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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에세이 /강인한

법정 2013. 8. 24. 05:27

 

이윤학의 「개 같은 삶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하여」해설 / 권순진

 

 

개 같은 삶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하여


   이윤학

 

 

점심 무렵,

쇠줄을 끌고나온 개가 곁눈질로 걸어간다.

얼마나 단내 나게 뛰어왔는지

힘이 빠지고 풀이 죽은 개

더러운 꼬랑지로 똥짜바리를 가린 개

벌건 눈으로 도로 쪽을 곁눈질로 걸어간다.

도로 쪽에는 골목길이 나오지 않는다.

쇠줄은 사려지지 않는다.

무심코 지나치는 차가 일으키는

바람에 밀려가듯 개가 걸어간다.

늘어진 젖무덤 불어터진 젖꼭지

쇠줄을 끌고 걸어가는 어미 개

도로 쪽에 붙어 머리를 숙이고

입을 다물고 곁눈질을 멈추지 않는다.

하염없이 꽃가루가 날린다.

 


               - 시집『너는 어디에도 없고 언제나 있다』(문학과지성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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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의 제목은 발레리의 '제쳐놓은 노래'에서 인용되었다. 발레리는 스무 살에 이미 빼어난 시를 발표했으나 20년간 시를 놓아버리고 침묵했다. 지중해가 바라보이는 곳에 머물며 그는 혼자서 오랜 기간 산책만 했다. 첫사랑에 실패한 것도 큰 이유였다. 그는 그곳에서 홀로 고독과 적막에 잠겨 의식의 끝까지 가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가 꿈꾼 것은 의식의 명료함이었다. 언어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한 마지막 수단일 뿐 언어에 기대어 삶을 해석하려는 짓은 멍청하고 어리석다고 생각했고 시도 마찬가지였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폴 발레리의 말이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기획하고 연출하는 필연으로 이끌지 않으면, 파도에 속절없이 나뒹구는 바닷가 돌멩이처럼 우연에 이리저리 휘둘리든가 쇠줄에 끌려나온 개와 다름없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발레리는 ‘개 같은 팔자로 더 이상 되돌아가지 않는’ 방법으로 이런저런 궁리 끝에 ‘어디로 가지? 끝장내러 간다. 무얼 할 것인가? 죽음’이라고 했다. 그 대목에서 꼭 10년 전 이맘때 스스로 죽은 한 친구와 그가 남긴 메모가 퍼뜩 스쳐지나간다.  

    그러나 폴 발레리는 죽지 않았다. 「해변의 묘지」에서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고 했다. 살면서 누구나 ‘더러운 꼬랑지로 똥짜바리를 가린 개’ 같은 인생일 때가 있다. ‘벌건 눈으로 도로 쪽을 곁눈질로 걸어’가는 꼬락서니로 보일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멸감과 수모를 견뎌내면서도 살아야할 분명한 이유가 있다면 살아야 한다. ‘늘어진 젖무덤 불어터진 젖꼭지’도 그 중 하나다. 타자에 의한 예속뿐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불편한 삶조차 상처 속에 맺힌 막연한 열매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걸 다른 이름으로 ‘희망’이라고도 하지만 너무나 진부하고 헐겁지 않은가. 차라리 꽃가루 바람에 날리는 길을 하염없이 축복인 양 걸어가는 것은 어떠한가. 

  

  권순진(시인)

 

 

제쳐놓은 노래/ 발레리

 

 

무얼 하니? 뭐든지 조금씩
넌 무슨 재능이 있지? 몰라,
예측, 시도,
힘과 혐오......
넌 무슨 재능이 있지? 몰라......
무얼 바라니? 아무런 것도, 그러나 전부를

무얼 아니? 권태를,
무얼 할 수 있지? 꿈꾸는 걸
매일 낮을 밤으로 바꿀려고 꿈꾸는 걸.
무얼 알지? 꿈꿀 줄을,
권태를 갈아 치우려고.

무얼 바라지? 내 행복을.
무얼 할 생각이지? 앎,
예측, 능력을 얻을 작정이야,
아무짝에도 쓸모 없지만.
무얼 겁내니? 의욕을
넌 누구니? 아무 것도 아니야!

어디로 가니? 죽음으로
어떤 조치가 있겠는가? 그만두기,
개 같은 팔자로
더 이상 되돌아가지 않기
어디로 가니? 끝장내러 간다
무얼 할 것인가? 죽음. 

