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시계」는 「오리의 계절」,「물푸레 동면기」등을 표절한 작품이다
강 인 한
누가 봐도 이서빈의 ‘오리시계’는 이여원의 ‘오리의 계절’에서 최초의 발상을 가져왔을 것이라고 읽을 수 있다.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을 종합해 보면 이서빈이 신세훈 시인에게 칭찬을 들은 작품이 ‘오리시계’라 한다. ‘선생님이 동그라미를 두 개 쳐 준 작품이었다.’ 이것을 “(신세훈)선생님이 정말 애써 주셨고(손질해줬다는 뜻), 마지막에는 마ㅇㅇ 선생님이 잘 정리하여서 동아일보에 당선했다.”
이 시를 이서빈 본인의 완전한 순수 창작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그녀를 지난해 여름까지 1년 남짓 문화원에서 직접 시 창작 지도를 한 내가 누구보다 잘 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십 년 넘도록 고쳐지지 않는 단순 사고, 상상력의 한계, 손에 익은 상투적 표현 등이 불과 서너 달 만에 치유되는 기적은 없다.
다시 정리해 보면 결국 ‘오리시계’는 이서빈 개인의 창작이 아니라는 것. 적어도 둘인지 셋인지 이 작품을 거쳐 간 손길이 여럿이었다는 고백은 틀림없다. 심한 경우에는 네 사람(이서빈+신세훈+마ㅇㅇ+박ㅇㅇ) 손을 거쳐 만들어진 작품일 거라는 개연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여기까지의 정황에 대한 구체적인 물증은 없다. 내가 이서빈 본인에게서 1월 4일 전화로 들은 말을 정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이서빈 혼자 쓴 ‘오리시계’는 아니라는 것이다. 누구누구의 손길이 더해졌는가 하는 진실은 ‘오리시계’를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한 본인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이서빈의 ‘오리시계’라는 당선작을 1월 1일 처음 대했을 때 나는 오직 한 사람만 생각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이서빈이 쓴 게 아니라 박ㅇㅇ이 당선작의 수준(?) 으로 대신 써준 것(혹은 많이 손질한 것)이라고 직감했다. 그의 특징적인 문체라 할 수 있는 참신한 감각적 표현이나 유별나게 기다란 시행들을 편애함을 보고 그런 생각을 떠올린 건 당연했다.
오리시계 / 이서빈
겨울, 오리가 연못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저녁이면 다시 걸어 나온다.
연못으로 들어간 발자국과 나간 발자국으로 눈은 녹는다. 시침으로 웅덩이가 닫히고, 방수까지 되는 시간들.
오리는 손목이 없는 대신 뭉툭한 부리의 시간을 가지고 있어 무심한 시보(時報)를 알린다. 시침과 분침이 걸어 나간 연못은 점점 얼어간다.
여름 지나 가을 가는 사이 흰 날짜 표지 건널목처럼 가지런하다.
시계 안엔 날짜 없고 시간만 있다.
반복하는 시차만 있다.
오리 날아간 날짜들, 어느 달은 28마리, 어느 달은 31마리
가끔 붉거나 푸른 자국도 있다.
무게가 덜 찬 몇 마리만 얼어있는 웅덩이를 보면
손목시계보다 벗어 놓고 간 시계가 더 많을 것 같다.
결빙된 시간을 깨면
수 세기 전 물속에 스며있던 오차들이
꽥꽥거리며 걸어 나올 것 같다.
웅크렸던 깃털을 털고
꽁꽁 얼다 풀리다 할 것 같다.
오늘밤 웅덩이는 캄캄하고
수억 광년 연대기를 기록한 저 별빛들이 가득 들어있는 하늘은
누군가 잃어버린 야광 시계다.
이 시에서 다음과 같은 시구들이 박ㅇㅇ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웅덩이가 닫히고, 방수까지 되는 시간들. 오리는 손목이 없는 대신(박ㅇㅇ의 특징- 문이 없다, 문고리가 없다 등), 반복하는 시차만 있다(월동지의…시차적응에 실패한-한교만 ‘새의 풍장’), 물 속에 스며 있던 오차들이 꽥꽥거리며 걸어 나올 것 같다.”이런 데서 보는 감각적인 문체가 바로 박ㅇㅇ 의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었다. 아울러 시의 길고긴 시행을 각별히 애완(愛玩)함은 그의 시가 지닌 형태적 특징의 하나. 1행 1연으로 된 4연까지의 지나치게 길게 느껴지는 시행 형태는 바로 박ㅇㅇ의 시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특징이다(‘묵독黙讀’, ‘계단의 변명’, ‘운지법’, ‘망증忘症’ 등).
