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 눈꽃 (외 6편)
범대순
저것을 어떻게 한다냐
다만 하얀 것 위에 하얀 것
역사도 전쟁도 파묻어 버린
백 년 같은 저 작은 별들을 어떻게 한다냐
꽃 위에 또 사랑같이
찢어질 듯 휘어진 가지가지
말고는 있어도 다 아닌
저 하얀 사상을 어떻게 한다냐
바람결이 조금만 있어도 쏟아질 듯
쏟아지면 산이 무너질 듯
아슬아슬 가슴이 두근거리는
만유위험萬有危險의 법칙이여
사람은 없다
푸른 하늘보다 더 푸른
저 순수한 겨울을 두고
다시 도시로 가야 하는 미운 마음이여
무등산 백마능선
푸른 하늘을 달리면서
흰 갈기가 천리 같다
보고 있으면 손에 잡힐 듯
동으로 서로 날리는 자유
큰 허공에 꿈
무지개 또 무지갯빛의 어지러움
가을 중봉에서 바라보는
석양 백마능선
장불재에서 안양산까지
길고 큰 사상思想을
타지 못하고 하산하자니
눈물과 같이 한이 남는다
아름다움은 절망
백마이면서 젊음이었다
새인봉
흰 구름도 푸른 하늘도 여기
긴 가난도 슬픔도 여기 있으면
어머니같이 흙 묻은 가슴이구나
무등산 새인봉에선
산새도 바위도 조선말로만 논다
전라도 사투리같이 모음 자음이 따로 없다
북으로 남으로 나의 행장은 바람 든 날개같이
꽃피다 말고 내리는 우박같이
늘 갈린 소리가 났었다
돌아와 여기 춘하추동에 서면
오랜 미움도 아픔도 다 그리움
아프리카도 히말라야도 모두 다 같이 있구나
—시집『무등산』(2013)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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黑人鼓手 루이의 북
당신은 아틀라스
검은 손이 불꽃처럼 밝다
처음에는 창조의 숨결
들릴 듯 들릴 듯 아쉽더니
이윽고 무수한 소나기와 상록(常綠)
화려한 전쟁이 몰리고 또 지고
그리하여 파도와 쫓기는 밀림의 불빛
붉은 비명과 검은 분(憤)이 목을 놓던
저렇게 우는 것인가 생각한다
—사랑한다든지 이렇게 산다든지 하는 것은
한낱 부끄러운 메아리
바위를 밀고 그 밑에 깔리고 발목이 쌓이고 한데
아아 나는 앉은 자리 그 발이 가려운 아프리카 어느
부족한 영양(營養)
오랫동안 여위고 절던 나의 눈이
지금 저 동자(瞳子) 속에 사는 뜻은 무엇인가
불도오자
다이너마이트 폭발의 5월 아침은 쾌청
아카시아 꽃향기 그 미풍의 언덕 아래
황소 한 마리 입장식이 투우사보다 오만하다
처음에는 여왕처럼 조심스레 주위를 살피다가
스스로 울린 청명한 나팔에 기구는 비둘기
꼬리 쳐들고 뿔을 세우면 홍수처럼 신음이 밀려
이윽고 바위 돌뚝이 무너지고
그것은 희열
사뭇 미친 폭포 같은 것
짐승소리 지르며 목이고 가슴이고 물려 뜯긴 신부의 남쪽
그 뜨거운 나라 사내의 이빨 같은 것
그리하여 슬그머니 두어 발 물러서며 뿔을 고쳐 세움은
또 적이 스스로 무너짐을 기다리는 지혜의 자세이라
파도 같은 것이여
바다 아득한 바위 산 휩쓸고 부서지고 또 부서지며
봄가을 여름 내내 파도 같은 것이여
불도오자
정오 되어사 한판 호탕히 웃으며 멈춰 선 휴식 속에
진정 검은 대륙의 그 발목은 화롯불처럼 더우리라
다이너마이트 폭발의 숲으로 하여 하늘은 환희가 자욱한데
내 오래도록 너를 사랑하여 이렇게 서서 있음은
어느 화사한 마을 너와 더불어 찬란한 화원
찔려서 또 기쁜 장미의 무성을 꿈꾸고 있음이여
—시집 『黑人 鼓手 루이의 북』(1965)에 수록
나는 디오니소스의 거시기다
나는 디오니소스의 거시기다.
