소 속에는 연륜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 동갑 친구가 부럽고

훌륭하게만 보였다.

 

2.거짓말하는 사진

김명규


동사무소에서 새로 발급된 주민등록증을 찾아가라는 통지를 받았

다.

지난 초여름 남편과 막내딸을 앞세우고 동사무소에 가서 우리는 주민등

록증을 발부 받기 위한 사진을 번갈아 가며 찍었다. 먼저 막내를 카메라

앞에 앉혔다. 최신형 디지털 카메라의 모니터에 비친 막내딸의 모습이 실

물보다 더 예쁘고 생생하게 보여서 흐뭇했다. 나도 모처럼 본래의 얼굴보

다 더 멋지게 나온 사진의 주민등록증을 가질 것 같아서 기대에 부풀었

다.


내가 살고 있는 문흥동 동사무소 앞을 지나 삼각산으로 사흘에 한 번

씩 등산을 다니던 참이었다. 나는 등산을 하면서도 새로 나올 주민등록증


의 사진을 머릿속에 그려보고 있었다. 어떻게 나왔을까. 평소에 남편이

카메라를 들고 내 모습을 필름에 담을 때마다 웃어야 사진이 예쁘게 나온

다면서 항상 웃으라고 하였는데 그날은 동사무소에서 웃고 찍은 게 아니

었다.


우리 집 아래층에 사는 등산 친구와 함께 가서 새 주민등록증을 찾기

로 하였다. 삼각산에서 내려와 우리는 자장면 한 그릇으로 허기를 때우

고 동사무소를 향하였다. 주민등록증을 찾아 가지고 나오는 사람들은 새

증명서를 들여다보느라고 오가는 사람과 어깨를 부딪치기도 하고 허둥거

리는 걸음으로 발길을 제대로 가누질 못하는 것이었다. 나도 마음이 조급

해졌다. 내 등산 친구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동사무소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새 주민등록증

을 받아들고 줄에서 빠져 나오는 사람들마다 그 표정이 형언할 수 없이

야릇했다. 갑자기 무안을 당한 듯, 눈길을 피하는 듯한 표정들이었다. 그

리고 그걸 감추듯이 얼른 주머니에 넣어버리기도 하는 것이었다. 나는 친

구보다 앞서 식구들의 주민등록증을 받았다. 맨 위에 내 것부터 밑으로

막내딸과 남편의 것이 포개져 나왔다. 내 주민등록증을 받아보는 순간 기

가 막혔다. 아무리 봐도 내 얼굴이 아닌 것 같았다. 물 속에서 팅팅 불어

터진 국수가닥처럼 잔뜩 부어 있는 얼굴이 아닌가. 동행한 친구가 볼까

봐 얼른 점퍼 주머니 안에 집어넣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친구 역시 나

를 등지고 서서 그것을 감추고 보고 있다가 내 시선을 느끼자 그것을 쥔

손이 잽싸게 호주머니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우리 둘은 갑자기 할 말

을 잃고 있었다. 서로 실망한 얼굴을 쳐들고 볼 수가 없어 앞만 보고 한

참을 걸었다. 친구의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그 집 식구들의 주민등록증

사진을 보고 싶었지만 내 것도 보여달라고 할 것 같아 차마 말을 꺼낼 수

가 없었다.


카메라가 거짓말을 하겠는가, 생긴 대로 사진이 나왔지 뭐, 하고 남편

은 말했다. 그러나 그런 내 모습을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아 나는 지

갑 안에 깊숙이 감춰두었다.


내 생생한 모습을 세상에 남길 수 있는 것은 사진뿐이라는 생각이 든

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대개가 사진 찍기를 좋아한다. 어렸을 적에 설

이나 추석이 되면 가까운 친지들을 만나 사진관에 가서 사진 한 장씩 찍

는 일은 즐거운 명절 행사의 하나였다. 사진관에는 두어 가지 이국적인

배경 그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초승달이 떠 있고 야자수가 서 있

는 해변 풍경을 배경으로 우리는 앉거나 서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사

가 지시하는 대로 고개를 이리저리 갸웃거리며 어리숙하게 긴장했던 기억

이 떠오른다.

내가 초등학교 오 학년 때 결혼 적령에 이른 고모가 있었다. 중매쟁이

가 우리 집을 드나들면서 고모의 사진 한 장을 달라고 하였다. 그 때는

처녀 총각이 다방에서 둘이 만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던 시절이었

다. 신랑감과 주고받을 사진을 찍기 위해 사진관에 갈 때 고모는 내 손

을 잡고 함께 갔었다. 날이 더워 땀을 흘렸던 것으로 보아 구월쯤이었을

것이다. 고모는 수를 새겨 손수 만든 손가방을 들고 있었다. 사진관으로

들어서자 고모는 가방 안에서 머플러를 꺼내었다. 그 무렵은 영화에서 주

연 여배우가 머플러를 머리에 두르고 나오는 것이 유행하던 시기였다. 하

얀 반소매 옷을 입은 고모는 검정 물방울무늬의 머플러를 머리에 둘렀

다. 그리고 턱 아래에서 예쁘게 매듭을 지었다. 고모는 사진사가 시키는

대로 살짝 고개를 옆으로 돌린 후 수줍은 듯한 모습의 사진을 찍었다. 그

런데 사진사의 기술이 부족해서였을까. 고모의 사진은 반소매 옷과 팔이

드러났고, 여름에 겨울 머플러를 두르고 있었다. 그런 사진을 총각에게

보낼 수 없다고 우겼지만 중매쟁이는 기필코 그 사진 한 장을 빼앗아갔

다.

총각의 사진도 보내왔다. 머리에 포마드를 얼마나 발랐는지 뒤로 제껴

넘긴 머리가 달빛에 빛나는 물결처럼 번들거리는 것이었다. 무슨 철학자

인 듯 고개를 약간 숙여서 그는 사색적이고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

다. 고모는 그 사진을 들고 골방으로 들어가 한참 동안을 나오지 않았

다.


눈이 많이도 내렸던 그 해 겨울 어느 날 고모는 트럭에 짐을 싣고 시집

을 갔다. 고모가 사진관에서 여름인데도 머리에 머플러를 두르고 사진 찍

던 일이 오랫동안 눈에 어렸다.


지금도 여자들의 계모임에서 야외로 나가거나 잔칫날에는 기념 사진을

찍곤 한다.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가지가지다.

렌즈를 의식하여 석고처럼 부동자세로 서 있는가 하면 펜으로 입가에 스

마일 표시를 그려넣은 듯 억지로 입술만 웃고 있는 사람, 정면으로 서서

눈살을 꼿꼿이 세우고 눈에 힘을 주는 사람 등 재미있는 정경이 연출된

다.


주민등록증의 사진이 부어 나온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디지털 카메

라로 동사무소에서 사진을 찍었던 사람은 모두들 한결같이 불만스러워하

였다. 잘못 나온 사진은 미련 없이 찢어버리는 사람이 있고, 볼품없는 것

일망정 그것대로 보관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 사진을

보면 그 자리에서 찢어버리는 쪽이다. 그러나 주민등록증을 찢어버릴 수

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언제 또 주민등록증이 바뀔 때가 올는지 모르지

만, 나는 그때에는 사진관에 가서 예쁜 증명사진을 찍어야겠다고 단단히

마음을 다졌다. 그러나 그 때쯤이면 내 얼굴엔 세월이 깊게 스며들어 이

보다 더 못한 모습으로 바뀌게 될는지도 모를 일이다.

 

 

 

 

 

대신 쓴 연애편지

김명규


유치환 시인의 시 '행복'을 내가 애송하던 것은 중학교 3학년 때였다. 현묵이라는 남학생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다. 현묵이는 미희의 펜팔 친구였다. 미희와 나는 중학교 3학년 같은 반 짝궁이었다.
교정의 동편에 서 있던 느티나무 잎사귀가 갈색으로 변할 때면 방과 후 방송실에서는 스피커를 통해 '고엽'이 운동장으로 흘러나왔다. 그럴 때면 우리들도 가을로 물들었다. 가을은 너나 할 것 없이 괴테의 시라도 한 구절씩 외우고 싶은 계절이었다.
가을은 사랑이 익어가는 계절/ 물들어져 퇴색하지 않을 사랑의 계절./ 숲으로 가지 않으렵니까.
지금처럼 그때는 보충수업이나 자율학습도 없어 오후 네 시가 되면 학교는 일제히 파했다. 학교 뒤 운동장 담 밖으로 백 미터 안팎에는 충렬사라는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를 모신 사당이 있었다. 울창한 숲과 철 따라 피는 꽃으로 조경이 잘 된 조용한 곳이어서 공원 같은 그 곳에 놀러가서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했다. 어느 날 수업이 끝나 집으로 가려는데 미희가 붙잡았다. 충렬사에서 이야기 좀 하자는 것이었다. 옆에 앉아 쉬는 시간마다 할 만한 얘기는 다 나누었던 것 같은데 다른 특별한 일이 있나 싶어 미희를 따라갔다. 추석이 지난 시월 초순의 햇살은 따가웠지만 나무 그늘 아래 벤치는 서늘했다. 미희는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무용반으로 예술제가 열릴 때마다 눈빛처럼 하얀 발레복을 입고 사뿐사뿐 춤을 추었다. 그럴 때의 미희는 정말 백조처럼 예뻤다. 무용을 해서 다듬어진 몸매도 그렇지만 얼굴도 인형처럼 작고 깜찍했다. 미희네 집에서 일하는 아줌마는 점심때마다 맛있는 반찬을 만들어 도시락을 들고 학교로 찾아왔다. 나는 그 반찬을 미희와 함께 먹었다.
미희의 외갓집은 전주였다. 방학 때면 외할머니 댁에서 지낸다고 하였다. 이번 여름방학 때 미희는 외사촌 동생과 함께 오목대에 놀러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남학생을 알게 되었다. 전주 신흥고 1학년생이었다. 외가에서 머무는 방학 동안 그 학생과 여러 차례 만난 모양이었다. 가방을 뒤져서 미희는 그 학생에게서 온 편지를 꺼내어 내게 내밀었다. 받는 이의 주소가 미희네 집 주소가 아니었다. 미희는 명문동에 살고 있었는데 겉봉 주소에는 수성동 박수길씨방 최미희 앞이라고 쓰여 있었다. 내가 겉봉 주소를 유심히 보고 있을 때 미희는 변명을 했다. 우리 반 맨 뒷자리에 앉는 순옥이가 방을 얻어 자취하는 집 주소라고 했다. 그렇다면 순옥이에게도 이 비밀을 털어놓았는지 궁금했다.
"너는 글짓기를 잘 하잖니? 이 편지 네가 읽어보고 답장 좀 대신 써줄래?"
미희는 그 학생이 좋은 모양이었다. 저 멀리 전깃줄 위에 앉았다가 날아가는 참새들을 바라보던 눈언저리에는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미희에게 보낸 현묵이의 편지를 나는 그 자리에서 읽었다. 화가의 꿈을 키우고 있다는 현묵이는 편지도 멋지게 잘 썼다. 미희의 부탁대로 그날 밤 식구들이 잠든 밤에 나는 몰래 답장을 썼다. 유치환의 '행복'을 서두에 인용하여 써 나갔다.

―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 …… )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깊은 밤에 쓰는 편지는 황홀한 감정을 끌어내었다. 그렇게 편지는 오고갔다. 현묵이의 편지는 문학성이 뛰어났다. 나는 현묵이의 정신 세계를 만날 수 있었고, 미희는 일요일이면 전주에가 현묵이를 만나고 왔다. 내가 쓴 편지는 미희가 읽어본 후 우체국에서 부쳐졌다. 그 때마다 미희는 나에게 고마워했고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제과점에서 비싼 생과자도 미희는 나에게 실컷 사주었다.
현묵이의 영혼이 고스란히 담긴 편지 속에는 아침에 피는 장미처럼 따스함이 배어 있었다. 성탄절에는 예쁜 카드와 일기장이 미희에게 보내와 행복해하는 얼굴을 보면서 나는 미희를 부러워하였다. 이젠 편지도 그만 써주고 싶을 만큼 은근히 질투가 났다. 현묵이는 미희와 미래를 꿈꾸었다.
산정여중을 졸업하고 미희는 전주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미희는 떠날 때 만년필과 목도리를 내게 선물로 주었다. 나는 더 이상 현묵이에게 편지를 쓰지 않았다. 그렇지만 현묵이가 남긴 어휘들이 나의 가슴에 오래도록 그 무늬가 지워지지 않았다.
내가 편지를 잘 쓴다는 칭찬을 받았던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그 시절 우리는 한 달에 한 번씩 '국군 장병 아저씨께' 위문 편지를 썼다. 우리 반 학생 전체가 편지를 써서 보냈지만 답장은 서너 명에게만 왔었다. 내게 답장이 왔고 담임 선생님은 그것을 교탁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읽으라고 했다. 내 이름이 남자 이름이어서 첫머리에 항상 '명규 군에게'로 시작했고, 자네도 머잖아 군대 생활을 하게 될 걸세…. 아이들과 선생님은 큰 소리로 웃어댔다. 집에서도 친척들에게 소식을 보낼 때면 내가 편지를 쓰던 것이 잊을 수 없는 내 유년의 한 페이지였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정학을 맞은 친구들의 반성문을 내가 많이도 써주었다.
얼마 전 산정여중고 총동문회에서 순옥이를 만났다. 중학교 3학년 때 자취하던 순옥이는 월요일 운동장 조회 때 흰 운동화에 황토 흙이 범벅되어 촌티가 났었다. 그러던 순옥이가 점잖고 세련된 중년이 되어 있었다. 순옥이로부터 미희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전주로 간 미희네는 아버지의 빚 보증으로 집안이 몰락했었다는 것, 현묵이가 아닌 고무신 가게를 하는 남편을 만나 어린애를 등에 업고 장사하던 모습이 초라하고 가엾어 보였다는 것, 고생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남매를 두고 교통사고를 당해 죽었다는 가슴 아픈 소식이었다. 내 가슴은 바위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언제부터인지 시인이 된 현묵이는 문학 잡지에 가끔씩 이름이 찍혀 나왔고 현재 어느 고등학교 미술 교사로 재직하고 있다는 것까지 순옥이는 알고 있었다. 삼십 여 년만에 찾아본 교정의 느티나무도, 충렬사의 그 벤치도 아직 그대로였는데 미희가 고인이 되었다니 허무함과 그리움이 한기처럼 나를 휘감았다.
어쩌면 그 뒷 이야기가 담긴 현묵이의 편지가 내게 올 것만 같다. 아직도 가방을 멘 우체부 아저씨는 나를 설레게 한다. 우리 집 우편함 속에는 오늘도 방금 닭이 달걀을 낳아 놓은 듯 우편물이 들어 있다.

 

 

 

 



닮는다는 것

김명규


혼자 있을 때에도 그 생각이 나면 나는 크게 웃었다. 평소에 친분이 두터운 정 선생이 고등학교 동창 모임엘 갔다. 읍 소재지에 있는 농업고등학교였다. 모임은 3년만에 한 번씩 있었지만 처음으로 동창회에 나온 사람은 정 선생만이 아니었다. 고향에 오기까지 교복을 입고 헤어졌던 친구들의 유년의 모습만이 하나하나 눈앞에 아른거렸다.
식당의 넓은 홀은 학창 시절 얘기며 서로의 안부를 묻고 인사를 나누며 떠드는 소리로 소란했다.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온 사심 없는 늙은 소년들이었다. 반평생을 보낸 까마득한 세월을 모두들 술잔에 담았다. 여기저기 얘기 꽃이 한참인데 뒤늦게서야 웬 남자가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모두들 그를 쳐다보았지만 알 듯 말 듯한 그의 얼굴을 쉽게 기억해 내는 사람이 없었다. 구석에 앉아 있던 친구 하나가 벌떡 일어나더니
"아이구, 상섭이 아버님이 오셨군요."
하고 허리를 굽혀 깎듯이 인사를 했다. 인사를 받은 사람은 상대방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니, 이 친구 이제 보니 자네 제철이구만… 우리 아버님은 7년 전에 돌아가셨네."
그 광경을 보고 있는 동창생 모두는 소리죽여 웃었다. 반백이 된 머리, 구부정한 어깨, 낡은 외투. 아닌게아니라 정 선생의 눈에도 어린 시절에 뵈었던 상섭이 아버님이 틀림없었다. 고생을 많이 하고 살아온 모습이 역력했다. 동창생 그 누구의 얼굴보다도 연륜의 그림자가 깊이 패인 모습이었다. 돌아가신 아버지만큼 늙어버린 세월의 허무를 누구라 할 것 없이 공감하는 순간이었다.
아들은 자라서 아버지의 모습으로, 딸은 어머니의 모습으로 늙어가는 것이야 자연스러운 순리인 것을. 나에게도 두 딸애가 있다. 딸들이 거울 앞에 서서 요리조리 저희들 맵시를 잴 때면 나의 옛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어쩜 그렇게 신기하게도 이 어미를 빼닮았을까.
군 복무 중이던 아들이 휴가 때 집에 와 있는 동안 걸려온 전화를 받곤 했다. 전화를 받으면서 "저, 아직 결혼 안 했는데요." 하고 익살을 부린다. 아들을 남편으로 착각한 상대방이 아주머니(또는 사모님) 좀 바꿔주세요, 라는 경어를 썼던 것이다. 우리 집 부자 간의 목소리가 똑같아서 친정 동생들마저 형부와 조카를 구별 못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반대로 남편이 전화를 받게 되면 확인하는 일도 없이 "엄마 바꿔라."하는 말도 종종 듣는 모양이다.
어느 일요일, 외출한 남편이 밤 늦게 들어왔다. 양복 저고리를 벗어 옷장에 걸던 남편은 낮에 있었던 자기의 실수를 얘기했다.
서점 앞에서 우연히 친구를 만났단다. 남편의 얘기로는 그 친구가 부인과 함께 왔더라는 것이었다. 모처럼 부부가 나들이를 나왔다 싶었다. "사모님 나오셨어요?" 하고 부인에게 인사를 했는데 어줍은 표정을 한 그 부인은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더라는 것이었다. "이 사람아, 우리 큰딸이네." 너무나 당혹스럽고 어이없는 순간이었다. 자기를 엄마로 알아보는 아빠의 친구가 얼마나 야속했을까. 남편은 또 얼마나 미안하고 무참했을까. "저런, 영희가 엄마를 영락없이 닮았구나." 남편의 실수는 연속이었다. 오십을 막 넘은 어머니, 몸집이 우람한 어머니와 비교를 하다니. 이제 대학을 갓 졸업한 영희에게 마음의 상처가 두고두고 얼마나 깊었을까. 모녀 간의 모습이 똑같아 보였다는 이유로 남편은 자기의 실수를 조금이나마 위안 받고 싶어 했다.
시력이 나쁜 편도 아닌 남편은 어떤 사람이건 찬찬히 살펴 보는 일이 없다. 몇 년 동안을 오며가며 인사를 나누는 동네 아주머니들에게도 누가 누구인지 모른 채로 건성으로 고개만 꾸뻑 숙이고 다닌다. 그래서 내게 책망을 들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 버릇은 여전하다.
"내가 왜 남의 각시 쳐다본당가. 우리 각시만 안 잊어버리면 되지."
남편의 성격 탓일까, 사람 보는 눈이 어둡다고 해야 할까. 그래도 남편은 어디에 새로운 서점이 생겼다는 둥, 우체통이 어느 골목 몇 번째 길가에 있다는 둥 내가 무심하게 지나치는 사소한 것들을 내게 일러 주곤 한다.
우리 집 아이들이 부모의 좋은 점만 닮아 준 것에 나는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 엄마의 건강하고 튼튼한 체격과 아빠의 끈질긴 인내심과 성실성을 닮아 준 것이 고마운 것이다.
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은 신에게서 사랑을 배웠다. 부모의 예술성, 부모의 재능을 닮은 우수한 인재들이 이 세상을 아름답게 꾸며 가기도 하지만 부모의 나쁜 버릇을 닮아 이 세상을 어둡고 우울하게도 만든다. 모든 사람이 훌륭한 모습만 닮고 그렇게 세대를 이어간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피부색이 닮아서 우리는 쉽게 동·서양인을 구별할 수 있고 동족임을 안다. 닮은 사람끼리 모여 가족을 이루고 혈육의 맥을 이어간다. 봄이 되면 미루나무는 미루나무잎으로 은행나무는 은행잎으로 새 잎이 돋아난다. 틀림없는 새 순을 보고서야 아, 그것이 은행나무였음을 안다.
닮는다는 것,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의 생명체로 태어나 또다른 한 생명에게 나를 대물림하고 떠나는 가장 아름다운 흔적일 것이다

 

 

 

 

당신의 이름은

김명규


"아니 어째서 김명규씨는 여자들 방에서 잔답니까? 나는 남자들만 자는 방에다 묶어 놓았구만…."
광주문인협회 회원들을 가득 실은 관광버스 안에서였다. 버스가 출발하기 전 부산에서 열릴 영호남 문협 세미나의 일정표와 하룻밤 묵게 될 호텔에서의 방 배정표를 한 회원이 미리 나누어주었다. 내 뒷자리에 앉아 있던 낯선 회원이 조별로 짜놓은 배정표를 보면서 큰 소리로 하는 말이었다. 내 이름을 잘 아는 몇몇 회원들과 나는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피식 웃었다.
김명규. 내 이름은 남자 이름이어서 에피소드도 많다. 초등학교 때 위문편지를 보낼 때면 답장은 늘 남학생으로 오인되었고, 내 이름을 처음 알게 된 사람마다 '남자 이름 같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부모를 원망하였다. 아버지께서는 쌀 두 가마니 값이나 주고 지은 이름인데 무슨 소리냐며 되레 야단치셨다. 고등학교 이 학년 때 시를 좋아하신 화학 담당 김영식 선생님은 나를 '밝은 별'이라고 불러주시어 무척 좋아했었다. 밝을 명(明), 별 규(奎)자이므로 그렇게 불렀지만 색다른 어감으로 들려왔었다. 그게 고마워서 나는 우리 집 넓은 정원에서 계절마다 피는 꽃을 한 아름씩 식구들 몰래 꺾어다 그 선생님의 테이블 위에 꽂아드리곤 하였다.
그 무렵 우리는 다른 지방의 학생들과 펜팔 편지를 주고받는 것이 유행하고 있었다. 나도 다른 친구들처럼 남학생과 펜팔을 하고 싶어 '학원' 잡지에 내 이름과 주소를 실어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한 달 후에 나온 잡지의 뒤쪽에는 전국의 펜팔을 원하는 학생들의 명단 속에 나의 이름과 집 주소도 깨알처럼 작은 글자로 찍혀 있었다. 나는 설레는 기대 속에 남학생에게서 편지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남학생에게서는 한 통의 편지도 오지 않았고 대전에서 한 여학생으로부터 나를 남학생으로 알고 보낸 편지 한 통이 전부였다.
친정 할머니는 명규라는 발음을 제대로 내지 못하고 항상 '밍기야' 하고 부르셨다. 지금도 내 남편은 나를 밍기라고 부르면서 그 이름이 귀엽다고 말한다. 얼마 전 내가 다니고 있는 대학의 사회교육원 원우에게 할 얘기가 있어 전화를 했을 때였다. 원우는 집에 없었고 그의 부인이 전화를 받았다. 한참 후에 원우에게서 전화가 왔다. 자기의 안식구가, 김명규씨의 부인이 전화했다고 말하여 한바탕 웃었다는 것이다.
첫 아이의 임신이 확인되면서부터 나는 태어날 아기에게는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다. 첫 애는 딸이었다. 산후 조리를 하면서 나는 방안에서 남편의 서가에 꽂힌 책 중에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를 발견했다. 율리시즈. 그리스 신화 속에서 온갖 모험을 겪는 왕, 율리시즈, 율리. 섬광처럼 스쳤다. '그래, 맞아. 율리가 좋아.' 저녁 노을을 안고 돌아온 남편에게 나는 우리 아기 이름을 율리라고 지으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뜻밖에도 남편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 이름을 생각해 두었다는 게 아닌가. 아기의 이름까지 생각이 일치할 수 있다니. 우리는 천생 연분이 틀림없는 것 같다고 나는 속으로 감동하였다. 남편이 생각한 율리는 밤 율(栗)자와 마을 리(里)자였고, 내가 생각한 것은 율리시즈에서 따온 우리말 소리글자로 서구적인 어감의 이름이었다. 율리가 태어난 후 나는 사진관이나 양장점에서 계약서에 서명할 때면 남자 이름 같은 내 이름 대신 으레 귀여운 딸의 이름을 썼다.
율리가 태어나고 두 돌이 가까워질 때 남편은 결혼 후 그의 두 번째 시집을 내었다. 그 시집을 펼쳐 한 편씩 읽어 내려가던 중 시 속에 율리라는 이름이 내 눈에 들어왔다. 남편과 팔 년 동안 교제하였던 첫사랑 최순자씨를 그렇게 부르며 쓴 시였다. 나는 갑자기 손에 힘이 빠지면서 바르르 떨렸다. 보던 시집을 덮어 팽개쳐버렸다. 시청으로 당장 달려가 호적에서 딸의 이름을 개명해버리고 싶었다. 미움과 분노의 감정이 거센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손녀딸의 이름을 불러대는 시어머니까지 야속했다.
그런 율리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담임 선생님은 누가 이름을 그렇게 예쁘게 지어주었느냐고 하였다. 그 말에도 가라앉은 앙금이 뒤범벅되어 나를 흐려놓았다. 율리는 새로 산 노트마다 제 이름을 반듯하게 적어 넣었다.
막내딸이 태어나 세리라는 이름을 갖게 되면서부터 나는 더 이상 그 어느 서명에도 율리의 이름을 쓰지 않고 세리의 이름을 썼다. 율리, 승일, 세리― 우리 집 세 아이의 이름이다. 아이들이 하나씩 태어날 때마다 우리는 작명 책을 펼치고 정성 들여 이름을 지어주었다.
남편의 첫사랑으로서의 율리는 이제 시인의 딸 율리로서 그 이름을 곱게 드러내고 있다. 나는 아들 못지 않은 율리가 못내 자랑스럽다.
이름 때문에 열등감을 가지는 사람도 더러 있다. 내가 직장생활을 하고 있을 때 '하찬'이라는 성명을 가진 동료가 있었다. 직원들은 가끔씩 "하찮은 걸 가지고 뭘 그러느냐."는 둥 "정말 하찮은 놈이군."이라든지 농담조로 그 사람의 이름을 들먹거렸다. 그럴 때면 그는 얼굴빛이 갑자기 변하였고 성난 고양이처럼 신경을 날카롭게 곤두세웠다. 그는 평소에 자기 이름을 가지고 놀리는 자를 공격하기 위한 만반의 대비책을 철저히 연구해 둔 것 같았다. 가령 김정남이라는 사람이 하하하 하고 '하'자를 강조하여 웃기만 해도 그는 "정나미 떨어진다. 정나미 떨어져."라고 비아냥거렸다. 또 이종철씨에게는 "종 쳐라, 종 쳤어."라는 말이 입에서 금방 튀어나오는 거였다. 특이한 이름을 가진 사람을 볼 때 흔히 사람들은 악의 없이 농담할 수도 있다. 그런데 성격에 따라 함께 웃고 넘기는 도량이 넓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찬씨처럼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도 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이름도 가지각색이다. 곽미녀, 김선생, 신양, 김서운, 이간난, 안길자, 설까치, 조까치….
사람의 이름은 그 사람의 행실과 삶을 담는 그릇이 되기도 한다. 아름다운 이름을 가지고도 악명이 되어 길이 남기도 하고, 살아온 업적과 덕망으로 오래 빛나기도 한다. 이완용의 이름은 역사 대대로 그 오욕을 씻을 길이 없고, 슈바이처는 그 이름만으로도 숙연한 평화가 느껴진다.
나는 내 이름이 남자 이름이므로 다른 사람에게 더 잘 기억되는 것을 이제는 고맙게 생각한다. 내 이름 석 자에 더러운 때를 묻히지 않으며 흠 내지 않고 살아가고 싶다.

 

 

장맛과 가운(家運)

김명규


업고 있던 손주딸을 마루에 내려놓으며 어머니께서 나직하게 말하셨다.
"내일은 메주를 쑤어야겠구나."
해야 할 일을 미루고는 견디지 못하시는 어머니의 성미를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김장을 끝낸 지 일 주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또 메주를 쑤다니. 피곤이 겹겹으로 덧쌓여 오는 것 같았다.
25년 전, 신혼 시절이었다. 그때는 유난히 겨울도 빨리 닥치고, 동짓달부터 눈이 많이도 내렸다. 나는 결혼하자마자 첫딸을 낳고, 돌이 채 지나지 않아서 둘째 아이를 갖게 되어 배가 남산만큼 불러 있었다. 우물에서 퍼 올린 물로 메주콩을 씻고 앉았노라면 부른 배가 자꾸만 뒤로 당겨져 주저앉곤 했다.
콩을 씻어 놓은 다음엔 장 담글 큰 독을 씻어야 했다. 먼저 독 안에 신문지를 태워서 그 불로 소독을 하였다. 깜깜한 독 안에 신문지의 불길이 활짝 피어나는 것은 잠깐이지만 그 빛은 황홀하고 신비스럽게 느껴졌다. 불길이 사그라진 뒤 물을 끼얹고, 솔뿌리 솥솔로 벅벅 문지를 때면 엎드린 배가 독에 지그시 눌렸다. 그 때마다 뱃속의 아기는 답답하다는 듯이 발길질을 해댔다.
다음날 메주콩을 안친 가마솥에 장작불을 지피고, 그 앞에 무거운 배를 부리고 앉아 불을 쬐면 노곤하고 아늑하여 졸음이 왔다. 콩 익는 냄새가 구수하게 부엌 안에 퍼질 무렵이면 씻어 둔 고구마를 몇 개 콩솥에 쑥쑥 박아두었다. 또 한 차례 김이 오르도록 불을 때고 나면 콩맛이 잘 밴 고구마는 노랗게 익었고 한결 더 맛이 좋았다. 뜨거운 고구마를 후후 불어가며 먹고 있는 양이 안쓰러웠던지 어머니가,
"그냥 먹으면 체할라. 이거랑 같이 먹어라."
하고 김치 사발을 등뒤에서 건네주셨다.
푹 삶은 메주콩을 찧는 일이 내게는 제일 큰 고역이었다. 메주콩은 찧을수록 찰기가 더해져서 절구공이를 뽑아내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손은 시리고, 겨울인데도 등에선 땀이 흥건히 솟았다. 숨이 차서 헐떡거릴 때쯤 시어머니는
"얘, 이젠 내가 좀 찧으마."
하시며 절구공이를 빼앗아 끝마무리를 지으셨다. 널찍한 안반에 네모나게 메줏덩이를 뭉쳐서 빚을 때면 예쁘게 만들어야 아기도 예쁜 아기를 낳는다며 어머니는 내 서투른 솜씨를 타일러 말씀하셨다.
방 세 칸 짜리 전셋집이라지만, 묵은 살림으로 꽉 찬 비좁은 방이었다. 하루쯤 말린 메주를 통나무에 다닥다닥 엇갈리게 매단, 크리스마스 트리 아닌 메주 트리는 겨우내 큰방 한쪽을 차지하고 지냈다.
공기 맑고 햇볕 좋은 장독대에서 발효된 된장은 정말 맛이 있었다. 봄에는 쑥국, 여름에는 아욱국, 가을이면 또 호박잎국…… 사시사철 맛있는 된장국과 김치만 있으면 애들 아빠는 반찬 투정을 하지 않았다. 묵은 된장을 항아리에서 퍼낼 때 거뭇한 위엣 것은 제껴 놓고 깊은 곳에서 꺼내야만 샛노랗고 촉촉한 게 맛이 좋았다. 어머니는 가끔씩 장독과 항아리들을 열어 보시며 내가 속엣 것만 떠오며 굴을 판 된장도 얌전히 다독거려 놓으시곤 하였다.
긴 겨울을 편히 보내고 정월이 되면 어머니는 또 장 담글 준비를 미리 걱정하셨다.
"나 죽은 담에는 무덤에 와서 장 담아 달라고 할래? 올해는 너도 간장 한 번 담아 보아라."
그 해 따라 어머니께선 며느리에게 장 담그는 순서를 가르쳐 주셨고, 인제 그 일을 완전히 일임하시려는 것 같았다. 노랗게 곰삭은 된장을 이웃과 함께 나눠 먹고도 우리 식구가 일 년은 더 먹을 수 있을 만큼 우리 집은 된장이 넉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번거롭고 귀찮은 연례 행사를 해마다 거르지 않으시는 것이었다.
"어머니, 간장이랑 된장이 아직도 많이 남았어요. 뭣하려고 또……"
행주로 장독을 닦다 말고 어머니는 나를 돌아보셨다.
"메주콩 찧기가 힘들지야?"
어머니는 다 안다는 듯 웃으시며 되물었다.
"해마다 새로 담근 장맛으로 그 해의 가운(家運)을 알 수 있단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해마다 남은 간장은 묵은 장과 섞어 몇 년이건 묵혔다. 묵은 간장의 장독을 열어 보면 하얗게 박꽃이 곱게 피어 있고, 향그러운 단내가 풍겼다. 간장 위에 핀 흰 박꽃은 장맛이 좋을 때 피려니와 길조를 알리는 조짐이라는 것이었다.

그 해 봄에도 새 된장을 거르고, 어머니는 간장을 끓이셨다. 내내 묵은 장만 먹다가 오늘은 새 간장으로 미역국을 끓여야겠다고 생각하고 나는 장독대로 갔다. 새로 담근 장 위에 칙칙한 고래기가 진한 잿빛으로 덮여 있었다. 장맛을 보니 쓰고, 역한 냄새가 났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는 수 없이 묵은 장을 떠다가 그날 저녁 미역국을 끓였다. 저녁상을 치운 뒤 나는 조심스럽게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어머니, 새 장맛이 이상하게 변했네요."
"으응?"
어머니는 놀라면서, 요즘 장독 뚜껑을 잘 열어 놓지 않아서 그런가 보다고만 하셨다. 다음날부터 나는 열심히 장독 뚜껑을 열어 따뜻한 봄볕을 쬐었지만 새 간장은 더욱 그 맛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런 즈음, 초등학교에 다니는 둘째와 셋째가 학교에서 돌아온 뒤 나는 저녁 찬거리를 사러 시장에 갔다. 시장에서 돌아오니 우리 집 대문 앞에 동네 아주머니들이 웅성거리며 서 있었다. 별다른 생각 없이 가까이 다가가자 이웃집 아주머니가 정색을 하며 말하는 것이었다.
"애 엄마, 큰일 났어! 할머니가 부엌 바닥에 쓰러져서 애들이 큰소리로 울고 야단이잖아. 우리가 듣고 나와 할머니를 안방에 뉘어 드렸으니, 어서 병원으로 모시고 가 봐."
허겁지겁 안방으로 들어갔다. 오 학년인 아들과 삼 학년인 막내딸이 할머니 머리맡에 앉아 훌쩍거리고 있었다. 얼굴이 백짓장처럼 창백하고 의식 불명인 듯 어머니는 눈을 감고 누워 계셨다. 나는 급히 남편의 직장으로 전화를 걸었다. 일찍 홀로 되신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온 남편은 곧바로 조퇴를 하고 달려왔다.
뇌 혈전증.
어머니는 주기적으로 대학병원에서 통원 치료를 하시던 중이었다. 막내딸이 할머니의 치맛자락을 잡고 시내버스를 타는 것이 즐거워서, 그리고 할머니가 사주시는 과자를 먹는 재미로 할머니와의 병원 동행을 좋아했었다. 눈이 어두워지셔서 시내버스의 번호가 잘 안 보이셨던 어머니는 손녀가 버스 번호를 알아보고 소리치는 것을 그토록 귀여워하셨다. 세 손자를 씻겨주고 머리를 빗기면서 아이들이 자라나는 것을 낙으로 삼으시던 어머니. 그 귀여운 손자들도 마다하시고 의식불명이 되신 것이다.
석 달 동안 병원에 입원 치료하여 의식은 약간 돌아온 듯했지만 말을 전혀 못하시고 누운 채 겨우 손짓으로 먹을 것을 달라고 하셨다. 더 이상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병원 측에서 퇴원을 재촉하였다. 어머니를 집으로 모셔 올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 그토록 정갈하시고, 손끝으로 음식 맛을 잘도 내시던 어머니가 방안의 네 벽에 변을 묻혀 놓기 일쑤였다. 그 얌전하신 분이 이렇게 변하다니 기가 막혔다. 장병(長病)에 효자(孝子) 없다고 하였던가. 화가 나서 나는 어머니께 소리도 지르고 퍼붓고 앉아서 울기도 하였다. 어머니는 나를 보기만 하면 당신의 입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음식을 요구하셨다. 나는 죄를 짓는 것 같아서 차마 혼자 밥을 먹기가 괴로워 점심을 거르는 때가 많았다.
부엌에서 쓰러진 지 여섯 달만에 기어이 어머니는 떠나시고 말았다. 추석이 지난 무렵이었다. 장례를 치르고 집안 정리를 하다가 나는 문득 봄에 담근 새 간장 생각이 났다. 장독의 뚜껑을 여는 순간 썩은 장 냄새가 코를 찔렀다.
"새로 담근 장맛으로 가운을 알 수 있단다."
어머니가 남겨주신 마지막 전설 같은 말씀이셨다. 썩은 된장을 쓰레기로 버릴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담그신 장독의 간장을 고스란히 하수구로 쏟아 내버리면서 나는 내내 소리 죽여 울었다.


당신의 이름은? 누구를 만나도 물어보고 싶은 말이다.

