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헌/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 8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
3) 생각을 시어로 쓰기
시어(詩語)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기에 앞서 '시가 무엇이냐'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시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 한마디로 답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수많은 시인들이 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나름대로 정의를 내리고 있음 또한 사실이다. 이러한 시에 대한 정의는 자신의 문학관의 표현이라는 점을 생각하면서 생각해보도록 하자.
☆시는 율어(律語)에 의한 모방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는 운율적 구문이며....이성의 도움에 알맞는 상상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쾌락과 진리를 결합시키는 기술이다.....그리고 그 본질은 발견하는 것이다. ( 사무엘 존슨)
☆시는 일반적 의미에서 상상의 표현이다. (셀리)
☆시는 시적 진리와 시적 미의 법칙에 의한 비평에 알맞는 상태에 있는 인생의 비평이다.(메슈 아놀드)
☆나의 시는 나의 참회다. (괴테)
☆시는 체험이다.(R.M. 릴케)
☆시는 정서의 표출이 아니라 정서로부터의 도피요,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개성으로부터의 도피다.(T.S.엘리어트)-------감정의 일반화와 언어화를 지적
☆詩三百 一言而蔽之曰 思無邪(공자)
☆詩言志(書經)
☆시는 우주의 생명적 본질이 인간의 감성적 작용을 통하여 표현되는 언어의 통일된 具象이다.(조지훈)
☆시는 언어의 건축이다.(김기림)
이들 정의들이 시의 모든 것을 다 말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위의 정의들 중에서 공통된 사항을 정리한다면 '시는 정서와 상상의 문학이며 운율적 언어로 생명의 해석과 체험의 표현' 이라는 공통점을 찾아낼 수 있다.
이렇듯 다양하게 해석되는 시(詩)를 구성하는 요소로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가장 대표적인 요소는 시어, 리듬, 이미지, 표현기교, 소재,주제,행과 연의 형태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 가장 기본적이며 중요한 것은 시어(詩語)이다. 시의 본질이 언어예술이란 점으로 보아 시어의 중요성에 이의를 달기는 어렵다. 물론 특수한 예로 그림이나 기호로 쓰여진 시들이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하나의 시도일 뿐, 시의 일반적 모습은 아니다.
발레리는 "시는 언어의 연금술(鍊金術)"이라고 했다. 이 말은 시를 쓰는 작업은 시정신을 가다듬고 내적 체험을 응결시키는 일이며, 언어와의 대결이라는 점을 지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언어를 깎고 다듬고 손질하고 매만져서 그 정수(精髓)를 캐내는 일이 곧 시인의 시작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시는 문학의 한 갈래이다. '문학'이란 말이 어렵다면 그냥 '글쓰기'라고 생각해도 된다. 글쓰기란 자신의 생각을 글로 나타내는 표현의 한 방법이다. 시도 자신의 생각을 나타내는 글의 한 갈래란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생각을 글로 나타내는 것을 의외로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좋은 생각이 떠올라도 어떻게 글로 나타내야할 지를 모르겠다며 하소연하는 경우를 심심찮게 접하게 된다. 그런 하소연을 들을 때마다, 지금 내게 말하듯이 그냥 글로 옮기면 된다고 일러주면 그게 그렇지 않다면서 공연히 글쓰기를 무슨 대단한 일로 신비화시킨다.
글은 자신의 생각을 문자로 표현하는 것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글쓰기를 어려워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글을 너무 높게 평가하고 있다. 아름다운 글을 써야하고, 의미가 그럴듯한 철학적 주제를 담아야 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글은 아름다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담아내야 한다. 특히 시쓰기를 어려워하는 경우의 대부분은 자신이 무엇을 시 속에서 말하려 했는지 조차 뚜렷하지 않아 자신이 시를 써놓고도 이내 '이게 아닌데……'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내 앞에 펼쳐진 탁 트이고 수평선만 내다보이는 바다를 보았다면 무슨 생각이 맨 먼저 들었을까?