나는 뿔 달린 디오니소스의 거시기다.
나는 머리카락이 춤추는 디오니소스의 거시기다.
나는 털이 늘 파안대소로 일어서는 디오니소스의 거시기다.
나는 부글부글 용소같이 속이 미친 디오니소스의 거시기다.
나는 대낮에 청천하늘을 나는 용 같은 디오니소스의 거시기다.
나는 맨발로 사하라사막의 밤낮을 가는 디오니소스의 거시기다.
나는 물구나무로 히말라야를 올라가는 디오니소스의 거시기다.
나는 주렁주렁 사람을 차고 다니는 디오니소스의 거시기다.
나는 때로는 등대의 거시기 때로는 구름 너머 꿈인 날개의 거시기
나는 바다의 끝에 닿는 하늘의 거시기 천둥의 거시기 벼락의 거시기
적도를 가르는 화산의 거시기 안에서 살아있는 극점 빙하의 거시기
태양을 향하여 짓는 잡초의 거시기 블랙홀을 찾아가는 짐승의 거시기
아 늪에서 헤맨 거시기가 아닌 땅 위에 올라온 두더지의 거시기가 아닌
나는 절대를 위하여 절대로 존재하는 절대의 거시기 아 거시기의 거시기.
—시집『나는 디오니소스의 거시氣다』(2005)에 수록
위대하지 않은 조국은 조국이 아니다
위대하지 않은 시간은 시간이 아니다
위대하지 않은 역사가 역사가 아니듯
위대하지 않은 강산은 강산이 아니다
위대하지 않은 조국이 조국이 아니듯
위대하지 않은 가슴은 가슴이 아니다
위대하지 않은 어머니가 어머니가 아니듯
위대하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위대하지 않은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니듯
위대하지 않은 바다 위대하지 않은 화산
위대하지 않은 무지개 위대하지 않은 흙
위대하지 않은 고난 위대하지 않은 절망
위대하지 않은 태양 위대하지 않은 세계
시간이여 역사여 강산이여 조국이여
가슴이여 어머니여 사랑이여 하나님이여
태양이여 세계여 고난이여 절망이여
위대하지 않은 조국은 조국이 아니다
—시집『산하山下』(2010)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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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대순(1930~2014) / 전남 광주 출생. 고려대 영문과 및 같은 대학원 수학. 데니슨대학, 케임브리지대학 등에서 영문학 연구. 1965년 시집 『흑인 고수 루이의 북』으로 등단. 『무등산』은 열네 번째 시집. 시론집, 에세이집 등 저서 27권. 1997년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전남대학교 영문과 교수 역임.
황지우의「똥개의 아름다운 갈색 눈동자」감상 / 이상국
똥개의 아름다운 갈색 눈동자
황지우
아침에 집을 나서는데 골목 어귀에서 우연히, 똥개 한 마리와 눈이 마주쳤다. 그 똥개의 눈이 하두 맑고 슬퍼서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그놈을 눈깔이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아 그랬더니 그놈도 고개를 갸우뚱하고 나를, 눈깔이 뚫어져라 바라본다. 우리나라 봄하늘 같이 보도랍고 묽은, 똥개의 그 천진난만-천진무후한 角膜→水晶體→網膜 속에, 노란 봉투 하나 들고 서 있는, LONDON FOG表 ポリエステル 100% 바바리 차림의, 나의 全身이, 나의 全貌가, 나의 全生涯가 들어가 있다. 그 똥개의 角膜→水晶體→網膜 속의, 나의 이 全身, 이 全貌, 이 全生涯의 바깥, 어디선가, 언젠가 우리가 꼭 한 번 만났었던 생각도 들고, 그렇지 않았던 것도 같고 긴가민가 하는데 그 똥개, 쓰레기통 뒤지러 가고 나, 버스 타러 핑 가고, 전봇대에 ←田氏喪家, 시온 장의사, 전화 999-1984.