 

 

 

 

 

도끼를 찬 여자

김명규


식후마다 소화제를 먹었지만 체한 것 같은 가슴은 며칠째 영 시원치 않았다. 웬 일인지 기운이 없고 틈만 나면 자리에 눕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푹 삶은 소고기를 숭숭 썰어 실컷 먹고 싶은 생각만 곰곰히 간절했다. 이렇게 둘째 아이의 입덧은 시작되었다.
여자는 임신을 하게 되면 유난히 친정집에 가고 싶어진다. 친정 어머니의 보살핌과 사랑이 그리워서일 게다. 산부인과에 가 볼 것도 없이 틀림없는 입덧이라 생각하여 나는 친정을 찾아갔다. 친정 할머니께 큰놈이 터를 판 것 같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반색하시며 '이번엔 꼭 아들을 낳아야 한다'며 나를 골방으로 데리고 가셨다. 누가 행여라도 들을세라 할머니는 소리를 낮춰 조용조용 말씀하셨다.
"읍내 시장에 가면 대장간이 있다. 대장간에 가서 아주 작은 도끼를 하나 만들어 달라고 해라. 그러면 다 알아듣고 만들어 줄 것이다. 그걸 굵은 실에 꿰어 당장 배에다 두르고 있어라. 여섯 달이 될 때까지 감쪽같이 두르고 있되 강 서방한테도 그걸 보여 줘선 안 된다. 알았지? 틀림없이 아들을 낳을 게야."
내가 첫딸을 낳았기에 할머니는 아들 증손을 보고 싶은 것이었다. 할머니는,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내일 또 오고 어서 대장간을 찾아가라고 내 걸음을 재촉하셨다. 할머니의 간곡한 당부대로 읍내 시장 안에 있는 대장간을 찾아갔다. 호미며 낫, 삽 등의 농기구들이 즐비하게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할머니의 비방이 무슨 확실한 과학적 근거가 입증된 방법이었겠는가마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기도 했다. 대장간 앞에서 멈칫거리고 있노라니 한쪽에서 일을 하고 있던 주인 아주머니가 나오며 뭘 찾느냐고 물었다.
"장난감처럼 쬐끄만 도끼 하나 만들어 주실래요?"
"옳아, 새댁 애기 가졌구만."
두말 할 것도 없이 내 말이 끝나자마자 아주머니는 안쪽으로 들어갔다. 당장 내 말을 알아듣는 걸로 보아 그런 비법이 통용되나 보다고 생각되었다. 아주머니는 어디선가 금방 찾아가지고 나왔다. 그러더니 내 손을 잡아다가 아주 작은 것을 꼭 쥐어 주며,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아요."
하고 빙긋이 웃었다. 값이 얼마냐고 묻는데 아주머니는 손을 내저으며 돈도 받지 않았다. 돌아오면서 사방을 살피다가 아무도 없는 골목으로 들어가 나는 그제서야 손에 쥐고 있던 것을 펴 보았다. 세상에 이렇게 앙증스러울 수가. 길이가 2센티 직경이 1센티쯤 되는 너무나 작고 이쁜 도끼였다. 이렇게 작은 도끼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신기했다. 대장간 아주머니가 내 등뒤에 대고 한 말이 떠올랐다.
"참말로 묘한 일이라우. 이 도끼를 닭이 알 품을 때 둥우리에 넣어 주면 모조리 수평아리가 나온다니까."
나는 그 아주머니의 말을 신앙처럼 믿으면서 속으로 아들이 태어나길 빌었다. 첫아이가 딸이었을 때의 입덧은 채 익지도 않은 진초록빛 자두와 신 음식만 청했었다. 그런데 둘째는 달랐다. 시지 않은 음식이나 소고기만 먹고 싶은 것이었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났다. 그 동안 남편도 모르게 감추느라 애썼던 엄지손톱만한 도끼를 몸에서 풀어 화장대 서랍 속에 싸서 넣어 두었다.
우리 세대의 젊은 시절엔 임신을 해도 별로 산부인과를 찾아가질 않았다. 자식을 많이 낳아 기른 웃어른들의 체험담이 곧 의사의 말이었으므로 그분들의 얘기를 듣고 안심하곤 하였다. 그러나 해산 달이 가까워질수록 불안하고, 또 겪어야 할 고통에 근심스러워졌다. 그 시절에도 남아 선호 사상이 팽배하던 때인지라 이왕이면 고생하면서 아들을 낳아야 며느리 구실을 다할 것만 같았다. 점점 몸은 무겁고, 남편 출근을 위해 이른 아침 밥을 짓기조차 고통스러웠다. 간밤에 꽉 막아 두었던 연탄 아궁이를 터놓고 한 이십 분쯤 뒤에 불꽃이 세게 올라오면 솥단지에 밥을 안쳤다. 그 일을 하기가 너무 힘겨울 때면 자고 있는 남편을 흔들어 깨워 나는 눈흘기며 말했다.
"이번에 또 딸을 낳기만 하면 당신 이 집에서 쫓겨날 줄 알아! 딸 낳거든 이 집에 들어올 생각도 마!"
앙칼지게 쏘아 부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어이없어 하며 고개만 푹 숙였다. 딸 낳는 것이 여자 죈가, 남자 책임이지. 나는 당당하게 큰소릴 치며 남편을 다그쳤다. 어찌 되었건 내가 임신으로 고통스러운 것만큼 남편을 달달 볶았다. 아들 못 낳으면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갖은 구박을 다해 대며 나는 쌓인 긴장감을 풀곤 했다.
새벽 한 시가 좀 지나 잠결에 진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통증으로 소리를 지를 때마다 남편도 곁에서 함께 진통을 느꼈을 게다. 조산원에서 산파를 불러 집에서 첫애도 분만했고, 둘째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즈음 우리는 남의 집에 전세를 살고 있었는데 울안에는 우리 또래의 젊은 부부가 둘이나 같이 살고 있었다. 이번에 아들 못 낳으면 강 선생님이 집에서 쫓겨날 거라는 내 말이 동네 사람들의 웃음거리요 화제였다. 진통을 견디다 못해 나는 아이를 낳을 때마다 동네 사람들의 잠을 깨울 정도로 큰 소리로 울었다. 이윽고 새벽 네 시가 넘어서야 아기를 낳았다.
"인제 나 안 쫓겨나겠네."
내 머리맡에서 출산을 지켜보던 남편이 눈물 범벅이 된 내 얼굴을 닦아 주며 말했다. 정말 아들이었다. 분만한 다음날에는 이웃에 사는 아주머니들이며 할머니들까지 우리 집에 몰려들 왔다. 하도 요란스럽게 아이를 낳는 바람에 아들인지 딸인지 궁금해서 찾아온다는 것이었다.
산후 조리를 하고, 갓난이가 포동포동 젖살이 오를 무렵 나는 서랍 속의 도끼를 꺼내어 남편에게 보여주었다. 자초지종 이야기를 들은 남편도 신기하고 희한하다면서 소꿉 같은 도끼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막내 여동생이 결혼했을 때는 할머니께서 이미 고인이 된 뒤였다. 우리 오 남매는 집집마다 아들과 딸을 두었는데 막내는 연년생으로 딸만 거푸 셋을 낳았다. 동생은 아들을 둔 언니들을 무척 부러워하였다. 그런데 웬 일인지 딸만 낳는 여동생의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할머니께서 가르쳐 주신 '아들 낳는 비법'을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들을 낳는 것도 운명이며 팔자 소관이란 말인가. 동생이 딸만 낳게 된 것이 내 잘못인 것만 같아 만날 때마다 미안한 생각을 금할 길이 없었다. 이쁘게 자란 동생의 세 딸을 보며 지금은 딸이 더 좋은 시대라고 동생을 위로해 줄 뿐이었다.

 

 

 

 

 

어머니의 달

김명규


달이 뜨는 밤이 싫었다.
가을이면 새로 바른 문 창호지에 환한 달 그림자가 슬픔처럼 내려앉는 밤이 나는 싫었다. 해질 무렵까지 동무들과 뛰놀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가을걷이로 집안 식구들은 정신없이 바빴다. 그럴 때면 저녁밥이 늦어져서 잠에 취한 나는 저녁을 굶기가 예사였다.
초저녁 잠을 실컷 자고 나면 건넌방에서 어머니의 인기척이 있을 뿐, 사방이 고요한 밤이었다. 낮에 못다 하신 일을 어머니는 혼자 밤 늦게까지 하시는 모양이었다. 어머니의 쓸쓸한 콧노래 소리가 조용히 문틈으로 새어나왔다. 어머니의 콧노래는 점점 애조를 띠었고 그러다간 흐느낌이 되어버리곤 했다. 어머니의 고향은 함경북도 청진이었다. 한의학 공부를 하러 청진에 가셨던 청년 시절의 아버지를 만나, 어머니는 혈혈단신 월남하셨다.
내가 여섯 살이던 그 해, 어머니는 서른 살의 고운 여인이었다. 성품이 조용하고 말이 없어 웃어른들께 얌전하다는 칭찬을 들으셨다. 어머니는 북에 계시는 외할머니와 이모들이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한 집에 대가족 식구가 사는 살림을 하시느라 낮에는 고향을 그리워할 틈도 없었을 것이다. 그 외로움과 그리움을 어른들 앞에서는 내색조차 못했을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깊은 밤에 혼자서 눈물 섞인 향수를 달빛에 적시었다. 그런 어머니가 나는 못 견디게 가엾었다. 어머니가 우실 때면 나도 베개가 다 젖도록 소리 죽여 따라 울었다.
달력이 귀하던 그때 벽에 붙여 놓고 보던 달력은 일월부터 십이월까지 사절지 한 장에 꽉 차 있었다. 할머니는 음력 일수를 손가락으로 꼽아보며 보름이 며칠 남았다는 말을 혼잣말로 하시곤 했다. 그 말을 들으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 무거웠다. 어머니의 눈물이 또 나를 슬프게 하기 때문이었다. 낮에 푸새한 빨래를 달빛에 비추어가며 손질하는 어머니가 콧노래로 탄식을 하실 것이었다. 그 푸른 달밤이 나는 싫었다.
달이 지친 깊은 밤마다 나는 너무 많이 울면서 자랐다. 어린 시절의 내 마음은 온통 슬픈 감정만이 얼룩진 것 같았다. 기와지붕의 소슬한 추녀가 창호지 문에 판화처럼 찍히는 밤이 나는 싸늘하고 무서웠다. 어머니는 친정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한처럼 안고 세상을 떠나셨다. 서른 아홉에.
내가 여중학생이 되어서도 어머니의 달밤은 찾아들었다. 처서가 지나고 서늘한 가을 기운이 돌면 어디선가 나타난 약장수가 가설 무대를 차리고 동네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정비석의 '산유화'나 방인근의 연애 소설을 친구들과 돌려가며 열심히 읽던 무렵이었다. 밤이면 약장수의 손풍금 소리가 서늘한 바람에 실려 들려왔고, 탱자나무 울타리 건너에 살던 여드름 많은 농업고등학교 학생이 '네버런 선데이'를 간드러진 하모니카로 연주하던 그 밤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트랜지스터 라디오에 귀를 대고 듣던 청춘 드라마의 주인공은 어쩌면 바로 나일 것만 같았다.
그 때 우리 집에는 부엌일을 하던 언니가 있었다. 농사를 짓던 아버지를 어려서 여의고 어머니 홀로 남의 집에서 일하고 받는 품삯으로는 생계가 어려워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언니는 우리 집에 식모로 들어왔다. 그의 어린 동생도 서울로 남의 집 살이를 갔다고 했다. 보자기에 몇몇 옷가지를 싸서 가슴에 안고 낡은 검정 고무신을 신고 왔던 언니는 열일곱 살이라고 했다.
배가 고파 찾아온 언니가 우리 집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식구로 친숙해졌다. 저녁 설거지가 끝나면 언니는 벽장 구석에 넣어두었던 옷 보따리를 가끔씩 꺼내어 풀어보았다. 옷가지 속에는 노란 봉투가 끼여 있었고 그 안에 무엇인가 쓰여 있는 종이를 펴보고는 다시 접어 소중히 간직해 두는 것이었다. 그런 날 밤이면 언니는 뒷마루에 혼자 앉아 달빛을 받고 있었다. 달빛은 사람의 감정을 여리게 하는 신비한 힘을 지녔나 보다.
저녁밥을 짓기 전 방에 미리서 군불을 땔 때면 아궁이 앞에 앉아 유행가도 시드러지게 곧잘 불렀다. 그 노래 속에는 언니의 순정이 스며 있었다. 노란 봉투 안에 감춰둔 게 무엇인지 나는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서울에서 공장에 다니고 있는 오빠의 주소라고 말하던 언니의 볼은 분홍으로 물들었다. 내 운동화와 교복을 깨끗이 빨아주던 언니는 집 모퉁이 호젓한 곳으로 나를 불러 조용히 말했다. 그 오빠에게 편지 한 장 써 달라는 부탁을 어렵게 꺼내는 것이었다. 언니는 초등학교 이 학년을 다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게 되어 학교를 중퇴하였다. 오빠는 언니가 살던 산골 마을에서 시오리쯤 떨어진 동네에 살았었는데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에서 공장에 다니고 있는 형을 따라갔다고 하였다. 언니는 그 오빠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나는 평소에 언니에게서 느낄 수 있었던 오빠에 대한 그리움을 읽을 수 있었기에 처음으로 연애 편지를 써 보았었다. 오빠 이름은 준식이었다. 내가 대신 써 주었던 편지를 몇 번이고 읽어보던 언니는 편지를 잘 썼다면서 흐뭇해하였다. 편지를 부치고 답장이 올 때쯤 되어 나도 설레임으로 기다렸다. 언니는 우체부가 오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는 것 같았다. 바람에 대문이 삐걱거려도 방문을 열고 뛰어나갔다. 그로부터 보름쯤이 지나 답장이 왔다. 언니는 그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서 봉투를 뜯었다. 공장을 다니면서 성실하게 살고 있던 준식 오빠와 연애를 하는 것은 언니가 아닌 나였다.
남의 집에서 고된 일을 하면서도 언니는 행복해 보였다. 그 때 언니의 얼굴은 복숭아처럼 예뻤었다. 준식 오빠를 언니에게로 끌어준 것은 내가 대필해주었던 편지의 힘이 컸던 것 같다. 설 명절에 집에 다녀온 언니는 동네 사람들 몰래 준식 오빠와 만났던 얘기를 비밀스럽게 들려주었다. 언니는 그렇게 우리 집에서 삼 년을 살다가 준식 오빠가 있는 서울로 갔다.
가로등도 없었지만 그때의 가을 달밤은 그림보다 더 아름다웠다. 팔월 대보름 십리 밖에 신파극이 들어오면 집집마다 이른 저녁을 지어먹었다. 과년한 딸들을 울안에 가둬 놓고 살던 때라 그런 밤에야 처녀들은 비로소 먼발치나마 총각들의 얼굴을 훔쳐보며 킥킥거렸다. 가난에 찌들어 밤 완행열차를 타고 서울로 돈벌러 가는 연인들의 이별도 달밤에 이루어졌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보름을 향한 달은 둥글게 떠오른다. 가혹하고 괴롭던 추억을 삼킨 채. 그러나 요즈음의 보름달은 옛날의 정취를 잃어버렸다. 오염된 하늘에 뜬 달은 옛날의 그 푸르고 서늘한 빛을 잃어버렸다. 그 시절 벼 포기 사이에 메뚜기가 잠든 고즈넉한 들녘의 달밤을 다시 보고 싶다. 달밤의 밤길을 걷고 싶다. 길가에 코스모스가 가냘프게 한들거리는 밤에 이슬 같은 맑은 눈물로 나를 정화시켜 보고 싶다. 배고픈 설움에 남의 집 식모살이를 했던 그 순박한 처녀들, 달밤이면 서로 만나 자신들의 처지를 이야기하며 서글퍼하던 그들이 못 견디게 그리워진다. 옛날은 지나간 것이므로 그리워지는 것. 라디오 드라마에 흠씬 빠졌던 설레임을 다시 한 번 내 가슴에 담아 보고 싶어진다.
아파트 베란다에 서서 나는 내 어머니의 얼굴 같은 달을 하염없이 바라볼 때가 있다. 아득히 지나간 동화를 다시 품어 보면서

 

 

 

 

 

 


그 해 겨울 이야기

김명규




마루에 걸려 있는 가을 햇살을 받으며 나는 막 찐 고구마를 먹고 있었다. 입덧이 가시더니 식욕이 돌아와 무엇을 먹어도 입에 달았다. 작은 쟁반에 고구마도 수북히, 새콤하게 익은 총각김치도 한 사발 곁들여 있었다.
집주인이 살던 안채와 우리가 전세로 살던 집은 따로 분리되어, 사람 하나 드나들 만한 함석 대문도 우리 식구만 사용했다. 블록 담 밑으로 하이힐을 신은 발자국 소리가 다가와 우리 집 대문 앞에서 멈췄다. 내가 앉아 있던 마루에서 대문까지는 세 발짝도 채 못 되었다. 누구라 할 것 없이 우리 집 문 앞에서 멈춘 걸음이기에 문을 열었다. 생각지 않았던 여고 동창 경희였다. 경희는 서울에 있는 Y대학에 입학하던 해 아버지의 사업이 번창하여 가족 모두가 서울로 이사를 갔었다. 어릴 때도 예뻤던 경희는 서울 사람이 되어 도시적이고 세련된 숙녀가 되어 있었다. 학창 시절에는 그렇게 다정했던 사이였지만 왠지 낯설고 서먹하였다. 경희와 헤어진 8년의 세월이 우정마저도 시들게 한 것일까. 그것은 아니었다. 경희와 지금의 내 초라한 처지가 비교되어 오는 내 자신의 열등감 때문이었다. 아직 여기 산정읍에 살고 계시는 큰아버지 댁에 온 길이었다면서 경희는 내가 먹던 고구마 한 개와 주전자의 숭늉 한 컵을 마시고 일어섰다. 예고 없이 찾아와 어색해 하는 나에게 경희는 미안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소문 없이 결혼해서 살고 있는 나를 수소문하여 찾아온 경희였다. 대문을 열고 나서니 길 옆 논에는 노란 비단을 깔아 놓은 듯, 익어 가는 벼이삭이 물결쳤다. 학창 시절의 추억담만 나누다가 떠나는 경희를 전송하며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나는 서 있었다. 경희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손짓을 했다.
경희는 슈베르트의 음반 석 장을 선물로 주고 갔다. 피아노를 전공한 경희의 큰언니 덕에 나는 여고 시절에 수준 높은 음악을 자주 들을 수 있었다. 겨울 방학이면 경희 언니가 들려주는 서울 얘기며 대학 생활 얘기를 듣느라 밤이 깊어 가는 줄을 몰랐다. 언니는 음반을 틀어 슈베르트의 '미완성'이나 '죽음과 소녀', '숭어'를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어쩌다 언니가 들려주는 음악 속에는 나의 그리움과 슬픔이 녹아 있었다. 내가 열한 살 때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이 거기에 깃들여 있는 것만 같았다.
전축이 없어 경희가 준 음반을 들을 수 없었던 나는 책꽂이 선반 위에 올려놓고 방안 청소를 할 때마다 마른 수건으로 닦으며 경희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안아보곤 했다.
사윗감이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친정 아버지는 우리들의 결혼을 반대하셨다. 내가 스물 다섯의 나이였다.
"지 복 있으먼 잘 살텡게 그만 마음 풀고 받어들여라."
할머니는 아버지를 설득시켰지만 아버지의 흔쾌한 승낙을 얻지 못한 채 우린 가난한 결혼식을 올렸다. 꿈꾸듯 아름답고 우아한 순백의 웨딩드레스 대신 동네 삯바느질을 하는 아주머니가 지어준 하얀 한복을 입고 결혼식을 올렸다. 신부가 준비한 혼수라곤 포마이카 이불장 하나와 이불 두 채가 전부였다. 나는 혼수 때문에 많이도 울었다. 어머니 대신 나를 길러주신 할머니의 마음만 쓰라리게 했던 것 같다. 결혼식을 며칠 앞두고 친정의 너른 텃밭 키 큰 옥수수 밭에 숨어서 나는 할머니 몰래 울고 또 울었다. 실꾸리 같은 옥수수를 다 따내고 누렇게 시들어 가는 잎새만이 바람에 서걱거렸다. 허공을 날아다니는 고추잠자리와 멀어진 가을 하늘이 떠나는 여름을 나와 함께 아쉬워하고 있었다.
"얼기빗, 참빗만 골마리에 챙겨 가도 지 복 있으먼 잘 살드라. 혼인 치레 말고 팔자 치레 허라 안 혔드냐. 할미 가슴 찢어징게 그만 울어라."
시집온 후에도 할머니의 얼굴만이 눈물 속에 아른거렸다.
홀어머니와 둘이 살던 신랑의 집은 앙증스런 장난감처럼 작았다. 하지만 나는 그 시절의 겨울을 유난히 좋아했었다. 내륙 지방인 산정읍은 겨울 내내 눈이 많이도 내렸다. 긴 겨울 밤 이른 저녁을 먹고 따뜻한 방에 몸을 녹일 때면 싸락눈은 함석 대문과 마루를 때렸다. 바람이라도 세찰 때는 그 소리가 격자문의 창호지를 뚫고 사르락사르락 좁쌀을 흩뿌리는 듯 가늘게 들려왔다. 아궁이에선 연탄불이 활활 타고 우리의 작은 방은 쩔쩔 끓었다. 누워 있으면 뱃속의 아기는 엄마에게 발길질을 해 댔고 마음은 끝없이 평온하였다. 야속하기만 했던 친정 아버지도 내가 결혼한 뒤 서울로 이사하게 되어 아픔과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뒤를 이어 새로 오신 어머니의 품안에 있던 어린 동생들도 가엾은 생각만 들었다.
전축도 없던 내 신혼의 방에서 클래식 음악을 듣는 태교란 꿈처럼 멀었다. 겨울밤의 오두막 같은 우리 집을 휩쓸어갈 듯한 찬바람 소리와, 멀리서 아스라이 들려오는 강아지 울음소리, 쌓인 눈을 밟고 지나가는 행인들의 발자국 소리만이 내 뱃속의 아기가 듣던 음악이었다. 그 집은 우리 집 삼 남매의 탯자리가 된 집이었다.
가난했지만 그 곳에서 나는 사랑을 배웠고 젊은 날의 꿈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같다. 이제 세월의 연륜만큼 생활도 윤택해졌다.
경희는 의사와 결혼하여 미국으로 이민 갔다는 소식을 다른 친구로부터 전해 들었다. 삼십 년. 길고도 짧게 느껴지는 세월이다. 무심한 세월은 모든 것을 바꿔놓는다. 인생도, 자연도. 지금 경희를 만난다면 하고 싶은 얘기도 많은데. 할머니와 아버지가 살아 계신다면 기뻐하실 일도 많은데.
이제 나이를 먹고 보니 젊은 시절의 가난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가난을 이겨보려고 얼마나 성실하게 살아 왔던가. 경희가 보고 싶다.
경희가 선물로 준 음반은 세월이 지나 판이 뒤틀릴 때까지 이십여 년을 간수해 왔었다. 언젠가 경희를 만나면 그것을 내보이면서 그때를 추억하리라 생각했었는데 이삿짐을 싸면서 올케가 해묵은 것이라며 나도 몰래 쓰레기로 버렸다. 이제는 하루 종일이라도 슈베르트와 모차르트도 들을 수 있는 좋은 전축도 거실에 놓여 있다. 가난이 부끄러워 나는 그 때 경희를 보내고 외진 논둑길에 서서 눈이 붓도록 철없이 울었었다.
경희가 보고 싶은 오늘 문득 옛날의 슈베르트를 만나고 싶다. 아르테지오네 소나타. 슈베르트와 가을의 추억은 창가에서 국화 향기처럼 피어난다.

 

 

 

생일 선물

김명규


하필이면 나는 음력 섣달 스무 아흐렛날에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일까. 하루 사이에 억울하게 나이를 한 살 더 먹게 되었고, 그보다 더 섭섭한 것은 서른 여섯 해를 살아오면서 한 번도 생일 축하를 받아 본 사실이 없다는 점이다. 내 어린 시절에도 집안 식구들 아무도 내 생일날을 기억하고 '축하한다'는 말 한 마디 건네주는 사람이 없었다.
음력설을 대명절로 쇠던 어릴 때에 섣달 그믐이 가까워지면 온 식구가 차례를 지낼 준비에 정신없이 바쁘기만 하였다. 가지 수를 헤아리기 위해 한참 손꼽아야 할만큼 여러 가지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였지만 그것들은 전혀 내 생일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열 살 무렵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해에도 맞게 될 생일을 기다리며 이번에야말로 나만을 위해 준비하는 축하를 받아야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었다. 역시 스무 여드렛날이 되어도 "내일이 네 생일이야."하고 기억해주는 식구는 아무도 없었다. 은근히 화가 나고 서글픈 생각까지 들었다.
혹시 내가 주워다 기르는 아이는 아닐까, 그러기에 음식을 푸짐하게 장만하는 날을 적당히 내 생일로 정해준 것은 아닐까. 나는 스스로 슬픈 동화 속의 주인공이 되어보기도 하며 어린 마음에 무척 속상했다. 그리고는 식구들 가운데 나를 제일 사랑해주시는 할머니의 치마폭을 붙잡고 이런 하소연을 하였다.
"할머니, 내일이 내 생일이야. 시루 구멍 좀 따로 막아 줘(생일 떡을 해 달라는 속어의 표현), 응?"
평소에 그처럼 사랑해 주시던 할머니마저도 바빠서 못 들은 체하시며, 차례 준비로 만들어 놓은 강정을 집어 주시면서,
"네 생일이 제일 좋은 날이야."
하실 뿐이었다.
해마다 그렇게 생일을 못 찾고 내 생일은 설날의 덤으로 그냥 넘어갔다. 결혼한 지 십 이 년이 되었지만 남편도 내 생일에 대해서 무관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평소에 아기자기하거나 다정다감하지 못한 성격 탓도 있겠지만 생일을 빼먹는 심정을 알아주지 않는 게 서운했다. 요즈음 흔해 빠진 고무장갑이라도 한 켤레 사 들고 와서,
"오늘이 당신 생일이구려."
하고 한 마디만 해 주면 서른 여섯 해 동안 못 받아본 생일 축하를 한꺼번에 받은 듯 기쁠 것만 같다. 말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데 어쩌면 그다지 따뜻한 말 한 마디가 인색한 걸까. 사소한 작은 사랑에서도 여자들은 큰 감동을 받게 마련인 것을.
올해에도 섣달 스무 아흐렛날은 또다시 찾아왔다. 친구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결혼 기념일이며 생일날 있었던 일들을 자랑삼아 털어놓는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들의 얘기가 텔레비전 드라마 속의 이야기처럼 낯설게 들린다.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금년에 맞는 내 생일에 대한 섭섭한 느낌이 더했다. 내일이 바로 내 생일이다.
시장에 함께 가자고 친구가 나를 불러냈다. 설 준비에 필요한 것들을 이것저것 사고 나서 정육점 앞에서 친구가 걸음을 멈추었다.
"율리 엄마 생일이 내일인데, 무엇을 선물할까 얼른 떠오르질 않네. 고기나 사줄까?"
하며 쇠고기 한 근을 내 시장 바구니 속에 억지로 밀어 넣었다. 생전 처음 받아보는 내 생일 선물이었다.
생일날 아침, 남편과 아이들이 서둘러 일터로 학교로 대문을 나간 뒤 혼자 남은 식탁에서 구운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으려니 알 수 없는 서글픔이 목구멍에 와 닿고 있었다. 내 생일을 기억해 준 친구의 따뜻한 마음씨가 모정처럼 후끈했다.

 

 

 

 

마지막 선물

김명규


구멍 난 스타킹을 꿰매던 베로니카 수녀는 손놀림을 잠시 멈추었다. 커튼을 젖힌 창밖을 응시하는 수녀의 눈은 반짝였고 코끝이 분홍으로 물들고 있었다. 한 번도 색조 화장품을 써 본 일이 없는 얼굴, 그녀의 영혼처럼 투명하고 깨끗한 얼굴이었다.
수녀원. 눈보다도 희고 순결한 성(聖) 처녀들의 집이다. 세간이라고는 응접 소파와 몇 개의 주방 용품이 전부였다. 앙증스럽게 작은 식탁과 정갈한 씽크대에서 성가라도 흐를 듯이 고요했다.
내가 성당 안의 수녀원을 찾은 것은 부활절 행사 관계로 베로니카 수녀와 의논할 것이 있어서였다. 현관에 들어섰을 때 베로니카 수녀는 응접실 한켠에 앉아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수녀들은 청빈 서원(淸貧誓願)을 하고 평생을 가난하게 산다. 아무리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수도자이지만 낡은 스타킹 한 켤레까지 기워 신는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어느 새 내 그런 속마음을 읽었던지,
"실비아씨, 제가 궁상맞게 보이지요?"
베로니카 수녀가 내게 엷은 미소를 보내왔다. 수녀는 소중한 보물이라도 꺼내어 보듯이 스타킹을 손에 씌우고 요리조리 살피며 쓰다듬었다.

어느 시골 본당에 있을 때의 일이라고 한다.
그 때 그 일을 회상하는 수녀의 얼굴은 북받쳐 오르는 어떤 감동과 슬픔을 지그시 누르는 듯했다. 별로 문화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사는 시골의 작은 성당에서였다. 마을의 주민은 거의가 농민들이었다. 생활 수준이 낮고 살기가 어려웠으며, 젊은이들은 모두 도시로 나가고 늙은 사람들만 남아 있는 곳이기도 했다.
오직 신앙 생활만이 전부였던, 김제가 고향이라는 할머니 한 분이 계셨다. 그 할머니는 아들 형제를 두었었지만 큰아들은 공장에서 산업 재해로, 작은아들은 트럭을 운전하다 자기 과실로 죽었다고 하였다. 할머니 자신의 탄식처럼 죽지 못해 사는 삶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름진 할머니의 얼굴에는 늘 평화가 있었다. 누군가를 사랑해서 오는 그런 행복과 평화였다.
야트막한 산비탈에 밭을 일구어 밭작물을 가꾸고 그 소득으로 겨우 연명해 나가는 처지였다. 누구 하나 의지할 사람이 없는 혼자였다. 낡은 지붕은 땅에 닿을 듯 기울어지고 군데군데 풀이 무성했다. 사람이 사는 집이라고 하기엔 너무 초라한 헛간 같은 오두막이었다. 가을걷이를 끝낸 초겨울이면 방 윗목에 고구마와 잡곡이 전을 벌리고 있었다. 주일 미사에 김제 할머니가 어쩌다 오지 않을 때가 있었다. 베로니카 수녀가 미사를 마치고 곧장 그 오두막을 찾아갈 때마다 썰렁한 냉방에서 할머니는 앓고 계셨다. 처마 밑에 모아 둔 삭정이로 수녀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미음을 끓였다. 때로는 약국에도 다녀와야 했다.
명절에도 김제 할머니를 찾아오는 사람은 베로니카 수녀밖에 없는 것 같았다. 할머니에겐 친딸보다도 더 사랑스러웠고 늘 눈물겹게 고마운 수녀님이었다.
수녀들은 이, 삼 년 동안의 임기가 끝나면 다른 성당으로 옮겨간다. 신자들과 정들 때쯤이면 가방을 챙겨 들고 매정한 사람처럼 낯선 본당으로 떠나야 한다. 베로니카 수녀가 떠나야 할 때가 가까워질 무렵의 추석이었다. 명절에도 고향에 가지 못하는 수도자들이다. 신자들을 바라보며 사는 그들은 성당에 찾아오는 신자들과 사랑을 나누고 거기서 삶의 보람을 찾는다.
추석 전날, 할머니가 베로니카 수녀를 찾아오셨다. 구겨진 신문지에 싼 조그만 것을 수녀 앞에 불쑥 내밀고 할머니는 빠른 걸음으로 수줍게 성당 밖으로 나가셨다. 읍내의 시장 노점에서 파는 검정색 스타킹 한 켤레였다. 그것을 받아 든 베로니카 수녀의 가슴은 메이었다. 스타킹 한 켤레를 사기 위하여 이른 아침 불편한 몸으로 서둘러 장에 나가 헤매었을 할머니였다.
기도를 바칠 때마다 수녀는 김제 할머니를 떠올렸다.
이듬해 이월, 아직 칼날처럼 매서운 바람과 함께 봄눈이 내리던 날 베로니카 수녀는 그 동안 정든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수녀 뒤를 추위를 무릅쓰고 신자 몇 명이 못내 섭섭해서 뒤따랐다. 맨 뒤에 처져서 뒤를 따라오던 김제 할머니는 연신 눈물을 훔쳤다.
"할머니, 또 좋은 수녀님이 오실 거에요. 날씨도 추운데 어서 들어가세요."
"우리 수녀님, 인자 가시면 내 생전에는 다시 못 보겄지라우?"
늙고 병든 친정 어머니를 홀로 두고 떠나는 것만 같아서 베로니카 수녀의 가슴은 미어지는 듯했다.

떠나온 뒤 몇 년이 흘렀지만 수녀는 선물로 받은 스타킹을 차마 버릴 수가 없었다. 그 스타킹을 버리면 할머니의 마지막 사랑조차 함께 버리는 것 같아서 평생 간직할 거라는 베로니카 수녀의 얼굴은 젖어 있었다.
사랑이 담긴 선물은 누구에게나 감동을 준다. 병든 할머니는 한 달치 생활비를 다 털어서 읍내 장에 가는 버스비와 스타킹 값을 지불했는지도 모른다.
베로니카 수녀의 이야기를 듣고 내가 수녀원을 나올 때는 저녁놀이 지고 있었다. 진실한 것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것은 없다. 김제 할머니의 사랑과 베로니카 수녀의 고운 마음씨.
어디선가 라일락 향기가 나의 얼굴을 스치는 듯했다

 

 

 

 

 

쏠라에 대한 추억

김명규



남편과 아들은 개를 무척 좋아했다. 그러나 내가 평소에 개나 고양이라면 질색을 하고 싫어하기 때문에 개를 기르자는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오 년 전의 일이다. 성당에서의 구역 반 모임이 있던 날이었다. 모임을 마치고 나오려는데 그 집의 유스티나씨가 별안간 내게 자기네 강아지 한 마리를 가슴에 안겨 주었다. 장난감처럼 작고 털이 노란 강아지였다.
"뭐야?"
"실비아씨가 갖다 키워."
그 집의 개가 낳은 네 마리의 새끼 중 한 마리였다. 겨울의 찬바람 속 가슴에 안긴 강아지의 체온이 나에게 살며시 느껴졌다. 좋은 품종의 애완견은 아니었지만 눈이 까맣고 귀여웠다. 개를 좋아하는 남편과 아들에게 하룻밤만 사랑 땜을 하도록 하고 다음날 개를 잘 키우는 친구에게 갖다 주려니 하고 생각했다. 개집이 없었으므로 라면 상자에 헌 수건을 깔아 주고 강아지를 현관 안에 들여놓았다.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과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은 웬 강아지냐며 좋아하였다. 부자간에 번갈아가며 주먹만큼 앙증스레 작은 강아지를 안아 보고 쓰다듬고 야단이었다. 노란 강아지는 그날 밤부터 우리 식구가 된 것이었다. 이튿날부터 남편의 귀가 시간조차 빨라졌다.
강아지는 암컷인지 수컷인지 알 수 없으리만큼 너무나 작았다. 수놈인 것 같다면서 남편은 쏠라(태양이란 뜻)란 이름을 지어 주었다. 남편과, 고등학교 일학년이던 아들 녀석은 집에 들어서면 먼저 쏠라를 찾았다. 눈꼴이 실 정도였다. 나는 일부러 식구들 앞에서 개를 구박하였다. 하건만 밥을 주는 아줌마를 쏠라는 그냥 좋아라 했다. 쏠라는 무럭무럭 잘 자랐다. 라면 상자가 개집으로선 너무나 비좁았다. 어느 날 시장에 가서 나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개집을 사왔다. 파란 색 몸채 위에 빨간 지붕이 고왔다. 남편은 개집 추녀 밑에 검정 매직 잉크로 '쏠라 하우스'라고 영문 문패를 써 주었다.
식구들이 직장과 학교로 나간 뒤 오전이면 나는 수돗가에서 빨래를 했다. 그러면 쏠라는 내 옆으로 바짝 다가앉아 언제나 나를 지켜 주었다. 한밤중에 바깥 화장실에 가게 되면 쏠라는 자다가 일어나 화장실 문 곁에 앉아서 하염없이 내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나 혼자 집에 있는 대부분의 시간이 쏠라로 인해서 심심찮을 때가 많았다.
공연히 짜증스럽고 왠지 화가 나는 그런 날이었다. 주방에서 청소를 하다가 돌아보니 쏠라가 현관에서 마루 위로 뛰어올라 앉아 있는 것이었다. 아니 저놈이 저러다 언젠가는 안방에까지 들어올 게 아니겠는가. "쏠라아!" 화가 난 바람에 빗자루 손잡이를 거꾸로 쥐고 대가리를 내리쳤다. 탁 소리와 함께 강아지는 깨갱거리며 마당으로 내려가 온갖 아픈 시늉으로 몸을 떨었다. 내가 지나쳤다 싶어서 금세 후회가 되고 쏠라가 안쓰러웠다. 마당으로 나가 "쏠라야" 하고 다정스레 불러 주었다. 그리고 안아서 쓰다듬었다. 아픔을 참는 듯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내려놓아도 또 나를 따라오며 꼬리를 친다. 혈육간의 자식도 한 마디 큰소리로 나무라면 삐쳐서 며칠 동안 뾰로통한 법인데, 그렇게 맞고서도 금방 돌아서 주인을 반기는 쏠라였다.
그 무렵 우리 집 이층엔 할머니 한 분이 대학생인 손자들 밥을 지어주며 지내고 있었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대문을 통해 이층 계단을 오르내리는 그 할머니를 보기만 하면 쏠라는 사납게 짖어댔다. 이층 할머니는 화가 나서 대놓고 사람을 나무라듯 쏠라를 야단쳤다.
우리 집 큰딸 율리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는데 새 식구가 된 강아지 쏠라 얘길 전화로 전해 듣고 반가워하던 참이었다. 학교의 축제 기간 동안을 틈타서 율리가 집에 왔다. 대문 밖에 낯선 사람의 인기척만 있어도 목청껏 짖어대는 쏠라였다. 그런데 율리를 보고는 꼬리치며 반기는 게 아닌가. 율리가 우리 가족이라는 것을 쏠라는 어떻게 알았을까. 참 신기한 일이었다. 쏠라에 대한 사랑이 나도 모르게 깊어가고 있었다.
봄이라고 하지만 아직도 추운 날, 현관 청소를 하려는데 쏠라가 앉았던 자리에 핏방울이 떨어져 있었다. 저녁에 남편에게 그 얘길 했다. 남편은 약장에서 머큐로크롬을 찾아 가지고 나왔다. 쏠라를 눕히고 상처가 난 듯 피가 나는 부분에 약을 발랐다.
일주일쯤 지나서였다. 전에 없던 일로 고만고만한 또래의 개들이 우리 집 대문 앞에 와서 문짝 밑으로 쏠라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쏠라도 대문 밑의 좁은 틈새로 주둥이를 바짝 대고 뭔가 밀어를 나누는 것만 같았다. 어떤 느낌이 왔다. 쏠라가 실은 암놈이었구나. 남편에게 새로운 사실을 전화로 알려주고 우린 웃었다.
새하얀 털에 검은 점박이 개가 쏠라의 애인이 되었다. 쏠라는 이층 계단으로 올라가 날마다 아래를 내려다보며 그 애인을 기다렸다. 아니나다를까 뉘네 집 애견인지 방금 목욕을 한 듯한 깨끗한 털을 흔들며 쏠라의 애인이 찾아와서 나는 대문을 열어 주었다. 밀린 설거지를 하고 책을 읽으며 나는 쏠라가 밖에 나갔다는 사실을 종일 잊고 있었다. 애인과 함께 집을 나간 쏠라는 그날 밤 돌아오지 않았다. 한밤중까지 식구대로 쏠라를 부르며 동네를 샅샅이 찾아다녔으나 쏠라는 그림자도 없었다. 그 이튿날도, 또 그 다음날도 쏠라는 오지 않았다. 텅빈 개집이 그렇게 허전할 수가 없었다. 영락없이 식구 하나를 잃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다른 집 개 짖는 소리가 들릴 때면 그 집이 행복해 보였다. 추위에 어디서 떨고 있을까. 누구에게 잡혀갔을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고 손에 일이 잡히질 않았다. 쏠라가 집을 나간 지 닷새째 되던 낮이었다. 뭔가 대문을 긁적거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쏠라였다. 대문을 여는 순간 쫓기듯이 쏠라가 황급히 달려들었다. 나도 모르게 "오매 내 강아지!" 하고 소리를 쳤다. 끄긍, 끄긍, 끄긍. 쏠라가 애절하게 울부짖었다. 보고 싶었어요, 너무나 보고 싶었어요. 아줌마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요 라고 우는 듯하였다. 나도 반가워서 울었다. 갈비뼈가 드러난 정도의 야윈 몸으로 쏠라는 돌아온 것이었다. 여기저기 그을음이며 거미줄이 묻었고, 마른 나뭇잎도 노란 몸뚱이에 붙어 있었다.
쏠라를 다독거려 진정시키고 나는 냉장고에서 돼지고기 한 덩이를 꺼내 냄비에 삶았다. '돌아온 탕아'처럼 쏠라의 귀환이 그저 고맙고 기뻤다. 삶은 고기를 삽시간에 먹어 치운 쏠라는 온 집안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자기의 체취를 확인하고는 쏠라 하우스에서 잠이 들었다.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한다. 그러나 인간이 한낱 개만도 못한 일을 저지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헐뜯고, 배반하고, 심지어 끔찍한 살인까지 서슴지 않는 범죄가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많이 저질러지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죽어도 주인을 배신하지 않는 개들이 오히려 측은하다. 주인을 불에서 구하고 죽은 오수의 충견이라든가 대전으로 팔려갔다가 진도의 주인을 끝끝내 찾아온 백구의 이야기들은 미담 이상의 훈훈한 감동으로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적셔준다.