① 넓다/푸르다/ 물결이 진다/ 잔잔하다/ 반짝인다
② 시원하다/ 춥다/ 음산하다/짭조름하다/ 비릿하다
③ 유리 같다/ 거울 같다/ 들판 같다/ 목장 같다/ 호수 같다
④ 소근거린다/ 비밀이 담겨 있다/ 또 하나의 세상이다
등등의 생각이 떠오를 것이다. ①은 최초의 감각이며 시각적이다. '넓고 푸른 물결이 반짝인다'고 쓰면 바다의 모습을 쓴 글이 된다. ②는 느낌을 쓴 것으로 촉각과 미각의 감각이다. '시원한 바람이 비릿하게 코끝을 스쳤다' 고 쓸 수 있다. ③은 눈에 보이는 시각적 현상을 다른 사물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유리처럼 반짝이는 바다'라고 쓰면 바다가 햇살을 받아 유리처럼 매끄럽게 빛나는 모습과 유리의 날카로움이 겹치게 된다.④는 주관적 느낌이다. '바다는 늘 소근거렸다'고 쓸 수 있다.
앞의 예로 든 글쓰기는 모두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쓴 것이다. 여기서 ①과 같이 단순한 시각적 느낌만을 썼다고 해서 질이 낮은 글이 되는 게 아니라 글을 쓰는 사람의 처지와 느낌, 그리고 상황에 따라 느낀 바 그대로 솔직하게 쓰면 된다. 다정한 친구와 여행을 와서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보는 바다는 '귓가에 속삭이는 바다'의 다정함으로 비칠 수도 있다.
엄마한테 꾸지람을 듣고 서러운 마음에 찾아 온 바다는 결코 '거울 같이 반짝이는 바다' 일 수 없다. 즉 자신의 생각이나 상황과 다른 글을 쓰면 글 전체로 보았을 때 어울리지 못하는 구절이 되어 쓰지 않은 것만 못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옷에 단추를 달아야 하는데 단추 대신 값이 나가는 동전을 가져다가 꿰맸다고 어울리는 옷이 될 것인가?
그러나 예외는 있다. 엄마한테 야단을 맞아 슬픈 마음으로 바다를 찾아 왔는데, 바다가 거울같이 반짝이고 있었다고 생각이 되었다면, 분명 다음 구절에는 '나의 슬픈 마음을 바다에 비추어 보며 위로를 받는다'는 상황의 구절이 이어져야 할 것이다. 즉, 일반적 사고와 다른 대비적 상황이 놓여진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계기(이유)가 전제될 수 있어야 시작품의 구조적 필연성이 성립된다. 이유나 상황제시가 없이 돌발적인 대립적 의미는 타당성이 없는 표현이 된다.
우선 글을(시를) 쓸 때는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분명한 자신의 생각을 글로 나타낼 수 있어야 비유도 성립되고 상징도 이루어질 수 있다. 분명한 자신의 생각을 알지 못하고 글을 쓰게되면 글쓰는 흥미도 사라지고 마음에 부담만 되어 오히려 쓰지 않음보다 못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나는 글쓰는 재주가 없는가 보다', '글은 전문적인 시인이나 소설가나 쓰는 건가 보다.' '글은 천부적인 재질이 있어야 하는가 보다.' 등등의 글쓰기 최대의 부정적 상황까지 자신을 내몰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을 비하시킬 필요는 없다.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을 문자언어로 바꾸는 작업은 문맹자가 아니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도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은 생각을 드러내기도 전에 멋을 내거나, 꾸미려 애쓰기 때문이다.
생각이 나타나지 않는 글은 글이라 할 수 없으며, 읽는 이에게 그 내용이 전달되지 않는 '무늬만 글인 것'이 되고 만다. '배가 고프다'고 하면 될 것을 '아름다운 배가 고프다'라든가, '조각달 같은 배가 쪼르르 고프다'고 한다면 본래의 뜻을 나타낼 수 없다. 우선 글이 된 다음에 비유도 상징도 성립된다는 얘기다.
4) 글 속에 생각을 담으려면
자신이 쓰고자 하는 글에 생각을 담으려면 우선 자신과 가족, 그리고 이웃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 국가, 세계까지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세계나 국가, 그리고 사회에 대해 잘 알 수 없다면 잘 알 수 있는 이웃이나 가족, 자신의의 이야기를 써야 한다. 느낌이나 생각한 바가 없는 국가나 사회를 글쓰기의 대상으로 정한다면 결코 잘된 글이 나올 수 없다.
감을 깎고 또 깎고
깎아도 깎아도 줄지 않는 땡감
땡감을 깎아서 곶감이 될 때까지
기다리기 싫어서 그냥 먹는다.
에잇 떫어. 모두 나를 보며 웃고
나도 어이없어 덩달아 웃는다.