—시집『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198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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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는 이런 일이 있다. 늘 보던 개이지만, 우연히 눈이 딱 마주쳐 잠깐 서로를 깊이 들여다보는 때. 개의 눈 속에 각막과 수정체와 망막이 맑은 원을 그리며 중심으로 들어간다. 그 중심에는 봉투를 들고 바바리를 입은 내 전신이 들어가 있다. 내 각막과 수정체와 망막의 파문에는 개 한 마리가 들어앉아 있으리라. 응시(凝視)는, 가만히 생각해보면 놀랍고 신비하다. 한 생애를 서로의 눈 속에 넣고 바라보는 일. 서로의 전모를 들키는 일. 개와 사람이 서로에게 이토록 유일한 대상으로 얽혀드니, 생의 바깥에서 우리가 만난 것 같기도 하다는, 인연설(因緣說)이 감돈다. 하지만 잠깐일 뿐, 미묘한 기억 따윈 훅 하니 사라지고 개는 개의 길로 나는 나의 길로 간다. 이런 겉도는 생을 살다가, 전봇대에 붙은 상가(喪家)의 주인공이 되어 사라질 것이다. 똥개는 내게 무엇이었나. 그 짧고 특별한 사랑은 내게 무엇이었나.
이상국 (시인)
* 옮긴이의 사소한 생각
황지우의 시에서 ‘보드랍고’를 부러 사투리 ‘보도랍고’로 쓴 건 시적허용으로 얼마든지 양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無垢(무구)를 한글로 ‘무후’라고 쓴다거나 ‘LONDON FOG表’라고 쓴 대목에서는 시인이 명문고를 나오고 명문대 비록 커트라인이 가장 낮은 미학과 출신이라도 그렇지, 無垢를 ‘무후’로, ‘~(商)標’의 한자를 터무니없는 ‘表’로 쓴 것 등에서는 국어실력이 충분히 의심스럽습니다. 전두환의 全씨를 검열에서 벗어나기 위해 ‘田'씨로 바꿔 쓴 고충이야 십분 헤아립니다만.
천재적인 시인이, 아니 어쩌면 나같이 알량한 국어선생 따위를 놀리기 위해 장난을 쳤는지도 모릅니다(하지만 버젓이 책으로 내는 시집에 장난을 친다?). 敗北를 ‘패북’, 復活을 ‘복활’, 十方世界를 ‘십방세계’, 金南祚를 ‘김남작’이라 큰소리로 읽으며 좋아라 하는 우리 선후배 또래들의 위악적인 장난으로 볼까도 싶습니다. 그럴까요, 그런데 왠지 아닐 것 같은 느낌에 ‘껄쩍지근한’ 뒷맛이 영 개운치 않습니다. 저런 이야기를 본인들이 알게 될 땐 마치 정확한 발음이나 바른 표기를, 모국어를 구사하는 시인으로서 마땅히 시정하려 들기보다는 대뜸 "아, 우리나라 국어가 제일 어려워."라고 절레절레 고갤 흔들며 그런 일은 국어 선생들의 전유물로 내팽개치려는 기색을 많이 봅니다.
군말- "런던포그표 포리에스데루 백 퍼센트 바바리 차림의 나의 전신이, 나의 전모가"라고 모두 다 한글로 써도 좋을 것인데 굳이 영문과 한자와 일문과 아라비아숫자며 수식 기호까지 비빔밥으로 뒤섞어 표기한 건 '열려 있는' 정신의 소유자로서의 코스모폴리탄을 과시하려는 제스처인 듯. 그리고 이런 사소하고 너절한 것을 시시콜콜 따지는 당신(독자)은 필시 '똥개'일 거라고 야유하려는 저의인 듯. (翰)
황지우의 '똥개의 아름다운 갈색 눈동자' (1984년작)는 그 해에 출간된 시집에 수록된 시.