 

 


 

개에 관한 이견|밍기의 방
이장민 | 조회 36 |추천 0 |2002.10.30. 21:38 http://cafe.daum.net/poemory/FwE3/13 

경우에 따라 '개만도 못한 ~'이란 말을 쓰는가 하면, '개 같은 ~'이란 말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의나 신뢰보다는 자기 이익이나 기호에 따라 적절하게 변신하고 배신하는 행위, 이거야 말로 지탄을 받아야 할 경우가 허다합니다. 하지만, 행하는 일이 상식에 어긋나고 사회정의에 배치될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맹목적으로 추구하고 추종하는 경우, 이것 또한 답답할 일입니다.
요컨데 개가 가지고 있는 습성에 대한 두 가지의 배치된 모습은, '개만도 못하다'거나, '개 같다'는 말 중의 하나를 선택할 때 상당한 이유가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런 뜻에서 밍기님의 수필 "쏠라에 대한 추억'을 관심 있게 읽었습니다. 흔하다고 할 수 있는 소재를 순수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글쓴이의 마음을 어려움없이 접할 수 있었습니다. 아하, 이 카페에서 맛보는 은은한 향의 차 한 잔이 생각나면 또 밍기님의 방에 들르겠습니다.

.....그건 그렇고요. 세리는 많은 사람들의 축복 가운데 혼례식을 잘 마쳤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다음 승일이는 광주에서 판을 벌립시다. 물론 광주도 고향은 아니지만, 제2의 고향이랄 수 있지 않습니까. 서울은 제3의 고향이 된다고 치더라도 말입니다. 그렇다면 제1과 제3의 중간인 제2가 무난할 것 같아서요.

 

 

 

귀부인 연습

김명규


강남 아줌마는 골프 웨어를 운동할 때만 입는다.
강북 아줌마는 그것을 외출복으로 입는다.
강남 아줌마는 파스텔 톤의 옷을 입고, 강북 아줌마는 검정색 옷을 많이 입는다.
강남 아줌마는 머리 염색을 하지 않고, 강북 아줌마는 컬러풀한 물을 들인다.

심령술사처럼 사촌동생은 차림새를 보아 사람의 환경을 내다보는 기술을 터득하고 있었다. 서울의 유명 백화점과 갤러리아 명품관 매니저로 그는 십 년이 넘게 일해 왔다. 그런 사촌이 전남 영광의 친정 집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우리 집에 들러 하룻밤을 쉬어간 것은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명품만을 찾아 드나드는 부유층 고객들만 접하면서 일해 온 탓인지 동생은 자기가 그런 고객인 양 눈도 마음도 하늘에 높이 떠 있었다. 관습과 취향도 환경에 따라 만들어질까. 그는 아침 식사로 우리 집 냉장고를 뒤져 토스트 두 조각과 싱싱한 토마토 한 개와 내림커피를 머그 잔에 부어 물처럼 마셨다.
소지품을 담아 들고 온 가방을 거실 한쪽에 놓아두었던 걸 동생은 펼쳤다. 내게 눈이 선 외제 화장품들이 줄지어 나왔다. 거울을 앞에 놓고 들여다보면서 내가 부엌일을 다 마칠 때까지 화장을 한 얼굴을 이쪽저쪽 살피면서 눈을 깜박거려보기도 하였다. 그런 동생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모델이나 배우 못지 않게 멋있어 보였다. 초등학교 오 학년, 삼 학년의 두 아이를 둔 엄마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군살이 없이 가꾼 몸매와 훌쩍 큰 키가 더없이 돋보여 아름다웠다. 농촌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누런 콧물을 흘리면서 배통만 풍선처럼 불러 있던 촌뜨기가 언제 저런 멋쟁이가 되었나 놀라웠다.
동생은 내 마음을 흔들어놓고 갔다. 처음 현관에 들어서면서부터 "사모님 홈 패션이 그게 뭐야?" 하고 멋과 멀어져 있던 나를 깨웠다. 내가 쓰는 기초 화장품이 몇 개 놓인 것을 들춰보면서 이걸로 어떻게 메이컵을 하고 다니냐는 둥 수선을 떨었다. 핸드백에서부터 신발장의 구두까지 열어보는 동생 앞에서 나는 감사를 받고 미비한 것을 지적 받는 기분이었다. 그런 동생이 되레 고마웠고 시들어 가는 풀잎에 맑은 물을 흠뻑 적셔준 것 같았다. 그가 남기고 떠난 말들이 여운으로 남아 솔깃이 나를 들뜨게 하는 것이었다.
"언니, 옷은 싼 걸로 입어도 구두와 핸드백만큼은 꼭 명품을 쓰세요. 그리고 젊게 보이기 위해 청바지는 입지 말고……."
창밖에는 올봄 새로 핀 라일락 잎사귀에 봄비가 앉으며 소근거렸다. 나는 원두 커피를 안치고 전원을 꽂았다. 캐롤 키드의 휀 아이 드림(When I dream), 생크림처럼 부드러운 음악도 준비하였다. 오늘 같은 날 동생이 말하던 귀부인 연습을 한번 해보고 싶어서다. 원두 커피는 압구정동 사모님 커피이고 인스턴트는 일반 서민 커피라고 불리운다. 나는 우아하게 원두 커피를 들어본다. "핸드백과 구두는 명품을…" 사촌동생의 말이 훈풍처럼 나를 스친다. 내 키보다 높은 대형 신발장 안에는 출근하는 남편의 구두보다 내 신발이 훨씬 더 많다. 말바우 시장에서 샀지만 뒷굽도 닳지 않은 멀쩡한 합성 비닐 구두가 이멜다의 것 못지 않게 즐비하다. 시장에서 사서 신은 구두가 지금껏 내 품위를 떨어뜨렸을 것 같다. 모조리 관급봉투에 담아내고 싶다. 검정 고무신이 너무 질겨서 새 꽃신을 신고 싶으면 엄마 몰래 신던 신발을 면도칼로 에었던 시절이 아스라하다.
마릴린 몬로가 신었다던 페라가모 구두는 어떻게 생겼을까. 그 여배우 한 사람만을 위해 지었다는 구두. 페라가모 구두는 지금도 명품관에서 팔고 있다던데 나는 아직 본 일조차 없다. 값이 얼마인지 알 수 없으나 내가 백화점에서 디자이너 작품 옷을 구경하려고 용기를 내어 점포 안까지 들어서면 점원은 나를 한번 훑어본 후 자기 하던 일만 계속하지 않았던가.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된다더냐던 계 모임 때 만난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귀부인 폼을 재보던 내 자세를 풀고 음악을 껐다. 그리고 그 말을 되새기며 한바탕 퍼질러 후련하게 웃었다. 개심심해서 평소엔 먹지 않던 원두 커피도 설거지통에 버렸다. 그러나 페라가모에 대한 동경은 사그러들지 않았다. 얼마 남지 않은 어버이날을 기대하면서. 그 날이 오면 직장에 다니는 우리 아이들이 내게 무엇을 선물할까 걱정해 오는 것을 나는 알기 때문에. 나는 명품의 이름을 전화번호 수첩 맨 뒷장 빈칸에 큰 글씨로 적어 놓았다. 딸에게서 전화가 걸려오면 얼른 생각이 안 날지도 모를 테니까.
상자 속에, 포장지를 뜯어내기 아까울 만큼 세련된 색종이에 싸인 페라가모 핸드백을 택배로 받은 것은 어버이날 이틀 전이었다. 그 날 그 백을 들고 아빠랑 레스토랑에 가서 맛있는 식사를 하라는 딸의 고운 편지가 가방 안에 들어 있었다. 외출할 때를 기다리면서 낮은 장식장 위에 가방을 올려놓고 틈만 나면 손에 들어보았다. 모임에 나갈 때나 성당에 갈 적에도 페라가모 핸드백을 소중히 모시고 다니면서 다른 사람 눈에 띄기를 바랐지만 그것이 명품이라는 걸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새 가방을 들었는데도 눈길조차 오지 않았다. 내가 사는 곳은 가진 자가 누리며 사는 압구정동도 청담동도 아니다. 내 주위에서 알아보지 못하는 명품은 내게도 낯설기만 하다. 화장실에 들어가면서 내 앞에 서 있던 여자가 잠시 내게 맡겨놓은 물건처럼. 다만 그것은 내가 손에 들면 금방 귀부인이 될 것만 같았던 엄마의 환상을 깰 수 없었던 딸의 효성을 받은 것이라 여길 뿐이다.
나는 자랑스런 핸드백을 들고 강남이 아닌 우산동 거리 시내버스 정류장에 서 있다.

 

 

 

 




당신도 한 번 당해 봐

김명규


수학 공식이나 화학 기호를 못 외우는 것은 내가 살아가는 데 별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미술 과목이 나의 삶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을 줄은 몰랐다. 내 그림 솜씨는 예나 지금이나 초등학생 수준에도 못 미친다. 손재주가 없어 여자로서 얼굴 화장을 할 때마다 애를 먹는다.
입술 윤곽을 양귀비처럼 예쁘게 그리지 못해 립스틱을 입술에 직접 대고 대충 문지르기 일쑤였다. 그럴 때면 스케치 선을 넘어 물감이 번져 있는 것처럼 입술 주위까지 루즈가 묻어 엉망이 되곤 하였다. 그런 나를 보고 직장 동료들은 화장지를 꺼내어 닦아주기도 해서 창피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결혼 전에도, 결혼 후에도 한동안 얼굴 화장을 하지 않았다. 남에게 흉잡혀 웃음거리가 되느니 스킨과 로션만 얼굴에 발랐다. 우리 집 큰애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학부형이 되었을 무렵에는 얼굴에 잡티가 생기고 피부는 탄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입학하던 날부터 할머니 손을 잡고 학교에 갔던 어린 딸이 그날만은 학부형 회의가 있으니 엄마가 꼭 와야 한다고 몇 번을 다짐하였다.
"엄마, 이쁜 옷 입고 얼굴에 화장칠도 이쁘게 하고 와 응?"
사랑스런 딸의 부탁이 내내 부담스럽게 마음 한켠에 걸려 있었다. 티슈에 물을 뿌려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던 화장품 용기들을 말끔히 닦았다. 뚜껑을 열어보니 내용물이 오래 되어 변질된 것도 있었고, 공기에 닿았던 부분이 굳은 것도 있었다. 그런 윗 부분은 덜어내고 남은 것이 아까워 쓰기로 하였다. 아이펜슬을 손에 쥐고 눈 가장자리로 가져가는데 손목이 나도 모르게 떨렸다. 양쪽에 그려 넣은 눈썹이 좌우의 균형이 맞지 않고 위아래로 오르내렸다. 그런 눈썹을 지웠다가 다시 그리고, 또 그렸다 지우고, 반복되는 과정에서 눈두덩은 벌겋게 부어 올랐다. 한 번만 더 연필심으로 자극을 주면 부어 오른 눈두덩에서 선홍색 피가 터져 흐를 것처럼 쓰리고 아팠다. 회의 시간은 몇 분 남지 않았고 딸아이가 눈이 빠지게 엄마를 기다릴 걸 생각하니 마른 장작 타듯 조급한 마음이 타들어 갔다.
눈썹 주위의 통증을 느끼면서 택시를 잡아탔다. 강당에서 회의를 하는 동안에도 나는 손거울을 꺼내어 슬쩍슬쩍 내 눈썹을 살펴보았다. 그 사이에 핏발이 삭고 부기도 가라앉고 있었다. 회의가 끝나고 교실로 돌아와 담임 선생님과 정면으로 인사를 나눌 때에도 얼굴을 제대로 들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교실 뒷벽에 걸린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아이펜슬이 스쳐간 자국이 여러 줄이 되어 희미하게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나를 보던 담임 선생님의 눈길이 아래로 떨구어지던 이유가 짐작되던 순간 유리창에 매달린 커튼 뒤로 내 얼굴을 숨기고 싶었다. 눈썹 하나 제대로 못 그리는 엄마를 둔 딸에게 미안한 생각뿐이었다.
그 후로 외출해야 될 일이 생기는 날이면 이른 아침 남편보다 먼저 세수를 하고 연필을 남편의 손에 쥐어주면서 내 얼굴을 바짝 디밀었다. 문학 동인지의 표지 그림이나 책갈피의 컷도 곧잘 그리는 남편이었다. 급히 출근을 서둘면서도 남편은 나의 맨얼굴에 대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근사하게 눈썹 그림을 그려주었다.
팔십년대 후반쯤에 서민 주부들을 대상으로 안방에서 눈썹 문신과 양잿물로 점을 빼는 시술이 성행할 때였다. 대개는 미용사가 불법으로 계모임을 하는 장소에서나 동네 주부들이 열 명 이상 모이게 되면 은밀하게 출장을 나왔다.
급히 와 보라는 희경이 엄마의 전화를 받고 그 일이 벌어지고 있을 걸 상상하며 옷을 입었다. 그날 따라 호남지방에는 대설주의보가 내려졌고 하늘을 열어제친 듯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희경이네 집 현관문을 열자 좁은 예배당 문앞처럼 빼곡이 들어찬 신발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있었다.
안방 한 가운데 누군가 한 사람 누워 있었고, 흰 가운을 입은 미용사가 병원의 간호사처럼 약병을 들고 있었다. 열 서너 명의 낯익은 동네 아줌마들이 이마를 서로 부딪칠 듯이 맞대고 둘러앉아 내가 들어서는 것에 기척도 하지 않았다. 누워 있던 여자는 희경이네 이층에 세 들어 살던 정우 엄마였다. 정우 엄마는 서른 대여섯쯤이었지만 몸집이 크고 비대하여 나이를 훨씬 웃돌아 보였다. 게다가 주근깨와 점이 얼굴에 빤한 데가 없어 별명이 '파리똥'이었다. 얼굴에 점이 제일 많은 사람부터 순서가 정해진 모양이었다.
미용사는 주사 약병만한 작은 유리병에서 면봉으로 약을 묻혀 조심스럽게 정우네의 얼굴에 대고 살풋살풋 눌러대었다. 이를 악물고 정우네는 아픔을 참아내고 있는 것 같았다. 모여 있던 여자들은 "아파? 많이 아파?" 하고 이구동성으로 캐물었다. 그 말에 대꾸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참아내는 아픔을 속으로만 저마다 가늠하고 있었다. 아마도 파리똥이라는 얼굴의 딱지를 기어이 떼내고야 말리라는 비장한 각오를 한 것 같았다.
열세 명의 여자가 점을 빼려고 모였다가 정우네 한 사람 만으로 미용사의 수입을 더 이상 올려줄 수 없었던 것은 아름이 엄마 때문이었다. 두 번째로 미용사에게 얼굴을 맡겨 예뻐지고 싶은 욕망을 충족시키려 했던 아름이네는 면봉이 얼굴에 처음 닿자 큰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나는 것이었다.
"오매, 아픈 것. 아이구 아퍼. 나는 안할라요. 점 빼려다가 사람 죽겄소!"
아름이네가 괜한 엄살을 떤 것만은 아닌 듯 싶었다. 아름이 엄마는 주섬주섬 방바닥에 놓여 있던 코트를 집어 입더니 방문을 열고 미련 없이 나가버렸다. 수백 명의 얼굴을 손댔지만 이 동네 아줌마들처럼 엄살 떠는 사람들은 처음 봤다면서 미용사는 불쾌한 듯 약병들을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그럼 다음엔 눈썹 문신 하실 분!"
그는 낱낱의 얼굴을 둘러보며 찾았다. 방안의 여자들은 붙잡혀 온 포로처럼 떨고 있었다. 미용사의 시선이 내게서 머물렀다. 메이컵을 할 때마다 괴로웠던 일들이 필름처럼 스치면서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을 먹었다. 나는 도마 위의 생선처럼 누워 그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그는 먼저 아이펜슬로 나의 눈썹 모양을 예쁘게 그렸다. 누워 있는 나에게 눈썹 그려진 모양을 거울로 비춰주면서 맘에 드느냐고 물었다. 나를 지켜보고 있던 여자들은 그 모양대로만 한다면 새 인물이 되겠다며 긴장을 늦추고 새로운 호기심에 생기가 돌았다. 주사 대롱에 새까만 먹물을 담고 마취도 하지 않은 채 바늘은 콕콕콕 내 생살을 파고들었다. 점을 빼는 것보다 전혀 아프지 않다던 미용사의 거짓말에 나는 이미 넘어간 뒤였다. 칼끝으로 쪼는 것 같은 아픔을 나는 죽은 듯이 참아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 보니 별로 아프지 않나 보다고 여자들은 안심이 되어 속삭였다. 그러나 나는 이런 아픔을 나 혼자만 당하는 것이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스쳤다. 어디 당신들도 한 번 당해 보라지…. 내색을 하지 않고 감고 있는 내 눈에서 아픔을 참다못해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미용사는 얼른 탈지면으로 내 눈물을 닦아주곤 하였다.
그 다음 사람도, 또 다른 이도 내가 아픔을 참았던 속마음이 이심전심으로 전해졌는지 난도 당하는 아픔을 참고 소리 없이 눈썹 문신을 그려 넣었다. 그 날 눈썹 문신을 해 넣은 여자들은 모두 여섯 명이었다. 미용사가 대금을 받아 챙겨들고 우리보다 먼저 희경이네 안방을 빠져나간 뒤에도 문신을 한 여자들은 아무도 아프더란 말을 꺼내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모두 쓰디쓴 약을 입안에 하나 가득 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얼마 전 지리산 콘도에 동창들과 놀러가서였다. 이제는 돋보기를 써야만 그나마 눈썹을 그릴 수 있다면서 금순이는 탄식을 했다. 그렇지만 이 나이에도 나는 눈썹을 그리기 위해 돋보기를 쓸 일은 없었다. 그 때 희경이네 안방에서의 바늘로 찌르던 고통은 잠시였고 그 누구와의 대면에서도 딸아이의 선생님 앞에서처럼 더 이상 내 얼굴을 죄인처럼 숙이지 않아도 좋았다. 눈썹과는 달리 내 입술의 뾰족한 산 그림은 언제나 병(丙)을 맞던 내 미술 실력을 아직도 말해주고 있지엄마처럼 살지 않을래

김명규


길에서 만난 영은 엄마는 내 손을 잡은 채 눈물을 글썽이더니 울음소리가 점점 고조되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았다.
삼월. 아직도 매서운 바람과 함께 희끗희끗한 봄눈이 꽃잎처럼 날리고 있었다. 영은 엄마가 우는 이유를 나는 금방 알 수 있었기에 나도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우리는 그 해 큰딸들을 서울의 같은 대학에 입학시켰다. 자식을 낳아 길러 처음으로 객지에 떼어놓고 돌아오던 길의 동병상련이었다. 우리 둘은 아이들을 서울에 두고 떠나올 때 좌석에 나란히 앉았었지만 눈물 때문에 말문을 열지 못했다. 희망하는 대학교에서 학력고사를 치르는 동안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신림동 하숙집에 머물렀다. 삼박 사일 동안이었지만 자식을 둔 엄마끼리의 일치감에 정이 들었다. 그 후 영은 엄마를 우연히 만난 것이었다.
아이들이 입학한 지가 이십 여일 남짓 되었었나 보다. 영은 엄마는 딸이 보고 싶어서 참을 수 없었던 감정이 나를 보자 터져나온 것이었다. 해질 무렵 수돗가에서 쌀을 씻을 때, 시내버스 안에서 딸 또래의 여학생들을 보고 있을 때, 나도 얼른 달려가서 찾아보고 싶을 만큼 그리웠다. 딸이 쓰던 방문을 열면 아직도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처럼 눈에 밟혔다. 영은이는 입학 후 밤마다 울면서 전화를 해 엄마의 마음이 더 아팠던 것 같다. 일주일에 한두 번 전화를 했던 우리 아이는 목소리가 밝고 명랑해서 낯선 대학 생활에 빨리 적응해 가려느니 생각됐다. 그러나 나는 딸을 기숙사에 둔 것이 마치 시집보낸 것처럼 서운했다.
학교 구내 식당에서 먹는 밥이나 기숙사의 식사가 부실해 영은이에게는 매월 간식비를 넉넉히 보내준다고 그의 엄마는 내게 전화했지만 우리는 그만한 형편이 안 되었다. 계절이 바뀌어 과일 몇 개와 옷가지를 싸들고 찾아간 캠퍼스 맨 끝에 있던 기숙사 건물은 언제나 쓸쓸해 보였다. 방안 넓은 유리창 밖 무성한 나무들은 그린 듯이 서 있었고, 그 창가에 서서 집을 떠나온 외로움에 몰래 울었을 딸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그런 딸을 나는 차마 가슴에 안아볼 수가 없었다. 길에서 만난 영은 엄마처럼 감당할 수 없는 감정에 딸의 마음까지 우울하게 할 것 같아서였다. 나는 그걸 억제하려고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곤 했다. 기숙사에서 딸을 잠시 만나고 당일에 돌아와야 했던 나는 달리는 버스 창 밖으로 보이는 고속도로가 반짝이는 강물처럼 아른거렸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방안 청소를 시켰을 때, 공부하는 것보다 청소가 훨씬 어렵다면서 짜증을 내기도 했지만 탓할 것이 없던 애였다. 여느 어머니들과 다를 것 없는 보편적인 모성을 지닌 나였지만 딸이 대학생이 되었어도 어린 젖먹이처럼 안 잊혔다. 입학 후 여름방학이 되기 전까지 영은 엄마는 딸 생각이 날 때마다 거의 매일 나에게 전화를 했다. 그 횟수가 점점 멀어져가던 것으로 보아 딸을 떼어둔 서운함에서 익숙해져 가리라 생각됐다. 나도 그러했다.
이 년간의 기숙사 생활을 신입생 후배에게 물려주고 제 힘으로 자취방을 얻어 이사하게 되었을 때에도 이삿짐을 모두 정리한 후에야 딸은 전화만 했다. 대학 사 년간을 장학생으로, 게다가 아르바이트까지 해야만 했던 그 좁은 어깨가 얼마나 무거웠으랴.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돌아와 냉장고 문을 열어보지만 초콜릿도 아이스크림도 찾아낼 수 없어 힘없이 냉장고 문을 닫으면서 "나는 이렇게 안 살 거야. 맛있는 것 냉장고 속에 가득가득 채워놓고 살 거야." 하고 울먹였다. 그리고는 조용히 책상 앞에 엎드려 있던 딸이었다. 학교에서 일등을 할 때마다 기껏 자장면이나 책을 선물로 사주었을 뿐이었다. 초·중·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일등을 놓쳐본 일이 없어 그 책들이 책꽂이에 가득 찼다. 착하고 대견스럽기만 한 딸에게 어미로서 해준 것이 하나도 없는 것만 같아, 안타까움만이 언제나 물결처럼 다가온다.
대학 삼 학년이 되면서 본인의 진로가 정해지고, 시험에 도전하기 위해 학원이나 도서관에서 밤샘하기가 일쑤였다. 그 때 어려웠던 것은 배고픔이었다고 훗날에 딸은 말하였다. 이른 아침 도서관에 가기 위해 자취방을 나서면 뉘 집에선지 생선 굽는 냄새가 허기를 재촉했고 그럴 때면 엄마 생각이 났었다고 한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두 연년생의 동생과 아빠의 출근 때문에 엄마의 손길은 저에게 닿을 수 없었다. 자정이 훨씬 지나 자취방에 전화를 하면 빨래하다 달려와 숨소리가 헐떡거렸다. 비타민 한 병도 먹여보지 못했던 딸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진 엄마였다. 어려서 먹고 싶은 과자가 넉넉지 않아 가난을 싫어하던 아이, 아빠가 받는 적은 월급 생활을 원망하던 아이, 공부를 하면서 졸음이 올 때면 나는 이 길이 아니면 죽는다는 각오를 수없이 되풀이하였다고 하였다.
모든 일의 영광 뒤에는 고통과 인내가 함께 있다. 박세리 선수가 미국의 필드를 강타했을 때 우리는 안방에 편히 앉아 그의 단편적인 영광만을 볼 수 있었다.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서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 낸 것이 아니었다. 물론 박 선수를 길러낸 배경에는 그의 훌륭한 아버지가 있었다. 아파트 층계를 거꾸로 걷는 훈련에서부터 한밤중에 공동묘지를 달리며 담력을 기르는 훈련에 이르기까지 그 많은 노고를 아버지와 함께 하였다고 한다. 죽음보다 강한 의지와 인내가 아니고서는 성공할 수 없다. 어느 발레리나가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인터뷰하던 일이 생각난다. 발가락에 염증이 생겨 뼈를 깎는 아픔을 참아내면서 공연을 해야 한다던 그의 모습에는 영광보다 더 큰 고통의 흔적들이 스며 있었다.
딸은 대학 졸업과 함께 스물 셋의 나이로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합격자 발표가 있던 날 딸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 저를 낳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실로 신이라도 감동했을 노력이었음을 나는 안다. 연수원에 입소하기 전 며칠 동안 집에 내려와 있을 때에도 메이크업 교실과 차밍스쿨에도 나가는, 여자로서의 소양을 다듬던 딸이 기특했다. 그리고 내 손을 쥐고 소곤소곤 말했다. 사시에 합격한 사람은 삼백 명이나 되니 저 혼자서만 해낸 일이 아니므로 엄마는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딸 자랑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그 약속을 받아냈다. 사법 연수가 끝나고 상위 5 퍼센트의 성적으로 마쳤다는 것을, 딸의 사진과 함께 신문에 실린 기사를 읽고서야 알게 되었다.
어느 젊은이들과 다를 바 없이 갈색 머리에 멋을 부리는 신세대다. 그리고 엄마에게 달려들어 어리광을 부리는 어린 딸이다. 아직도 야무진 꿈과 야망을 위해 끝없이 도전하는 딸을 멀리서 나는 바라볼 뿐이다. 보람된 일을 이루며 살고 싶다는 그의 뜻에 신의 은총이 함께 하기를 나는 기도할 뿐이다.



냉장고 앞에서 사진 찍고

김명규 wpoemory@hanmail.net


십삼년 전 연년생의 세 아이를 데리고 우린 시골에서 도시로 전근된 아빠를 따라 이사를 했다.
나일론 끈을 얼멍하게 엮은 주머니에 김치 단지를 넣고 가방 줄을 무거운 돌에 매달아 우물 속에 띄워두고 살았지만 젊었었기에 꿈을 가진 아름다운 시절이기도 했다. 냉장고라는 것은 정말 잘 사는 중산층이 아니면 엄두도 낼 수 없었던 비싼 물건이었기 때문에 신혼 생활을 할 때만 해도 나는 냉장고를 구경도 못 했었다.
김치를 담근 지 하루만 되어도 시어져서 먹을 수가 없게 되는 폭염에 시어머님은 아이스박스에 넣을 얼음을 사기 위해 새벽같이 동네로 나가셨다.
그 시절 70년대엔 얼음을 사기 위해서 모여드는 사람들은 마치 명절을 앞두고 고향으로 가기 위해 열차 표를 예매하려고 밀린 인파만큼이나 길게 몇 십 미터의 행렬이 늘어서곤 했다.
나는 애들 아빠의 아침을 지어야 했으므로 연로하신 시어머님께서 얼음을 구하러 나가시지 않으면 안 되었다. 새벽 네 시쯤 동이 트자마자 나가신 시어머님은 아침을 먹고 설거지를 끝낼 무렵에야 플라스틱 그릇에 얼음 한 덩이를 담아들고 돌아오셨다. 노인네가 새벽마다 그 고생을 하시니 가슴이 아프고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나마도 얼음을 채워둔 다음날 아이스박스를 열어보면 다 녹아버린 얼음 물 위에 김치 단지만 동동 떠 있는 것이었다.
도시로 나와 전세방을 얻어 사는 것조차 생활에 부담이 컸던 까닭에 우리에게 냉장고란 꿈도 꾸기에 일렀다. 그러나 시어머님의 고생하시는 모습이 더 이상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내핍 생활을 각오하면서 우린 큰맘먹고 십 개월 월부로 냉장고를 들여놓았다. 마루 한 구석을 차지하고 서 있는 냉장고를 볼 때마다 정말 우리도 남부럽잖은 부자라도 된 것 같았다.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신 아이들의 큰아빠가 물려주고 가신 낡은 카메라로 우리는 가끔씩 가족 사진을 찍곤 했다. 냉장고를 배경으로 올망졸망한 세 마리 토끼 같은 연년생의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을 카메라에 담는 게 즐겁고 흐뭇했다. 그리곤 친척들에게 자랑이라도 하듯 그런 사진을 한 장씩 부쳐 보내곤 했다. 그것이 우리 젊은 날의 한동안 행복이었다고 생각된다.
이제는 냉장고도 최신형으로, 컬러 텔레비전도 최신형으로 바꿔가며 산다. 그러면서도 또 무엇인가 부족하여 또 채우려는 욕망은 끝이 없는 것 같다. 마치 아이스박스 속에 담아도 담아도 녹아버리고 마는 그 십여 년 전의 얼음덩이처럼.

 

 

 

색소폰 연주자의 비애

김명규


오 대니 보이.
언제 들어도 낮고 부드러운 색소폰 소리는 우리의 가슴을 감미롭게 파고든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무대 한 쪽에 어두운 조명 아래 서서 '밤 안개'를 연주하던 이봉조씨의 색소폰 연주는 한때 우리 나라의 안방을 낭만으로 물들이기도 했었다. 낮게 가라앉은 저음이기에 그 어느 악기보다도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데는 색소폰보다 더 좋은 악기는 없을 것 같다.
편한 자세로 누워 책을 읽던 남편은 갑자기 깔깔깔 웃었다. 감정이란 금방 전염되는 것이어서 나는 영문도 모르면서 덩달아 웃었다. 남편이 읽고 있는 글은 일본 여류 작가의 수필이었다. 일어나 앉으며 남편은 그 내용을 들려주었다.
좀 추잡스런 이야기였다. 사람은 화장실에서 남의 대변을 보면 온갖 인상을 찌푸리고 질겁하지만 자기가 내놓은 것을 보고는 풍부한 분량에 대부분 흐뭇해한다는 것이었다. 아닌게아니라 웃음이 절로 나오는 얘기였다.
얼마 전 나는 성인병 예방이나 치료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자연 건강 식품을, 효험을 본 친구로부터 소개받아 먹게 되었다. 약을 처방하는 한의원은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오랜 기간 먹어두면 무병 장수한다고 호언 장담을 했다. 그리고 그걸 먹으면서부터는 체내의 좋지 않은 가스가 배출되기 때문에 방귀 냄새가 고약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몸에 좋다는데 나 혼자만 먹기가 식구들에게 미안해서 남편과 딸도 함께 그 건강 식품인지, 약인지를 열심히 복용하게 했다.
약을 먹기 시작한 지 닷새쯤 되면서부터 식구들은 시도 때도 없이 독한 방귀를 뀌기 시작했다. 때마침 겨울이고 보니 세 식구가 모여 있는 저녁이면 거실 안이 온통 구린 가스 냄새로 서로 다투었다. 거실에서 베란다로 나가는 유리문이 밑바닥의 레일 바퀴가 깨져서 열기가 힘들고 빡빡했다. 딸이나 남편이나 자기가 방귀를 뀔 때는 예고 없이 나오는 대로 뀌어대면서 내가 방귀를 뀌면 방밖으로 나가서 일을 보지 않는다고 여지없이 나무랐다. 내가 베란다로 나가려고 그 빡빡한 유리문을 힘을 주어 여는 순간 미처 밖으로 나가지 못한 채 방귀가 나와버리곤 했다. 어쩌다 소리 없이 조용히 방귀를 뀌었지만 그 지독한 냄새는 숨길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 냄새란 풍겨나가기 마련이었다. 그럴 때면 식구들은 곱지 않은 눈으로 가스 무단 방출자를 수색하였다. 뀐 사람은 주눅이 들어 꼬리 내린 강아지처럼 수그러들었고 남은 사람은 언성을 높여 열을 내었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방귀에 대한 집중 탐구를 방송한 적이 있었다. 방귀를 자주 뀌는 사람의 팬티는 뒷부분에 콩알만한 구멍이 나 있는 것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주기도 하였다. 또 많은 사람의 방귀 가스를 모아서 성냥을 그어 대보며 불이 붙는 희한한 실험도 보여주는 것이었다. 방귀 가스가 불이 붙는다는 사실은 우습고 재미있었다. 방귀를 못 뀐 것이 원인이 되어 중병을 앓았다는 체험자의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것을 참는다는 건 건강상 좋지 않다는 게 분명하다.
지난여름이었다. 저녁 찬거리를 사러 동네 슈퍼마켓을 다녀오던 길이었다. 집에서 나올 때부터 뱃속이 거북스레 부글거렸다. 슈퍼마켓 안에는 사람들이 붐볐으므로 나오려는 방귀를 억지로 참아내었다. 아파트 담 아래를 걷고 있는데 손에 무거운 것을 들고 있는 탓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마침 내 앞뒤로 오고 가는 행인은 아무도 없었다. 바로 이때다 싶어 나는 아랫배에 힘을 주어 후련하게 뿜어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굵은 저음의 목관악기 색소폰 소리가 도막도막 들렸다. 더위가 싹 가시면서 시원함을 만끽하고 있는데, 아주 가까운 데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런 낭패가 또 있나. 내가 걷는 보도 옆의 차도에 차창을 열어제친 승용차들이 줄지어 신호 대기 중이었던 것을. 나는 양손에 든 장바구니를 내팽개치고 뛰고 싶었다. 하도 우스워 빠른 걸음에다 웃고 보니 또 아랫배에 힘이 주어져 남은 가스가 후렴이 되어 나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었다.
나는 큰 잘못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엘리베이터 안에서 미처 숫자 단추를 누르는 것도 잊은 채 한참을 서 있었다. 엘리베이터 벽에 붙은 거울에 비치는 내 얼굴은 아직도 붉은 빛깔의 여운을 띠고 있었다. 색소폰 연주자가 한껏 폐에서 바람을 뿜어내는 순간의 그 붉은 뺨의 홍조를.

