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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감동한 한 편의 시 (꽃은 자전거를 타고) /강인한

법정 2013. 1. 16. 14:04

 

내가 감동한 한 편의 시, '꽃은 자전거를 타고'|강인한의 산문
강인한 | 조회 773 |추천 0 |2008.07.25. 14:00 http://cafe.daum.net/poemory/H3jQ/28 
내가 감동한 한 편의 시

최문자의 시 '꽃은 자전거를 타고'





창피한 이야기를 고백해야겠다. 이 나이가 되도록 나는 자전거를 탈 줄을 모른다. 물론 남의 자전거 뒤에 타 본 적은 많다. 하지만 나는 내 발로 자전거 페달을 돌리며 탈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아주 오래 전에 광주 변두리에 살 적이다. 그 무렵 아들녀석이 초등학교 3학년쯤 됐을까. 밖에서 돌아온 아내가 기가 막힌 꼴을 봤노라고 하였다. 마을 앞의 작은 하천을 건너 공터가 있는데 거기서 한 아이가 제 키만큼 높은 성인용 자전거를 타더란 거였다. 키가 작은 그 아이는 안장에 오르면 발이 페달에 닿지 않으므로 안장에 올라서 엉덩이를 기우뚱갸우뚱 양쪽으로 오르내리며 자전거를 탔는데 서커스 같은 그 모양이 하도 우습고 재미있어서 넋을 놓고 보았다고 한다. 한데 가까이 다가온 아이의 얼굴을 보고서는 깜짝 놀랄 것이, 그게 바로 아들녀석이 아닌가.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흐뭇하기도 하고 한편 쑥스럽기도 하고, 기분이 요상했다.
국민학교 6학년 때 우리 집에 자전거가 있어서 배울 기회가 있었으나 자꾸만 넘어지는 바람에 자전거 타기를 못 배웠다. 그 후 이십대가 되어서 학교 운동장에서 동료 선생님의 부축을 받으며 배워보려고도 했다. 하지만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아직껏 내가 자동차 운전을 배우지 않은 건 바퀴에 대한 일종의 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엉뚱한 얘기가 나왔다. 여기에 내가 소개하고자 하는 시가 자전거를 소재로 하고 있기에 문득 옛날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가난한 두 사람의 남녀가 있었다. 휴일이면 그들은 자동차가 아닌 자전거를 타고 데이트를 즐겼다. 마음이 서로 통하기 때문에 값비싼 승용차가 아니어도 좋았다.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를 뒤에 태우고 야외로 나갈 때도 있었고, 여의도 광장 같은 데서 둘이 자전거를 달리기도 하였다. 자전거 페달을 힘껏 밟으면 바람이 차갑게 얼굴을 스쳐가는 느낌, 그리고 등뒤의 여자가 남자의 허리를 감은 손에 더 힘을 주고 자기 얼굴을 남자의 등에 바짝 붙이는 걸 느꼈다. 어쩌다 남자가 장난삼아 너무 거칠게 자전거를 몰 때에는 여자가 등을 탁탁 두들기기도 하였다.
자전거를 타고 둘은 한강 고수부지로 나간 적도 많았다. 고수부지에서 그들은 도도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강 건너편 높이 솟은 빌딩과 먼 산의 능선을 보며 그보다 높은 꿈을 이야기하기도 하였다.
어느 날 남자는 전혀 생각지 않은 그녀의 소식을 들었다. 그녀가 병원에 입원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명랑하고 사랑스러운 그녀가 며칠 동안 소식이 끊겼던 것을 심상하게 생각했던 터인데 입원을 할 정도의 큰 병에 걸렸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용기를 내어 그녀의 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병명을 물었다. 대수롭지 않은 듯, 금방 수술하고 나면 퇴원하게 될 거라고 했다.
평일에는 직장을 쉴 수가 없어서 남자는 토요일을 잡아 그녀의 병실을 찾아가리라 생각했다. 꽃집에 들러 아네모네 한 다발을 샀다. 그는 평소에 그녀를 태운 자리에 꽃다발을 싣고 자전거를 달려 병원을 찾아갔다. 길바닥이 울퉁불퉁한 곳을 달릴 때면 꽃송이가 탁탁 남자의 등을 때리는 게 느껴졌다. 어쩌면 장난치지 마라고 등뒤에 탄 그녀가 주먹으로 토닥거리는 것도 같이 느껴졌다.
병원 6층이 입원실이었다. 급히 달려오느라고 몇 송이 꽃이 빠져나간 아네모네 꽃다발을 다시 추스르고 그는 열려진 병실로 들어섰다. 서너 명의 환자와 보호자들이 멀뚱히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없었다. 병실을 나와 간호사들에게 그녀의 이름을 대고 어디로 옮겨갔느냐고 물었다. 수술실이라고 했다. 다시 그는 3층의 수술실로 내려갔다. 왠지 꽃다발을 든 손이 떨렸다. 그가 수술실에 허겁지겁 도착했을 때, 그녀는 벌써 영안실로 내려간 뒤였다. 꽃다발을 자전거 뒤에 싣고 그는 병원 뒤쪽에 있는 영안실을 향했다. 정말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꿈인 것만 같았다.
한 시간이나 지났는지 모른다. 남자는 한강 고수부지에 걸터앉아 울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자전거는 잡석 사이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었다. 정신 없이 자전거를 달려오면서 뒤에 실은 꽃다발이 엉망으로 헝클어지고, 길바닥에 뚝뚝 아네모네 꽃송이들이 떨어져 나간 것도 그는 몰랐다. 마지막 꽃송이가 떨어져 나갈 때였을까, 바람결에 문득 여자의 말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그녀가 죽던 날
꽃은 자전거를 타고 왔다
그녀의 남자가 입원실 현관 앞에 자전거를 세우고
막 아네모네 꽃을 내리려고 할 때
그녀의 심장은 뚝 멎었다
꽃은 다시 자전거를 타고 영안실 근처로 갔다
죽을 자리에서도 타오른다는 아네모네가
놀란 자전거를 타고 앉아
헛바퀴만 돌리고 또 돌렸다