공광규의 「욕심」해설 / 권순진
욕심
공광규
뒤꼍 대추나무
약한 바람에 허리가 뚝 꺾였다
사람들이 지나며 아깝다고 혀를 찼다
가지에 벌레 먹은 자국이 있었나?
과거에 남모를 깊은 상처가 있었나?
아니면 바람이 너무 드샜나?
그러나 나무 허리에선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다만 너무 많은 열매를
나무는 달고 있었다.
—시집『지독한 불륜』(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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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과수는 열매를 솎아주지 않으면 과실이 작아질 뿐 아니라 이듬해 해거리를 하게 되는 원인이 되므로 반드시 솎아 주어야 한다. 이 대추나무도 가지치기를 소홀히 한 탓에 열매를 너무 많이 달고 있어 가지가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꺾였다. 이런저런 다른 이유를 먼저 찾아봤지만 결국은 욕심 때문임을 알았다.
톨스토이의 우화에 한 가난한 농부 얘기가 있다. 이 농부는 평소 귀족들처럼 넓은 땅을 갖고 싶은 욕망에 넘쳤는데 어느 날 한 귀족으로부터 제의를 받는다. “여보게 파콤, 내가 그 소원을 풀어주지. 자네 마음대로 하루 동안 달리면 그 만큼의 땅을 자네에게 주겠네.” 다음 날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신이 나서 죽기 살기로 넓은 들판을 달렸다. 한 발을 내디딜 때마다 그게 자기 땅이라니. 마침내 그는 엄청난 거리를 달린 뒤 출발점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숨을 헐떡이며 되돌아오자 곧 지쳐 쓰러져 죽고 만다. 결국 하루 종일 자기의 땅을 위해 달렸지만 그에게 필요했던 땅은 스스로 묻혀야 할 2평의 땅 뿐이었다.
욕심이 일을 그르치고 화를 부른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한 사막에 조그만 오두막집을 짓고 사는 노인이 있었다. 그곳은 맑은 샘물과 우거진 야자수가 있는 명당이었다. 노인은 나그네들에게 시원한 샘물을 퍼주며 기쁨과 보람을 느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나그네들은 물을 얻어먹고 노인에게 몇 푼의 동전을 건넸다. 노인은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금고에 동전이 쌓여가면서 욕심이 생겼다. 노인은 돈을 모으는 것에 몰입했다. 그리고 샘물을 철저하게 관리하기 시작하여 한 잔에 일정금액을 받았다. 어느 날 노인은 샘물이 점점 줄어들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잎이 무성한 야자수가 샘물을 빨아들인다고 생각하고 야자수를 몽땅 잘랐다. 결국 샘물은 말라버렸다. 야자수가 만들어 낸 그늘도 없어졌다. 그 뒤 아무도 노인의 오두막집을 찾지 않았다. 노인은 뜨거운 햇볕을 견디지 못한 채 죽고 말았다.
끝이 없는 게 인간의 욕심이라지만 이치에 맞지 않는 지나친 욕심은 자신뿐 아니라 이웃을 곤경에 빠뜨릴 수 있다. 욕심은 불만을 낳고 불만은 불행을 지름길로 안내한다. 어느 땐 희망이니 꿈조차도 욕심의 불쏘시개가 될 때가 있다. 엄밀히 말하면 누구라도 욕심 없는 삶을 지탱하기란 불가능하다. 문제는 늘 분수를 넘은 과욕이며 인본을 벗어난 욕심에 있었다. 남이야 어찌되든 설사 남이 죽어가는 것을 목격하더라도 나만 득이면 된다는 자기중심적 이기주의에 몰입하고 집착한 결과로 빚어진 숱한 사건 사고들을 지금껏 얼마나 보아왔던가. 우리사회에 깊숙이 뿌리 내린 천민자본주의의 실상이다. 괴테는 "진정한 행복은 절제에서 솟아난다."고 했다. 이때 절제는 억제가 아니라 선량한 양심의 자유요, 축복의 관문인 것이다.