 

 

 

우리 애기 물어내 놔

김명규


"십구만팔천 원인데요."
내 귀를 의심하여 카운터의 아가씨에게 되물어 보았으나 확실히 십구만팔천 원이었다. 일식집에서 세 식구가 먹은 한 끼의 점심값이었다. 너무나 비싼 식대였다. 이 음식점에 멋모르고 들어온 게 몇 번이고 후회가 되었다.
하얀 무채 위에 포를 뜬 참치 살이 꽃잎처럼 가볍게 얹혀 나왔다. 참치 살을 김에 싸서 입안에 넣으니 신선하고 고소한 맛에 보드랍게 넘어갔다. 감칠맛이 났다. 시집보낸 딸이 오랜만에 광주 출장으로 업무를 마치고 돌아가던 길에 제 아빠와 내가 마주앉은 식탁이었다. 딸이 효성으로 마련한 자리이고 보니 감회가 남다른 자리였다. 이런 자리를 자주 마련하지 못하는 딸의 부모에 대한 미안함과 보고 싶어도 딸의 얼굴을 자주 볼 수 없는 어미의 안타까운 마음이 어우러진 식사였다. 참치 회를 맛있게 먹는 엄마 아빠를 보며 딸은 흐뭇해 하였다. 자식이 사 주는 점심이라서 나오는 음식을 깨끗이 다 먹었다.
음식 값을 알고 있던 딸은 그래서 메뉴판을 상 밑으로 감춰 놓고 있었던 모양이다. 친정 집에 왔다 돌아갈 때마다 차비 한 푼 못 주는데 비싼 밥을 먹고 나니 목에 가시를 삼킨 것만 같았다.
바쁜 일정에 서둘러 돌아가는 비행장까지만이라도 함께 가고 싶었다. 차안에서 손을 꼬옥 쥐어보았다. 아직도 어미 손안에 들어오는 작은 손이었다. 두 돌이 지나 말을 배울 때쯤 저를 등에 업고 논둑길을 걸으며 이것은 벼다, 저것은 염소란다, 하고 가르치면 새끼 종달새처럼 어미의 말을 따라 배우던 그때가 엊그제 같다.
그때에 세들어 살던 집 주인댁에는 열여섯 살 난 식모아이가 있었다. 틈틈이 그 소녀는 우리 아이를 돌봐 주었다. 따뜻한 어느 봄날 아침나절 그 소녀에게 아이를 맡기고 집안 청소를 하고 있었다. 그 소녀가 아이를 얼르는 소리에 깔깔거리고 웃던 아기의 웃음소리가 은방울 같았다. 마루를 걸레질하려던 순간 앞마당에서 무엇이 툭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십 초도 더 지난 후에 아기 울음소리가 자지러졌다. 나는 맨발로 마당으로 뛰쳐나갔다.
그 소녀는 어른의 짐 자전거를 잡은 채 서 있었고 아기가 높은 자전거 짐받이에서 떨어진 모양이었다. 흙마당에 얼굴을 처박은 채 아기는 울고 있었다. 입안에는 흙이 들어갔고 입술이며 콧등, 양볼이 흙투성이가 된 채 피가 범벅이 되어 있었다.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나는 사지가 떨렸다.나도 모르게 울부짖음이 터져나왔다.
"야, 이 가시내야 우리 애기 물어내 놔!"
악을 쓰던 나는 거의 내 정신이 아니었다. 막 돋아난 새순처럼 여린 얼굴에 상처가 가실 때까지 아기의 고통이 오롯이 내 살의 아픔으로 생생하게 느껴져 두고두고 가슴이 저렸다.
나는 세 살 때 그 무서운 천연두를 앓았다고 한다. 아들도 아닌 딸의 얼굴에 곰보 자국의 흉터를 남기게 된다면 평생을 두고 비관할 딸의 앞날에 어머니는 눈앞이 캄캄하셨을 것이다. 얼굴부터 온몸에 붓으로 먹물을 찍어 놓은 듯한 딱지가 절로 떨어질 때까지 어머니는 무릎 정강이가 보라색으로 멍들도록 꿇어앉아 빌었다고, 내가 자란 후 고모는 일러주었다. 낮에는 떡시루 앞에서, 새벽이면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놓고 천지신명께 빌었던 어머니는 애간장이 다 녹았을 것이다.
자전거에서 떨어진 내 딸애의 작은 상처를 보며 느끼는 아픔보다 천 배나 더 아팠을 내 어머니였겠지만, 어머니의 아픔이 아직도 실감되지 않는 것은 어른들이 말하는 내리사랑의 자식 사랑인 탓일까. 집주인 아저씨는 딸애가 다섯 살이 다 될 때까지 그때 일을 기억하며 나를 놀려댔다.
"아주머니, 어떻게 애기를 물어준다요?"
그 딸애가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어도 마른 체구는 늘 가냘프기만 했다. 고등학생의 책가방은 무겁기만 했다. 도시락 두 개와 물통, 그리고 열여덟 과목의 무거운 책. 해가 뜨기도 전 고3 수험생은 집을 나섰다. 그런 딸이 가엾어서 나는 매일 아침 책가방을 들고 버스 정류장까지 딸을 데려다주곤 했다. 길에서 만난 동네 아주머니가 내게 인사를 건넸다.
"딸이 공부를 잘하지요?"
우리집 딸애와 같은 학교를 다니는 딸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문득 의아한 생각과 함께 반가움이 느껴졌다.
"공부 못하는 자식은 먹는 것도 아깝다우."
하며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아니었다. 이 세상의 아버지들은 잘난 자식에게 애정을 갖지만 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못난 자식에게 자신의 생명과 같은 사랑을 쏟는 것이 본능이다. 자식을 사랑하는 모성처럼 원초적인 사랑이 또 있을까. 역설하던 그 아주머니의 눈 언저리엔 더욱 강렬한 애착과 무거운 자책의 그림자가 깃들여 있었다.
희망하던 대학에 진학한 딸은 학업에 충실했고 소망하던 꿈도 이루었다. 한 손에 들기도 무거운 법률 관계 책들이 서가에 꽂힌 딸애의 집무실에 처음 찾아갔을 때 장하고 대견스럽다는 생각이 가슴 뿌듯이 압도해 왔다. '품안엣 자식'이라는 어른들의 말이 쓸쓸히 내게서 맴돈다. 부모에게서 용돈을 타서 쓸 때까지는 아직 자식이더라고 말들을 한다.
구월. 공항 부근의 논에는 늦여름의 햇살에 나락이 영글고 있었다. 우리집 삼남매가 하나씩 각자 자기의 인생 행로를 찾아 둥지를 떠난다. 인생은 누구나 홀로 서야 하는 개체이다. 혈육의 한 부분인 부모도 형제도 내 삶의 몫을 대신 져주지 못한다. 사람은 누구나 혼자이다.
딸을 태운 비행기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버린 하늘을 향해 나는 우두커니 허수아비처럼 서 있었다. 논 이랑에 물결을 이루며 벼 이삭을 간지럽히던 바람이 내 볼에 스쳐와 나의 더워진 얼굴을 씻기고 갔다.

 

 

연이 날아간 저 하늘

김명규



닿을 수 없기 때문일까.
먼 하늘은 슬프디슬픈 그리움을 담고 있다. 사람들은 때로 삶의 고통스러운 무게에 짓눌릴 때면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쳐다본다.
내 어린 시절 동심의 눈에 비친 하늘은 차갑고 어떤 전율 같은 것으로 두려움에 차 있었다. 그때 오빠랑 내가 함께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싸늘할 뿐인 하늘이었다.
오빠가 일곱 살, 내가 여섯 살 우리는 연년생의 오누이였다. 나는 오빠를 따라서 강변에서 다슬기를 잡거나 땅뺏기나 구슬치기도 따라 하며 놀았다. 찬바람에 손등이 터서 피가 났지만 아픈 줄도 모르고 흙 속에서 놀았다. 엄마는 그런 우리를 밤마다 손등에 안티플라민을 발라주고 불기가 약한 화롯불에 손을 쬐라고 타일렀다.
초등학교가 집에서 멀던 옛날이라 오빠는 여덟 살이나 되어야 학교에 보낸다고 엄마는 그러셨다. 내년 봄이면 오빠가 학교에 입학하게 될 그 해의 가을이었다. 내가 할머니 품에서 낮잠을 자던 사이 오빠는 밖으로 놀러 나갔다. 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검정 고무신이 황토 흙투성이가 되어 돌아왔다. 손에는 시들어버린 자줏빛 국화가 몇 송이 들려 있었다. 여느 때처럼 그 꽃을 내 귀밑머리 양옆으로 꽂아주고 꽃을 꽂은 동생이 예쁘다는 듯이 눈짓을 했다. 꽃만 보면 따서 동생의 머리에 꽂아주는 것이 오빠의 행복이었을까. 어쩔 땐 머리카락이 당겨서 뽑히는 아픔이 있었지만 그런 오빠가 고마워서 나는 꾹 참기 일쑤였다.
그날 밤은 오빠가 저녁을 먹지 않았다. 엄마가 참기름과 깨소금으로 밥을 맛있게 비벼 주었는데도 고개를 저었다. 아랫목 이불 속을 파고들며 시름시름 기운 없어 보였다. 오빠는 엄마와 함께 아버지 친구의 트럭을 타고 읍내 약방엘 다녀왔다. 그런 뒤에도 일어나지 못했다. 며칠째 오빠는 골방에서 엄마와 둘이서만 있었다. 이제 알고 보니 식구들과 오빠를 격리시켜 놓았던 모양이다. 오빠랑 놀고 싶은 나는 심심할 때마다 골방을 기웃거렸다. 그 방엔 들어가지 말라고 하는 엄마의 얼굴은 근심스러웠고 엄마는 머리도 빗지 않아 심란해 보였다. 시멘트 포장지로 오빠가 실겁게 만들어준 딱지를 혼자 가지고 노는 일은 너무 쓸쓸했다.
오빠의 회복을 기다리던 하루하루가 십 년 같았지만 병은 더 악화되어 가는지 병간호하는 엄마조차 잠시도 골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엄마가 잠시 화장실에 가는 사이에도 가느다란 신음 소리가 엄마를 불러댔다. 황토 흙이 묻은 채 벗어놓았던 오빠의 고무신을 집 앞 맑은 도랑물에 나는 깨끗이 씻어 엄마가 하듯이 마루 끝에 물이 빠지도록 걸쳐놓았다.
오빠가 몹시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이웃집 아주머니가 냄비에 죽을 쑤어 오셨다. 엄마와 아주머니의 주고받는 얘기 속에서 오빠가 뇌염에 걸렸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 가을도 깊어갔다. 갈색 플라타너스 이파리가 바람에 날려 떨어졌다. 길바닥에 떨어진 이파리는 밟으면 버석거리는 소리가 났다.
오빠가 조금씩 미음을 받아먹는지 달그락거리는 수저 소리가 방안에서 들려왔을 때 나는 뛸 듯이 반가웠다. 어쩌다 골방 문을 열고 환기를 시킬 때 멀리서 볼 수 있었던 오빠는 늘 죽은 듯이 누워만 있었다.
어린 나에게 셀 수 없는 세월이 흐른 것만 같았을 때 마르고 창백해서 오빠 같지 않았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아버지도 엄마도 자식이란 오빠밖에 없는 것처럼 온갖 정성을 다 쏟았다. 맛있는 것은 모두 오빠만 먹인 탓인지 얼굴에 조금씩 살이 올랐다. 그렇지만 왠지 오빠는 나를 부르지 않았다. 나를 모르는 사람처럼 나를 보고도 무심한 표정이었다. 곧 일어나서 구슬치기를 할 것 같았는데 시간에 맞춰 엄마는 오빠를 요강에 앉히곤 하였다.
점점 집안 어른들의 슬픔과 어머니의 소리 없는 눈물이 빗물처럼 구석구석에 고여갔다. 할머니는 뭐라고 주문을 외우며 이른 새벽에 마당에 소금을 뿌리기도 했다. 그래도 오빠는 일어나지 못했다.
겨울 방학이 시작되는 12월이 되면 동네 형아들이 마을 어귀 논바닥에 모여 연 날리기를 했다. 나락을 베어낸 밑둥을 짓밟아 다져진 논은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점심을 차리던 엄마는 거기 가서 오빠를 찾아오라고 했다. 논에는 군데군데 땔감으로 쓸 볏단이 다락같이 쌓여 있었다. 그 밑에 앉으면 바람막이가 되어 따스한 겨울 햇살을 받을 수 있었다. 내가 찾아가면 오빠는 틀림없이 그 곳에 혼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동네 형들이 하늘 높이 띄운 연을 고개를 쳐들고 한없이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 때의 시린 하늘은 남색 비단처럼 푸르렀다. 얼마나 연을 날리고 싶었을까. 너무 어린 오빠는 연을 만드는 기술이 없어 할아버지께서 더 크면 방패연을 만들어 주마고 하셨다. 하늘 높이 날고 있는 연은 아스라이 푸른 하늘색에 물든 것 같았다. 그 연을 얼마나 갖고 싶었을까. 그 가슴 설레는 놀이를 얼마나 하고 싶었을까. 멀리 연을 바라보는 소년의 얼굴은 꿈꾸듯 슬프고 황홀한 표정이었다. 연을 날리던 동네 형이 논두렁에 소변을 보러 갈 때면 오빠에게 얼레를 잠시 들고 있으라 했다. 오빠는 그 기회를 얻기 위해 하루 종일 쪼그리고 앉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그 때를 기억한다. 그 얼굴을 기억한다. 잠시 얼레를 손에 받아 쥔, 찬물처럼 소슬한 소년의 얼굴을. 그 연은 소년의 꿈이었다. 소년의 영혼을 담은 보물이며 미래였다.
"정훈아, 정훈아……."
애끊는 엄마의 절규를 뒤로하고 오빠는 색동저고리에 오동색 바지를 마지막으로 입고 갔다.
그 곳이 어디였을까.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 오빠를 부르던 곳은. 두 갈래로 땋아 내린 내 머리에 꽂아줄 들국화를 오빠는 꺾고 있었을까. 이승의 다리를 넘어서 오빠는 왜 오지 못했을까. 그토록 먹고 싶어했던 비과며 눈깔사탕을 들고 애타게 부르는 엄마를 뒤로하고 오빠는 오지 않았다.
어디서 얻었던지 찢어진 국정 교과서 종이 한 장을 들고 와 실에 꿰어 바람 속을 달리면 양 볼이 홍시처럼 물들던 오빠. 실이 떨어진 연을 찾으러 먼 하늘 나라로 간 것일까.
이듬해 오빠 대신 내가 할아버지 손을 잡고 입학식에 갔다. 학교 운동장 가득 만국기가 알록달록 춤추는 어쩌면 그것은 축제였다. 운동장에서 할아버지는 나를 깊숙이 끌어안으며 까칠한 수염을 내 볼에 비비셨다. 잃어버린 손자 생각을 하신 걸까. 수염에 물기가 젖어 있었다.
봄 여름 가을, 들꽃을 볼 때마다 내 머리에 화관처럼 꽃을 꽂아주던 오빠를 생각한다. 누이가 이쁜 그 눈빛도. 여섯 살 일곱 살의 오누이로. 영원히.

 

 

 

 

평소에도 잘 쓰시는 줄은 알았지만...|밍기의 방
물고기 | 조회 57 |추천 0 |2002.11.12. 08:33 http://cafe.daum.net/poemory/FwE3/22 

이 글은 정말 좋네요.
저의 마음에 쏙~ 듭니다.
찬휘는 혹시
첫사랑(?)이 아닐까요
- 선생님이 질투하실 것 같은데요. -

저도 요즘 산문을 써보고 있지만
언제 이렇게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를 써볼까요.
소설을 쓰셔도 좋을 듯.

제 홈에 옮겨 놓아도 괜찮을런지요.
www.kobupoet.com
'초대석'입니다.
선생님 글도 여러편 있어요.

 

 

유년의 가을

김명규


기차는 쉽게 오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건너편 산밑으로 기차가 두 번 지나간 뒤에 돌아오라고 말씀하셨다. 하늘은 금방 내려앉을 것처럼 무거운 먹구름이 덮여 있었다. 샛노랗게 벼가 익은 들판에 서서히 어둠이 들고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다.
논 가운데 앉으려는 참새를 손을 휘저으며 쫓을 때마다 양은 도시락에 간식으로 담아온 찐 감자 몇 알이 이리저리 굴렀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새들도 더 이상 날아오지 않았다. 두 번째 기차가 기적 소리를 울리며 멀리서 지나갔지만 어둑어둑 비가 오는 논둑 길을 걸어서는 무서워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들에 사람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논 가운데 허수아비가 두 팔을 벌리고 살아서 나를 잡으러 오는 것 같았다. 나는 큰 소리를 내어 목이 아프도록 울었다. 새를 쫓아야 쌀밥을 먹을 수 있다면서 할아버지는 새를 보러 가지 않으려는 나를 무섭게 호통쳐서 내쫓다시피 하였다. 밥상 위에서는 밥알 하나도 흘리지 못하게 하던 할아버지다. 나는 논에 가지 않으려고 할아버지 몰래 정옥이네 집에 숨어서 놀았지만 할아버지는 거기까지 나를 찾아와 내 손목을 끌고 갔다. 다른 집의 논은 어른이 된 오빠나 언니가 와서 새를 지키지만 초등학교 삼 학년인 내 또래의 아이가 새를 보는 것은 오직 나뿐이었다.
할아버지는 논둑 길을 가로질러 네 기둥을 세우고 작은 원두막처럼 높이 내가 혼자 앉거나 누울 만한 새 볼 자리를 만들어 놓았다. 겨우 발을 디딜 만한 좁은 사다리를 세 번 딛고 올라가서 앉으면 풍경화처럼 아름다운 산과 들이 시야에 가득 차 들어왔다. 작은 원두막에 혼자 앉아서 '우여 우이여' 하며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목소리로 새를 쫓아도 새들은 어린 나를 깔보는 듯 얼른 달아나지 않았다.
나는 그 때마다 찬휘 생각이 났다. 언제 보아도 말쑥한 양복 차림과 머리에 포마드를 발라 향내가 나던 찬휘 아빠가 서울에서 돌아가셨다고 동네 어른들은 수군거리며 혀를 끌끌 찼다. 찬휘는 나와 함께 손을 잡고 찻길을 건너 유치원에 다니던 그 때의 유일한 남자 친구였다. 아빠의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온 찬휘는 나를 보아도 별로 말이 없었다. 찬휘는 엄마와 두 식구가 되었다. 유치원 졸업을 하고 얼마 후 찬휘네는 서울 외삼촌 집으로 이사간다 하였다. 이사가던 날 이른 아침 우리 집 문간을 기웃거리며 나를 찾던 찬휘는 손가락을 입에 물고 한참을 서 있다가 그냥 가버렸던 것이 나와 마지막 작별 인사였던가 싶다. 새를 쫓다 감자를 벗겨 먹을 때에도, 이솝 우화가 실린 재미있는 책을 읽을 때에도 찬휘가 보고 싶었다. 동네의 개를 만나 내가 무서워하면 발을 굴러 쫓아주던 찬휘, 서울을 오가며 사업을 하던 아빠가 사온 과자를 내 손에 듬뿍 쥐어주던 착한 찬휘. 나 혼자 논에 새를 보러 간다면 따라와 줄 동무였다.
깊은 하늘에 뭉게구름 한 점이 떠 있을 때면 그 구름 위에 올라앉아 어디론가 흘러가고 싶었다. 나는 그 때처럼 하늘을 많이 바라본 적이 없다. 아기 천사가 날개를 달고 날아가는 것 같던 구름은 어느새 꽃송이도 되었다가 커다란 백곰이 되기도 하였다.
내가 중학생이 되어서 찬휘도 서울에서 중학생이 된 모습을 가끔씩 그려보았다. 고등학교 입시를 앞둔 삼 학년의 가을이었다. 담임 선생님의 심부름으로 교무실에 들러 나오는 복도에서 자장면 철가방을 무겁게 들고 들어서는 키 작은 소년을 내가 먼저 보게 되었다. 어디서 본 듯한 낯익은 얼굴, 그것은 유치원 친구 찬휘임에 틀림없었다. 복도 창쪽으로 얼른 몸을 피하고 찬휘가 나를 볼 수 없도록 얼굴을 돌렸다. 나를 스치고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찬휘의 뒷모습을 나는 떨리는 가슴으로 바라보았다. 찬휘네는 서울로 이사간 게 아닌가 보더라고 하던 할머니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 날 나는 점심 시간에 도시락을 먹을 수가 없어 교실에서 나와 운동장 벤치에 혼자 앉아 있었다. 가을 하늘은 더 멀고 눈이 시리게 푸르렀다.
내 유년의 가을은 심란하고 두려움뿐인 계절이었다. 할아버지가 빈 깡통을 모아 작은 돌멩이들을 그 안에 넣고, 낡은 한복 바지저고리를 챙겨 허수아비의 옷을 마련할 때면 내가 또 새를 보아야 할 걱정에 밤에는 잠이 오지 않았다. 집에서 우리 논까지 걸어서 가는 길은 십 리나 되는 듯 멀었다. 할아버지가 밉고 원망스러웠다. 식구들의 일손이 모자라 어린 손녀를 새 보러 보내는 할아버지의 마음도 내가 안쓰러웠던 모양이었다. 헌 고무신과 유리병을 모아두었다가 엿장수가 지나가면 엿을 바꾸어 할아버지는 나에게만 주었다.
지금의 논 가운데 서 있는 허수아비를 보면서 나는 쓸쓸하게 웃는다. 허수아비는 티셔츠에 낡은 청바지를 입고 있다. 요즈음에도 어쩌다가 가을 들녘에 나가보노라면 그 시절의 시린 외로움이 찬바람처럼 파고든다. 만국기처럼 줄에 매달린 깡통이 바람을 타고 춤을 추면서 강하고 여리게 하모니를 이루던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다. 가냘프게 핀 억새가 유연하게 몸짓을 하던 언덕빼기를 지나 집 앞이 가까워오면 어머니가 무청 시래기를 삶는 냄새가 은은하던 내 고향집이 아직도 거기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11월의 편지

김명규


가을이구나, 승일아.
엄마가 성당에 다니는 아파트 뒷길에는 요즈음 가로수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어 밤길에도 한 아름의 촛불을 한꺼번에 켜놓은 듯 환하단다. 네가 있는 루이지애나에도 서늘한 기운이 도는 가을이 왔겠구나.
아빠가 퇴근 후 컴퓨터 앞에 앉으시면 엄마는 네게서 이-메일이 왔는지 그것부터 확인한단다. 몸무게는 좀 불었는지…. 다른 사람들은 미국에 가서 살면 기름진 음식 때문에 살이 찐다던데 넌 한국에서 살 때보다 체중이 덜 나간다니 그 고생이 짐작된다. 군대를 제대한 뒤 벌써 5년째 자취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오늘 저녁엔 엄마가 시장에서 사 온 싱싱한 가을무로 채김치를 버무렸다. 채김치를 남달리 좋아하던 네 생각이 났다.
우리가 산정읍에서 살 때를 너는 너무 어릴 때라 기억하지 못할 거야. 너른 텃밭을 안고 둘러선 탱자나무 울타리에 호박순은 잘도 기어올랐지. 늦가을 이맘때쯤 된서리가 내리기 전, 엄마는 어린 네가 좋아하는 호박잎 국을 끓여 주려고 여린 순을 차곡차곡 소쿠리에 따 담았단다. 그럴 때면 넌 어느 새 텃밭을 질겅질겅 밟고 뛰어와 호박잎 사이에 숨어 있는 네 주먹만한 호박을 찾아내고 그것을 찾아낸 대견함에 우아, 하고 소리쳤지. 너의 어리고 가냘픈 목소리가 가을 하늘에 연처럼 높이 떠올랐단다.
승일아. 손자라면 동네 개구쟁이들이 네게 큰소리도 못하게 야단치시던 할머니를 기억하니? 할머니께서 집주인 댁 텃밭 한 귀퉁이를 얻어 가을배추랑 무랑 처서가 지나면 씨를 뿌려 가꾸어 놓으신 것을, 엄마는 그 무를 뽑아 저녁 찬을 만들었었지. 새파란 무청과 함께 곱게 채를 썬 무에 갖은양념과 유월에 담근 새우젓을 넣어 햇고추가루로 버물려 채김치를 만들었어. 호박잎 국과 무 채김치는 우리 집 밥상에 푸지고 맛있는 반찬이었다. 매워서 입술이 꽃잎처럼 빨개진 네가 호오호오 불면서 어른 밥 먹듯 할 땐 정말 사랑스러웠다.
지금은 미국에서도 한국 음식을 다 먹는다 하더라만 아무렴 맛이 같을 수 있겠니. 유난히 토속적인 음식만 좋아했던 너는 끼니때마다 집이 더욱 그립겠구나. 승일아. 이제 주립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할 날도 몇 달 안 남았구나.
엄마가 너를 키우는 동안 숨겨온 아픈 이야기가 있다. 산정읍에서 살던 무렵의 네가 네 살이 되었을 때란다. 돈이라는 것을 주면 과자를 사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네가 자각하기 시작했었나 보더라. 엄마는 작은 동전 지갑을 낮은 화장대 위에 올려놓았었지. 넌 엄마 몰래 그 지갑에서 동전을 꺼내어 동네 구멍가게로 달려가 뽀빠이 과자를 사먹는 것이었어. 동네 형들 틈에 끼어 구슬치기하는 것을 구경하면서 너는 뽀빠이를 아이들과 함께 나누어 먹고 있었다. 엄마는 그 때 돈을 훔쳐낸 네게 몹시 화가 나서 널 붙잡아 끌고 들어왔어. 영문도 모르고 팔을 붙잡혀 너는 끌려왔고, 네 입안에서는 뽀빠이가 사각사각 부서지고 있었다.
굵은 나무 손잡이의 빗자루를 거꾸로 잡고 엄마는 너의 종아리를 무섭게 때렸단다. 엄마가 붙잡은 네 팔목 뼈가 애처롭게 느껴질 정도로 약질인 너를 말이다. 너는 울면서 매질을 피하려다가 그만 네 머리에 나무 손잡이가 탁 소리가 나며 부딪쳤어. 아냐, 엄마가 널 때린 거지. 그 순간 고사리 같은 네 손이 머리를 감싸쥐고 새파랗게 자지러졌고 한참을 숨조차 쉬지 못하는 것이었다. 승일아. 그때 엄마의 심장도 녹아드는 것 같았다. 지갑에서 엄마 몰래 돈을 꺼내 가는 일이 나쁜 짓이라는 사실도 모르는 아이에게……. 그런 일이 나쁘다는 걸 미처 가르쳐주지 못한 채. 엄마가 목욕을 시켜주고 울음을 그친 너는 곧 잠들었지. 잠결에도 너는 흠칫 놀라곤 했었다.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펴 밥을 지으면서 엄마는 네가 안쓰러워 한참을 울었다. 언제 깨었는지 엄마에게 매를 맞은 것도 잊고 쪼르르 부엌으로 달려나와 넌 엄마 등에 네 작은 얼굴을 비비며 어리광을 부리는 것이었어.
그 시절에도 돈을 많이 주면 맛난 것을 너희들에게 얼마든지 사줄 수 있는 때였단다. 십원 짜리 뽀빠이 과자 하나를 몰래 사먹은 너를 때린 엄마는 너를 품에 안을 때마다 하느님께 용서를 빌었단다. 그 후로 네가 감기에만 걸려도 엄마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고, 머리를 호되게 얻어맞아서 네가 미련해져 공부를 못하게 될 것만 같아 숨은 근심으로 널 지켜보았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이른 아침의 등교 길에서, 질경이풀이 우거진 신작로에 떨어진 지갑을 주워 너는 담임 선생님께 갖다 드린 일이 있지. 그 지갑에는 많은 지폐와 중요한 증명서가 들어 있어서 그것을 돌려받은 아저씨가 학교로 찾아와 제과점의 큼직한 스펀지 케익을 사주셨지 않니. 그리고 넌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선행상을 받아왔지.
중, 고등학교 시절 남에게 뒤지지 않으려는 성실한 노력으로 엄마 아빠에게 항상 행복을 안겨주었던 내 아들아. 이제 대학을 졸업하면 네가 전공한 학문으로 우리 나라에서 너의 꿈을 이루기 바란다. 너는 미국에서도 취직할 수 있다고 지난 번 전화에서 말했지만 아빠는 네 작은 성취라도 우리 나라를 위해 쓰여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더냐. 엄마도 같은 생각이란다. 많이 생각다가 이제는 너도 그렇게 마음을 굳혔다니 정말 고맙구나.
착하고 성실한 너의 품성은 누구에게나 좋은 본보기가 되고 사랑 받을 것이다. 주말마다 아르바이트를 하랴, 새벽까지 공부하랴, 고된 너의 외국 생활도 아름다운 앞날의 좋은 거름이 될 거라고 엄마는 믿는다.
승일아. 너의 초등학교 3학년 때 짝이었던 진영이가 지난 토요일에 결혼했다. 신부 대기실에서 만난 진영이는 너에게 안부 전해 달라고 하더구나.
네가 돌아오게 되는 그 날이 벌써 기다려진다. 루이지애나에서 볼 수 없다는 함박눈이 축복처럼 펑펑 쏟아지는 날 네가 돌아온다면 좋겠구나. 그럼 돌아올 때까지 끼니 거르지 말고, 환절기인데 감기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려무나.

 

 



오십 년 뒤의 선물

김명규


남편의 새 직장을 따라 우리는 시골에서 도시로 이사하게 되었다. 남의 집 비좁은 이층에 전세를 얻었기 때문에 묵은 살림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문을 여닫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포마이카 장롱과 오래 된 찬장도 버리자고 나는 시어머니께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아무 말이 없었으나 못내 섭섭한 눈치였다. 찬장에서 그릇들을 꺼내어 어머니는 말없이 커다란 고무통에 차곡차곡 담았다. 쓰지 않는 유기 그릇들을 고물 장수에게 넘겨줄 모양으로 어머니는 그것도 한쪽으로 치워놓았다. 가볍고 녹슬지 않는 스테인리스 그릇에 밀려난 놋그릇이었다.
이삿짐을 트럭에 싣던 날 분홍 보자기에 따로 싸놓은 묵직한 그릇 하나가 눈에 띄었다. 무거운 돌냄비였다. 길에 버려도 누가 주워갈 것 같지 않은 새까맣고 심란스런 그릇이었다. 정갈하신 어머니가 저런 돌냄비를 왜 보자기에 싸 두었는지 알 수 없었다. 우툴두툴 투박한 몸통에 귀가 달렸으며 석재는 쑥돌이 분명했다. 처음 보는 것 같았지만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보니 어머니가 그 돌그릇 안에 팥이나 참깨 같은 잡곡을 넣어두었던 생각이 떠올랐다. 잡곡을 담아 쓸 그릇이라면 예쁘고 가벼운 것이 얼마든지 많이 나오는 때였다. 남편에게 나는 무겁고 별로 쓸모도 없는 그것을 버리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남편은 그게 무슨 소리냐고 깜짝 놀랐다. 그건 아버지가 출장 갔다 돌아오시던 날 어머니께 사다 드린 선물이라는 거였다.
시아버님을 나는 흑백 사진으로만 뵈었을 뿐이었으므로 도무지 어떤 분인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아버님은 광주고보를 수석으로 졸업하시고 곧바로 공무원이 되어 세무서장을 지내신 분이라 하였다. 젊은 시절 어머니는 아버님의 전근을 따라 이곳저곳 당신의 삼 남매를 데리고 관사에서만 생활하였다. 큰집 큰아버님은 벌이가 적어 아버님의 월급은 항상 절반을 떼어 큰집으로 보내 드렸다고 한다. 그런 아버님이 마흔 다섯에 병환으로 세상을 뜨셨다. 유족들은 관사를 비워야 했고, 그러나 오두막 한 채도 없어 막상 머리 두르고 갈 곳이 없었다. 세무서장을 지내신 분이 그처럼 청빈하게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된 동료들도 놀랄 정도였다고 한다. 친분이 있는 고인의 동료들이 나서서 성금을 모아 집 한 칸과 얼마의 위로금이 지급되었다. 서른 여덟에 남편을 잃은 어머니의 시린 마음을 나는 그 시절 한 순간도 헤아리지 못하였다.
누나와 형님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뒤였으므로, 막내며느리와 십 삼 년을 함께 사시는 동안 어머니는 손자들을 돌보느라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가난한 집에 시집온 며느리가 가엾어서였을까. 집안 구석구석 힘든 일은 어머니 손이 먼저 갔다.
그런 어머니에게 겨우 그 형편없이 초라한 돌냄비를 선물로 사 주셨다니. 그러나 어머니는 그 돌냄비를 한 번도 냄비의 쓸모로 사용한 적이 없었다. 그것을 처음 사왔을 때엔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밥을 짓던 때였고 그 후 연탄이 나와 아궁이를 개량했지만 그 냄비의 크기란 아궁이에 박혀 꺼내는 일이 도무지 힘들 터였다. 내가 시집왔을 당시에는 식구가 늘어 그 돌냄비는 사용할 수가 없었다. 나는 시아버님이 원망스럽고 야속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 옛날 많은 여성들이 선호하였을 모나분이나 구리무 한 통쯤 선물로 사왔더라면 어머니는 두고두고 고마워하셨을 텐데. 하지만 며느리인 내가 보이지 않을 때를 골라 어머니는 찬장에서 그 돌냄비를 꺼내어 깨끗이 삶은 행주로 닦고 또 닦아 왔으리라. 어쩌면 어머니는 남편이 남기고 간 단 하나의 유물인 돌냄비에서 아버님의 영혼을 만나고 말없는 대화를 나누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남편의 영혼을 간직하듯 분홍 보자기에 돌냄비를 싸들고 나서던 어머니.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뒤로도 우리는 두 차례나 이사하였다. 이사할 때마다 나도 돌아가신 어머니를 모시듯 그 투박한 돌냄비를 싸안고 다녔다.
아이들이 장성하여 모두 제 일을 찾아 객지에 나가 있고, 이제는 아파트에 우리 두 내외만 남게 되었다. 어쩌다 밥 두 그릇을 전기 밥솥에 안치는 일이 큰 접시에 콩알 하나 담아 내놓는 듯해서 문득 그 돌냄비 생각이 났다. 싱크대 깊이 처박아둔 그것을 꺼내어 수세미로 여러 번 닦고 씻었다. 그리고 두 그릇의 밥을 안쳐보았다. 요즘 식당에서 흔히 보는 얄팍한 돌솥과는 달리 몸채가 두툼하여 쉽게 끓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번 끓기 시작하면 약한 불에서도 끓어 서서히 뜸이 들었다. 가스 불을 꺼놓은 후에도 두툼한 뚜껑 사이로 누룽지 눋는 고소한 냄새가 은은하였다. 뜨겁고 둔한 뚜껑 꼭지를 행주로 싸서 열면 밥알이 찬 공기와 부딪쳐 물기를 거두는 소리가 싸아 하고 들린다. 양은솥의 숭늉을 먹던 때보다 더 숭늉 맛이 깊었다.
내가 돌냄비에 밥을 짓고 있을 때 퇴근하여 돌아오는 남편은 아이처럼 좋아한다. 밥알이 쫘악 퍼져서 기름을 바른 듯 윤기가 도는 밥을 남편과 오순도순 먹으면 어머니 생각이 난다. 시아버님과 어머니가 못다 하신 내외의 정분을 남편과 내가 대신 나누는 것 같다. 돌처럼 차가운 듯하지만 한번 더워지면 쉬이 식지 않는 진지함에서 돌냄비를 볼 때마다 나는 냉철하고 엄격하신, 그렇지만 깊은 정을 지니신 아버님을 뵙는 듯하다. 돌냄비 하나를 선물로 남기신 아버님은 부부간의 사랑까지도 대물림하고 가신 분이셨다. 가난하지만 양심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늘 말씀하셨다는 시아버님의 가르침을 내가 닦고 있는 돌냄비에서 새겨듣는다.