                          _ 김현 옮김

 

김소연의 「너의 눈」감상 / 안상학

 

 

 

너의 눈

 

 

   김소연

 

 

 

 

네 시선이 닿은 곳은 지금 허공이다

길을 걷다 깊은 생각에 잠겨 집 앞을 지나쳐 가버리듯

나를 바라보다가, 나를 꿰뚫고, 나를 지나쳐서

내 너머를 너는 본다

한 뼘 거리에서 마주보고 있어도

너의 시선은 항상 지나치게 멀다

 

 

그래서 나는

내 앞의 너를 보고 있으면서도

내 뒤를 느끼느라 하염이 없다

 

 

뒷자리에 남기고 떠나온 세월이

달빛을 받은 배꽃처럼

하얗게 발광하고 있다

 

 

내가 들어 있는 너의 눈에

나는 걸어 들어간다

 

 

그 안에서 다시 태어나 보리라

꽃 피고 꽃 지는 시끄러운 소리들을

더 이상 듣지 않고 숨어 살아보리라

 

 

 

 

                -시집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민음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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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연명이 「飮酒」라는 시에서 그랬던가. 마음이 멀어지면 사는 곳도 절로 외지게 된다(心遠地自偏)고. 자동차 소리가 요란한 곳에 살아도 그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을 정도라 하니 가히 한 도 튼 이야기다.

 

   꽃들이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을지도 모른다. 그런 소리까지 듣게 된다면 우리 귀는 엄청 시끄러울 것이다. 어디 가서 조용히 쉴 수 있으랴. 그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귀를 가져서 다행이다.

 

   문제는, 꽃들이 피고 지는 소리를 마음으로 듣는다는 것이다. 무슨 노래처럼 울고 웃게 되는 것도 꽃의 말을 내 마음대로 들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것들로부터 상처를 받는다는 것은 더 아픈 일이다. 옛 시인이나 지금 시인이나 잘 안 되는 일들을 견디는 방법은 같은 모양이다. 어깃장을 놓아 보는 것이다. 얼굴 옆에 달린 귀는 몰라도 마음의 귀는 막기 어렵다는 말이다.

 

 

  안상학 (시인)

 

이근화, 「목요일마다 신선한 달걀이 배달되고」평설 / 장석주

 

 

목요일마다 신선한 달걀이 배달되고

 

   이근화

 

 

나는 먼지 쌓인 황금보다

황금빛 나는 먼지를 사랑해

이 가을의 한순간을 길게 늘여놓아도 좋아

현명하게 현명하게

기차를 타고 떠나는 방법은 없다

 

기차를 집 모양으로 만들어도

집을 나가고 싶은 사람은 집을 나가고

집을 옮기고 싶은 사람은 집을 옮길 것이다

목요일의 신선 달걀은 포기하고

 

떠날 수 있을까 기차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구름을 깔고 앉을까

가장 먼저 부패되어 갈 것과

가장 오래도록 남을 것을 한 냉장고에 넣어 두고

 

우리는 떠났다 우리의 황금 위에

이제 먼지가 쌓여 갈 것이고

부유하는 먼지를 오래도록 쳐다보다 잠이 들고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 창밖을 내다볼 것이다

 

구름을 깔고 앉았지만

유리창 바깥에는 우리가 없다

곧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건 모르는 일

기차를 타고 돌아올 때까지

 

먼지와 같이 엉길까

엉기다 엉기다 무거워지면 가라앉을까

황금을 닦듯이 유리를 닦고

사과를 닦듯이 손을 닦고

돌아오지 않을 계절을 향해 잠깐 고개를 숙이고

 

 

                            이근화 시집 『우리들의 진화』문학과지성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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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의 낭만 소녀, 떠남을 열망하다

 

 

 「목요일마다 신선한 달걀이 배달되고」는 낭만주의자의 목소리로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고 싶다는 소망을 노래한다. 이 떠남을 추동하는 것은 신체의 지리적 이동이 아니라 미지의 존재 양식 찾기, 즉 순수한 현존을 향한 열망이다. “나는 먼지 쌓인 황금보다 / 황금빛 나는 먼지를 사랑해”라는 시구에 따르자면 떠나려는 곳은 먼지가 쌓이는 황금이고, 가려는 저곳은 황금빛 먼지가 이는 곳이다. 집을 떠나 어디론가 이동한다는 것은 익숙하게 누리던 편의와 안락을 포기하고 새로운 모험과 꿈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목요일의 신선 달걀은 포기하고”가 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서울은 목요일마다 신선한 달걀이 배달되는 도시다. 이 도시를 떠난다는 것은 목요일의 신선 달걀을 포기한다는 뜻이다.

   가을의 쾌청은 그 순간을 길게 늘여놓고 싶어진다. 그런 가을 어느 날 여행을 떠난다. “가장 먼저 부패되어 갈 것과 / 가장 오래도록 남을 것을 한 냉장고에 넣어 두고”, 집의 문을 잠그고, 공항이나 기차역으로 나간다. 우리가 공항과 기차역에서 가볍게 설레는 것은 그곳이 이쪽 세계에서 저쪽 세계로 넘어가는 문턱이기 때문이다. 장소와 삶은 하나다. 삶은 장소의 규정력으로 제약되기 때문이다. 장소가 바뀌면 소리, 이미지, 느낌들은 쇄신되고 아울러 존재도 쇄신된다. 이쪽을 떠나 저쪽으로 넘어가는 자는 이전과는 다른 존재로 바뀌는 것이다. 늘 먹던 밥, 늘 깨어나던 침실, 늘 마주치던 사람들, 늘 걷던 거리… 이 모든 것들은 바뀐다. 모든 여행의 궁극적 꿈은 다른 장소에서 다른 삶을 살아 보고 싶다는 열망과 닿아 있다. 낯선 장소, 낯선 시간 속에서 우리의 자아를 덧씌우고 있던 낡은 껍질이 벗겨지면 우리는 變態(변태)를 한다. 시인은 우리가 곧 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구름을 깔고 앉았지만 / 유리창 바깥에는 우리가 없다 / 곧 달라질 것이다 / 그러나 그건 모르는 일 / 기차를 타고 돌아올 때까지”.