권순진(시인)
이장욱의 「소규모 인생 계획」해설 / 권순진
소규모 인생 계획
이장욱
식빵가루를
비둘기처럼 찍어먹고
소규모로 살아갔다.
크리스마스에도 우리는 간신히 팔짱을 끼고
봄에는 조금씩 선량해지고
낙엽이 지면
생명보험을 해지했다.
내일이 사라지자
어제가 황홀해졌다.
친구들은 하나 둘 의리가 없어지고
밤에 전화하지 않았다.
먼 곳에서 포성이 울렸지만
남극에는 펭귄이
북극에는 북극곰이
그리고 지금 거리를 질주하는 사이렌의 저편에서도
아기들은 부드럽게 태어났다.
우리는 위대한 자들을 혐오하느라
외롭지도 않았네.
우리는 하루종일
펭귄의 식량을 축내고
북극곰의 꿈을 생산했다.
우리의 인생이 간소해지자
이스트를 가득 넣은 빵처럼
도시가 부풀어올랐다.
—시집『생년월일』(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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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all is beautiful」‘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영국 주류경제학의 못마땅함에 맞섰던 E. F. 슈마허가 성장지상주의에 대한 성찰과 반성의 근거를 제공하고 그 대안을 모색한 대표적 경제학 저서의 제목이다. 그는 경제학을 위한 경제학의 상투성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안하지 못하고 철저히 외면했다면서 상식에 근거한 실천적 경제학으로 인간답게 살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이를테면 지치지 않는 자연개발은 고갈을 초래할 것이고, 끊임없이 공급되는 양적 생산은 머지않아 인간을 자본의 노예로 전락시킬 것이라고 이미 반세기전에 예언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더 편리하고 재바른 개발만이 인간의 삶을 질적으로 향상시켜줄 것이라 믿기 때문에 지난 4대강사업의 폐해를 지금 확인하듯이 환경오염의 위험에 늘 노출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또한 그 개발은 도시와 농촌의 균형발전과는 거리가 멀기에 빈부의 차는 갈수록 커진다. 대량생산은 인간의 풍요를 가져다주어야 마땅한데 이 무슨 딜레마인가. 결국 대량 생산과 소비로 인간이 품위 있게 살아가는 것과는 점점 멀어지고, 인간을 소외시키며 그 삶의 터전마저 앗아가 버릴 수 있다고 그는 기존 경제학의 모순을 지적했다.
이장욱의 ‘소규모 인생 계획’이 제시하는 '방안'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자면, 꼭 필요한 만큼 개발하고 인간이 요구하는 한도에서 개척하는 것이 오히려 더 풍성하고 자유롭고 아름다울 것이란 불교경제학의 내용과도 닮아 있다. ‘먼 곳에서 포성이 울렸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자연은 제 할 도리를 다하고 있다. ‘남극에는 펭귄이 북극에는 북극곰이 그리고 지금 거리를 질주하는 사이렌의 저편에서도 아기들은 부드럽게 태어났다.’ 그래서 ‘내일이 사라지자 모레가 황홀해졌다’는 말은 ‘부드럽게 태어난’ ‘아기’들의 먼 미래를 생각하는 휴머니스트다운 발상으로도 이해된다.