정진욱 <곶감> 『함께여는 국어교육』98년 봄호196-197쪽
충북 안내중 이경희 선생님 글 중에서
이 글은 농촌에 사는 아이가 글을 쓰기 전에 선생님과 대화하는 중에 글감을 찾아 쓰게 된 시이다. "집에서는 요즘 뭐하니?" "감 따요. 나락 베요. 고추 따요" "그럼 그걸 써 봐." 이렇게 해서 쓴 자신의 이야기다. 여기에는 생활의 솔직함이 나타나 있다. 수식이나 비유도 없지만 삶이 배어나는 시이다. 압축과 생략, 리듬감이 느껴진다. 시의 요소를 고루 갖췄다. 시가 함축적이라든가, 상징적이라든가 하는 것은 뒤의 이야기다. 자신의 생각을 나타내지도 못한 글에 상징이 성립될 수 없고, 비유라고 해서 제대로 효과를 얻을 수 있겠는가?
'내 생활을 쓰자'는 것은 살아가는 이야기를 쓰자는 것이다. 인문계 고등학생이 학교에서 지내는 생활에는 어떤 게 있을까?
등교하는 버스 안 풍경, 아직 잠이 덜 깬 친구의 모습, 교문을 들어서면서 더욱 무거워지는 책가방, 딱딱한 의자, 선생님들의 다그침, 잃고 싶지 않은 나의 꿈, 길에서 본 여학생, 손 때 묻은 문제집, 교실 창 밖에서 들려오는 뻐꾸기 울음소리, 부모님의 실직 등등. 글감은 무한히 펼쳐진다. 그러나 이러한 글감이 그대로 쓰여지지는 않는다. 이런 글감들에 대해 평소에 얼마나 생각해 봤느냐가 '생활을 잘 안다'와 직결된다. 아무런 생각 없이 등교하는 버스 안 풍경은 그냥 버스 안일 뿐이며, 손 때 묻은 문제집을 매일 매일 접하면서도 그냥 문제집으로만 바라보면 쓸거리가 안 된다. 버스 안이 삶의 현장이며, 문제집은 내 삶의 흔적이라는 깨달음이 있어야 비로소 글이 된다. 글은 소재의 발견(대상에 대한 깨달음)에서 시작된다.
내 이웃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있을 때에야 아버지의 주름진 이마가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엄마의 굵은 손마디가 자식을 길러낸 억센 의지라는 것이 눈에 보이게 된다.
오늘 아침부터 비가 왔다. 옷도 눅눅해지고 기분도 별로였지만 공부는 열심히 했다. 2교시는 수학이었는데 머리가 어지럽고 열도 나고 잠도 왔다. '쉬는 시간에 선생님께 조퇴 맞을까?' 하고 생각했지만 막상 쉬는 시간이 되자 머리에 열도 나지 않고 어지럽지도 않았다. (중략)
아침부터 내린 비
내 맘을 흔든다.
머리가 지끈지끈
잠이 스르르
조퇴나 할까.
수업이 끝나는 종이 치자
씻은 듯이 나았다.(중략)
위의 산문과 시는 박현우 학생의 글이다. 먼저 산문으로 구체적인 생활글을 쓰고, 그걸 다시 시로 옮겼다.( <생활이 곧 국어수업> 충북 안내중 이경희 글 속에서)
여기에서 먼저 산문으로 자신의 생활글을 쓴 것은 자신이 무엇을 쓸 것인가를 확인해보는 기초 단계로서의 한 방법이다. 쓸 내용에 대한 생각은 곧 주제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에 모아진다. 여기서 주제의 선택은 쓰는 이의 주제 의식과 깊은 관련을 가진다. 이 주제 의식은 주제 선택의 가치관이라 할 수 있다.
나도 알고 있다. 행복한 사람만이
인기가 있다. 그런 사람의 말소리를 사람들은
즐겨 듣는다. 그런 사람의 얼굴은 아름답다.
마당의 뒤틀린 나무는
토양의 좋지 않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 나무가 불구라고 욕한다.
하지만 그것은 옳다.
준트 해협의 푸른 보트와 즐거운 요트를
나는 보지 않는다. 내가 보는 것은
어부들의 찢어진 그물 뿐이다.
왜 나는 마흔 살의 소작인 여자가 허리를 구부리고 걷는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는가?
소녀들의 가슴은
예전처럼 뜨거운데.
내 시에 각운을 쓴다면
그것은 내게 거의 오만처럼 보일 것이다.