 

 

 

 



미루나무 아래




김명규



유월의 미루나무 잎은 기름을 바른 듯 윤기가 흘렀다. 우리 집 대문 앞에 서 있던 미루나무는 키가 컸다. 내가 학교에서 돌아올 때마다 그 미루나무 아래에는 할머니가 서 계셨다. 할머니는 항상 누군가를 기다리시는 것 같았다. 내 생각으론 할머니를 반갑게 찾아올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만 같았다. 할머니의 얼굴은 잊을 수 없는 사람을 그리워하시는 것처럼 보였다. 쓸쓸해 보이기도 했고 무엇인가를 안타까워하시는 것 같기도 하였다.
신작로를 오가는 사람이 멀리서 눈앞에 다가올 때까지 약속된 사람을 기다리기라도 하듯 할머니는 낱낱이 살펴보시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여름이면 항상 깔끔하게 푸새한 모시 저고리를 입고 계셨다. 매우 정갈한 성품이셨다. 새하얀 모시 저고리에 할머니의 품성이 날카롭고 차갑게 서려 있었다. 평소에 할머니가 말씀을 많이 하시거나 남을 원망하고 미워하시는 걸 나는 보지 못했다. 식구들 몰래 보자기에 싼 쌀을 들고 밤이면 할머니는 어딘가에 조용히 다녀오시곤 했다. 누구라도 치마폭 안으로 감싸줄 것 같은 할머니였다. 열 살 때 어머니를 여읜 나에게 할머니는 어머니보다 더 뜨거운 눈물이었고 따뜻한 품안이었다.
며칠 전 광주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연극 '품바'를 보았다. 영화는 어쩌다 두 번 보게 되면 싱겁고 지루하지만 연극은 다른 느낌이 들었다. 세 번째 보는 같은 연극이었지만 십여 년 전의 그 '품바'와는 또 달랐다. 옛날, 무안군 일로읍에서 살았던 거지 대장 천장근의 일대기가 기둥 줄거리인 점은 그대로였다. 먹고 살기가 어렵던 50년대, 내 어린 시절의 추억이 무대 위에 고스란히 펼쳐져 있었다. 작가이자 연출자이기도 한 김시라씨의 품바 타령이 걸찍하게 고조되면서 공연장 안은 박자를 맞추는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 관객은 나처럼 중년을 넘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관객들은 모두 뜨거운 일체감 속에 젖어들어 박수를 쳤다.
품바. 그 거렁뱅이의 모습을 보면서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영락없이 그런 모습을 한 거지가 어느 날 미루나무 밑에 서 계시던 할머니한테 다가서더니 그 더러운 두 손으로 할머니의 손을 덥석 싸 쥐는 정경이었다.
"아이구, 어머니 안녕하셨능기라우."
하고, 친아들이라도 되듯이 인사를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할머니는 객지에서 돌아온 아들처럼 거지를 반겨 주셨다. 여름이건 겨울이건 밥상을 차릴 때쯤이면 할머니는 대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 그 시절 모두들 어렵게 살았지만 그래도 우리 집은 밥술이나 먹고 살던 터였다. 아침 저녁 끼니 때마다 깡통을 든 거지 서넛이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왔다. 그때 유치원에 다니던 나는 거지를 보면 찌든 악취에 비위가 돌아 밥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무대 위의 거지로 분장한 배우를 보며 나는 사십여 년 전 할머니의 얼굴을 떠올렸다. 밥상을 받으신 할머니는 밥그릇 뚜껑에 밥을 듬뿍 덜어 놓았다. 식구들의 식사가 끝나갈 때까지 밥을 얻으러 오지 않으면 할머니는 몇 번이나 방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셨다.
내륙 지방에 살던 내 어릴 때의 겨울은 거의 날마다 눈이 내렸고, 폭설이 내릴 때면 거지들의 기척도 없었다. "거지들 다 얼어죽었겄다…." 할머니는 탄식하듯 혼잣말을 하셨다. 나는 할머니의 그 슬픈 얼굴을 기억한다. 겨울을 빼고는 대문 앞의 미루나무 밑에 서서 할머니는 거지들의 인사를 받으며 어쩌면 그들의 안부를 걱정하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불쌍한 사람 천대하면 못 쓰는 것이여!"
부엌 일 돕던 언니가 할머니께 야단맞던 소리가 아스라히 들리는 듯하다.
목침만한 트랜지스터 라디오 소리를 신기하게 들으시며, 이리저리 둘러보시고는 "이 속에 어떻게 사람이 들어갔을거나? 사람 주둥팽이(주둥아리)만 썰어서 넣었는갑다." 하시던 할머니는 문맹이었다. 할머니의 외아들이었던 아버지는 소학교때 매우 영특하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친구인 김낙구씨와 이십 리를 걸어 소학교엘 다니셨다. 동네에서 글을 아는 청년을 불러 할머니는 김낙구씨와 아버지의 성적표를 읽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김낙구씨의 것은 갑(甲), 을(乙), 병(丙)이 뒤섞여 있었고 아버지의 성적은 모두 갑(甲)이었다. 그걸 듣고 할머니는 준비한 회초리로 아버지의 종아리를 때리셨다고 한다. "이놈아, 낙구는 병도 맞았는디 너는 어찌 병 하나도 못 맞았냐 이놈아."
그때 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하셨을까.
내가 결혼했을 무렵 할머니는 칠순을 넘기고도 정정하셨으나 아버지는 고혈압으로 건강이 좋지 않으셨다. 그래서 매일 병원에 가서 혈압 체크를 하셨다. 이십 분 거리에 병원이 떨어져 있었으므로 날마다 아들이 병원에 가는 것이 마음 아프셨을 할머니는 혈압을 잰다는 말과 그 수치를 듣고 계신 터였다. 한 번은 병원으로 향하는 아버지를 불러 "얘야, 날씨도 춘디 그냥 요 앞에 쌀집 저울에다 재 보지 그러냐?" 하는 말씀에 온 식구들이 웃었다.
70년대 초 보통 가정의 안방에도 텔레비전을 들여놓을 때의 생각이 난다. 안방에 텔레비전이 들어오면서부터 여름에도 할머니는 겉옷까지 다 챙겨 입으셨다. 테레비 통 안에 남자들이 보고 있다면서. 할머니 가까이에 놓아두었던 안방의 요강도 뒷마루로 나가게 되었다.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는 아무리 추운 날에도 텔레비전이 켜 있을 땐 굳이 밖에 나가서 일을 보시곤 했다.
배고픈 사람들을 사랑했던 할머니. 배운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만큼 순수한 마음씨를 지녔던 할머니. 어쩌면 배움이 없는 사람들의 사랑이 더 아름다운 것일까.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할머니의 상여 뒤를 낯선 중년의 남자들이 몇 따라오고 있었다. 미루나무 밑에서 할머니가 반기시던 바로 그들이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나에게 어머니 대신 도시락을 들고 학교로 찾아오셨던 할머니. 수업을 하고 있는 교실마다 찾아다니며 거리낌없이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시던 할머니.
나는 이웃에서 만나는 노인을 볼 때마다 내 어린 시절의 할머니 생각으로 가슴이 뭉클해진다.

 

 

 

 

누가 늙고 싶으랴

김명규


미장원이나 백화점에서 우리집 큰딸 또래의 직원들이 나를 언니의 호칭으로 부르면 역겨워서 야단을 치곤 했다. '아주머니'라는 말은 사실 나이가 든 여자라는 뉘앙스가 있지만 참으로 고유한 우리들만의 호칭이다. 그런데 그것이 무슨 유행 바람인지 요즈음 아주머니들은 딸 같은 아가씨들을 부를 때 그 이름이 언니이고, 아가씨들이 어른을 부를 때도 언니가 되어버렸다. 나이든 아주머니에게 언니라고 부르면 그 '언니'의 기분은 과연 산뜻할까. 처음엔 그것을 내가 받아들이기에 그처럼 거부 반응을 일으키고 불쾌했지만 지금은 그러려니 하는 것이 어느새 만성이 되었나 보다.
시어른 한 분을 찾아뵈러 익산으로 가는 시외 버스를 탄 일이 있다. 출발 시간 3분을 남겨 놓고 버스 회사 직원이 차표를 점검했다. 버스 안은 서너 군데만 자리가 비었고 승객이 거의 좌석을 채우고 있었다. 뒤에서부터 차근차근 검표원이 티켓을 받아쥐고 앞 좌석쯤까지 왔을 때였다. 베이지색 베레모를 쓴 남자가 핸드폰을 들고 전화를 하고 있었다. 베레모 밑으로 쭈글쭈글한 주름살이 뒷목까지 내 눈에 선연히 들어왔다. 검표원이 그 곁에서 티켓을 내주기를 기다리고 서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전화에 열중했다. 검표원은 그의 어깨를 흔들며 표를 달라고 말했다. 핸드폰을 든 그분 옆 좌석엔 사십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핸드폰을 귀에 댄 채 바바리코트 주머니 양쪽을 다 뒤져도 차표는 냉큼 나오지 않았다. 차가 출발할 시간이 임박해지자 비로소 그는 핸드폰을 접었다.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선반 위에 올려둔 007가방을 내려서 열어 보기까지 하였다. 차표는 나오지 않았다. 그의 자책하는 혼잣말이 걸작이었다.
"아직 늙지도 않아서 벌써 이렇게 정신이 없으니……."
양복 안주머니에 깊이 넣어둔 차표가 버스 출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나왔고 승객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버스 안의 승객들 모두가 그를 향해 속으로 웃었을 것 같다. 베레모에 바바리코트를 걸치고 사뭇 멋을 부렸지만 누가 보아도 칠십에 가까운 노인이었다. 큰 소리로 주고받던 통화의 내용으로 보아 그는 무엇을 소개하고 소개비를 받는 중개인 같았다.
바바리코트에, 베레모에, 007가방에, 핸드폰. 첨단의 문명을 누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을까, 자신의 연륜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그는. 요즘 말로 그 '젊은 오빠'는 자기 기분으로 이십대를 살고 있었는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그 비싼 통화료가 부과되는 핸드폰을 연신 눌러대고 있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본인이 늙었다는 것은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나와 동갑의 아주머니들이 텔레비전에서 인터뷰하는 것을 볼 때면 가슴이 철렁해진다. 내 나이인데 어쩜 저렇게 늙었을까. 나도 텔레비전 화면에 비치면 저렇게나 늙어 보일까 싶어 거울을 들여다보곤 한다.
여고 동창 친구가 만원이 된 시내버스에서 어린 학생으로부터 자리를 양보 받고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앉게 되었다고 한다. 젊은 여자가 대여섯살이 된 여자아이를 데리고 좁은 버스 안으로 비집고 들어섰다. 마침 친구가 앉아 있는 좌석에 바짝 어린애를 밀어넣기에 친구는 그 아이를 안으려고 했었다. 아이는 낯선 아주머니의 무릎 위에 앉으려고 하지 않았다. 아이의 엄마는 "괜찮아, 할머니 무릎에 앉아."라고 말하며 애를 나무라더라는 것이었다.
쉰둘의 나이에 처음으로 할머니라고 불리우고 보니 가슴이 떨리고 와락 서글퍼져서 넋 나간 사람처럼 창밖만 내다보다가 정작 내려야 할 곳조차 지나쳐버리고 두 정거장을 더 갔었다고 하였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나도 지금 내 나이가 되셨던 시어머님께 손자를 안겨 드렸다. 그때에 나는 시어머님이 당연히 노인이려니 생각했다. 내가 젊었을 때 얼글에 주름이 가득한 노인들의 "마음은 청춘이여." 하시는 탄식 소리를 들을 때면 그 말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었다. 지천명의 나이를 넘고 보니 깨달음이 온지라 그 고백이 바로 나의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나는 아직 소갈머리 없는 사람이 되곤 한다. 신데렐라 컴플렉스는 아직 나에게 유효하다. 그것은 영원할 것 같다. 젊은 새댁들에 유행하는 예쁜 드레스나 젊은 패션의 의상을 나는 못내 아쉬워한다.
누군들 늙고 싶으랴. 젊어 보인다는 겉치레 인사말에 누가 마음 설레지 않으랴. 그러나 늙어도 아름다운 사람이 있다. 풋풋한 젊음보다 가슴 뭉클한 아름다움을 지닌 사람이 있다. 늙어서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 늙어서도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사람.
흐르는 세월이야 거역할 수 없는 것. 인생 여정의 시련과 고뇌를 자기의 것으로 승화시킴으로써 자신의 영혼에 곱게 그린 수채화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아름다운 사람일 것이다.

 

 

가을 나무들처럼

김명규


"우리 나라의 여성들이 모여 있는 곳이면 어디거나 그대로 파리 거리에 옮겨 놓아도 패션 유행의 본고장을 뺨칠 만하죠."
회사에서 연수차 프랑스에 다녀온 친정 동생이 들려준 말이다. 그 이야기를 처음 들으면서 나는 그게 칭찬인지 비난인지 얼떨떨했었다. 파리는 패션을 온 세계에 보급하는 도시일 뿐, 사실 파리 여성들은 구멍난 옷이 아니면 그대로 그냥 물려 입을 정도로 검소한 차림을 한다고 하였다.
요즘 들어 물가가 턱없이 뛰어서 만 원 한 장 달랑 들고 시장 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나라의 경제 사정도 심상찮은 눈치다. 금년 말이면 외채가 천억 달러를 넘을 거라고 하며 남편이 계산하는 걸 옆에서 보니, 사천만 국민 일인당 이백만 원씩의 빚을 지고 있는 셈이라 한다. 수출 부진으로 중소 기업이 여기저기서 쓰러져 가는데도 백화점엘 가보면 내가 딴 나라에 와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같은 옷인데도 비싸야 잘 팔린다는 어처구니없는 허영의 산술이 아찔한 것이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이건만 비좁은 골목길이 저녁만 되면 모두 주차장으로 변하고 만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도 한 세대가 두 대씩 자가용 승용차를 가진 경우도 적지 않다.
사회적 지위야 변함없다 치더라도 현대는 여성 천국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 여성들에겐 편리한 세상이다. 벌건 대낮에 식당에 앉아 있는 손님들은 대부분 여성들이다. 빨래는 세탁기로 하고 청소는 진공청소기로 한다. 하루 종일 시간을 들여 김치를 담글 필요도 없다. 전문적인 김치 가게가 있고, 슈퍼에는 손쉽게 먹을 수 있는 먹을거리가 즐비하다. 볼링을 한다, 수영을 한다, 골프를 친다 해서 웬만큼 사는 친구들은 날마다 일과가 바쁘다.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보면 으레 낮 동안은 열에 여덟, 아홉은 집에 부재중이다.
친구들의 모임에선 가끔씩 "우리 남편들이 불쌍하긴 불쌍해." 하며 깔깔거린다. 남편들은 직장의 구내식당에서 싸구려 점심을 먹는데, 아내들은 모임에서 최소한 오천 원 짜리 이상의 고급스런 점심을 사먹는 것이 조금씩은 마음에 걸려서 나오는 말인 것이다. 남편들은 죽어라고 돈버는 기계일 뿐 월급은 꼬박꼬박 은행 통장으로 직접 여자들 손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래도 월급날이면 남편은 양복 주머니에서 'O월분 지급 명세서'를 건네주며 호기롭게 "월급 타왔네." 한다. 나는 건성으로 "우리 영감, 수고했어요." 한 마디가 고작이다. 그리고 남편은 용돈을 가져갈 때마다 아내의 눈치를 보며 구걸이라도 하듯이 사정을 한다. 이구동성으로 여자들은 말한다. "잠든 남편의 얼굴을 보면 너무나 처량하고 불쌍하더라." 그러면서도 여자들은 자기가 수고해서 번 돈인 것처럼 열심히 잘도 쓰고 다닌다.
"엄마는, 뭘 그래? 엄만 「전업 주부」니까 아빠한테 너무 미안해할 것 없어요."
지난봄에 시집간 맏딸의 야무진 말이 마음 속 한 구석에서 울려오긴 하지만, 그래도 왠지 큰돈을 쓰게 될 땐 미안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월급날이면 남편들이 목에 힘을 주며 으스대던 시절. 기다리는 월급날이 가까워지면 아내들이 여느 때와 달리 남편에게 연한 배처럼 사근사근하고, 애교를 부리던 것마저 지금은 사라져버린 게 아닌가 싶다.
고등학교 교사인 남편이 들려준 이야기. 월급이 직접 선생님들에게 현금으로 지급되던 때의 일이다. 나이가 많으신 정 선생님은 비교적 수업 시간 배당이 적은 편이어서 틈만 나면 휴게실에서 내기 바둑을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그 사모님은 선생님께 용돈 드리는 데 무척 인색한 눈치였다. 요샛말로 '비자금'을 정 선생님은 월급 아닌 딴 데서 구할 도리가 없었다. 월급날마다 정 선생님은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지급 명세서를 서무과에서 따로 한 장 더 얻었다. 그리고 돋보기를 쓰고 비자금 액수를 제한 월급에 맞추어 지급액과 공제액을 이리저리 계산하는 게 월급날의 골치 아픈 일거리였다. 다달이 월급을 속여서 봉투를 건네준 정 선생님과, 건네받는 사모님을 상상하면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 정 선생님께선 몇 해 전에 정년으로 교단을 떠나셨다고 한다. 다행히 현금으로 직접 월급을 수령하던 때에 교직에 계셨기에 망정이지 요즘과 같이 은행 계좌로 끝전 몇십 원까지 불입되는 비인간적인 시대였더라면 그 선생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내기 바둑으로 황혼의 인생을 즐기는 여유마저 갖기 어려웠을 그 선생님을 생각해보면 측은한 생각이 든다.
시월. 단풍의 계절이다. 오늘도 관광버스마다 여자들이 단풍놀이에 신바람이 난다. 기어이 풀어버려야 할 무슨 스트레스가 그리도 많은지 '꿍따리 샤바라', 길길이 뛰는 모습이 꼴불견이다. 거리엔 가로수로 늘어선 노란 은행나무들이 환한 등불을 매단 양 아름다운 요즘이다. 계절의 엄연한 변화를 조용히 받아들이는 저 나무들처럼 안으로 충실의 시간을 가꿔야 할 때라는 생각에서 나는 혼자만의 오후, 남편의 책상 앞에 앉아본다. 그리고 지난달에 남편이 사다준 피천득 선생의 수필집을 조용히 다시 펴본다.

 

 

 


눈물

김명규


날려갈 것 같은 거센 바람 소리뿐이었다. 인적이란 없었다. 서양 영화에서 본 듯한 작은 이층집 한 채가 정적 속의 언덕 위에 서 있었다.
차에서 내린 우리 일행은 굳게 닫혀진 문 앞으로 가서 벨을 눌렀다. 잠시 후 차분하고 기품이 서린 늙은 수녀님이 세속적인 반가움이나 가벼운 표정조차 없이 문을 열어주었다. 은퇴하신 대주교님의 주교관이었다. 설을 쇠고 교우 몇 명이 어울려 대주교님께 세배를 드리러 나선 길이었다.
우리를 반겨주시던 대주교님께 축복 기도를 받고 대문 밖으로 나왔을 때 다소 바람이 잔 하늘은 쪽빛으로 푸르렀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거기에서 하느님을 외쳐 부르면 금방이라도 천상의 소리가 메아리쳐 들려올 것만 같은 고요한 곳이었다. 주교관 아래로 가톨릭대학 캠퍼스가 눈에 가득 들어왔다. 일 년에 한 번 성소 주일에만 개방이 된다는 곳, 속세와 차단된 그 곳에 계시는 수도자들의 영혼이 어찌 흰눈과 같지 않을까.
마당에서 대주교님의 전송을 받고 있을 때 하얀 진돗개 한 마리가 우리들 앞으로 오더니 반가운 듯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었다.
그 날 운전을 해주었던 안젤라와 나란히 나는 앞자리에 앉아 서서히 비탈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 때 좀 전에 본 그 진돗개가 짖어대며 있는 힘을 다해 자동차 뒤를 쫓아왔다. 개는 자동차를 앞질러 길을 가로막았다. 안젤라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내 쪽의 차창으로 개는 앞발을 걸치고 얼굴을 바짝 들이대는 것이었다. 커다란 개를 무서워하던 나는 짐짓 놀라 몸을 뒤로 제꼈다. 그리고 진돗개를 쳐다보았다. 나는 보았다. 울고 있는 개의 얼굴을. 둥근 눈에는 분명 눈물이 어려 있었다. 뒷자리에 앉아 있던 루시아가 말하였다. 우리가 떠나는 것을 보고 섭섭해서 그런갑다고, 짐승인들 이 산 속이 외롭지 않겠느냐고 혀를 찼다. 다음에 올 때에는 맛있는 것 많이 가지고 올 테니 잘 있으라고 말하자 개는 알아듣는 듯 차체에서 떨어져 내려섰다. 그리고 우리가 멀어질 때까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는 개의 눈물을 두 번째 경험하였다.
내가 단독주택에 살면서 기르던 개 쏠라가 다섯 마리의 새끼를 낳았었다. 어미의 젖을 떼고 쏠라의 다섯 새끼들이 호강스럽게 살 만한 집을 골라서 시집을 보내었다. 그 중 한 마리는 송정리 시골 집에 조용히 지내면서 소설을 쓰고 있던 문우에게 주기로 하였다. 나는 어린 강아지를 넓은 타월에 싸서 조심스럽게 안고 버스를 탔다. 좌석에 앉아 한참을 가다가 무릎 위에 앉힌 강아지를 들어 수건 안에 얼굴만 내민 것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미동도 없이 웅크리고 있는 강아지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는 게 아닌가. 어린 것을 어미에게서 떼어놓은 내가 몹쓸 짓을 한 것 같아 가슴이 철렁하였다. 강아지의 얼굴을 쓸어주면서 나는 속으로 말하였다. '세상에 태어난 생명 있는 모든 것은 어미를 떠나 사는 법이란다.' 강아지를 시골의 문우에게 넘겨주고 돌아오는 길은 딸을 시집보낸 모성처럼 마음이 서늘하였다.
동물에게도 눈물이 있다는 것을 나는 어려서 일찍이 체험하였다. 다섯 살 적에 나는 우시장이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있었다. 닷새마다 서는 장날이면 소 떼가 모여드는 그 곳에 종종 찾아갔다. 소가 다른 사람에게 팔려갈 때면 슬피 운다고 말씀하신 할아버지의 얘기가 정말인지 보고 싶어서였다. 우시장을 둘러 친 철조망 밖에 서서 소를 사고 파는 흥정이 이루어지는 광경을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황소도 있고, 작은 송아지도 있었다. 끌려나온 소들은 운명을 기다리는 듯 유순하게 기죽어 서 있었다. 새 주인을 만나 농부의 손에 끌려가는 소는 울지 않았다. 그러나 험상궂게 생긴 아저씨가 우악스럽게 소를 끌고 가면 그 소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리라는 것을 알기에 탁구 공만한 눈에서 눈물방울을 뚝뚝 떨구며 우는 것이었다. 나는 동무들과 어울려 놀 때에도 소가 울던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울적하였다.
우리 집 아들녀석이 다섯 살이 되었을 때 나는 동화처럼 그 얘기를 들려주었다. 어느 햇살 고운 봄날 마루에 앉아서 엄마의 입을 쳐다보며 이야기를 듣던 아들녀석도 똥그란 눈망울이 금세 분홍빛으로 물드는 거였다. 끝내는 입을 삐죽거리더니 소가 불쌍하다며 엉엉 울었다. 나는 아이를 보듬어 달래었다. 머잖아 손자가 태어나면 제 아범이 아이에게 다시 들려줄 얘기로 할미의 감성을 받아 느꼈으면 좋겠다.
말 못하는 짐승들의 눈물은 지금도 내 마음을 아리게 한다. 눈물이란 영혼을 깨우고 움직여서 반사되는 보석의 빛깔과 같은 것이 아닐는지. 내년에도 주교관을 방문하게 된다면 그 진돗개에게 줄 먹이를 들고 가 그 때까지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개와 흠뻑 정을 나누고 싶다.

 

 

 

 

 



얄미운 미소

김명규


혼란스런 생각으로 머릿속은 뒤엉킨 수세미 같았다. 씨티촬영을 마치고 결과를 기다리며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나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온몸의 힘이 발가락 끝을 통하여 죄다 빠져나갔다. 고무장갑을 낀 채였다. 장갑 안에서 후끈한 수증기가 진득하게 느껴질 때까지 나는 꼼짝하지 않고 결과를 알리는 전화를 기다려야 했다. 2년에 한번씩 남편은 직장단위로 건강 검진을 받았다. 올해도 어김없이 검사를 받았었는데 폐에 이상이 있는 것 같으니 엑스레이 직접 촬영을 해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내게 말한 것 같지만 나는 그 말을 건성으로 들었었다. 다음날 아침에 출근하였던 남편은 곧바로 병원부터 들른 모양이었다. 김장을 하려고 절인 배추의 양념을 준비하던 아침나절이었다. '그놈의 담배 때문일 거야' 아이들이 나무젓가락 끝에 꽂힌 알사탕을 빨듯 계속해서 남편은 담배를 빨았다. 내가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을 때 그 연기를 피울 때면 입에 거품을 물고 별별 야만스런 독설을 퍼붓는데도 죽으면 죽으리라고 줄기차게 태웠다. 담배가 몸에 이로운 영양제라면 하루에 열 갑을 태워도 말하지 않겠다고 얼르기도 하지만 그 애착을 버리기가 그렇게도 어려웠을까. 담배를 파는 동네 입구 가게에서부터 연초 제조창까지 당장 달려가 차근차근 부숴버리고 싶은 분노가 복받쳐 왔다.
남편은 남달리 체구가 작고 허약해 보이는 사람이다. 태풍이 세게 불어도 종잇장처럼 날아가 버릴 것 같아 은근히 걱정하며 살아왔던 터다. 고무장갑을 벗어 주방에 던져 놓고 경황없이 소파에 앉으니 두 배의 중량감으로 의자는 깊숙이 가라앉았다. 엑스레이 직접 촬영을 하고 또다시 씨티촬영이라는 정밀검사를 받는다는 자체가 예사롭지 않은 것 같았고 의학 상식이 부족한 나는 두렵고 앞이 캄캄했다.
가족을 위해 모진 추위와 비바람을 혼자 맞으면서 말없이 버텨온 느티나무와 같은 사람. 그를 만나 살아온 생애가 스크린을 흐르는 필름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젊었을 적 어느 해 여름이었다. 퇴근 길 시내버스에서 내렸을 때 길 건너 찻집에서 시원한 주스 한잔 마시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였지만 주머니에 돈이 없어 그냥 왔다고 하였다. 우리 아이들은 그 무렵 누에가 뽕을 단숨에 먹어치우듯이 쓴 것 단 것 없이 한창 먹으며 자랄 때였다. 집에서 농산물 도매시장까지는 삼십여분이 걸렸지만 나는 버스비를 아끼려고 걸어서 다녔다. 양이 많고 못난 사과를 한 상자씩 사서 머리에 이고도 남편의 말이 목에 걸려 시내버스를 타지 않았다. 비록 마시고 싶었던 주스 한 잔 마실 수 없었던 남편이나 시내버스비마저 아끼고 싶어 고개가 휠 것처럼 무거운 과일 상자를 이고 걸어 다녔던 나도 그것이 결코 서글프진 않았다. 어린 새끼들 웃음소리가 담 밖으로 새는 그때 우리는 행복하였다. 이제 아이들은 다 출가하였고 남은 우리 내외는 마시고 싶은 주스도 실컷 마시고 살아온 셈이다. 그러나 아직은 우리가 늙고 병드는 일을 생각할 여유가 없이 그런 대로 큰 병 앓지 않고 지내왔다. 그런데 내 남편이 중병 환자가 찍어야 한다는 씨티촬영을 하게 된 것이다. 친구들이 한 번쯤은 부부 동반하여 다니는 외국 여행 한번 우리는 떠나보지 못하였고 귀여운 손자도 아직 안아보지 못하였다. 가슴 한 군데가 뚫린 것처럼 시려왔다.
적막을 깨우며 전화벨이 울렸다. 결과가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며 택시 안에서 휴대폰으로 몇 마디를 남기고 끊어버린다. 목소리는 평소 여느 때처럼 감정의 기복이 없었다. 애태우는 나에게 택시를 타기 전 전화하여 결과부터 알려 주지 않는 것은 그의 타고난 성격이다.
냉수 한 컵으로 나는 마른 목을 적셨다. 내 손으로 아직 전등 한번 갈아 끼워본 일 없었다. 주말이면 유리창 청소는 남편이 맡아 놓고 해주었다. 크고 작은 심부름도 남편이 아니면 해줄 사람이 없었다. 나에게 가장 큰 의지는 생활수단을 책임지고 해결해 주는 사람이었다. 남편이 절대적인 존재로 새삼스럽게 인식되는 것은 결국 내 자신의 지극한 이기심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차가운 기계 속에 몸을 맡기고 미라처럼 누워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남편은 시를 쓰는 사람이다. 그의 시 구절처럼 서글프게 내 영혼을 깨우는 구두 발자국 소리와 함께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현관으로 들어선 그의 손에는 노란 큰 봉투가 들려 있었다. 거실 바닥에 힘없이 내려놓으며 폐에 기포가 생겼고 결핵이라는 판독이 나왔다고 별 일 아닌 것처럼 말하였지만 어두워 보였다.
간호사 생활을 오래 하였다는 아래층 K시인을 불렀다. 그는 우리 집 일이라면 자기 일처럼 도와주었고, 그의 남편은 의과대학 교수였다. K는 엑스레이 사진을 들고 베란다 창 쪽에 펼쳐 보더니 나름대로 아는 체를 하였다. 명랑하고 입담이 좋아 평소에도 장난스럽던 그는 오후에 남편이 돌아오면 상의해 보자면서 은근히 겁을 주는 얘기들을 쏟아 놓았다. 결핵 환자는 양 볼에 도화색을 띄고 늘 발그레한데 이제 보니 선생님이 그랬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성욕이 무척 강해지는 병이라고 스스럼없이 남편을 폐결핵 환자로 내놓고 떠들었다. 하지만 요즘 결핵은 잘 먹고 편히 쉬면 쉽게 낫는다고 걱정하지 말라면서 병 주고 약도 주고는 내려갔다.
남편은 온종일 서재에서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양념을 버무려 김장을 담그는 동안 별별 생각이 바람처럼 왔다가 사라지곤 하였다. 올 겨울 이 김치를 남편과 마주 앉아 함께 먹을 수 있을까, 결핵을 앓는 남편은 마산 어디쯤에 있다는 요양소로 격리되는 것은 아닐까. 나는 그를 찾아가 슬픈 상봉을 해야만 하게 되는 것은 아닐지.
폐에 기포가 생겼으니 척추를 가르고 대 수술을 해야 한다고, 남편의 사진 판독을 듣고 K가 저녁에 올라왔다. 폐암이 아닌 것에 순간 감사하면서 올 것이 왔구나 싶더니 차라리 마음은 침착해졌다. 오진이 있을 수도 있어, 내가 잘 아는 성당의 교우 중 흉부외과 의사인 바오로씨 집으로 사진을 들고 늦은 밤 찾아갔다. 사진으로 보아 결핵이라며 요즘 공해로 인해 결핵환자가 부쩍 늘어나는 추세라고 그가 말하였다. 그는 결핵 정도는 중병으로 생각지도 않는 눈치였다.
다음날 우리는 대학병원 결핵전문의를 찾아갔다 뷰박스에 사진을 끼운 의사는 잠시 그것을 주시하였다. 긴장한 남편은 말썽을 피우다 잡혀온 아이처럼 주눅이 들어있었고 나는 가슴이 떨리는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올 것만 같았다. 의사가 뷰박스에서 사진을 빼내고 테이블 앞에 앉자 나도 모르게 성급하게 말이 튀어 나왔다. "담배 때문이죠?"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지금 사진으로 나타난 증상은 젊었을 때 자각증상이 없이 결핵을 앓았다가 저절로 치료된 흔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결핵은 담배와 상관이 없다고 말하였다. 뒤에 서 있던 나를 돌아보며 남편은 빙긋이 웃고 있었다. 담배를 피운다고 너무 구박하지 말라는 듯한 얄미운 미소.
택시 승강장까지 앞서 걸어가는 남편의 걸음이 예전과 다름없었지만 나에게는 쓸쓸하게만 보였다. 가난한 마음 하나를 신념으로 살아온 사람, 삶이 고달플 때마다 내가 내리찍은 흔적들이 그의 뒷모습에서 어른거린다. 우리가 병원 문을 빠져나올 때 근조 화환을 실은 작은 트럭이 영안실 쪽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지금 남편은 어둠이 내린 베란다 구석에 서서 빨간 꽃잎 같은 불꽃을 물고 있다.

저 멀리 무등산 등성이 쪽으로 향하여 무엇을 골똘히 생각 하는지 나는 모른다.

 

 

감꽃을 모르는 아이들

김명규


민자네 집 감나무 가지는 키 작은 싸리 울타리를 넘어 골목길로 뻗어 나왔다. 감꽃을 줍기 위해 어린 나는 이른 아침에 일어나 할머니가 만들어 준 작은 함지박을 들고 집을 나섰다. 아침의 하늘은 연한 보랏빛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송글송글 떨어져 있는 감꽃은 연노랑 크림색으로 이슬에 젖어 더 싱그럽고 탱탱하였다. 어른들은 골목길 민자네 집 앞을 지나면서 방금 떨어진 그 생생한 감꽃을 그냥 밟고 지나갔다. 떨어진 감꽃이 밟혀서 짓이겨지기 전 얼른 가서 주우려는 생각 때문에 나는 잠결에도 감꽃 꿈을 꾸었다.
주워온 감꽃은 실에 꿰어 목걸이를 만들어 두 겹 세 겹으로 목에 걸면 나는 공주라도 된 기분이었다. 감꽃 목걸이는 쉽게 시들지 않는다. 다른 꽃들보다 꽃잎이 동글동글하고 통통하게 살이 있어, 입안에 넣으면 씹히는 게 있었고 달착지근했다가 훗입맛은 떫떠름하였다.
감꽃의 추억은 아직도 나를 유년의 동화 속으로 끌어들인다.

