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 모 장

당신의 벼랑 외 1편 (신철규)

법정 2011. 8. 17. 08:52

당신의 벼랑 (외 1편)

 

   신철규

 

 

 

마지막 연락선이 바다에 몸을 맡긴다

천천히

박음질을 하며 나아가는 배

꽁무니에 하얀 실밥이 풀려나온다

 

갈매기들이 머뭇거리다가 선착장으로 돌아간다

너무 멀리 가면

돌아올 곳을 잃어버린다

 

빛과 어둠이 만든 붉은 주름이 조금씩 뒷걸음친다

실핏줄이 돋아난 바다

비문처럼 떠 있는 바지선들

고물이 들썩거릴 때마다 흔들리는 당신의 속눈썹

 

등대의 불빛이 검은 수평선을 향해 뻗어간다

등대의 밑은 어둡다

섬 뒤에 숨은 또 하나의 섬

당신 속에 가라앉는 또 하나의 당신

뒤돌아선 당신의 뒷모습이 벼랑 같다

벼랑의 뿌리를 핥는 파도가 하얗게 부서진다

 

우리는 너무 멀리 왔다

서로 밀어내며 좀 더 짙어졌을 뿐,

속눈썹 위에 걸려 있는 말들이 파르르 떤다

 

반환점을 돌 때 우리는 잠시

포개졌다가 다시

멀어진다 마주잡은 손 틈으로

미세한 전율이 지나간다

우리가 실밥 같은 웃음을 주고받을 때

 

우리의 등 뒤로

먹구름들이 꿈틀대며 몸을 비빈다

 

 

                          —《시와 문화》2011년 여름호

 

 

 

파브르의 여름

 

 

 

태양이 신작로를 핥는다

발을 디디면 움푹움푹 빠질 듯하다

 

한 아이가 제 발에 걸려 넘어진다 팔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뜨린다

한참을 엎드려 있다가 스스로 무릎을 털고 일어선다

검은 아스팔트 위에 남은,

걸을 때마다 삑삑 소리가 나는

하늘색 샌들 한 짝

 

어릴 적 할머니는 신발을 사줄 때 신발 앞을 엄지손가락으로 눌러보곤 했다

신발은 발에 맞기도 전에 떨어졌다

낡은 소파 위에 팔을 괴고 눕는다

할머니의 베개에서는 늘 파마약 냄새가 났다

 

눈가에 주름이 많은 사람에게 눈길이 오래 머문다

잘 웃는 사람은 잘 울기도 한다

주름에 와서 주름으로 나가는 것

한참을 쪼그리고 누워 있다가 무릎을 펴자

무릎에서 우두둑 소리가 난다

오금에 새겨지는 주름

 

읍(揖)하듯 날개를 가지런히 모으고

나무에 매달려 있는 매미

자신의 몸을 떠오르게 했던 것이 어느새 명정(銘旌)이 되었다

바닥에 엎드려 울고 있는 아이를 달래듯

조심스럽게 떼어내 바지 주머니에 넣는다

 

가장 무더웠던 여름만을 사람들은 기억한다

 

 

 

                            —《시와 시》2011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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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철규 / 1980년 거창 출생. 고려대학교 국문과 및 대학원 박사과정. 2011년 〈조선일보〉신춘문예에 시 「유빙(流氷)」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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