작금의 우리는 크다고 무조건 좋은 세상을 살고 있지는 않다. 과거 ‘큰’것에 약하고 오므라들었던 ‘사이즈 콤플렉스’경향은 웬만큼 벗었다. 그동안 ‘우리는 위대한 자들을 혐오하느라 외롭지도’않았으며, 거시적 사회에 충분히 지쳐있었다. 그러나 '친구들은 하나 둘 의리가 없어지고 밤에 전화하지 않'는 제팔 제 흔들기 식의 이기가 파다한 이 현실이 작은 게 아름다운 세상의 온전한 도래를 예고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우의 신포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자발적 가난'으로 까지 비쳐지는 축소지향의 간략한 생도 ‘아주 작은 비석’처럼 군데군데 지펴지고 있음을 본다.
권순진(시인)
허형만의 「뒷굽」감상 / 김광규
뒷굽
허형만(1945~ )
구두 뒷굽이 닳아 그믐달처럼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수선집 주인이 뒷굽을 뜯어내며
참 오래도 신으셨네요 하는 말이
참 오래도 사시네요 하는 말로 들렸다가
참 오래도 기울어지셨네요 하는 말로 바뀌어 들렸다
수선집 주인이 좌빨이네요 할까봐 겁났고
우빨이네요 할까봐 더 겁났다
구두 뒷굽을 새로 갈 때마다 나는
돌고 도는 지구의 모퉁이만 밟고 살아가는 게 아닌지
순수의 영혼이 한쪽으로만 쏠리고 있는 건 아닌지
한사코 한쪽으로만 비스듬히 닳아 기울어가는
그 이유가 그지없이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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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족을 한 중국 여인처럼 조촘조촘 걷는 친구가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구두 뒷굽이 똑바로 닳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걷는다는 것이다. 정말로 그의 구두 뒷굽은 새 구두처럼 양쪽이 수평으로 마모되고 있었다. 옛날 신병 훈련소에서 지급된 군화가 크거나 작더라도 발을 거기에 맞추라고 윽박지르던 생각이 나서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요즘 브랜드 구두 가운데는 관절 부하를 줄이기 위해서 뒷굽 바깥쪽을 아예 비스듬히 닳아버린 각도로 제작한 것도 있다. 뒷굽의 어느 쪽이 어떻게 닳아버리든 간에, 그 모양보다는 구두의 주인이 걷기 편해야 하지 않을까.
김광규(시인)
김기택의 「커다란 나무」감상 / 황인숙
커다란 나무
김기택(1957∼ )
나뭇가지들이 갈라진다
몸통에서 올라오는 살을 찢으며 갈라진다
갈라진 자리에서 구불구불 기어 나오며 갈라진다
이글이글 불꽃 모양으로 휘어지며 갈라진다
나무 위에 자라는 또 다른 나무처럼 갈라진다
팔다리처럼 손가락 발가락처럼
태어나기 이전부터 이미 갈라져 있었다는 듯 갈라진다
태곳적부터 갈라져 있는 길을
거역할 수 없도록 제 몸에 깊이 새겨져 있는 길을
헤아릴 수도 없이 가보아서 눈 감고도 알 수 있는 길을
담담하게 걸어가듯이 갈라진다
제 몸통에서 빠져나가는 수많은 구멍들이
다 제 길이라는 듯 갈라진다
갈라지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는 듯
조금 전에 갈라지고 나서 다시 갈라진다
다시 갈라진다 다시 갈라진다 다시 갈라진다
다시다시다시 갈라진다
갈기갈기 찢어지듯 갈라진다
뱀의 혀처럼 날름거리며 쉬지 않고 갈라진다
점점 가늘어지는데도 갈라진다
점점 뒤틀리는데도 갈라진다
갈라진 힘들이 모인 한 그루 커다란 식물성 불이