학교에서 신학기가 시작된 봄날이었다.
평소에도 남편은 저녁 식탁에서 학교의 수업 시간에 있었던 얘기를 곧잘 들려주었다. 고등학교 이 학년 삼백여 명 중 감꽃을 본 학생이 꼭 한 명 있더라는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사과꽃이 맺혀 있던 부분도 모르고 그것을 배꼽이라고 말하는 학생이 있어 웃었을 뿐 그것마저도 아는 아이가 없더라고 하였다.
눈부시게 아름답던 꽃도 결국엔 시들고야 만다. 꽃이 진 자리에 그 희생으로 열매가 잉태된다. 그 열매가 모진 시련을 극복하고 익어갈 때 단맛과 향기를 낼 수 있다는 교훈을 남편은 가르치기 위해 꺼낸 꽃 이야기였다고 한다. 그런데 감꽃을 본 일조차 없는 아이들에게 그런 것을 이야기할 흥미를 잃었다고 했다. 남편의 실망스러운 얼굴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도시에서 삼십여 분만 차를 타고 외곽으로 나가면 동네마다 한두 그루의 감나무를 흔하게 볼 수 있다. 과수 농가가 늘면서 옛날보다 더 쉽게 눈에 띄는 것이 과일 나무다. 지금의 아이들은 훗날에 무엇을 추억할까? 고층건물의 학원이나 학교 교실 안에 갇혀 있는 아이들이 가엾은 생각이 든다.
추운 겨울에도 논밭으로 뛰어다니며 연을 날리는 풍경 속에서, 집 모퉁이나 마을 어귀에서 나는 흙을 만지며 자랐다. 지금도 그 때의 정서가 내게는 찰랑하게 남아 있다. 더구나 서글픈 것은 근래에 어린이 놀이터가 텅 비어가고 있는 현실이다. 아이들의 놀이터에 동네 노인들의 쉼터가 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아파트의 아이들은 놀이터를 떠난 지 오래다.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오르내리면서 만났던 아이들이 모두 어디로 갔을까. 어려서 동네 아저씨들이 새끼를 굵게 꼬아 정자나무 튼실한 가지에 그네를 매어주었다. 그네를 타고 싶어 쪼그리고 앉아 한나절 내내 차례를 기다리던 일이 생각난다.
아이들이 오지 않는 어린이 놀이터는 이른봄의 햇살에 쓸쓸히 잠겨 있다. 아이들 모두가 집에서 컴퓨터 앞에서 미래의 문명을 꿈꾸는 것일까. 만능의 요술 상자라지만 마우스 한 번 잘못 누르면 인간의 영혼을 마비시키는 전류만이 흐를 뿐이다.
내 아이가 컴퓨터 앞에서 공부한다고 조용히 앉아 있을 때 엄마는 안심이 될까. 컴퓨터 게임에 탐닉하는 아이들이 야성의 난폭한 성격을 자신도 모르게 키워가고 무서운 음모가 도사리고 있어 언제 시한폭탄처럼 그것이 비행이나 범죄로까지 발전할는지도 모르는 것을…….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싸우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서 자라는 것이 좋을 성싶다. 나는 어려서 아이들의 고무줄 놀이에 끼고 싶어 맛있는 밀가루 빵을 들고 나와 친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게 두려워 요즘은 모두 안방으로 숨어드는 병약한 어린이들이 늘어가는 것 같다. 자기 자신밖에 소중한 것이 없는 이기적인 아이들은 누가 그렇게 만들어 가는 것일까.
유창하게 영어를 잘하는 아이가 벼이삭을 본 일이 없고, 감꽃도 모른다는 것은 정신적 영양의 결핍과 다를 바 없다. 근본을 모르는 것은 뿌리가 없는 나무와 같다. 서양에서 들여온 후리지아나 히야신스 꽃은 알아도 목화꽃이 빨갛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요즘 아이들이다. 영어 단어를 외우고 과학을 탐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더불어 사는 사람살이의 방법을 깨치는 일일 것 같다. 놀이터에 추레하게 멈춰 서 있는 그네에 아이들이 몰려와 친구를 사귀고 과자를 나누어 먹는 모습이 보고 싶다. 아이들이 서로 다투어도 제 아이를 먼저 나무라는 젊은 엄마들을 만나고 싶다. 내 어린 날의 향수를 그들에게 나누어줄 수만 있다면.
주택가의 좁은 골목길까지 깔린 그 두꺼운 시멘트나 아스팔트를 뜯어내 버리고 아이들을 맨땅에서 뛰어 놀게 하였으면 좋겠다. 땅 위에 간장종지만한 동그란 홈을 파서 구슬치기를 하고 땅뺏기를 하는 놀이 공간이 될 수 있게 말이다. 눈에 보이는 문화재만을 보유하기보다는 작고 소박한 어린이 놀이 문화를 옛날처럼 되살릴 수 있었으면 싶다. 우리 아이들을 컴퓨터 게임 속에서 구해낼 수 있는 하나의 방책이 되지 않을는지.
올해의 감꽃이 피는 오월에는 과수원의 감나무 아래에서 초등학생들의 소풍이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2001. 3월)

 

터미널 그 쓸쓸한 추억

김명규


미국의 여류시인 에드나슨트 빈센트 밀레아는 "인생은 끝없는 아리아."라고 하였다.
정류장이란 떠나는 사람과 기다리는 사람들로 물결을 이룬다. 지는 해를 바라보듯이 아쉬움을 머금고 이별하는 사람들, 만남의 기쁨을 환호하는 얼굴들을 보고 있노라면 슬픔과 기쁨이 담긴 한 소절의 아리아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장성한 우리 아이들 모두가 서울에 있어 나는 종종 버스를 타고 서울을 찾아간다. 제각기 직장에 얽매어 바쁘게 사는 아이들이라 강남 터미널에 도착할 때나 다시 서울을 떠나올 때에도 나는 늘 혼자서 오고 간다. 버스 출발 시간을 앞두고 잠시 기다리는 동안 터미널까지 전송 나온 자녀들이나 친지들과 못내 섭섭함을 나누는 광경을 볼 때면 나는 사뭇 그들이 부러울 때가 있다. 기차역이나 버스 터미널에 혼자 서 있을 때면 나는 문득 그 날의 풍경을 떠올리게 된다.
지난 삼월 초 강남 터미널에서였다. 젖먹이 아기를 가슴에 안은 젊은 주부가 그의 남편과 함께 친정 어머니를 배웅 나온 듯하였다. 허름한 점퍼와 낡은 청바지를 입고 있던 남자의 초라한 모습으로 보아 어렵게 살아가는 부부 같았다. 삼월의 찬바람은 그날 따라 움츠러들게 쌀쌀하였다. 추워서 핏기가 없는 젊은 남자의 썰렁한 옷차림에 나의 눈길이 자꾸만 부딪쳤다. 선량하고 순박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친정 어머니는 들고 있던 작은 가방을 딸에게 잠시 맡겨주고 화장실에 가는 모양이었다. 그 틈을 타서 아이의 아빠는 점퍼 안주머니에서 흰 봉투를 꺼내어 아내에게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든 아내는 얼마를 넣었느냐고 물었다. 남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십만 원이라고 대답하였다. 집에는 생활비도 떨어지고 없는데 너무 많다면서 아내는 남편에게 볼멘 소리를 하였다. 아내를 달래며 그는 말했다. 어머니께 보약 한 번도 못 해 드렸는데, 그리고 이제 곧 농사철이 되면 얼마나 돈 쓸 데가 많겠느냐면서…….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 앞에 다가선 듯 나는 뜨거운 감정에 휩싸였다. 그 젊은이를 더 이상 바라볼 수가 없어서 눈길을 돌렸다. 삭막한 도시 한 모퉁이에 고향의 향훈(香薰)이 봄 햇살처럼 찾아들었다. 아기는 엄마의 심장에 볼을 대고 잠들어 있었다. 남편의 등뒤로 돌아선 아기 엄마의 손이 가만히 눈언저리를 씻어내렸다. 남편에 대한 고마움과, 친정 어머니에 대한 애처로운 마음이 무지개처럼 피어올랐으리라. 나는 시간이 되어 버스에 오르면서 속으로 젊은 부부에게 축복이 있기를 빌어주었다. 버스는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쫓기듯 달렸다.
고속버스.
경부 고속도로가 개통되고 그레이 하운드라는 고속버스가 들어와 우리 나라에선 처음으로 서울-부산 간만을 운행하였다. 때맞춰 내 친구들 중 제일 먼저 결혼했던 숙자가 그 고속버스를 타고 신혼여행을 떠났다. 스튜어디스처럼 멋진 유니폼을 입은 고속버스 안내양의 극진한 영접을 받으며 버스에 오르던 숙자의 행복한 얼굴은, 비행기 트랩을 밟고 외국 여행길에 오르는 기분을 느끼는 것 같았다. 나도 나중에 고속버스를 타고 숙자처럼 신혼여행을 가고 싶었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던 나는 부모가 계시는 산정읍에 내려갈 때에는 늘 완행열차를 타야만 했다.
지금도 기차역을 자나노라면 어렸을 적의 추억이 물 젖은 푸성귀처럼 생생하게 살아난다. 우리 집은 기차역과 가까운 동네에 있었으므로 심심하면 나는 으레 역의 대합실을 찾아갔었다.
눈오는 날, 조개탄 난로가 벌겋게 달구어진 대합실 안은 따뜻하고 왠지 모르게 내 마음을 설레게 하였다. 그 시절에 부산에 살고 있던 고모가 일 년에 몇 차례 할아버지, 할머니의 생신이거나 집안의 큰 행사 때마다 찾아왔다. 결혼한 지 채 얼마 되지도 않아 고숙을 떠나보낸 고모는 친정살이를 하다가 홀로 떠나가 사는 곳이 부산이었다. 국제시장 큰 가게에서 고모는 점원으로 일한다고 하였다.
집에 올 때마다 고모는 무거운 가방을 몇 개씩 들고 왔다. 그 가방 안에는 식구들에게 줄 선물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 중에서도 그때는 귀했던 빨간색, 초록색 내 나일론 양말과 학용품이며 과자가 나를 뛸 듯이 기쁘게 해 준 고모의 선물이었다. 고모가 찾아오기를 나는 명절을 맞듯 설레며 기다렸다. 부산에서 산정읍까지 열 두 시간 동안 밤 완행열차를 타고 온 고모는 하룻밤이나 이틀을 지나면 훌쩍 돌아가 버렸다. 고모를 태운 기차가 저만큼 멀어져 가물거릴 때까지 할머니와 나는 정거장 빈터에서 한참동안 멍하니 서 있곤 하였다.
고모가 온다는 소식 없이도 나는 민자와 고무줄놀이 하던 것도 뒤로하고 혼자서 정거장을 찾아가 보기도 하였다. 기다림과 그리움이 있는 곳. 열차가 도착할 시간에 앞서 기차에서 내린 승객들의 차표를 회수하기 위해 역무원이 개찰구 문을 열고 승객들을 기다렸다. 그럴 때면 마중 나온 사람들이 우르르 개찰구 쪽으로 달려들었다. 나도 잽싸게 달려가 개찰구 가까이에 까치발을 딛고 서서 열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낱낱이 살펴보았다. 머리 위에 짐을 이고서도 팔이 늘어지게 무거운 짐 보따리를 들고 나오는 사람, 큼직한 가방을 등에 멘 사람, 한 손에는 짐을 들고 또 한 손으로는 어린아이의 손을 붙잡고 나오는 사람…. 저 사람들의 보따리 안에는 어렵게 모은 돈으로 마련한 효성과 사랑의 선물이 가득 담겨 있을 것이라 상상해 보는 일이 나는 행복하였다.
지금도 기차 정거장을 보면 그때 일이 어제인 듯 나를 쓸쓸하게 한다. 연로하신 고모는 얼마 전에 암으로 투병하다가 끝내 세상을 떠났다. 나는 기차를 타고 싶은 생각이 없다. 추억이란 언제나 쓸쓸한 것이므로.
하지만 다음 여행에는 기차를 한 번 타볼까 한다. 열차 안에서 삶은 계란 하나가 그리도 귀하고 맛있던 옛날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 때엔 계란을 넉넉히 삶아 가지고 가서 옆에 앉은 낯선 손님들과 나누어 먹으며 지나간 일들을 그리워하고 싶다.

 

 

 

 

오십 년 뒤의 선물

김명규


남편의 새 직장을 따라 우리는 시골에서 도시로 이사하게 되었다. 남의 집 비좁은 이층에 전세를 얻었기 때문에 묵은 살림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문을 여닫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포마이카 장롱과 오래 된 찬장도 버리자고 나는 시어머니께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아무 말이 없었으나 못내 섭섭한 눈치였다. 찬장에서 그릇들을 꺼내어 어머니는 말없이 커다란 고무통에 차곡차곡 담았다. 쓰지 않는 유기 그릇들을 고물 장수에게 넘겨줄 모양으로 어머니는 그것도 한쪽으로 치워놓았다. 가볍고 녹슬지 않는 스테인리스 그릇에 밀려난 놋그릇이었다.
이삿짐을 트럭에 싣던 날 분홍 보자기에 따로 싸놓은 묵직한 그릇 하나가 눈에 띄었다. 무거운 돌냄비였다. 길에 버려도 누가 주워갈 것 같지 않은 새까맣고 심란스런 그릇이었다. 정갈하신 어머니가 저런 돌냄비를 왜 보자기에 싸 두었는지 알 수 없었다. 우툴두툴 투박한 몸통에 귀가 달렸으며 석재는 쑥돌이 분명했다. 처음 보는 것 같았지만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보니 어머니가 그 돌그릇 안에 팥이나 참깨 같은 잡곡을 넣어두었던 생각이 떠올랐다. 잡곡을 담아 쓸 그릇이라면 예쁘고 가벼운 것이 얼마든지 많이 나오는 때였다. 남편에게 나는 무겁고 별로 쓸모도 없는 그것을 버리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남편은 그게 무슨 소리냐고 깜짝 놀랐다. 그건 아버지가 출장 갔다 돌아오시던 날 어머니께 사다 드린 선물이라는 거였다.
시아버님을 나는 흑백 사진으로만 뵈었을 뿐이었으므로 도무지 어떤 분인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아버님은 광주고보를 수석으로 졸업하시고 곧바로 공무원이 되어 세무서장을 지내신 분이라 하였다. 젊은 시절 어머니는 아버님의 전근을 따라 이곳저곳 당신의 삼 남매를 데리고 관사에서만 생활하였다. 큰집 큰아버님은 벌이가 적어 아버님의 월급은 항상 절반을 떼어 큰집으로 보내 드렸다고 한다. 그런 아버님이 마흔 다섯에 병환으로 세상을 뜨셨다. 유족들은 관사를 비워야 했고, 그러나 오두막 한 채도 없어 막상 머리 두르고 갈 곳이 없었다. 세무서장을 지내신 분이 그처럼 청빈하게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된 동료들도 놀랄 정도였다고 한다. 친분이 있는 고인의 동료들이 나서서 성금을 모아 집 한 칸과 얼마의 위로금이 지급되었다. 서른 여덟에 남편을 잃은 어머니의 시린 마음을 나는 그 시절 한 순간도 헤아리지 못하였다.
누나와 형님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뒤였으므로, 막내며느리와 십 삼 년을 함께 사시는 동안 어머니는 손자들을 돌보느라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가난한 집에 시집온 며느리가 가엾어서였을까. 집안 구석구석 힘든 일은 어머니 손이 먼저 갔다.
그런 어머니에게 겨우 그 형편없이 초라한 돌냄비를 선물로 사 주셨다니. 그러나 어머니는 그 돌냄비를 한 번도 냄비의 쓸모로 사용한 적이 없었다. 그것을 처음 사왔을 때엔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밥을 짓던 때였고 그 후 연탄이 나와 아궁이를 개량했지만 그 냄비의 크기란 아궁이에 박혀 꺼내는 일이 도무지 힘들 터였다. 내가 시집왔을 당시에는 식구가 늘어 그 돌냄비는 사용할 수가 없었다. 나는 시아버님이 원망스럽고 야속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 옛날 많은 여성들이 선호하였을 모나분이나 구리무 한 통쯤 선물로 사왔더라면 어머니는 두고두고 고마워하셨을 텐데. 하지만 며느리인 내가 보이지 않을 때를 골라 어머니는 찬장에서 그 돌냄비를 꺼내어 깨끗이 삶은 행주로 닦고 또 닦아 왔으리라. 어쩌면 어머니는 남편이 남기고 간 단 하나의 유물인 돌냄비에서 아버님의 영혼을 만나고 말없는 대화를 나누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남편의 영혼을 간직하듯 분홍 보자기에 돌냄비를 싸들고 나서던 어머니.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뒤로도 우리는 두 차례나 이사하였다. 이사할 때마다 나도 돌아가신 어머니를 모시듯 그 투박한 돌냄비를 싸안고 다녔다.
아이들이 장성하여 모두 제 일을 찾아 객지에 나가 있고, 이제는 아파트에 우리 두 내외만 남게 되었다. 어쩌다 밥 두 그릇을 전기 밥솥에 안치는 일이 큰 접시에 콩알 하나 담아 내놓는 듯해서 문득 그 돌냄비 생각이 났다. 싱크대 깊이 처박아둔 그것을 꺼내어 수세미로 여러 번 닦고 씻었다. 그리고 두 그릇의 밥을 안쳐보았다. 요즘 식당에서 흔히 보는 얄팍한 돌솥과는 달리 몸채가 두툼하여 쉽게 끓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번 끓기 시작하면 약한 불에서도 끓어 서서히 뜸이 들었다. 가스 불을 꺼놓은 후에도 두툼한 뚜껑 사이로 누룽지 눋는 고소한 냄새가 은은하였다. 뜨겁고 둔한 뚜껑 꼭지를 행주로 싸서 열면 밥알이 찬 공기와 부딪쳐 물기를 거두는 소리가 싸아 하고 들린다. 양은솥의 숭늉을 먹던 때보다 더 숭늉 맛이 깊었다.
내가 돌냄비에 밥을 짓고 있을 때 퇴근하여 돌아오는 남편은 아이처럼 좋아한다. 밥알이 쫘악 퍼져서 기름을 바른 듯 윤기가 도는 밥을 남편과 오순도순 먹으면 어머니 생각이 난다. 시아버님과 어머니가 못다 하신 내외의 정분을 남편과 내가 대신 나누는 것 같다. 돌처럼 차가운 듯하지만 한번 더워지면 쉬이 식지 않는 진지함에서 돌냄비를 볼 때마다 나는 냉철하고 엄격하신, 그렇지만 깊은 정을 지니신 아버님을 뵙는 듯하다. 돌냄비 하나를 선물로 남기신 아버님은 부부간의 사랑까지도 대물림하고 가신 분이셨다. 가난하지만 양심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늘 말씀하셨다는 시아버님의 가르침을 내가 닦고 있는 돌냄비에서 새겨듣는다.

 

 

 

 

 

 

 




 

아침에 나누는 대화

김명규


나는 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해마다 사월이 되면 산과 들은 색채의 향연을 이루고 세상이 온통 꽃밭 같다. 샛노란 산수유, 아기 입술 같은 진달래, 분홍의 복사꽃, 팝콘처럼 한꺼번에 피는 벚꽃……. 꽃의 화려함에는 잠시 눈이 즐겁지만 나는 꽃에 대한 관심이나 애정이 별로 없다.
꽃들 중에서도 싫은 것이 장미다. 장미의 향기야 그 어느 꽃향기보다 우아하고 매혹적이지만 꺾이면 제일 쉽게 시들어버리는 가시 돋친 장미가 나는 싫다. 꽃집 아가씨가 장미 가시에 찔려 손가락을 두툼하게 싸맨 것을 보았다. 장미꽃을 팔다 보면 가시에 찔리는 것이 예사라는 듯 말없이 웃었다.
사람들 중에도 얼굴은 장미처럼 예쁘지만 가시가 돋친 사람이 있다. 나도 때로는 사람의 가시에 찔려 아파 할 때가 있다. 질투, 교만, 미움의 가시 ― 모양도 가지가지다. 그럴 때면 꽃집 아가씨처럼 아픈 곳을 싸매야 했다.
꽃을 좋아하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시든 꽃과 지는 꽃을 보노라면 우리의 생이 저와 같이 덧없음을 말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스산한 늦가을 날 뒹구는 낙엽을 보면 나는 걷잡을 수 없는 허무감을 느낄 때가 있다. 지는 꽃잎과 같은 우리의 삶이 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고, 작은 씨앗과 같은 희망이나 의욕도 꺾여버린다. 희망이란 어둠에 갇힌 사람들이 다가서는 창이다.
비록 꽃을 좋아하지 않지만 늘 푸른 잎을 매달고 있는 관엽 식물(觀葉植物)을 나는 좋아한다. 바킬라, 관음죽, 벤자민, 행운목은 사철 푸르름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식물을 기르는 데 별로 상식이 없는 나는 화분에 심은 꽃나무들을 죽이기 일쑤였다. 천장까지 키가 닿도록 무성했던 바킬라를 자주 물을 주었던 탓에 죽어갔다. 여름 내내 시원한 들녘 바람을 몰고 올 듯이 거실 한쪽에 우람스럽게 서 있던 나무였다. 가을이 되면서부터 그 무성한 이파리가 사막의 꽃처럼 맥없이 시들어 갔다. 분이 커서 쉽게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을 생각다 못해 꽃집의 아저씨를 불러왔다. 나무를 살리기가 어렵겠다며 아저씨는 무거운 화분을 어렵사리 들고 나와 아파트 정원 양지바른 곳에 옮겨 심어 보자는 것이었다. 앙상한 기둥만 남아 쫓겨난 듯 정원에 버려진 모습이 가여웠다. 바킬라가 버티고 섰던 거실의 그 자리가 휑하니 비어 있어 식구 하나가 나간 듯 허전하였다. 밤이 되어도 마음은 아파트 아래 정원으로 내려갔다. 자정이 가까워 주민들의 발걸음이 뜸해지면 나는 내려가 어둠 속에 서 있는 생기 잃은 나무 가지를 가만히 안아보았다. 사람도 생명이 다하면 나무토막 같다는 말을 한다. 그 나무토막을 뽑아냈다. 가볍고 힘없이 빠져 나왔다.
바킬라가 서 있던 거실의 빈자리에 새 식구로 행운목을 사 들여놓았다. 벼이삭도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자란다고 했던가.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면 베란다로 먼저 나가 난과 관음죽, 벤자민을 쓰다듬으며 '내 사랑하는 것들아 잘 잤니?' 하고 나는 인사를 나눈다. 일주일에 한번씩 물을 주어야 한다는 꽃집 아저씨의 말을 이제는 잘 지키고 있다.
올 겨울에 여행을 계획하고 있어 일주일이 넘는 여행은 떠나지 않아야 할텐데 걱정이다. 내 어린 젖먹이를 등에 업고 길을 걸으며 아이에게 소곤거렸던 엄마의 말처럼 나무들과 아침에 대화를 나누는 일이 나는 심심치 않다.
손짓하는 유월의 창밖은 신의 몸짓인 양 아름답기만 하다. 나는 꺾인 꽃이 싫어서 올해에도 내 생일에는 꽃바구니를 보내지 말라고 내 아이들에게 거듭 당부할 것이다. 

 

 






 

 

한턱 내기

김명규


감미로운 음악이 입안의 초콜릿처럼 부드럽게 녹아들었다. 혜정 언니와 최용근씨가, 지숙이와 내가 나란히 마주보고 앉았다. 시내의 중심지 스카이라운지였다. 우리는 대학의 사회교육원에서 알게 된 문우들이다. 혜정 언니와 최용근씨가 연달아 문학지를 통해 뒤늦게 등단한 것을 축하해 주기 위해 내가 마련한 자리였다. 넓은 유리창 밖으로는 한낮의 목화구름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떠 있었다.
그들과 만나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실 때면 나는 으레 대접만 받았었다. 의사 남편을 둔 혜정 언니, 사업가의 부인인 동갑내기 지숙이, 회사 중역인 최용근씨, 나는 모처럼 그들의 기호에 맞게 레스토랑에 초대하였다. 글을 쓰는 이들의 만남이고 보니 우리는 쉽게 친해졌고 동기간처럼 가까워 아까운 것 없이 나누고 싶었다.
종업원이 가져온 메뉴판을 나는 그들 앞에 내밀었다. 최용근씨와 혜정 언니가 머리를 맞대고 메뉴판을 손가락으로 짚어갔다. 이것은 이만 이천 원…. 들릴락말락한 소리로 혜정 언니가 음식값을 확인하였다.
"나는 이것으로 먹을래요."
혜정 언니의 손가락이 메뉴판에서 멈추자 최용근씨도 이어 동의를 하고 모두 그렇게 런치 정식으로 주문하였다. 식사 주문을 받은 뒤 흰 셔츠에 검정 나비넥타이를 맨 종업원이 출렁이는 와인 글라스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아름답고 순결한 여인의 입술 같은 와인을 우리는 높이 들어 축배를 들었다. 이만 이천 원, 혜정 언니가 분명 이만 이천 원 짜리 런치 정식을 주문한 게 틀림이 없었다. 양식을 별로 즐겨 먹지 않던 나는 햄버거 스테이크나 돈까스 정도의 값만 알고 있었다.
까스명수만 마셔도 취기가 도는 나는 와인 한 잔에 화선지에 물감이 번지는 것처럼 알코올 기운이 손끝까지 느껴졌다. 이만 이천 원. 나는 머릿속으로 내 핸드백 안에 들어 있는 돈을 헤아리기 시작했다. 어제 오후 노점상 아주머니에게 감자 이천 원어치를 사고 만 원에서 팔천 원을 거슬렀다. 그리고 오늘 약속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설 때 육만 원을 따로 세어 지갑에 넣고 나왔다. 지갑을 수십 번 뒤져봐도 돈은 모두 육만 팔천 원이 들어 있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준비한 돈은 식사비로 이만 원이 모자란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어 갔지만 나는 마음이 무거웠다. 그들이 웃으면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건성으로 따라 웃었고 한 마디씩 엉뚱한 말참견도 하였다. 밝고 환한 하늘이 큰 창으로 가득히 밀려들어오고 멀리 무등산 짙은 정기가 바람결에 풍겨올 듯 전망이 아름다웠다.
넓은 접시에 푸짐하게 골고루 담아온 음식은 비싸 보였고, 맛있는 냄새가 코끝에 닿았지만 식욕이 생기지 않았다. '엄마, 비상용으로 신용카드 하나 만들어 가지고 다니세요.' 하고 말하던 딸의 얼굴이 떠올랐다. 신용카드를 만들어 쓰게 되면 소비 성향이 커지므로 만들지 말라고 완강히 만류하던 남편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런 남편에 대한 미움이 불끈 솟아올랐다. 자기의 눈높이로 음식을 선택한 혜정 언니가 서운하였다. 내가 음식을 입에 넣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최용근씨는 내가 사주는 점심이니 더욱 맛있다고 농담을 한다.
나와 허물없이 지내는 지숙이를 화장실로 불러내어 이만 원을 빌려야 할까. 오늘 식사비가 모자란다고 내가 솔직히 털어놓으면 그들은 서로 자기가 계산하겠다고 나설 게 뻔했다. 이렇게 창피할 수가 있나.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퍼뜩 묘안이 떠올랐다. 나는 비로소 남은 음식을 맛있게 다 먹었다. 디저트로 과일과 커피가 나왔다. 카운터의 아가씨에게 내 사정을 이야기하고 주민등록증을 맡겨놓은 후 모자라는 돈은 오늘 저녁 안으로 갖다주겠노라고 할 참이었다.
테이블 밑으로 핸드백을 가만히 열고 지갑을 꺼내었다. 분위기가 흐트러지 않도록 눈치를 살피다가 화장실에 가는 체하며 일어났다. 평소의 내 목소리보다 훨씬 낮은 소리로 카운터의 아가씨에게 식사비가 얼마냐고 물었다. 오만 육천 원인데요. 예? 귀가 번쩍 띄었다. 얼마요? 내 목소리는 평소의 크기로 돌아왔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몸은 가볍고 계산을 무사히 끝낸 마음이 홀가분하였다.
소파 깊숙이 앉아 나는 커피잔을 들었다. 나는 그 커피 향에 마력처럼 빨려 들어갔다. 비빔밥 한 그릇이었으면 어땠을까. 내가 허세를 부려본 것이 아니었는지, 남의 옷을 빌려 입고 잔치집에 간 사람처럼 내 격에 맞지 않는 쑥스러움이 아직도 남아 있는 듯하다.


 



별과 대화하는 와불(臥佛)

김명규


유월. 새로 태어난 자연의 침묵을 한 줄기 바람이 흔들고 있었다. 봄에 화려한 꽃으로 영화를 뽐내던 벚나무는 그 꽃이 지고 짙푸른 가지마다 청년기의 열정을 품고 산들거렸다. 전남 화순군 도암면의 운주사. 내가 그 곳을 처음으로 찾아갔던 것은 십 사 년 전의 오월, 남편의 모임에 부부 동반으로 따라가서였다. 그 때만 해도 운주사는 흙냄새와 산골 풍광이 넘치는 곳이었다. 운주사에서 절의 구색을 갖춘 곳은 살림집 같은 오래 된 암자가 하나 있을 뿐, 화엄사나 송광사 같은 규모를 갖춘 가람의 모양새를 찾아볼 수 없는 허술한 곳이었다. 허허롭기만 하던 뜰에는 넘실 자란 쑥덤불과 질경이꽃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여기저기 흩어진 여남은 개의 석탑들은 아무렇게나 버려진 듯 서 있었고 그것들은 다보탑이라든지 석가탑처럼 세련된 예술미를 지닌 게 아니었다. 솜씨가 없는 사람이 그저 탑의 모양만 내어 만들어 세운 것처럼 볼품이 없었다. 그러나 못난 그 모양이 더 수수하고 정감이 느껴졌다. 밭 가운데 인절미 덩이를 포갠 듯한 원형의 석탑이 친근하게 다가섰다. 어떤 석탑은 탑신의 중간 어름에 앞뒤가 툭 터져 있고 그 안에 한 쌍의 불상이 서로 등지고 앉아 있는 신기한 것도 있었다. 이런 쌍배 석불을 안에 간직하고 있는 탑이란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때의 운주사 주변은 인적이 드물어 적막감마저 깃들여 있었다.
우리 일행은 운주사 뜰을 거쳐 왼쪽 산등성이를 타고 올라갔다. 울창한 나무 숲 사이로 가르마 같은 오솔길을 가는데, 암벽을 파고 새겨진 마치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는 듯한 두세 점씩의 못 생긴 불상들을 만나기도 하였다. 그대로 한참을 오르니 거기에 거대한 불상이 바위에 새겨져 누워 있었다. 그곳을 처음 찾아갔던 나와 일행은 그 특이한 모습에 감탄하고 놀랐다. 가쁜 숨을 진정하고 자세히 보니 좌상의 부처님과 나란히 또 하나의 작은 불상이 누워 있는 게 아닌가. 어찌 보면 다정한 부부가 나란히 누워 있는 것 같기도 하였고, 수행을 함께 하는 동행자 같기도 하였다. 성자의 거룩한 얼굴이 떼를 쓰고 누워버린 천진난만한 소년과도 같았고 지그시 감은 눈은 중생들의 구원을 위해 아직도 깊은 기도 중에 계시는 모습처럼도 보였다. 앉아 있는 모습의 부처님을 그 큰 바위에 새긴 후 일으켜 세우려 했으나, 작업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움직여 세우면 기반이 되는 본래의 바윗돌에 금이 가 전체의 불상조차 부서질 것을 염려하여 그대로 보존한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와불은 앉은 모습을 한 채 누워 있었다.
어쩌면 자신 스스로가 벌떡 일어나 앉을 것만 같았고, 살아서 우리들의 이야기를 넌지시 엿듣고 있는 건 아닐까. 내 마음의 어두운 곳을 어루만져 줄 것 같고 영혼을 꿰뚫어 보는 듯 두려움이 엄습하였다. 그 힘에 주저앉아 나도 동화되고 싶은 간절함이 심연에서 소용돌이쳤다. 실로 부처님의 그 위엄을 내려다보고 있는 순간 마음의 떨림은 나를 송두리째 비워내게 하였다. 육신의 욕망과 온갖 더러운 것들을 남김없이 도려내고 싶었다.
소나무 사이로 내려 쬐던 오월의 태양은 참회인 듯 나의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을 흘러내리게 하였다. 땅 위에 서서는 카메라에 와불의 전경을 다 담아낼 수가 없어 와불 발밑 근처에 한 그루 서 있는 키 큰 소나무 높직한 가지 위에 올라서 광각 렌즈를 사용해야만 찍을 수 있다고 한다.
수백 년 전 우리 조상들의 순박한 예술성과 지혜는 참으로 높이 기릴 만하였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서도 와불의 형상이 눈앞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산 속 어두운 밤이면 와불은 반짝 눈을 뜨고 밤하늘에 쏟아져 내리는 극락정토의 별들과 얘기를 나누는 것은 아닐까. 와불이 있는 곳에서 백 미터쯤 떨어진 솔밭 사이로 큼직큼직한 원반 모양의 검은 바윗돌들이 북두칠성 형태로 놓여 있었다. 그 바윗돌을 밟고 우리 몰래 밤마다 이승과 피안을 오르내리는 것은 아닐는지. 밤이 되면 나 혼자 그곳에 가서 숲에 숨어 요정들과 함께 그런 와불을 볼 수 있다면…….
십 사 년이 지난 유월, 한 편의 소박한 서정시와 같은 추억이 담긴 운주사에 또 다시 문학 기행을 오게 되었다. 운주사의 옛 모습은 간 데 없고, 새로 지어진 대웅전이 들어섰으며 시멘트를 덕지덕지 처바른 새로운 운주사가 낯설게 들어서 있었다. 포장된 도로와 넓은 주차장, 그리고 입구의 매표소. 왠지 실망스러웠다. 오지 않음만 못한 후회가 들었다. 도시계획으로 밀려나간 고향에 온 것처럼 허전하기만 하였다.
나는 옛날에 와불의 가부좌한 무릎에 앉아보기도 하였고 곁에 앉아 와불의 둥근 어깨에 손을 얹고 사진도 찍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둘레에 나지막한 쇠울타리가 둘러쳐져서 그 안에 와불은 외롭게 갇혀 있었다. 십 사 년 전의 운주사 풍경을 희미한 앨범을 보듯 나는 쓸쓸히 돌아보았다.
버스 안을 가득 채운 우리 일행은 운주사를 빠져나와 노랫가락에 흥을 돋구었다. 그들 속에서 나는 내 자신의 일상적 즐거움을 위한 욕망이 밀물처럼 차오르기 시작하였다.

 

 

 

 

엄마의 행복

김명규


월요일과 금요일, 그날만 물 좋은 생선을 살 수 있는 생선 가게를 나는 알고 있다. 그 집의 단골 손님들은 그때를 기다려 찾아간다.
바다에서 막 잡아 배에서 곧바로 간을 하여 삼삼한 목포 먹갈치가 구이로는 최고의 맛을 낸다. 손바닥 너비만큼 굵고 가무잡잡한 먹갈치가 다섯 마리에 사만 오천 원이다. 어려서부터 우리 집 큰애가 좋아하는 생선이기에, 그리고 멸치가 비리다고 먹지 않으면서도 갈치는 수저 놓을 때까지 가시를 발겨 먹는 남편이기에 아낌없이 샀다.
지느러미를 자르고 토막 쳐서 깨끗이 씻은 후 넓은 소쿠리에 담아 물기를 뺀다. 뾰족한 머리끝에서 십 오 센티 밑으로 창자와 뼈가 많은 부분과 꼬리는 골라서 따로 둔다. 그것을 쇤 호박과 약찬 풋고추를 넣고 얼큰하게 찌개로 끓이면 그 쌈빡한 맛에 나는 밥을 두 그릇이라도 먹을 수 있다.
제일 굵은 가운데 토막과 그 다음 굵기로 분류하여 위생랩에 넣는다. 통통한 것만 고른 것을 냉동하였다가 나는 내일 서울에 가서 내 아이들에게 구워줄 셈이다. 노릇노릇 기름이 도는 구운 갈치에 더운밥을 호호 불며 맛있게 먹을 내 아이들을 생각하면 어서 그것을 들고 달려가고만 싶다.
맛있는 것 엄마보다 잘 먹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제 아무리 전화로는 말하지만 식당에서 사먹는 밥이 돌아서면 쉽게 허전해지기에 나는 그 안타까움을 떨칠 수가 없다. 사먹는 밥이니 상품으로만 그럴싸하게 만들어 정성을 담은 음식이 아니어서일까. 된장국만 맛있게 끓여진 날에도 나는 삼키는 음식에 목이 아프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는 첫째가 건강, 둘째가 돈, 셋째가 친구, 넷째가 부부이며 다섯 번째가 자식이라고 한다. 나이가 들수록 나는 자식에 대한 애착이 더 깊어만 가는데 그 순위가 나에게는 이해되지 않는다.
주위에서 노인들은 자식 소용없더라는 말을 물 흘러가듯 해댄다. 그러면서도 왜 소용이 없다는 것인지 그 내면을 털어놓는 부모는 없다. 사랑은 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주었기에 받고 싶은 때문일까. 부모는 자식에게 모든 것을 다 주지만 자식은 받은 것을 또한 제 자식에게 돌려주는 것이 아닐는지.
성당의 교우 중 내가 잘 알고 있는 할머니 한 분이 있다. 자녀들을 모두 훌륭하게 교육시킨 멋쟁이 할머니다. 둘째 아들 내외가 시내에서 대형 약국을 경영하고 있다. 의약분업 이후 약국의 규모가 더 커지고 바빠진 터라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손녀를 돌보기 위해 아들과 살림을 합하였다.
저녁 늦게 약국 문을 닫고 들어오는 아들 내외는 날마다 아이들의 간식거리를 사들고 들어왔다. 노인은 초저녁잠을 한 잠 자고 일어난 터라 늦은 시간에 군것질을 하면 소화가 안될까 싶어 간식을 드시라는 며느리의 권유를 거절하였다. 그렇게 두 번을 거절하였더니 다음엔 아예 할머니는 저녁 식사 이후에는 아무것도 안 먹는 사람으로 제쳐버렸다.
아들 내외, 손녀 네 식구가 화목하게 둘러앉아 밤마다 이야기꽃을 피우고 쩨금쩨금 과자나 피자를 먹는 소리가 맛있게도 들렸다. 노인은 침이 꿀꺽꿀꺽 삼켜지고 먹고 싶어 죽겠더라는 거였다. 아들은 제 아이들 잘 먹는 것이 흐뭇해서 새로 나온 맛있는 것은 다 사오지만 늙은 어머니에게 빈말이라도 함께 먹자는 얘길 꺼내본 일이 없었다.
노인은 그 일이 서럽다고, 나에게 털어놓았다. 노인의 얼굴은 토라진 어린아이처럼 천진스러웠다. 절대로 그럴 일이 아니더라고, 당신의 이야기를 교훈 삼아 나는 그렇게 서운한 일 겪지 말라며 노인은 덧붙여 일러주는 것이었다.
문득 프랑스의 신화 하나가 생각난다. 하나뿐인 아들이 산모퉁이를 돌아 산골의 한 소녀에게 반해 있었다. 소녀는 그 소년이 자기에게 반해 있다는 걸 알고 놀려주고 싶은 생각에 소년의 집에 있는 귀중한 물건을 하나씩 가져오라고 요구하였다. 소년은 소녀가 원하는 대로 집에 있는 것을 다 갖다 주었다. 맨 마지막으로 소녀는 네 엄마의 심장을 꺼내오면 너를 사랑하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차마 그것만은 가져오지 못할 거라고 소녀는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들은 서슴없이 어머니에게 달려들어 심장을 빼내었다. 그것을 들고 달려가던 소년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고 어머니의 심장은 땅바닥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그러자 어머니의 심장은 이렇게 말하였다. "얘야, 다친 데는 없니?"
사랑은 곧 희생이다. 나를 희생하여 내 아이들이 행복해진다면 그것으로 모성을 다하는 것이 아닐까. 나도 그 할머니의 나이에 이르게 되면 그렇게 작은 일에도 서러워할까.
광주에서 서울까지 고속버스를 타고 가서 생선을 구워 밥을 지어놓고 아이들의 퇴근을 기다린다. 저녁 늦게 문을 열고 아이들이 엄마에게 달려와 두 팔로 내 허리를 휘어 감는다. 나는 내 아이들의 따스한 체온을 느낀다. 그리고 짜릿하게 엄마로서의 행복을 체감한다.