그날,
꽃은 온종일 자전거에게 끌려 다녔다
꽃을 태운 자전거는 참았던 속력을 냈다
꽃도 그녀처럼 자전거를 타고 앉아
남자의 등을 탁탁 때리며 달렸다
꽃은 내부가 무너지도록 달렸다
마지막 꽃 한송이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뭐라고 말했지만
바람이 그 말을 쓸어갔다

그날,
빈 자전거 한 대
고수부지 잡석 사이에 쓰러져 있었다

―최문자, 「꽃은 자전거를 타고」


이 시는 《시와 시학》 2007년 봄호에 실려 있다. 처음 읽어볼 때에는 그저 시큰둥하게 읽어가다가 두 번째 읽으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가슴속에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름을 느꼈다. 오래 전에 김종삼 시인의 「민간인」이란 시를 읽고 느낀 전율 이상의 것이 온몸을 휩싸는 것이었다.
두 번째 읽을 때 "꽃도 그녀처럼 자전거를 타고 앉아 / 남자의 등을 탁탁 때리며 달렸다"라는 두 줄의 시행이 모든 상황을 밝혀주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꽃 한 송이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무어라고 하는 말을 바람이 쓸어갔다는 대목에 이르러 나는 두 사람의 아름답고 슬픈 사랑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지난 5월 하순 한국시협에서는 만해 생가가 있는 홍성으로 문학기행을 다녀왔다. 마침 점심 시간 지나 이 시를 쓴 최문자 시인을 만났다. 반가워하며 내가 이 시에 대한 솔직한 감동을 최 시인에게 들려주었더니 그 시에 담긴 서사적 내용은 평소에 알고 지내는 어떤 사람의 실화였다는 고백을 들을 수 있었다.
사랑하는 아도니스의 죽음을 지켜보며 슬퍼하는 아프로디테. 연인의 피에 술을 부어 그 자리에서 빨갛게 피어났다는 아네모네의 꽃 전설이 슬프고 아름다웠던 게 생각난다.


―《시와사람》2008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