   우리는 달라지겠지만, 집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우리는 안심한다. “우리는 떠났다 우리의 황금 위에 / 이제 먼지가 쌓여 갈 것이고 / 부유하는 먼지를 오래도록 쳐다보다 잠이 들고 /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 창밖을 내다볼 것이다”.

   떠나온 곳은 황금 위에 먼지가 쌓여 가는 곳이고, 우리가 찾아가는 곳은 황금의 먼지들이 부유하는 곳이다. 시의 화자는 두 장소를 견주며 후자를 더 사랑한다고 말한다. 먼지가 내려앉는 황금은 유동성이 없고 고착성이 강한 장소와 관련되는 은유다. 되풀이와 변화 없음은 곧 지루함과 권태를 불러온다. 황금빛 나는 먼지가 있는 곳은 순수한 현존의 자리, 즉 유동성이 풍부하고 변전으로 꿈틀대는 멋진 장소를 가리키는 은유다. 늘 새롭고 변화가 많은 곳은 존재 자체를 생생하게 만든다.

   이근화의 새 시집을 읽으며 나는 서울이 “춤추는 바보와 술 취한 망종”(오장환, 「병든 서울」)들로 들끓는 도시만이 아니라, “외로운 자들이 자꾸 명랑해지는 이유를 하루 종일 생각”(「우리들의 진화」)하고, “원피스 속에 갖출 것은 다 갖췄는데 / 사람들이 날 무시해”(「원시해」)라고 토라지는 소녀들의 도시라는 걸 알았다. 이근화의 시적 화자들은 소녀들이다. 서울은 그 소녀들이 이야기꽃을 피우고 춤추는 무대이며, 실존의 발원지다. 청바지를 입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비의 냄새를 훔치며, 핫도그의 기원을 이야기하고, 최대한 귀여워지려고 노력하는 소녀들! 소녀들은 제 감정에 한껏 도취된 명랑성으로 세계를 바라본다. 그 명랑성이 소녀들로 하여금 이 복잡하고 불가사의하게 커지는 도시를 좋아하도록 만든다. 소녀들에게 소중한 것은 이념이나 견고한 도덕이 아니라 저만의 취향, 혹은 기분이다. 그래서 “아무도 하지 않는 것을 할 때 / 테이블처럼 즐겁고 반듯해지는 기분”(「옛날 버터 케익」)을 느끼고, “청바지를 입는 것은 기분이 좋다”(「청바지를 입어야 할 것」)라는 진술이 나온다.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라고 말하는 소녀들은 햇빛을 받고 광합성 작용을 하며 맛있는 서울을 쪽쪽 빨아들이고 나날이 푸르러진다. 소녀들의 팔다리가 나날이 길어지고 아파트도 쑥쑥 자라난다. 육백 살도 더 먹은 늙은 서울은 꽃처럼 피어나며 진화하는 이 명랑한 소녀들 때문에 해마다 回春(회춘)하며 새로운 봄을 맞는다.

 

 

   이근화(1976~ )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7년을 기준으로 날마다 245명이 태어나고 105명이 사망하고, 날마다 195쌍이 결혼하고 69쌍이 이혼하는 서울! 수만 개의 골목길이 실핏줄처럼 뻗어 있고, 수십 만 마리의 배고픈 길고양이들이 밤마다 울어대는 그 서울에서 나고 자란 소녀 중 하나가 시인이 되었다. 이근화는 단국대학교 국문학과를 나와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시인이 되었고, 결혼도 하였다. 시인은 서울에서 살며 갖게 된 나쁜 기억과 좋은 기억을 섞어 시를 쓴다. “살아남기 위해 / 우리는 피를 흘리고 / 귀여워지려고 해 / 최대한 귀엽고 / 무능력해지려고 해”(「엔진」)라고 노래할 때 이 깜찍한 어법에는 감정을 과장하는 소녀의 감수성이 여과되지 않은 채 드러난다. 어른이 되었지만 소녀의 감수성을 유지하는 것은 생존 전략이다. “우리는 이 세계가 좋아서 / 골목에 서서 비를 맞는다 / 젖을 줄 알면서 / 옷을 다 챙겨 입고”(「소울메이트」)라고 노래할 때 이근화의 시적 자아는 전혀 모호하지 않다. 옷이 젖을 줄 알면서도 비를 맞으며 즐거워하는 것은 이 세계가 제게 우호적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이 취하는 행동이다.

 

  _ 장석주 (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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