 

두 사내

김명규


서울에 자주 가지만 고속버스에 오를 때마다 나는 여행의 기분으로 설렌다. 긴 시간 생각할 수 있는 자유와 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되기 때문이다. 네모난 차창 가득 밀려드는 자연은 계절에 맞추어 변화되어 간다. 노오란 벼가 영그는 벌판 검푸르던 나무 이파리가 가을 채비로 퇴색해 가는 풍경은 나의 정신 세계를 신선한 곳으로 끌어간다.
그러나 나는 승객들이 지닌 핸드폰의 소음에 방해를 받는다. 버스가 출발하면서 안내 방송에서는 자제해 줄 것을 당부하지만 아랑곳없다. 별로 중요한 일들 같지 않은 사사로운 안부가 핸드폰으로 소란스럽더니 고속버스가 제 속도를 지키며 달릴 때서야 잠잠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버스 안의 승객들을 한 번 돌아보았다. 무거운 삶의 무게만큼 눕힌 의자에 몸을 맡기고 차체가 흔들릴 때마다 출렁거리면서도 깊은 잠에 빠진 사람, 팔짱을 끼고 무엇인가 깊은 생각에 빠진 사람, 신문이나 잡지를 훑어보는 젊은이 등 인생의 한 단면을 보는 듯하다.
일인석에 앉은 내 앞의 옆자리에는 오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두 남자가 앉아 있었다. 버스에 올라앉던 순간부터 그들은 주거니받거니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버스 안이 조용해지자 그들의 말소리가 더 생생하게 들려왔다. 그들이 나누는 어감으로 보아 둘은 친구 사이인 것 같았다.
어제 나는 장거리 등산을 한 탓에 피로가 서서히 나를 적셔왔다. 의자를 젖히고 몸을 뉘였지만 두런거리는 사내들의 이야기 소리에 신경이 예민한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을 청할수록 말소리가 또렷이 귓결에 부딪혔다. 창 쪽에 앉은 남자가 안 쪽에 앉은 친구를 유혹하고 그 꾀임에 넘어오도록 유인하는 중이었다. 인생의 허무를 운운하면서 여자 관계를 끌어들이는 추한 이야기였다.
부처님도 시앗이라면 돌아앉는다고 하였던가.
"그래 좋아."
안 쪽에 앉은 사내가 드디어 유혹에 넘어가는 모양이었다. 버스는 호남고속도로를 벗어나 경부고속도로로 진입하였다. 창 쪽에 앉은 사내가 이제는 핸드폰을 열어 눌러대기 시작하였다. 갑자기 느물느물하고 듣기에 닭살이 돋는 목소리로 상대편에게 인사말을 하였다. 귀에 바짝 붙인 사내의 핸드폰에서 여자의 음성이 새어나왔다. 버스를 잘못 탔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내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죄의 유혹이란 꿀보다도 달콤한 것. 핸드폰을 접은 후에도 두 사내는 입을 다물지 않았다. 공모와 탈선의 감미로운 솜사탕에 취한 것이었을까.
내 바로 앞자리에는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은 내 또래의 수수한 아주머니가 앉아 있었다. 책을 읽던 그 아주머니가 가방 안에서 핸드폰을 꺼내었다.
"여보세요. ○○경찰서지요?"
나는 귀를 세우고 바짝 긴장하였다. 두 사내도 순간 말을 멈추더니 힐끗 아주머니에게로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박 서장 자리에 있습니까? 네? …… 회의가 있어 나갔다고요? 그럼요, 엄마가 세 시 차로 서울에 가고 있으니 일곱 시쯤 터미널로 나오라고 전해 주시지요. 네네, 수고하세요."
핸드폰을 가방에 넣은 아주머니는 읽던 책을 다시 펼쳐들었다. 아주머니와 거리를 두고 나란히 앉은 옆의 두 사내의 통속소설 같은 얘기보다 더 재미있는 소설이라도 읽고 있는 모양이었다. 비로소 두 사내는 입을 다물고 말 없는 짐승처럼 앉아 있었다.
경찰서장님의 어머니가 버스 안에 함께 탔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사내들은 죄인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날 고속버스 안에서 아주머니의 핸드폰은 영약이었다. 요즘 아이들을 둘, 셋쯤 둔 가정에서는 매월 통신비가 이십만 원 이상 지출되는 것이 기본이라고 한다. 길거리에서, 공공장소에서 남녀노소가 핸드폰을 터뜨리면 자기들의 안방인 양 소리소리 질러댄다. 얼마 전 동네의 좁은 소방도로에서 내 뒤를 따라오던 한 아저씨가 갑자기 혼잣말을 시작하더니 큰 소리로 웃는 것이었다. 미친 사람이 내 뒤를 따라온다는 생각에 등이 오싹하였다. 겁에 질려 살며시 돌아보니 맨손으로 활개치며 걸으면서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전화를 하는 거였다. 그 모습이 흡사 옛날 날이 궂으려면 거리로 나와 방황하던 미친 사람과 다름없어 보였다.
미국에서 대학 교수를 하던 분이 근래에 귀국하여 놀랐던 일은 고향으로 내려가는 휴게소에서 서 있는 사람마다 핸드폰으로 전화하는 광경을 보았을 때라고 한다. 저 많은 사람들에게 도대체 무슨 위급한 일이 동시에 벌어졌기에 그 비싼 핸드폰을 들고 전화를 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서 놀라웠다고 하였다. 핸드폰이 정말로 요긴할 때도 있다. 그러나 너무 많이 쓰게 되면 전자파가 인체에 미치는 해가 크다는 것을 여러 차례 매스컴에서 보았다. 오십 원이면 한 통화를 할 수 있는 공중전화가 가는 곳마다 곳곳에 늘어서 있지만 이젠 무용지물이 되어 선 채로 녹슬어 가는 것 같다.
세상의 모든 것에는 양면이 있는가 보다. 좋은 약도 때에 따라서는 그것이 독약이 될 수 있듯이.
버스가 강남터미널에서 멈추자 두 사내는 고개를 숙인 채 내리더니 어디론가 재빠르게 사라져버렸다.

 

 

 

 

 

쉽게 돈벌기

김명규


이월의 강추위가 벌거벗은 가로수를 날카롭게 매질하였다. 아이엠에프라는 생소한 말이 우리네 서민들의 삶을 한파로 강타하던 때이다. 이웃간에 사는 몇몇 주부들의 친목 모임도 대학교 구내 식당에서 갖기로 하였다. 천 오백 원이나 이천 원 짜리 점심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식판에 담아온 간단한 점심을 먹으면서도 식탁 위에 책을 펴놓고 공부하는 대학생들의 모습이 내 자식처럼 믿음직스럽고 사랑스러웠다. 저들의 노력만큼 반드시 꿈을 이루기를 마음으로나마 빌어주고 싶었다.
우리 일행은 대학생들 틈에 끼어 점심을 먹고 자판기 커피를 한 잔씩 뽑아 마신 후 쉽게 헤어졌다. 청바지에 배낭을 멘 여학생들을 보면서 내가 저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부러움과 달콤한 생각에 젖어 캠퍼스를 빠져 나오고 있었다.
지금의 나에게 대학 시절이 주어진다면 시간을 황금처럼 쓰면서 나의 최선을 다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학생들이 붐비는 대학교 주변의 도로를 나는 천천히 걷고 있었다. 내가 사는 아파트까지는 십 분 정도 걸리는 가까운 거리였다. 내 앞에서 마주 걸어오고 있던 웬 젊은이와 그 동행인 아가씨가 나를 가로막았다. 나는 멈칫 한 걸음 물러섰다. 아르바이트를 구하러 시골에서 올라왔는데 여비가 떨어져 배가 고프다며 밥값을 좀 달라는 거였다. 젊은이는 허기가 진 듯 힘없이 말하였다. 나는 잠시 그들을 주시하면서 멍하니 서 있었다. 친구인지 누이인지 그와 동행한 아가씨도 동감이란 듯 고개만 떨구고 있었다. 그들의 허술한 차림새로 보아 시골에서 온 게 틀림없어 보였다. 그들의 얼굴을 보자 가엾은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제 어머니 같은 나에게 구걸을 하였을까.
나는 모임에서 회비 이만 원을 내고 난 뒤 저녁 찬거리를 사들고 가야 할 만 원 한 장이 남아 있었다. 만 원을 다 주기엔 큰돈이라는 생각이 지나갔다. 거리에 슈퍼마켓이나 구멍가게가 있나 살펴보았다. 한 장뿐인 만 원을 낱돈으로 바꾸어 그들에게 오천 원만 주고 싶었다. 오천 원이면 둘이서 자장면을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잔돈을 바꿀 수 있는 곳이 얼른 눈에 띄지 않았다. 그들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엷어지면서 그렇다고 그제서야 모른 체하고 뿌리치고 갈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지갑을 열었다. 만 원 짜리 지폐를 꺼내기가 바쁘게 젊은이는 내 손에서 나꿔채듯 빼앗더니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서 쌩쌩 가버렸다. 텅 빈 지갑을 힘없이 닫았다. 그들이 사라져버린 방향을 나는 맥빠진 사람처럼 서서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매서운 바람이 서 있는 내 얼굴을 할퀴며 지나갔다. 무엇에 홀린 듯 허망하였다. 좋은 일을 하였는데도 언짢고 화가 났다.
노점상 앞을 지나려니 그날 따라 물 좋은 생태가 반들반들 내 눈길을 끌었다. 늦은 오후가 되면서 꽁꽁 얼어붙을 것처럼 기온은 떨어지고 퇴근하여 돌아올 남편에게 따끈한 생태탕을 해주지 못하는 게 마음에 걸렸다. '배고픈 사람에게 밥값 주었으니 좋은 일을 했지.' 그렇게 생각하려 했지만 왠지 사기를 당한 것만 같았다. 집에 돌아와서도 찜찜한 기분은 풀리지 않았다. 우리 집 거실에 어둠이 찾아들고 건너편 아파트에는 집집마다 불빛이 새어나왔다. 그 때 마침 서울에 있는 막내딸로부터 안부 전화가 걸려왔다. 얘기를 나누던 끝에 나는 오후에 거리에서 있었던 일을 딸에게 말하였다.
"엄마, 당했군요. 요즘은요, 대학생들이 아르바이트는 힘드니까 안 하고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게 쉬운 일이라고 사기치는 걸 모르셨수?"
하는 것이었다.
제 어미 같은 아주머니의 동정심을 이용해 멀쩡한 녀석들이 구걸을 하다니. 석연치 않던 생각이 막내딸의 얘길 듣고 보니 틀림없었다. 충실하게 살아도 짧고 모자라는 젊은 날을 그런 행실로 낭비를 하다니. 우리 어릴 적 가난한 청년들은 가로등도 없던 어두운 밤, 찹쌀떡을 팔기 위해 정강이까지 차 오르는 눈길을 헤매었었다. 삼복 더위에도 얼음과자 통을 메고 홍시감처럼 익은 얼굴로 몇 십 리씩 걸어서 아이스케키 장사를 하였다. 검은 고무신에 하얗게 흙먼지가 앉아 회색 신발이 되도록 걸어다녔던 그 소년들의 모습이 지금도 아련하게 떠오른다.
시간이나 말은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것은 다시 주워담을 수 없는 것이기에.
젊어서 내가 책을 많이 읽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문득문득 내 길을 가로막는 것 같아 안타깝다. 지금은 돋보기를 쓰고 책을 오래 읽으면 머리가 아프고 눈이 피로하여 견딜 수 없다.
일하지 않아도 살 수 있다 하여 일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 일이 즐거우면 인생은 낙원이고 일이 의무이기만 하면 인생은 지옥이라고 말한 러시아 작가 막심 고리키의 말을 가슴 깊이 음미해 본다.

 

 

 



유년의 가을

김명규


기차는 쉽게 오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건너편 산밑으로 기차가 두 번 지나간 뒤에 돌아오라고 말씀하셨다. 하늘은 금방 내려앉을 것처럼 무거운 먹구름이 덮여 있었다. 샛노랗게 벼가 익은 들판에 서서히 어둠이 들고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다.
논 가운데 앉으려는 참새를 손을 휘저으며 쫓을 때마다 양은 도시락에 간식으로 담아온 찐 감자 몇 알이 이리저리 굴렀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새들도 더 이상 날아오지 않았다. 두 번째 기차가 기적 소리를 울리며 멀리서 지나갔지만 어둑어둑 비가 오는 논둑 길을 걸어서는 무서워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들에 사람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논 가운데 허수아비가 두 팔을 벌리고 살아서 나를 잡으러 오는 것 같았다. 나는 큰 소리를 내어 목이 아프도록 울었다. 새를 쫓아야 쌀밥을 먹을 수 있다면서 할아버지는 새를 보러 가지 않으려는 나를 무섭게 호통쳐서 내쫓다시피 하였다. 밥상 위에서는 밥알 하나도 흘리지 못하게 하던 할아버지다. 나는 논에 가지 않으려고 할아버지 몰래 정옥이네 집에 숨어서 놀았지만 할아버지는 거기까지 나를 찾아와 내 손목을 끌고 갔다. 다른 집의 논은 어른이 된 오빠나 언니가 와서 새를 지키지만 초등학교 삼 학년인 내 또래의 아이가 새를 보는 것은 오직 나뿐이었다.
할아버지는 논둑 길을 가로질러 네 기둥을 세우고 작은 원두막처럼 높이 내가 혼자 앉거나 누울 만한 새 볼 자리를 만들어 놓았다. 겨우 발을 디딜 만한 좁은 사다리를 세 번 딛고 올라가서 앉으면 풍경화처럼 아름다운 산과 들이 시야에 가득 차 들어왔다. 작은 원두막에 혼자 앉아서 '우여 우이여' 하며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목소리로 새를 쫓아도 새들은 어린 나를 깔보는 듯 얼른 달아나지 않았다.
나는 그 때마다 찬휘 생각이 났다. 언제 보아도 말쑥한 양복 차림과 머리에 포마드를 발라 향내가 나던 찬휘 아빠가 서울에서 돌아가셨다고 동네 어른들은 수군거리며 혀를 끌끌 찼다. 찬휘는 나와 함께 손을 잡고 찻길을 건너 유치원에 다니던 그 때의 유일한 남자 친구였다. 아빠의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온 찬휘는 나를 보아도 별로 말이 없었다. 찬휘는 엄마와 두 식구가 되었다. 유치원 졸업을 하고 얼마 후 찬휘네는 서울 외삼촌 집으로 이사간다 하였다. 이사가던 날 이른 아침 우리 집 문간을 기웃거리며 나를 찾던 찬휘는 손가락을 입에 물고 한참을 서 있다가 그냥 가버렸던 것이 나와 마지막 작별 인사였던가 싶다. 새를 쫓다 감자를 벗겨 먹을 때에도, 이솝 우화가 실린 재미있는 책을 읽을 때에도 찬휘가 보고 싶었다. 동네의 개를 만나 내가 무서워하면 발을 굴러 쫓아주던 찬휘, 서울을 오가며 사업을 하던 아빠가 사온 과자를 내 손에 듬뿍 쥐어주던 착한 찬휘. 나 혼자 논에 새를 보러 간다면 따라와 줄 동무였다.
깊은 하늘에 뭉게구름 한 점이 떠 있을 때면 그 구름 위에 올라앉아 어디론가 흘러가고 싶었다. 나는 그 때처럼 하늘을 많이 바라본 적이 없다. 아기 천사가 날개를 달고 날아가는 것 같던 구름은 어느새 꽃송이도 되었다가 커다란 백곰이 되기도 하였다.
내가 중학생이 되어서 찬휘도 서울에서 중학생이 된 모습을 가끔씩 그려보았다. 고등학교 입시를 앞둔 삼 학년의 가을이었다. 담임 선생님의 심부름으로 교무실에 들러 나오는 복도에서 자장면 철가방을 무겁게 들고 들어서는 키 작은 소년을 내가 먼저 보게 되었다. 어디서 본 듯한 낯익은 얼굴, 그것은 유치원 친구 찬휘임에 틀림없었다. 복도 창쪽으로 얼른 몸을 피하고 찬휘가 나를 볼 수 없도록 얼굴을 돌렸다. 나를 스치고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찬휘의 뒷모습을 나는 떨리는 가슴으로 바라보았다. 찬휘네는 서울로 이사간 게 아닌가 보더라고 하던 할머니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 날 나는 점심 시간에 도시락을 먹을 수가 없어 교실에서 나와 운동장 벤치에 혼자 앉아 있었다. 가을 하늘은 더 멀고 눈이 시리게 푸르렀다.
내 유년의 가을은 심란하고 두려움뿐인 계절이었다. 할아버지가 빈 깡통을 모아 작은 돌멩이들을 그 안에 넣고, 낡은 한복 바지저고리를 챙겨 허수아비의 옷을 마련할 때면 내가 또 새를 보아야 할 걱정에 밤에는 잠이 오지 않았다. 집에서 우리 논까지 걸어서 가는 길은 십 리나 되는 듯 멀었다. 할아버지가 밉고 원망스러웠다. 식구들의 일손이 모자라 어린 손녀를 새 보러 보내는 할아버지의 마음도 내가 안쓰러웠던 모양이었다. 헌 고무신과 유리병을 모아두었다가 엿장수가 지나가면 엿을 바꾸어 할아버지는 나에게만 주었다.
지금의 논 가운데 서 있는 허수아비를 보면서 나는 쓸쓸하게 웃는다. 허수아비는 티셔츠에 낡은 청바지를 입고 있다. 요즈음에도 어쩌다가 가을 들녘에 나가보노라면 그 시절의 시린 외로움이 찬바람처럼 파고든다. 만국기처럼 줄에 매달린 깡통이 바람을 타고 춤을 추면서 강하고 여리게 하모니를 이루던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다. 가냘프게 핀 억새가 유연하게 몸짓을 하던 언덕빼기를 지나 집 앞이 가까워오면 어머니가 무청 시래기를 삶는 냄새가 은은하던 내 고향집이 아직도 거기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눈물

김명규


날려갈 것 같은 거센 바람 소리뿐이었다. 인적이란 없었다. 서양 영화에서 본 듯한 작은 이층집 한 채가 정적 속의 언덕 위에 서 있었다.
차에서 내린 우리 일행은 굳게 닫혀진 문 앞으로 가서 벨을 눌렀다. 잠시 후 차분하고 기품이 서린 늙은 수녀님이 세속적인 반가움이나 가벼운 표정조차 없이 문을 열어주었다. 은퇴하신 대주교님의 주교관이었다. 설을 쇠고 교우 몇 명이 어울려 대주교님께 세배를 드리러 나선 길이었다.
우리를 반겨주시던 대주교님께 축복 기도를 받고 대문 밖으로 나왔을 때 다소 바람이 잔 하늘은 쪽빛으로 푸르렀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거기에서 하느님을 외쳐 부르면 금방이라도 천상의 소리가 메아리쳐 들려올 것만 같은 고요한 곳이었다. 주교관 아래로 가톨릭대학 캠퍼스가 눈에 가득 들어왔다. 일 년에 한 번 성소 주일에만 개방이 된다는 곳, 속세와 차단된 그 곳에 계시는 수도자들의 영혼이 어찌 흰눈과 같지 않을까.
마당에서 대주교님의 전송을 받고 있을 때 하얀 진돗개 한 마리가 우리들 앞으로 오더니 반가운 듯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었다.
그 날 운전을 해주었던 안젤라와 나란히 나는 앞자리에 앉아 서서히 비탈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 때 좀 전에 본 그 진돗개가 짖어대며 있는 힘을 다해 자동차 뒤를 쫓아왔다. 개는 자동차를 앞질러 길을 가로막았다. 안젤라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내 쪽의 차창으로 개는 앞발을 걸치고 얼굴을 바짝 들이대는 것이었다. 커다란 개를 무서워하던 나는 짐짓 놀라 몸을 뒤로 제꼈다. 그리고 진돗개를 쳐다보았다. 나는 보았다. 울고 있는 개의 얼굴을. 둥근 눈에는 분명 눈물이 어려 있었다. 뒷자리에 앉아 있던 루시아가 말하였다. 우리가 떠나는 것을 보고 섭섭해서 그런갑다고, 짐승인들 이 산 속이 외롭지 않겠느냐고 혀를 찼다. 다음에 올 때에는 맛있는 것 많이 가지고 올 테니 잘 있으라고 말하자 개는 알아듣는 듯 차체에서 떨어져 내려섰다. 그리고 우리가 멀어질 때까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는 개의 눈물을 두 번째 경험하였다.
내가 단독주택에 살면서 기르던 개 쏠라가 다섯 마리의 새끼를 낳았었다. 어미의 젖을 떼고 쏠라의 다섯 새끼들이 호강스럽게 살 만한 집을 골라서 시집을 보내었다. 그 중 한 마리는 송정리 시골 집에 조용히 지내면서 소설을 쓰고 있던 문우에게 주기로 하였다. 나는 어린 강아지를 넓은 타월에 싸서 조심스럽게 안고 버스를 탔다. 좌석에 앉아 한참을 가다가 무릎 위에 앉힌 강아지를 들어 수건 안에 얼굴만 내민 것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미동도 없이 웅크리고 있는 강아지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는 게 아닌가. 어린 것을 어미에게서 떼어놓은 내가 몹쓸 짓을 한 것 같아 가슴이 철렁하였다. 강아지의 얼굴을 쓸어주면서 나는 속으로 말하였다. '세상에 태어난 생명 있는 모든 것은 어미를 떠나 사는 법이란다.' 강아지를 시골의 문우에게 넘겨주고 돌아오는 길은 딸을 시집보낸 모성처럼 마음이 서늘하였다.
동물에게도 눈물이 있다는 것을 나는 어려서 일찍이 체험하였다. 다섯 살 적에 나는 우시장이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있었다. 닷새마다 서는 장날이면 소 떼가 모여드는 그 곳에 종종 찾아갔다. 소가 다른 사람에게 팔려갈 때면 슬피 운다고 말씀하신 할아버지의 얘기가 정말인지 보고 싶어서였다. 우시장을 둘러 친 철조망 밖에 서서 소를 사고 파는 흥정이 이루어지는 광경을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황소도 있고, 작은 송아지도 있었다. 끌려나온 소들은 운명을 기다리는 듯 유순하게 기죽어 서 있었다. 새 주인을 만나 농부의 손에 끌려가는 소는 울지 않았다. 그러나 험상궂게 생긴 아저씨가 우악스럽게 소를 끌고 가면 그 소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리라는 것을 알기에 탁구 공만한 눈에서 눈물방울을 뚝뚝 떨구며 우는 것이었다. 나는 동무들과 어울려 놀 때에도 소가 울던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울적하였다.
우리 집 아들녀석이 다섯 살이 되었을 때 나는 동화처럼 그 얘기를 들려주었다. 어느 햇살 고운 봄날 마루에 앉아서 엄마의 입을 쳐다보며 이야기를 듣던 아들녀석도 똥그란 눈망울이 금세 분홍빛으로 물드는 거였다. 끝내는 입을 삐죽거리더니 소가 불쌍하다며 엉엉 울었다. 나는 아이를 보듬어 달래었다. 머잖아 손자가 태어나면 제 아범이 아이에게 다시 들려줄 얘기로 할미의 감성을 받아 느꼈으면 좋겠다.
말 못하는 짐승들의 눈물은 지금도 내 마음을 아리게 한다. 눈물이란 영혼을 깨우고 움직여서 반사되는 보석의 빛깔과 같은 것이 아닐는지. 내년에도 주교관을 방문하게 된다면 그 진돗개에게 줄 먹이를 들고 가 그 때까지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개와 흠뻑 정을 나누고 싶다.

 

 

 

길을 묻는 사람

김명규


승용차의 운전자 옆자리에 앉아 초조하고 미안한 마음에 진땀을 뺄 때가 종종 있다. 운전자가 방향이나 지리를 몰라 헤맬 때다. 십중팔구 그 때 핸들을 잡고 있는 운전자의 얼굴은 거의 울상이거나 조금만 건드려도 터질 것 같은 팽팽한 열을 품고 있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운전을 못 하는 내가 길눈조차 어둡고 둔해서 운전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못 주기 때문이기도 하고 차를 얻어 타는 주제에 그만한 센스조차 없는 나이므로.
목적지로 가는 길을 확실히 모르면서 그곳을 찾아 나서는 사람은 누구나 긴장하게 되고 발걸음이 무거울 것이다.
작년 겨울 나는 서울 종로에 있는 한 잡지사를 찾아가야 할 일이 있었다. 피카디리 극장 앞 주변 거리는 이십여 년 전이나 지금에도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비원 쪽으로 가기 위해 작은 네거리 신호등 앞에 나는 서 있었다. 변함은 없었지만 몇십 년 만에서야 그 근처를 찾아가는 길이라서 학생이나 젊은 사람을 만나면 길을 정확히 물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는 중이었다.
유난히도 추운 겨울의 서울이었다. 건물 사이로 몰아치는 회오리바람은 매운 고춧가루가 눈에 든 듯 아렸다. 추위 때문인지 거리에는 행인도 드물었다. 길을 물어볼 사람이 적당히 눈에 띄지 않아 상호를 보면서 나는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 때 내 옆으로 다가서는 한 아주머니가 있었다. 모직 코트를 입고는 있었지만 그 옷이 오래 되어 낡았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초라한 아주머니라는 것도. 콧등과 양 볼이 홍시감처럼 추위로 물들어 있었고 입술은 건조한 바람에 딱지를 입은 듯 말라붙어 있었다. 아주머니는 나에게 비원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신호등을 건너 맞은편 쪽이라는 것을 짐작하고는 있었으나 내가 자신 있게 정확히 아는 것은 아니었다.
아주머니에게 제대로 길을 가르쳐주지 못한다면 추위 속에서 헤맬 것을 생각하니 순간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마침 오십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점퍼 주머니에 양손을 넣고 내 뒤에 조금 떨어져 서 있었다.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나와 아주머니와 그 남자 셋뿐이었다. 할 수 없이 나는 그 남자에게 비원으로 가는 길이 어느 쪽이냐고 물어보았다. 나를 힐끔 쳐다보던 남자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어줍은 표정이었다. 내 옆에 서 있던 아주머니가 말하였다. "제 남편이에요." 웃음이 나와 우리 세 사람은 동시에 큰 소리로 웃었다.
내가 짐작하고 있던 방향으로 그들을 보내 놓고 다행히 나는 잡지사를 쉽게 찾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 부부가 못내 마음에 걸렸다.
길을 잘못 찾아들었을 때의 어려움을 대개의 사람들은 경험하였을 것이다. 우리의 인생 행로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사람을 보면 어른들은 말한다. 앞길이 보이는 사람이라고. 또한 잘못 된 듯 싶고 날 넘은 사람에게도 그렇게 말한다. 앞길이 훤히 내다보이는 사람이라고.
사람의 행복과 불행은 자신의 길이 어느 길인가를 깨달았을 때 선택되는 것이 아닐는지. 인간은 숙명처럼 자신이 헤쳐 나가야 할 길이 정해져서 태어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가야 할 길의 목표는 다른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두지 말고 자신에게 가장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곳으로 정해져야 할 것 같다.
나는 길을 진리라고 생각한다. 한번 잘못 나선 길은 아무리 멀리 갔다 해도 되돌아 나와서 다시 가야만 하는 것처럼. 최고를 추구하는 사람은 항상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자기가 가야 할 길을 걷는 사람의 뒷모습이야말로 아름답지 않으랴.

 

 

 

 


나의 글, 나의 삶

김명규


현란한 조명등 불빛에 보아도 그의 눈언저리에는 불그스레한 취기가 어려 있었다. 시를 낭송하듯이 감정을 잡으며 그는 줄줄이 몇 줄의 글을 외워 갔다. 내가 작년에 출간했던 수필집 『당신의 이름은』 중에서 「어머니의 달」의 일부분이었다.
판사로서 이십 년이 넘도록 법복을 입고 판결문이나 딱딱한 법서만 보기에도 빠듯이 살아왔을 그분은 작년에 법정을 떠나 변호사 개업을 한 분이었다. 윤 변호사는 남편과 중학교 동창이기도 하지만 나와 같은 고향에서도 더 깊은 시골 농가에서 태어난 분이다. 남편의 중학교 동창 모임에 부부 동반하여 내가 윤 변호사를 만난 것은 삼십 년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분의 정서가 어렸을 적 메뚜기를 잡던 그 때와 변함이 없는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나의 수필 한 편이 그분을 어린 날의 동화 속으로 끌어가는 감동을 주었을는지도 모른다. 윤 변호사가 내 글을 줄줄이 외워 내려가는 것을 그의 곁에서 들었을 때 전율과 행복감이 알코올처럼 내 몸 안에 퍼져나갔다.
여학생 때 문예반 활동을 하면서 대학의 문예창작과에 진학을 하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완강한 반대로 나는 서울의 한 관공서에 취직하였다. 어느 날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된 강인한씨의 「대운동회의 만세 소리」를 읽게 된 독자로서 인연이 되어 만난 것이 그와 부부가 되었다. 그와 가난하게 살면서 여성잡지라도 공짜로 얻어볼까 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독자 문예란의 투고에서부터였다. 잡지에 글이 뽑히면 그 달의 책과 소정의 고료도 받게 되었다. 그렇게 삼십대, 사십대가 흐르는 물처럼 가버렸다.
뒤늦게 수필 문단에 등단을 하고 나름대로 열심히 써왔던 것을 작년에 책으로 냈다. 책을 내게 된 것도 남편의 일방적인 권유였다. 내 졸작을 책으로 낸다는 것은 내 격에 맞지 않는 호사며 낭비라고 생각되었다. 출판비가 아까워 나는 망설였다. 저명한 작가들의 책이 서점마다 홍수를 이루는데 어느 누가 내가 쓴 글을 읽어준다는 말인지.
먼 훗날 내 손자 녀석들이 생기면 할머니가 살고 간 흔적이나마 될 것 같은 생각으로 나는 못 이기는 체 책을 내기로 하였다. 편집에서부터 표지 구성까지 남편의 정성으로 만들어진 예쁜 책이 택배로 일곱 박스가 배달되어 거실에 쌓인 것을 보니 책의 무게만큼 내 마음도 무거울 따름이었다.
증정본을 차에 싣고 우체국에 가 우송을 하고 나니 서글픈 생각마저 들었다. 그것은 곧 재활용 쓰레기가 될 것만 같아서였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 책을 받아 읽은 분들로부터 편지와 전화가 날마다 나를 찾았다. 정말 뜻밖이었다. 그 분들의 칭찬이 나에게는 힘이 되었다.
동네 점쟁이 영한 줄 모른다는 말처럼 오히려 나와 친분이 있는 몇몇 사람들은 책을 받고서도 읽지 않은 것 같았다. 내 학력이나 평소의 생활을 잘 아는 사람들일수록 그러하였다. 최고 학력을 갖춘 사람이나 문학박사라고 해서 글을 다 잘 쓴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의 인식은 나를 슬프게 하였다. 박식한 얘기를 많이 써 놓는다고 그것이 훌륭한 글이라 할 수 있을까. 글이란 열등감이 많은 사람들이 쓰는 것이라고 누군가 들려주었다. 열등의식으로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보배로 품어 안으리라.
전혀 생각할 수 없었던 우리 나라 중견 수필가들로부터 그것이 비록 인사말에 불과했을지라도 격려와 과찬을 들으면서 보람과 동시에 나의 어깨는 무거워졌다. 이제 잘 쓰든 못 쓰든 글을 쓰는 일은 나의 작은 행복이다. 다른 사람들처럼 풍부한 지식으로나 수려한 문장으로 쓰는 글은 못 되지만 다만 진솔하게 쓰고 싶을 뿐이다. 내 손에 펜을 들 수 있는 그 날까지 내 노년의 외로움을 흰 종이에 쏟아내리라. 그 열정만은 늙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오늘도 인터넷 문학 사이트에는 내 어설픈 글을 읽어주는 이름 모를 독자들이 찾아와 있다. 그분들을 낱낱이 만나서 한 잔의 차라도 대접하며 고마워하고 싶은 심정이다. 어떤 재료로 음식을 맛있게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이 요리사의 과제이듯 이 순간에도 누군가에게 기억될 글 한 편을 쓰고 싶은 집착에 나는 매달리고 있다.

 

 

 


행운의 예감

김명규


인부들의 거친 손에서 하나씩 그것들은 포로처럼 붙들려 나갔다. 다시 만날 때까지 살아서 돌아오기를 빌며 나는 떠나보내야 했다. 아파트를 빠져나가는 트럭에 실려 파란 손수건을 흔드는 듯 그들은 내 시야에서 멀어졌다.
관음죽, 행운목, 동·서양란, 바킬라. 철저하게 묶인 이삿짐 틈에 끼여 보름 동안 이삿짐 보관 창고 속에 갇혀 지낼 것들이었다. 집을 사고 파는 과정에서 이삿날이 서로 맞지 않아 우리가 이사하게 될 아파트를 수리하는 동안 짐을 꾸려 이삿짐 센터에 보관하기로 하였다.
남편과 나는 가방 하나를 챙겨들고 그 동안 묵게 될 모텔로 갔다. 집을 떠난 모텔 생활은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조금만 고생을 하면 예쁘게 단장된 집에서 살게 될 것을 꿈꾸며 참았다. 최신형 모델하우스를 찾아가서 그것을 응용하여 아파트를 리모델링하는 것이다. 일하시는 분들의 간식거리를 사들고 나는 분주하게 현장을 드나들었다. 내 집이 아닌 것처럼 날이 갈수록 예쁘게 꾸며지고 있었다.
잎 푸른 행운목이 앉을 자리, 너른 서재며 가구가 들어설 자리를 구상하는 일이 더없이 행복하였다. 그리고 건축 분야에서 쓰이는 용어라든가 자재에 대한 전문 지식을 목수에게서 듣고 배우는 일이 재미있었다. 거실 벽면에 무늬목을 둘러 아트월을 만들고 정사각형 알판을 넣으니 모던한 분위기가 갤러리를 연상케 하였다. 도배를 하고 거실에 온돌마루를 깔고 보니 황홀한 기분마저 들었다. 이렇게 멋진 새집으로 이사와 살게 되면 꿈도 새로워질 것만 같고 더 이상 바랄 것도 없을 성싶었다.
남편은 멋지게 꾸며진 집을 둘러보면서 각시도 새로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빈정대었다. 수리가 다 끝나갈 무렵 보관 창고에서 지내고 있는 화분들이 문득 생각났다. 식물의 이파리가 목말라 서걱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걱정이 새로웠다. 이삿짐이 새집으로 들어오던 날 햇볕에 말린 배추 시래기같이 누렇게 마른 행운목 잎새와 서양란이 사다리 선반을 타고 올라왔다. 그 푸르던 것이 주인의 손길을 얼마나 기다리다 말라갔을까.
십 년이 넘게 자란 관음죽 두 개의 분과 동양란만이 점점 생기를 되찾아갔다. 겨울이 지나면 이파리도 없이 말라버린 행운목을 뽑아내려고 한쪽 구석에 버려 두었다. 이른봄이 되고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던 남편이 급히 나를 불렀다. 두 달 동안 거의 돌보지 않았던 행운목 기둥 이곳저곳에서 굳은 껍질을 뚫고 뾰족이 움이 돋는 게 아닌가. 그것은 감격이었다. 잃었던 아이를 찾은 것만큼이나 반가웠다. 금년에 어떤 행운이 예감되는 것 같아 우리 내외는 날마다 그 눈트는 새 움을 들여다보곤 한다. 찾아오는 행운이 거기 있어서 머지않아 피어날 것처럼.



여자의 속마음

김명규


그 곳에 갈 때에도 나는 꿈을 꾼다. 비비안 리, 잉그릿 버그만, 올리비아 핫세 등 예쁜 여배우들의 얼굴을 사진처럼 떠올리면서.
지난 목요일 오후, 그 날도 나는 지적 감성이 넘치는 십구 세기의 여류작가 조르주 상드의 초상을 머릿속에 그리며 미장원 도어를 열었다. 두 시간쯤 뒤 이 문으로 다시 나오게 될 때 나의 변신을 기대하는 설렘에 부푼 채 말이다. 분홍색 가운을 입은 손님들의 시선이 나에게 쏠려 머쓱하고 주눅이 든 나는 한쪽 구석 의자에 조용히 앉았다. 고데를 불에 달구어 물수건에 식히느라 치익치익 나던 소리와 그 쇠붙이가 딸그락거리는 소리가 미용실의 정적을 깨던 옛날과는 달라진 풍경이다. 독한 파마 약 냄새도 많이 순화되었고 과일 냄새가 나는 헤어로션 향으로 미장원 안은 산뜻하다. 전문 교육을 받은 미용사들이 많이 나오는 요즘에는 그들에게도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쓰고 있다.
언제부턴가 남자들도 미장원을 드나들며 커트를 하고 머리 손질을 받으니 이제 그곳은 남녀 공용 장소가 되었다. 그래서 귀걸이를 단 여자 같은 청년도 가끔씩 눈에 띈다. 여자만의 전용이었던 시절과는 달라 몸가짐이나 말씨에도 긴장감이 있고 차분한 느낌이 드는 곳이 되었다. 클래식 음악도 나직하게 흘러나오고 취향에 맞도록 갖가지 차와 음료도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어 휴식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다른 여자들은 미장원에 올 때에도 의상부터 멋진 패션이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허름한 바지와 셔츠 차림에 화장도 하지 않은 맨 얼굴이다. 왠지 기분이 눅눅해지는 것은 그 곳에서 상대적으로 비교되었을 때서야 나의 초라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미용사는 내 분위기에 맞춰 평범한 아주머니 스타일로 머리를 자르고 파마를 시작한다. 그가 가위를 손에 들기 전 꼭 하고 싶은 말이 혀끝에서 맴돈다. 일일 연속극에 나오는 인기 탤런트 박 아무개와 똑같이 머리를 해달라고 하고 싶은 말이다. 정면 거울에서 내 얼굴을 보면 그 말은 자라목처럼 기어들고 만다. 미용사는 온갖 정성을 다하여 머리를 매만지고 마지막으로 복숭아 향내가 나는 스프레이를 뿌려준다. 그러나 아파트 앞 노점에서 야채를 팔고 있는 여느 아주머니와 다를 바 없는 내 모양새다. 미장원 문을 열고 들어서기 전 내가 딴 인물이 되어 나올 줄 알았던 부푼 꿈은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버린다. 어깨에 둘렀던 넓은 보자기를 종업원이 풀어주는 순간 거울 속의 실망에 찬 내 어정쩡한 표정은 영화 '25시' 라스트신의 안소니 퀸과 영락없이 닮아 있다.
옷 한 가지를 골라 입으려고 백화점에 갈 적에도 나는 그렇다. 외출 준비를 하면서 이미 내 머릿속에선 황홀한 꿈이 연출된다. 사뿐사뿐 나비처럼 날 듯이 걷는 모델들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을. 그 때 버스 속에서 낯모르는 사람이 내게 길을 물으면 생각에 취한 나는 알아듣지 못하고 미륵처럼 앉아 있기도 한다. 아줌마들의 옷가게엔 절대로 돌아보지 않는다. 아래층 영캐주얼 브랜드에만 마음이 가는 것을 어쩌랴. 막내사위를 보게 될 내가 정말 웃긴다고 수군댈지 모르지만. 백화점 화장실 세면대에서 손을 씻으며 나는 기가 꺾인다. 조금 전 백화점 현관 벤치에 펑퍼짐하게 두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있던 촌스런 아줌마와 성씨가 다를 뿐인 나다. 내 자신의 얼굴이 거울에 비치는 순간을 빼고는 나이를 잊고 청춘에 머물러 있다.
요즘에도 케이블 광고 방송 중에서 내가 가장 즐겨 보는 것이 패션 채널이다. 그 때마다 텔레비전을 켜놓고 옷장을 모두 열어제치고 사 계절 옷을 이것저것 입어 본다. 야시야시한 망사 블라우스, 로맨틱한 롱 원피스, 목에 두르면 금방 귀부인이 될 것 같은 밍크 숄, 그 옷을 입기 위하여서는 하루씩 계절이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광경을 남편에게 들킬라 치면 딸들이나 어미나 똑같다면서 어이없어 한다.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늙어 가는 것은 순리이며 곱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내 속마음과는 다른 웅변을 잘도 털어놓는다. 젊음을 가졌던 가장 아름답던 시절의 나는 그것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한 채 놓쳐버렸다. 그런 젊음을 되찾고 싶은 것이 어찌 나 혼자뿐이랴. 우리 모든 아줌마들의 소망인 것을. 새끼들 먹이랴, 교육시키랴, 우리들의 한때 젊은 시절은 찌든 삶에 저당 잡혀 있었다. 젊었을 때 젊음을 느낄 틈도 없이 살아온 세월이 마냥 억울하기만 하다. 길을 가다가 뒷모습이 아가씨 같아 가까이 가서 앞을 보면 초로의 얼굴인 아줌마인 것을 확인할 때 나는 절망한다. 단발을 한 생머리에 온갖 액세서리로 치장을 하였지만 감출 수 없는 얼굴의 주름살은 줄기줄기 선을 긋고 밀려 있다. 젊음을 찾고 싶은 욕망만큼 초라함만 드러난다. 허기야 여자란 구십 살이 되어도 예뻐지고 싶은 마음만큼은 늙지 않는다.
휴일이던 며칠 전 남편과 함께 조조 프로 영화를 보기 위해 아침을 먹고 나섰을 때였다. 나는 타이트한 청자켓에 검정 면바지 차림을 하고 내 방에서 거실로 나왔다. 내 모습을 본 남편은 웃저고리를 벗어 소파에 던지더니 그런 옷을 입은 나와는 외출할 수 없다며 표정이 굳은 채 의자에 주저앉았다. 무색하고 창피해진 나는 방문을 잠근 뒤 오전 내내 누워 있었다. 다른 옷을 입고 오후 늦게 극장엔 갔지만 종일 내 마음은 흐려 있었다.
청자켓을 미련 없이 재활용 의류함에 넣고 이제 나는 여자이기를 포기한 듯 중년을 넘어선 아줌마의 자세로 돌아왔다. 젊음은 내게서 청자켓과 함께 떠나가 버렸다. 시냇물에 종이배가 떠내려 흘러가듯이.
봄비에 물오른 정원의 느티나무 이파리도 가을이 되면 단풍이 들겠지.