내 안에서 꽃피는 사과나무에 대한 열정과
칠장이의 연설에 대한 경악이 서로 싸우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 펜을 잡게 하는 것은
두 번째 것뿐이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시에 불리한 시대>
우리는 브레히트의 시에서 가치관을 어디다 두느냐에 따라 시의 주제와 내용이 달라질 수 있음을 읽을 수 있다. 브레히트는 민중의 삶에 관심을 두게 되면서 히틀러의 연설에 경악하고, 아름다운 소녀보다 삶에 지친 소작인 여자의 삶에 관심과 애정을 가지게 되고, 심지어는 시의 형식보다는 내용성에 의미를 둔다. 이러한 외면 받는 삶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곧 사회를 순수하고도 아름다운 삶, 정의로운 세상으로 이끌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가. 생각의 시작과 확장
정원석(정원사)
↑
침묵과 인고의 상징(시인:유치환) 수성암 형성시기(지리학자)
↖ ↗ 바위
↙ ↘
안식처(피곤한 사람) 신의 조화(종교인)
↓
조각품(조각가)
앞의 그림에서 보듯 하나의 '바위'를 바라보는 시각은 너도나도 다르게 마련이다. 이러한 개인적 관점의 차이는 개인의 삶의 태도와 환경, 그리고 자신의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 평범한 생활 속에서 바라보는 '바위'는 그냥 '바윗덩어리'라고 느끼는 게 일반적 모습이며 평범한 생각이다. 그러나 보다 의미 있는 삶을 살려한다면 무의미하게 사물을 바라보기보다는 의미를 담아 느낄 수 있다면 삶의 가치는 달라진다.
내가 자연환경 보호자라면 자연의 신비로, 조각가라면 돌을 깨어 빚어낼 조각품의 원석으로 떠올리게 된다. 유치환 시인처럼 생명의식을 지닌 소유자라면 바위에서 인고의 삶을 끌어낼 수 있으리라.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 년 비정(非情)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유치환 <바위>
유치환의 <바위>는 바위를 통해 허무의 의지를 형상화하고 있다. 즉 바위라는 소재를 통해 시인이 바라본 것은 그의 가치관 속에 내재한 '허무 의지이며 생명 의식'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내면에 흐르는 생각을 구체적인 바위로 형상화시키고 있어, 허무를 극복하고 무한한 생명의식으로 나아가려는 시인의 생각을 쉽게 이해하게 된다.
시는 우선 글이 되어야 한다. 글은 또한 생각이 나타나야 한다. 생각을 글로 나타내는 훈련이 먼저 이루어져야만 시도 쓸 수 있다. 시의 가장 초보적 단계는 짧은 글 속에 자신의 생각을 담아내는 단계다. 그것이 음악성을 지니든, 구체적 이미지를 가지든 하는 문제는 다음 단계다. 성급하게 음악성, 시어의 상징성을 이미지를 떠올리고 시를 쓰게 되면 자신의 생각마저도 드러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게 된다.
흔히 시를 '표현'이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표현이라는 의미는 말하지 않고 드러낸다는 시법이다. 이미지화라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미지 속에 의미를 담지 못한다면 그것은 한갓 언어유희에 지나지 않게 된다.
다음의 시들은 이오덕 선생님이 글쓰기 회원들과 엮은 책 창비아동문고 『나도 쓸모 있을걸』 중에서 뽑은 아동시다. 아이들의 체험과 삶의 냄새가 그대로 배어 있으며, 꾸밈이 없어 절로 미소를 짓게 한다. 초등학교 저학년 어린이에서 고학년으로 올라가면서 추상적 개념을 구체화시키는 모습으로 발전하고 있어 좋은 보기글이 되고 있다.
하나의 시상을 확대 심화시킨다는 것은 쓰는 이의 인생관과 경험 정도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아래의 초등학교 학생들은 하나의 시상이 하나의 체험에서 왔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나도 쓸모가 있을 걸>에서는 자신의 태어남에 대한 의미 부여에서 앞으로의 희망과 의지로 확장되고 있으며, <내복 장사 굶어 죽겠네>에서는 아버지의 내복에서 내복 장수로 확대되어 있다. 단일한 시상에 국한되는 초등학교 저학년의 시는 짧고 내용이 분명하다. 한편 고학년의 경우에는 시상의 확장이 이루어지면서 길어지게 된다. 이러한 시상의 확장은 삶의 경험 폭이 넓어지고 깊어지면서 일반 성인시로 쓰여지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청소년의 시는 어떠한 단계에서 쓰여져야 할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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