둥글게 타오른다 제 몸 안에 난 수많은 불길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맹렬하게 갈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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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무는 백양나무나 메타세쿼이아처럼 몸통이 곧고 훤칠한 나무는 아닌 듯하다. 느릅나무일까. 사람의 눈이 쉬이 닿는 높이부터 가지가 갈라져 나오고, 그 가지에서 또 가지가 갈라져 나오고, 거기서 ‘맹렬하게 갈라지고’ 있는 잔가지로 우듬지를 이루는 나무. 나뭇가지들이 세세히 보이니 아직 나뭇잎 무성한 계절은 아니리라. 화자는 유난히 가지 많은 한 그루 커다란 나무에서 맹렬한 생식력을 보고, 징그러움과 동시에 경탄을 느낀다. 나뭇가지가 ‘몸통에서 올라오는 살을 찢으며’ 갈라진단다. 과연 무통분만인 듯한 식물의 생식도 동물 새끼가 어미 몸을 찢으며 태어나는 것처럼 폭력적일 수 있겠다. 화자는 ‘갈라진다 갈라진다’고 강박적으로 반복한다. 점점 빠르게, 점점 세게! ‘이글이글 불꽃 모양으로 휘어지며 갈라지는’ 나무의 몸속에서, 고조되는 생명력에 휩쓸려 화자는 거의 환각에 빠진 듯하다. 그러나 ‘점점 뒤틀리는데도’ 갈라지는 나무나 화자나 쓰러지지 않는다. 뿌리가 굳건하기에. ‘제 몸 안에 난 수많은 불길을/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은 김기택 시를 읽을 때면 감지되는 그의 치열한 시 정신이기도 하다. 잔가지 빽빽한 그 나무, 이제 깊은 녹음(綠陰) 드리우리라.
황인숙 (시인)
길상호의「응시」감상 / 권서각
응시
길상호(1973~ )
빨랫줄의 명태는
배를 활짝 열어둔 채
아직 가시 사이에 박혀있는 허기마저
말려내고 있었네
꾸덕꾸덕해진 눈동자를
바람이 쌀쌀한 혀로 핥고 갈 때도
결코 흔들리지 않았네
꼬리지느러미에서 자라난 고드름
맥박처럼 똑.똑.똑.
굳은 몸을 떠나가고 있었네
마루 위의 누런 고양이
한 나절 미동도 없이
자리를 지켰네
빨랫줄을 올려다보는 동안
고양이는 촉촉한 눈동자만 남았네
허기를 버린 눈과 허기진 눈이
서로를 응시하고 있는
참 비린 한낮이었네
—《한국동서문학》 2014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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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시가 읽히지 않는 시대다. 물론 다양한 매체의 발달로 인해 활자매체가 위축된 탓도 있겠지만 시가 전문화되어 시인들만의 시가 된 탓도 없지 않다. 아무리 심오한 시라도 시를 읽는 재미는 있어야 한다. 길상호 시인은 우리말의 맛을 살려 시를 읽는 재미를 느끼게 하는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절에 공부하러 간 적이 있는데 먹을거리로 싸가지고 간 멸치 대가리가 법당에 떨어져서 부처님을 보고 있었다. 그때의 민망함을 떠올리게 하는 시다. 허기를 잊어버리고 빨랫줄에 매달린 명태의 눈과 생선을 좋아하는 허기진 고양이의 눈이 서로 응시하는 순간을 포착한, 재미있고 맛깔스러운 시다.
권서각 (시인)
[에세이 사물 사전] 김행숙 - 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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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사물 사전] 베개 ⓒ이현경 |
여행 중에 마주치게 되는 ‘낯선 것’들은 대개 여행의 매혹이나 선물처럼 여겨지지만, ‘낯선 베개’에 관해서라면 사람마다 그 속사정이 다를 것이다. 내게 그것은 여행의 여정에 따라붙는 괴로움에 속한다. 성서의 인물 야곱은 황야에서 쫓기는 몸을 숨기면서 돌베개를 베고 잠들었다가 꿈에 천국의 계단을 보고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지만, 만약 내가 실제로 ‘돌’이라도 베개로 삼아야만 하는 상황에 맞닥뜨린다면 그건 그 자체로 악몽인 끔찍한 밤일 뿐이다.