귀부인 연습

김명규


강남 아줌마는 골프 웨어를 운동할 때만 입는다.
강북 아줌마는 그것을 외출복으로 입는다.
강남 아줌마는 파스텔 톤의 옷을 입고, 강북 아줌마는 검정색 옷을 많이 입는다.
강남 아줌마는 머리 염색을 하지 않고, 강북 아줌마는 컬러풀한 물을 들인다.

심령술사처럼 사촌동생은 차림새를 보아 사람의 환경을 내다보는 기술을 터득하고 있었다. 서울의 유명 백화점과 갤러리아 명품관 매니저로 그는 십 년이 넘게 일해 왔다. 그런 사촌이 전남 영광의 친정 집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우리 집에 들러 하룻밤을 쉬어간 것은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명품만을 찾아 드나드는 부유층 고객들만 접하면서 일해 온 탓인지 동생은 자기가 그런 고객인 양 눈도 마음도 하늘에 높이 떠 있었다. 관습과 취향도 환경에 따라 만들어질까. 그는 아침 식사로 우리 집 냉장고를 뒤져 토스트 두 조각과 싱싱한 토마토 한 개와 내림커피를 머그 잔에 부어 물처럼 마셨다.
소지품을 담아 들고 온 가방을 거실 한쪽에 놓아두었던 걸 동생은 펼쳤다. 내게 눈이 선 외제 화장품들이 줄지어 나왔다. 거울을 앞에 놓고 들여다보면서 내가 부엌일을 다 마칠 때까지 화장을 한 얼굴을 이쪽저쪽 살피면서 눈을 깜박거려보기도 하였다. 그런 동생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모델이나 배우 못지 않게 멋있어 보였다. 초등학교 오 학년, 삼 학년의 두 아이를 둔 엄마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군살이 없이 가꾼 몸매와 훌쩍 큰 키가 더없이 돋보여 아름다웠다. 농촌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누런 콧물을 흘리면서 배통만 풍선처럼 불러 있던 촌뜨기가 언제 저런 멋쟁이가 되었나 놀라웠다.
동생은 내 마음을 흔들어놓고 갔다. 처음 현관에 들어서면서부터 "사모님 홈 패션이 그게 뭐야?" 하고 멋과 멀어져 있던 나를 깨웠다. 내가 쓰는 기초 화장품이 몇 개 놓인 것을 들춰보면서 이걸로 어떻게 메이컵을 하고 다니냐는 둥 수선을 떨었다. 핸드백에서부터 신발장의 구두까지 열어보는 동생 앞에서 나는 감사를 받고 미비한 것을 지적 받는 기분이었다. 그런 동생이 되레 고마웠고 시들어 가는 풀잎에 맑은 물을 흠뻑 적셔준 것 같았다. 그가 남기고 떠난 말들이 여운으로 남아 솔깃이 나를 들뜨게 하는 것이었다.
"언니, 옷은 싼 걸로 입어도 구두와 핸드백만큼은 꼭 명품을 쓰세요. 그리고 젊게 보이기 위해 청바지는 입지 말고……."
창밖에는 올봄 새로 핀 라일락 잎사귀에 봄비가 앉으며 소근거렸다. 나는 원두 커피를 안치고 전원을 꽂았다. 캐롤 키드의 휀 아이 드림(When I dream), 생크림처럼 부드러운 음악도 준비하였다. 오늘 같은 날 동생이 말하던 귀부인 연습을 한번 해보고 싶어서다. 원두 커피는 압구정동 사모님 커피이고 인스턴트는 일반 서민 커피라고 불리운다. 나는 우아하게 원두 커피를 들어본다. "핸드백과 구두는 명품을…" 사촌동생의 말이 훈풍처럼 나를 스친다. 내 키보다 높은 대형 신발장 안에는 출근하는 남편의 구두보다 내 신발이 훨씬 더 많다. 말바우 시장에서 샀지만 뒷굽도 닳지 않은 멀쩡한 합성 비닐 구두가 이멜다의 것 못지 않게 즐비하다. 시장에서 사서 신은 구두가 지금껏 내 품위를 떨어뜨렸을 것 같다. 모조리 관급봉투에 담아내고 싶다. 검정 고무신이 너무 질겨서 새 꽃신을 신고 싶으면 엄마 몰래 신던 신발을 면도칼로 에었던 시절이 아스라하다.
마릴린 몬로가 신었다던 페라가모 구두는 어떻게 생겼을까. 그 여배우 한 사람만을 위해 지었다는 구두. 페라가모 구두는 지금도 명품관에서 팔고 있다던데 나는 아직 본 일조차 없다. 값이 얼마인지 알 수 없으나 내가 백화점에서 디자이너 작품 옷을 구경하려고 용기를 내어 점포 안까지 들어서면 점원은 나를 한번 훑어본 후 자기 하던 일만 계속하지 않았던가.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된다더냐던 계 모임 때 만난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귀부인 폼을 재보던 내 자세를 풀고 음악을 껐다. 그리고 그 말을 되새기며 한바탕 퍼질러 후련하게 웃었다. 개심심해서 평소엔 먹지 않던 원두 커피도 설거지통에 버렸다. 그러나 페라가모에 대한 동경은 사그러들지 않았다. 얼마 남지 않은 어버이날을 기대하면서. 그 날이 오면 직장에 다니는 우리 아이들이 내게 무엇을 선물할까 걱정해 오는 것을 나는 알기 때문에. 나는 명품의 이름을 전화번호 수첩 맨 뒷장 빈칸에 큰 글씨로 적어 놓았다. 딸에게서 전화가 걸려오면 얼른 생각이 안 날지도 모를 테니까.
상자 속에, 포장지를 뜯어내기 아까울 만큼 세련된 색종이에 싸인 페라가모 핸드백을 택배로 받은 것은 어버이날 이틀 전이었다. 그 날 그 백을 들고 아빠랑 레스토랑에 가서 맛있는 식사를 하라는 딸의 고운 편지가 가방 안에 들어 있었다. 외출할 때를 기다리면서 낮은 장식장 위에 가방을 올려놓고 틈만 나면 손에 들어보았다. 모임에 나갈 때나 성당에 갈 적에도 페라가모 핸드백을 소중히 모시고 다니면서 다른 사람 눈에 띄기를 바랐지만 그것이 명품이라는 걸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새 가방을 들었는데도 눈길조차 오지 않았다. 내가 사는 곳은 가진 자가 누리며 사는 압구정동도 청담동도 아니다. 내 주위에서 알아보지 못하는 명품은 내게도 낯설기만 하다. 화장실에 들어가면서 내 앞에 서 있던 여자가 잠시 내게 맡겨놓은 물건처럼. 다만 그것은 내가 손에 들면 금방 귀부인이 될 것만 같았던 엄마의 환상을 깰 수 없었던 딸의 효성을 받은 것이라 여길 뿐이다.
나는 자랑스런 핸드백을 들고 강남이 아닌 우산동 거리 시내버스 정류장에 서 있다.

 

 

 

 



당신도 한 번 당해 봐

김명규


수학 공식이나 화학 기호를 못 외우는 것은 내가 살아가는 데 별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미술 과목이 나의 삶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을 줄은 몰랐다. 내 그림 솜씨는 예나 지금이나 초등학생 수준에도 못 미친다. 손재주가 없어 여자로서 얼굴 화장을 할 때마다 애를 먹는다.
입술 윤곽을 양귀비처럼 예쁘게 그리지 못해 립스틱을 입술에 직접 대고 대충 문지르기 일쑤였다. 그럴 때면 스케치 선을 넘어 물감이 번져 있는 것처럼 입술 주위까지 루즈가 묻어 엉망이 되곤 하였다. 그런 나를 보고 직장 동료들은 화장지를 꺼내어 닦아주기도 해서 창피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결혼 전에도, 결혼 후에도 한동안 얼굴 화장을 하지 않았다. 남에게 흉잡혀 웃음거리가 되느니 스킨과 로션만 얼굴에 발랐다. 우리 집 큰애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학부형이 되었을 무렵에는 얼굴에 잡티가 생기고 피부는 탄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입학하던 날부터 할머니 손을 잡고 학교에 갔던 어린 딸이 그날만은 학부형 회의가 있으니 엄마가 꼭 와야 한다고 몇 번을 다짐하였다.
"엄마, 이쁜 옷 입고 얼굴에 화장칠도 이쁘게 하고 와 응?"
사랑스런 딸의 부탁이 내내 부담스럽게 마음 한켠에 걸려 있었다. 티슈에 물을 뿌려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던 화장품 용기들을 말끔히 닦았다. 뚜껑을 열어보니 내용물이 오래 되어 변질된 것도 있었고, 공기에 닿았던 부분이 굳은 것도 있었다. 그런 윗 부분은 덜어내고 남은 것이 아까워 쓰기로 하였다. 아이펜슬을 손에 쥐고 눈 가장자리로 가져가는데 손목이 나도 모르게 떨렸다. 양쪽에 그려 넣은 눈썹이 좌우의 균형이 맞지 않고 위아래로 오르내렸다. 그런 눈썹을 지웠다가 다시 그리고, 또 그렸다 지우고, 반복되는 과정에서 눈두덩은 벌겋게 부어 올랐다. 한 번만 더 연필심으로 자극을 주면 부어 오른 눈두덩에서 선홍색 피가 터져 흐를 것처럼 쓰리고 아팠다. 회의 시간은 몇 분 남지 않았고 딸아이가 눈이 빠지게 엄마를 기다릴 걸 생각하니 마른 장작 타듯 조급한 마음이 타들어 갔다.
눈썹 주위의 통증을 느끼면서 택시를 잡아탔다. 강당에서 회의를 하는 동안에도 나는 손거울을 꺼내어 슬쩍슬쩍 내 눈썹을 살펴보았다. 그 사이에 핏발이 삭고 부기도 가라앉고 있었다. 회의가 끝나고 교실로 돌아와 담임 선생님과 정면으로 인사를 나눌 때에도 얼굴을 제대로 들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교실 뒷벽에 걸린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아이펜슬이 스쳐간 자국이 여러 줄이 되어 희미하게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나를 보던 담임 선생님의 눈길이 아래로 떨구어지던 이유가 짐작되던 순간 유리창에 매달린 커튼 뒤로 내 얼굴을 숨기고 싶었다. 눈썹 하나 제대로 못 그리는 엄마를 둔 딸에게 미안한 생각뿐이었다.
그 후로 외출해야 될 일이 생기는 날이면 이른 아침 남편보다 먼저 세수를 하고 연필을 남편의 손에 쥐어주면서 내 얼굴을 바짝 디밀었다. 문학 동인지의 표지 그림이나 책갈피의 컷도 곧잘 그리는 남편이었다. 급히 출근을 서둘면서도 남편은 나의 맨얼굴에 대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근사하게 눈썹 그림을 그려주었다.
팔십년대 후반쯤에 서민 주부들을 대상으로 안방에서 눈썹 문신과 양잿물로 점을 빼는 시술이 성행할 때였다. 대개는 미용사가 불법으로 계모임을 하는 장소에서나 동네 주부들이 열 명 이상 모이게 되면 은밀하게 출장을 나왔다.
급히 와 보라는 희경이 엄마의 전화를 받고 그 일이 벌어지고 있을 걸 상상하며 옷을 입었다. 그날 따라 호남지방에는 대설주의보가 내려졌고 하늘을 열어제친 듯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희경이네 집 현관문을 열자 좁은 예배당 문앞처럼 빼곡이 들어찬 신발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있었다.
안방 한 가운데 누군가 한 사람 누워 있었고, 흰 가운을 입은 미용사가 병원의 간호사처럼 약병을 들고 있었다. 열 서너 명의 낯익은 동네 아줌마들이 이마를 서로 부딪칠 듯이 맞대고 둘러앉아 내가 들어서는 것에 기척도 하지 않았다. 누워 있던 여자는 희경이네 이층에 세 들어 살던 정우 엄마였다. 정우 엄마는 서른 대여섯쯤이었지만 몸집이 크고 비대하여 나이를 훨씬 웃돌아 보였다. 게다가 주근깨와 점이 얼굴에 빤한 데가 없어 별명이 '파리똥'이었다. 얼굴에 점이 제일 많은 사람부터 순서가 정해진 모양이었다.
미용사는 주사 약병만한 작은 유리병에서 면봉으로 약을 묻혀 조심스럽게 정우네의 얼굴에 대고 살풋살풋 눌러대었다. 이를 악물고 정우네는 아픔을 참아내고 있는 것 같았다. 모여 있던 여자들은 "아파? 많이 아파?" 하고 이구동성으로 캐물었다. 그 말에 대꾸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참아내는 아픔을 속으로만 저마다 가늠하고 있었다. 아마도 파리똥이라는 얼굴의 딱지를 기어이 떼내고야 말리라는 비장한 각오를 한 것 같았다.
열세 명의 여자가 점을 빼려고 모였다가 정우네 한 사람 만으로 미용사의 수입을 더 이상 올려줄 수 없었던 것은 아름이 엄마 때문이었다. 두 번째로 미용사에게 얼굴을 맡겨 예뻐지고 싶은 욕망을 충족시키려 했던 아름이네는 면봉이 얼굴에 처음 닿자 큰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나는 것이었다.
"오매, 아픈 것. 아이구 아퍼. 나는 안할라요. 점 빼려다가 사람 죽겄소!"
아름이네가 괜한 엄살을 떤 것만은 아닌 듯 싶었다. 아름이 엄마는 주섬주섬 방바닥에 놓여 있던 코트를 집어 입더니 방문을 열고 미련 없이 나가버렸다. 수백 명의 얼굴을 손댔지만 이 동네 아줌마들처럼 엄살 떠는 사람들은 처음 봤다면서 미용사는 불쾌한 듯 약병들을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그럼 다음엔 눈썹 문신 하실 분!"
그는 낱낱의 얼굴을 둘러보며 찾았다. 방안의 여자들은 붙잡혀 온 포로처럼 떨고 있었다. 미용사의 시선이 내게서 머물렀다. 메이컵을 할 때마다 괴로웠던 일들이 필름처럼 스치면서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을 먹었다. 나는 도마 위의 생선처럼 누워 그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그는 먼저 아이펜슬로 나의 눈썹 모양을 예쁘게 그렸다. 누워 있는 나에게 눈썹 그려진 모양을 거울로 비춰주면서 맘에 드느냐고 물었다. 나를 지켜보고 있던 여자들은 그 모양대로만 한다면 새 인물이 되겠다며 긴장을 늦추고 새로운 호기심에 생기가 돌았다. 주사 대롱에 새까만 먹물을 담고 마취도 하지 않은 채 바늘은 콕콕콕 내 생살을 파고들었다. 점을 빼는 것보다 전혀 아프지 않다던 미용사의 거짓말에 나는 이미 넘어간 뒤였다. 칼끝으로 쪼는 것 같은 아픔을 나는 죽은 듯이 참아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 보니 별로 아프지 않나 보다고 여자들은 안심이 되어 속삭였다. 그러나 나는 이런 아픔을 나 혼자만 당하는 것이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스쳤다. 어디 당신들도 한 번 당해 보라지…. 내색을 하지 않고 감고 있는 내 눈에서 아픔을 참다못해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미용사는 얼른 탈지면으로 내 눈물을 닦아주곤 하였다.
그 다음 사람도, 또 다른 이도 내가 아픔을 참았던 속마음이 이심전심으로 전해졌는지 난도 당하는 아픔을 참고 소리 없이 눈썹 문신을 그려 넣었다. 그 날 눈썹 문신을 해 넣은 여자들은 모두 여섯 명이었다. 미용사가 대금을 받아 챙겨들고 우리보다 먼저 희경이네 안방을 빠져나간 뒤에도 문신을 한 여자들은 아무도 아프더란 말을 꺼내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모두 쓰디쓴 약을 입안에 하나 가득 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얼마 전 지리산 콘도에 동창들과 놀러가서였다. 이제는 돋보기를 써야만 그나마 눈썹을 그릴 수 있다면서 금순이는 탄식을 했다. 그렇지만 이 나이에도 나는 눈썹을 그리기 위해 돋보기를 쓸 일은 없었다. 그 때 희경이네 안방에서의 바늘로 찌르던 고통은 잠시였고 그 누구와의 대면에서도 딸아이의 선생님 앞에서처럼 더 이상 내 얼굴을 죄인처럼 숙이지 않아도 좋았다. 눈썹과는 달리 내 입술의 뾰족한 산 그림은 언제나 병(丙)을 맞던 내 미술 실력을 아직도 말해주고 있지만.

 

 

 

사람이 가질 수 없는 것

김명규


처서가 지나더니 살랑이는 바람은 산속 깊은 약수 맛 같다. 약속의 땅, 논과 들에는 어느 새 벼이삭이 얼굴을 내밀고 주렁주렁 열매를 달고 과수들은 단물을 가득히 잉태하고 있다. 모든 생명의 원천인 이 땅을 나는 어머니이며 그 신성함이 하느님이시라고 말하고 싶다. 땅은 진리라고 하였다.
담양으로 조문을 가는 길이었다. 친구의 승용차에 합승하기로 한 것이 그만 약속 시간을 놓쳐 나 혼자 택시를 탔다. 장거리의 무료함을 잊게 하려는 기사의 배려였을까. 아니면 원래 입담이 좋아 말하기를 좋아해서였을까. 택시 기사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했다. 고인이 된 어느 재벌 총수의 얘기라며 그는 내가 앉은 뒤쪽을 얼른 돌아봤다. 자신의 말에 집중하고 있는지 확인해 두려는 것 같았다. 재벌이 되기까지는 애초에 땅 장사를 하여 돈을 벌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런 재벌 총수가 죽는 순간까지 세 가지를 모르고 떠났다는 것이었다. 첫째는 자신의 재산이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몰랐고, 둘째는 자기 부인이 몇이나 되는지 몰랐고, 셋째는 슬하의 자식이 몇 명이었는지 몰랐다는 거였다. 누군가가 그럴싸하게 풍자해 낸 소문 같았다. 나는 피식 웃고 넘겼다.
그런데 얼마 후 그 첫 번째 이야기를 실감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베로니카라는 성당 친구가 있다. 그는 신앙 생활에 맛들여 사는 사람이어서 때때로 텅 빈 성당에 찾아가 기도하였다. 어느 날에도 기도를 마치고 일어서려는데 그가 앉았던 자리 앞에 누군가 놓아두고 간 성가 책 한 권이 눈에 띄었다. 표지를 열어보니 평소에 자주 만나는 교우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만나거든 전해주려고 책을 가방 안에 넣었다. 성가 책을 주워 가방에 보관해온 지 석 달 가량이 지났지만 그걸 깜박 잊고 있었다. 그 동안 그 교우와 자원봉사며 혼자 사는 노인을 돌보는 일 등으로 여러 차례 만났었지만. 베로니카가 들고 다니던 큼직한 성서 가방이 낡아 끈이 떨어져서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에야 남의 성가 책이 보관되어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무심코 성가 책 갈피를 넘겨보았다. 책 한가운데서 더 이상 넘어가지 않고 끼어 있는 것이 있었다. 얼핏 보기에 백화점 상품권 같았다. 일, 십, 백, 천, 만… 그것을 꺼내든 베로니카의 가슴은 뛰고 손이 떨렸다. 천만 원 짜리 자기앞수표 석 장이 포개져 있었다.
베로니카의 남편은 초등학교 교사였고 아이들을 사 남매를 두고 보니 절약하고 검소하게 생활하였다. 삼천만 원이라는 큰돈을 잃은 교우가 그 동안 겪었을 마음을 헤아려 보니 빨리 알려주어야 할 것 같았다. 밤이 깊었지만 전화기를 들었다. 전화를 받은 교우는 뜻밖에 침착하고 태연했다. 돈을 잃고 애가 탄 것 같지 않았다.
"으응, 그것이 거기 있었구나. 그것 땜에 전화했수?"
허탈감에 빠진 것은 베로니카였다고 한다. 그 교우는 소문난 부자였다. 성당 건축 기금도 거액을 바쳐서 교우들 간에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나는 시장에서 오토바이를 탄 날치기에게 사만 몇 천 원이 든 손지갑을 빼앗긴 적이 있다. 그 돈을 가지면 생선을 몇 마리나 더 살 수 있었을 텐데, 고기를 샀어도 한참을 먹을 수 있었을 텐데…. 곰곰이 새길수록 분하고 속상했다. 시장에서 집에까지 이십 여분 걸어오는 동안 나는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런데 부자들은 뭉칫돈이 한쪽 구석에서 빠져나가도 빈틈을 모르는 것일까. 하기야 강물을 몇 바가지 퍼낸다고 축이 날까마는. 베로니카가 찾아주었던 교우의 수표도 어느 곳의 땅 일부를 팔게 되어 받은 계약금이었다고 한다. '부자가 되려면 돈을 땅에 묻어야 한다'는 말은 수십 년 전 내가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었을 때 어른들이 한 말이었다. 내가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었다.
온갖 열매가 풍요로운 가을을 지날 때마다 이 땅이야말로 살아있는 것들의 축복임을 새삼 깨닫는다. 1855년 미국 대통령이 백인 대표자들을 보내어 인디언 부족들이 대대로 살아온 땅을 팔 것을 제안하였을 때 추장이었던 시애틀이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고 한다.
"공기의 신선함과 반짝이는 물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대들에게 팔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에게는 이 땅의 모든 부분이 거룩하다. 빛나는 솔잎, 모래 기슭, 어두운 숲속 안개, 맑게 노래하는 온갖 벌레들. 이 모두가 우리의 기억과 경험 속에서는 신성한 것들이다. 나무 속에 흐르는 수액은 우리 인디언의 기억을 실어 나른다. 백인들은 죽어서 별들 사이를 거닐 적에 그들이 태어난 곳을 망각해버리지만 우리가 죽어서도 이 아름다운 땅을 결코 잊지 못하는 것은 이것이 바로 우리 인디언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인디언의 성지를 매수하려 했던 것은 백인뿐만이 아닌 지금의 우리 자신들도 그런 부류들이다. 대자연 앞에 참으로 부끄럽고 면목이 없다. 이 땅을 돈으로만 보는 이들에 의해 땅은 죽어간다. 어쩌면 그것은 하늘에 대한 반역이 아닐는지.

 

 

 

 

 

 

 



언제나 슬픈 이름

김명규


세상의 모든 고통을 끌어안고 사는 이가 어머니이다. 질화로가 숯불을 안아 담듯이.
얼굴의 군데군데 꽈리만한 것이 몇 개 부풀어오르더니 풍선이 터진 것처럼 그것이 찢겨진 자국에서 진물이 흘렀다. 그렇게 부어오른 어머니의 얼굴은 누렇게 뜬 시래기 같았다. 고등학교 때의 최 선생은 어머니가 수두와 비슷한 어떤 돌림병을 앓고 있는가 보다는 생각으로 무심히 지나쳐 버린 일이었다.
최 선생은 글을 쓰는 분으로 고등학교 교사이며 내가 존경하는 분이다. 근래의 그와 만났던 것은 노모의 영정 앞에 상주가 되어 있던 병원 영안실에서였다.
어버이날이면 구청장이나 시장이 백 세를 넘긴 장수 노인을 찾아다니며 큰절을 하고 주고 가는 금일봉을 작년에까지 받았다는 어머니였다. 고인의 호적상 나이는 103세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98세로 눈을 감았다. 그의 가정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상세히 물어 볼 수 없던 처지였지만 어쨌든 최 선생은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내가 집으로 방문하였을 때 거실에 계시던 모자간의 모습은 늙은 누이와 동생 사이처럼 보이기도 했고 형수와 시동생과도 같게 보였었다. 자식과 부모는 결국 함께 늙어간다.
큰아들은 학도병으로 나간 뒤 끝내 돌아오지 못하였고, 그 뒤를 따라 홧병으로 남편을 잃은 어머니였다. 졸지에 외아들이 되어버린 최 선생은 4대 독자인 셈이었다. 남은 아들 하나만이 어머니에겐 하늘이었고 바람막이였으리라. 그 어머니는 살아 생전 당한 모든 잘못이 자신의 죄인 양 조상을 뵙기가 부끄럽다며 숨소리 한번 크게 내 쉬지 못하였다. 그래서 자신의 몸을 면죄부의 죄값으로 내놓은 듯 고달픈 노동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무거운 거름지게를 지는가 하면 산에 가서 푸나무도 한 짐씩 땔감으로 이고 내려오기도 하였다. 어머니 손은 장작개비처럼 거칠고 뻗세어졌다. 홀아비는 이가 서 말, 홀어미는 겉보리가 서 말이라는 말이 있지 않았던가. 어머니는 허기진 배를 꿈으로 채웠을까. 알토란처럼 모은 돈은 아들 공부시키는 데 아낌없이 내놓았다. 자랑스러운 아들은 도회지로 대학교를 보냈다. 품안에서 떼어놓고 바람 앞의 촛불처럼 안 잊혔을 것이다.
목화가 피기 전 어린 열매는 따먹으면 달착지근하여 먹을 만한 군입정이었다. 그것이 마치 먹을 만한 때에 따서 항아리에 넣어 두고 아들을 기다렸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말라버리거나 썩기 일쑤여서 어머니의 마음이 애처롭기도 하였단다.
얼굴의 상처로 달포가 넘게 앓던 어머니의 얼굴엔 무서운 흉터가 남게 되었다. 깊은 화상이 아물었을 때처럼 얼굴 근육이 일그러져 땅긴 채 굳은 아교 같았다. 사춘기 시절을 지나고 있던 최 선생은 그런 어머니의 얼굴이 남 보기에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한다. 장날이면 농사지은 곡물을 팔기 위해 싸놓은 보따리를 어머니의 두 손으로 들고 가기에 턱없이 모자랐다. 짐을 나눠 들고 장에 갈 적마다 아들은 어머니보다 앞질러 가거나 뒤에 처져서 느릿느릿 따라갔다. 장터로 가는 행인들이 어머니의 얼굴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것이 싫어서였다.
어머니가 왜 그런 병을 앓았었는지 집안 당숙모로부터 들어 알게 된 것은 대학 3학년 겨울 방학 때였다고 한다. 객지에 나가 있는 조카에게 더운 밥 한 그릇 해주고 싶어 초대된 자리에서였다. 밥상을 물린 뒤 당숙모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들을 배 곯린 적 없던 어머니는 당신의 끼니는 숨어서 풀대죽으로 연명하였다고 한다. 죽을 쓰려고 뜯어 온 나물 속에 독성이 든 풀이 섞여 있었다. 그것을 먹은 후 그 독의 후유증으로 한평생 배고팠던 흔적이 낙인처럼 찍혀 있었던 거였다.
더 이상 당숙모 앞에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최 선생은 사립문을 나왔다. 마을 어귀 눈 덮인 대숲에는 달빛이 싸늘했다. 시골의 밤은 그 고요함이 혼령들의 정기마저 오싹하게 느껴지게 한다. 청년은 눈밭에 주저앉았다. 냉기가 정강이까지 차 올라 얼어붙을 것 같았다고 하였다.
집에 자주 오지 못하였지만 농번기에나 연휴 때에 다녀갈 때면 어머니는 서운함을 못 이겨 안 봤던 것만도 못하다며 아들보다 앞서 집을 나섰다. 그리고는 빠른 걸음으로 뒷산 언덕을 향하여 올라갔다. 산 중턱에 오르면 좁은 신작로가 끝나는 곳까지 길이 보였다. 아들이 걸어가는 뒷모습이나마 좀더 오래 지켜보고 싶어서였다. 그 뒷산이 멀어졌을 때서야 아들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 솔숲 사이로 보이던 어머니의 무명 저고리는 하얀 박꽃처럼 피어있었다. 해가 저물던 보랏빛 하늘은 모자간의 가슴 속을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이제 어머니는 아들의 효도를 다 받고 한 생애를 여한이 없이 마감하였다. 고등학교 교사란 사실 중노동자다. 최 선생은 점심시간이면 집으로 달려와 어머니의 점심상을 차려 함께 식사하는 일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동료 직원들은 그에게 효자 최 선생이라는 별명을 붙여 불렀다.
어머니의 입맛을 돋게 하기 위해 며칠 전 하늘 수박 덩굴손을 어렵게 구해 왔는데 이제는 그것을 자기가 혼자 먹어야 할 것 같다고 최 선생은 고개를 숙였다. 하늘수박, 나는 그것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이 도시에서 최 선생은 그것을 어떻게 구해 왔을까. 하늘수박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헤매었을 아들이다.
어느 샌가 손에 꼭 쥐어져 있던 손수건은 내 따뜻한 살의 온기에 젖어 있었다. 어머니, 언제 불러 보아도 슬픈 이름이다.



재래식 추억

김명규


고무 풍선처럼 탱탱하던 것은 조금만 움직여도 곧 터질 것 같았다. 이리저리 살펴보면서 생각해 보았지만 그 자세로 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물기 없이 고슬고슬한 바닥에 처리하기엔 빠져나갈 수채망이 없었다. 내가 그곳에서 쓸 수 있는 시간만큼의 여유가 지연되었던지 밖에서는 문을 두드리며 재촉하였다. 방법이 없고 다급한 나는 구두를 벗었다. 왼손 바닥을 타일 벽에 밀착시키고 몸에 중심을 의지한 뒤 올라섰다. 발바닥의 넓이도 안 되는 그것을 밟고 곡예사처럼 아슬아슬하게 쪼그리고 앉았다. 몸의 높이가 느껴지면서 긴장과 팽배감을 늦출 수 없었다. 습관과 자연의 이치에 알맞은 자세를 취하던 순간 잠금장치가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물줄기는 세차게 뿜어 나왔다. 그 때 내가 쪼그리고 앉아 있던 곳의 구멍에 과녁을 맞추기란 닭이 홰를 치고 지붕에 올라가기보다 더 어려웠을 것이다. 제어장치가 없던 분수는 바닥으로 쏟아져 물바다가 되었다. 점심으로 우동 국물을 한 대접 다 들이킨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었을 것이다.
내가 서울에 진입하게 된 것은 학교를 졸업한 직후 광화문 전화국 업무과에 취직이 되어서였다. 식성이 좋아 체격도 좋았던 나는 신진 대사작용이 원활하여 신체 건강한 직장 여성이었다. 화려함이 도시의 극치를 이루던 어둠 속에 높이 떠 있는 네온사인은 서울의 밤하늘에 색실로 수를 놓은 듯 휘황하고 아름다웠다. 처음 보는 물건들도 많았고 신기한 것도 한두 가지가 아닌 서울이었다. 그러한 서울에서 첫 출근을 했던 날부터 나는 새로운 문화에 부딪히게 되어 긴장하고 당황했었던 일들을 잊을 수 없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애태웠던 것은 화장실이었다.
출근 첫날 변소를 찾던 나에게 화장실의 위치를 동료 직원이 가르쳐 주었다. 그곳의 문을 열어 보았을 때 세면대에 서서 여직원이 손을 씻거나 벽에 붙어 있는 거울을 보면서 화장을 고치고 있었다. 말 그대로 화장하는 곳이었지 암모니아 가스가 코 설주를 자극하는 변소가 아니었다. 건물 꼭대기까지 찾아 다녔지만 내게 필요한 곳은 찾지 못하였다. 나는 그날 칠층 옥상의 우수관에 바싹 붙어 앉아 방뇨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 올라온 나는 미아리에서 살던 고모 집에 머물렀다. 객지에 나가 있는 손녀딸 생각으로 할아버지는 이삿짐 트럭에 부탁하여 고구마나 감자를 한 자루씩 부쳐 왔다. 고모 집에서 먹는 밥도 식당에서 사먹는 밥도 내 양에 차지 않았다. 저녁이면 나는 고구마나 감자로 모자라는 배를 채웠다.
수세식 변기에 소변을 본 후 물을 내리지 못한 것은 별 문제가 아니었지만 고구마를 실컷 먹은 다음 날 아침이 문제였다. 거기에다 아침밥도 거르지 않았다. 그래서 출근하자마자 다급한 것이 화장실이었다. 웬 일인지 먹었던 양보다 나오는 것은 곱빼기였다. 건강한 누런 색깔의 그것은 꾸역꾸역 많이도 기어나왔다. 길이가 칠십 센티쯤 되는 사기 요강이 그들막하게 차 오르는 것이었다. 한바탕을 쏟아낸 뱃속은 상쾌하고 흐뭇했지만 처리할 수 없는 것이 큰 문제였다. 변기 바로 옆에 설치된 손잡이 모양의 쇠붙이가 붙어 있어서 그것을 잡아 빼고 좌우로 돌려 봤지만 물 내리는 작동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화장지를 펴서 변기 안을 살짝 위만 덮어놓고 인기척을 살핀 뒤 도망쳐 나오곤 하였다.
화장실에서 마주치는 청소아줌마가 어떤 시골뜨기가 또 변기의 물을 내릴 줄 모르는갑다고 얼굴에 주름살을 있는 대로 접었던 것을 두 번이나 보았다. 나는 절대 아님을, 시치미 떼는 표정 관리를 잘 해냈다. 그리고 애꿎은 손바닥만 씻고 나와 청소 아줌마가 화장실을 나온 뒤에야 이용할 수 있었다. 관리계 미스 리가 용변을 보고 물 내리던 것을 확실하게 문틈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은 입사한지 닷새 만이었다. 그때 화장실 사용 자격증 시험에서 합격이라도 한 듯 가슴이 설레고 자신감마저 생겨났다. 내가 손으로 잡고 시동해 보았던 그 꼭지를 구두 신은 발 앞꿈치로 살짝 누르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깨달은 나의 의기 양양하고 혈색 좋은 얼굴은 거울 속에서 웃고 있었다. 수세식 변기를 사용할 줄 알게 된 나는 서울 멋쟁이가 다 된 것 같았다.
미스 김이라고 나를 부르는 이름에도 서류를 처리하고 사무에 임하는 것도 익숙해 갔고, 여직원들과의 사귐도 익어 가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옥천이 고향이던 같은 과의 현숙이는 지방 출신이며 촌티를 못 벗는 나와 동병상련의 정이 깊어 서로의 마음 속 깊은 얘기도 나눌 수 있었다. 현숙이의 형부가 캐나다의 광부로 떠난 지 이년 만에 자리를 잡아 언니가 이민을 가게 되었다고 하였다. 언니가 떠나던 날이 마침 토요일 오후 세시 비행기라고 하였다. 친했던 여직원 몇몇이 돈을 모아 떠나는 언니의 조그마한 선물을 샀다. 그날 점심으로 시민회관 뒷골목에서 우동을 먹고 우리들은 김포 공항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탔다.
공항에서 처음으로 양변기를 보았을 때, 정말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난감하였던 것이 삼십 오 년이 지난 지금에도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 불과 몇 해전 어느 시골 아주머니도 나와 같았던지 어려운 서울 사돈집에 가서 양변기 안의 고인 물에 세수를 하였다고 들었다.
날로 변해 가는 산업 문명의 탓인지.
남편의 고등학교 선배인 어느 지방 대학 교수님의 이야기다. 그 교수님은 지금도 화장실에 들어가면 두 가지 동작이 벌어진다고 한다. 대변과 소변을 분리해서 따로따로 보는 일이다. 내가 공항에서 처음 양변기를 사용했을 때의 그림처럼 아마 그분도 똑 같은 풍경을 연출하는 모양이다. 대변은 쭈그리고 앉아야만 볼 수 있고, 소변은 평소의 남자들이 서서 보는 그 자세를 취해야 볼 수 있다고 하니 얼마나 그 일이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겠는가. 그 육중한 어른이 양변기에 올라가 가장 자리를 딛고 쭈그려 앉아 있을 자세를 생각만 해도 우습기 짝이 없다.
흘러간 세월, 이발소나 중국음식점 벽마다 한때 유행처럼 푸슈킨의 '삶'이란 시를 액자에 걸어 놓았었다. 우리 세대에 그 시를 가장 많이 애송하며 사춘기를 보냈을 것이다. "지나간 것은 그리운 것이다." 그 시의 마지막 구절처럼 재래식 화장실을 쓸 때의 지난 추억들은 지금도 아련하기 만하다. 그 시절이야말로 내가 가장 순수한 꿈을 머금었던 때였음을 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