불면증을 호소하며 “매일 밤 나는 투쟁한다”고 썼던 카프카는 그의 특별한 ‘문학적인’ 머리를 매일 밤 어떤 베개 위에다 누이고 거친 파도처럼 뒤척였을까. 1911년 10월 2일의 일기가 전해주는 카프카의 침상의 정황은 “잠 없는 밤. 사흘째나 이어지는 중이다. 잠이 쉽게 들지만, 한 시간 후쯤, 마치 머리를 잘못된 구멍에 갖다 뉜 것처럼 잠이 깨버린다”. 불면의 시간은 그 무게가 6~8킬로그램쯤 되는 ‘머리’의 존재감을 새삼스럽게 환기시킨다. 불면은 ‘머리’를 갖다 뉜 장소를 ‘잘못된 구멍’, 꿈에게 보내는 편지 봉투에 잘못 적은 주소인 양 만들어버린다. 베개는 잠들고 싶은 머리를 위해 고안된 단순한 물품이라기보다는, 머리가 잠의 문을 찾는 장소다. 그러므로 잠을 찾지 못한 이들은 잘못된 주소를 고쳐 적듯이 다시, 다시 하염없이 베개를 고쳐 베야 하는 것이다. 카프카에게 잠과 불면 사이에 있는 ‘침대’와 ‘소파’가 문학적인 장소였다면, 밤새도록 부단히 그 모양과 방향을 바꾸었을 ‘베개’는 확고한 고정점을 찾지 못해서 늘 흔들리고 떨리는 문학적인 나침반 같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어젯밤에 이어 오늘 밤에도 잠 못 이뤄 뒤척이는 사람들이라면 아무래도 베개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과민할 확률이 높다. 요사이 부쩍 늙으신 아버지가 불면의 고충을 토로한 일이 얼마 전에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내 여동생은 민간요법이라면서 양파를 썰어 말려서 베갯속으로 사용해보라는 처방을 내놓았다. 말은 안 했지만 그녀도 불면의 밤을 잠재우려고 이런저런 궁리를 해보았던 것이다.
‘베개 방랑자’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시중에 좋다는 베개는 수집하듯이 사서 이것저것 다 사용해보지만, 어느 베개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하룻밤 사이에도 그가 바꾸어 베는 베개 종류가 다섯 손가락으론 다 꼽지 못할 지경이니, 침상 주변이 다양한 베개들로 꽤나 어지러울 것이다. 내가 베개에 대해 더욱 예민해지게 된 것은 한동안 시달렸던 목의 통증 때문이었다. 목에 대해 신경을 많이 쓰다 보니까 자연히 베개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그러다 보니 어느 결에 나도 ‘베개 방랑자’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던 것이다. 치아 교정을 하듯이 자신에게 맞는 최적의 베개를 찾아서 ‘탐구하고 실험하는’ 기분으로 쇼핑을 하곤 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어쨌든 나는 한 개의 베개에 정착을 하긴 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베개에 대한 이야기에 솔깃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베개라는 사물을 탐구한다는 것은 인간을 탐구하는 일이기도 하다. 인간에게 잠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몸을 가장 편안하게 만드는 방법은 무엇인가. 서 있고, 앉아 있고, 누워 있는 인간의 신체 자세가 지구상에 어떤 사물들을 생성케 했는가. 가령 인간이 돌고래처럼 생겼다면 베개는 지구 상에 존재하지 않는 물건일 것이다.
베개에 눕히는 머리의 모양과 무게, 목의 굴곡 따위를 가늠하다 보면, 인간의 몸이 참으로 기이하게 생겼다는 걸 문득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이런 발견은 인간의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돌고래의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게 낯설어질 때, 나는 서서히 인간으로부터 멀어지면서 미지의 세계인 잠에 빠지려고 하는 것 같다. 이제 곧 머리도 목도 잃어버린 듯이 잠이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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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행숙(시인) |
김행숙199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사춘기》, 《이별의 능력》, 《타인의 의미》, 산문집 《에로스와 아우라》 등이 있다. 노작문학상을 수상했다. _ 한겨레 문학웹진 <한판> 2014.0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