동아일보사 내부에서 당선에 대한 번복이 없다고 결정을 내린 1월 10일(금요일) 그 다음날 새로운 표절 의혹의 자료가 발견되었다. 안타깝게도 이 자료는 결정 이후라는 이유로 아예 묵살되어버렸다. 그러나 이서빈의 ‘오리시계’가 표절 의혹을 벗어날 수 없다는 증거로 새롭게 제시된 시는 바로 2012년《문학청춘》여름호에 발표된 이여원의 시 ‘오리의 계절’이다.
오리의 계절 / 이여원
열 두 개의 숫자들, 둥근 시계 안에 흩어져 있다
시침 밑으로 분주한 초침이 물 갈퀴질 중이죠
계절풍과 물가의 산란産卵을 끝낸
몸속의 시계가
징검다리처럼 물을 건너고 있죠
물의 상피, 굳어져가는 호수는 단호하다
새 을乙 자의 숫자들,
모두 아랫배 쪽이 젖어 있지만
햇빛 얹혀 있는 곳은 모두 등이죠
숫자가 숫자를 앞지르지 않듯이
아무리 거센 물살에도 뒤로 가지 않는 시간들
언젠가는 다 날아갈
추운 계절의 시간들이죠
누군가 돌을 던지면
흔들리는 수면 위로 겁먹은 숫자들이
제 발자국을 가슴에 붙이고 날아오르죠
쥐눈이콩 같은 까만 눈으로
별이 춤을 추는 것, 구름이 집을 넓혀 가는 것,
바람이 아이를 낳는 것, 나무가 이사를 가는 것
다 본 매서운 눈
그 눈으로
수만리를 날아와 천연스레 엉덩이를 세운 채
계절을 고르고 있죠
물 뒤를 오리가 따라갔다고 생각했으나
오리가 물을 끌고 가는 것을 보았죠
‘오리의 계절’을 보고 ‘오리시계’를 썼다고 보는 것은 두 편의 발표 순서로 볼 때 너무도 자명했다. 어쩌면 두 편이 이렇게 똑같은 발상이라니. 이것을 도저히 우연의 일치라고 볼 수는 없다. 그냥 앞에 작품을 놓고 슬쩍슬쩍 약간 다르게, 비슷하지만 다른 느낌이 나게 ‘베낀’ 것이다.
* (오리)몸속의 시계……(이여원, 오리의 계절)
오리시계 (시의 제목)……(이서빈, 오리시계)
* 시침 초침 ……(이여원, 오리의 계절)
시침으로 웅덩이가 닫히고……(이서빈, 오리시계)
* 뒤로 가지 않는 시간들 ……(이여원, 오리의 계절)
방수까지 되는 시간들 ……(이서빈, 오리시계)
* 별이 춤을 추는 ……(이여원, 오리의 계절)
별빛들이 가득 들어있는……(이서빈, 오리시계)
* 호수 ……(이여원, 오리의 계절)
연못 ……(이서빈, 오리시계)
* 수만리를 날아와 ……(이여원, 오리의 계절)
수억 광년 연대기를……(이서빈, 오리시계)
* 징검다리 ……(이여원, 오리의 계절)
건널목 ……(이서빈, 오리시계)
* 추운 계절 ……(이여원, 오리의 계절)
겨울 ……(이서빈, 오리시계)
그밖에도 이여원의 다른 시와 이서빈의 ‘오리시계’가 어떻게 비슷한 생각이나 이미지들을 공유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물푸레 동면기 / 이여원
물푸레나무 찰랑거리듯 비스듬히 서 있다
양손에 실타래를 감고
다시 물소리로 풀고 있다.
얼음 언 물에 들어 겨울을 나는 물푸레,
생각에 잠긴 척
바위 밑 씨앗들이 졸졸 여물어가는 소리를 듣고 있다.
얼룩무늬 수피가 물에 닿으면 물은 파랗게 불을 켰었다
바람은 지나가는 분량이어서 몸 안에 들인 적 없고 팔목을 좌우로 흔들어
멀리 쫓아 보냈었다
손마디가 뭉툭한 나무는 실을 푸느라 팔이 아프다
나무의 생채기에 서표(書標)를 꽂아두고
녹아 흐르는 물소리를 꽂아두고 말린다.
푸른 잎들은 물 속 돌 밑에 들어 있고
겨울 동안 잎맥이 생길 것이다.
추위가 가득 엉켜 있는 물가, 작은 샛길이 마을 쪽으로 얼어 미끄럽다
빈 몸으로 서 있는 겨울나무들
모두 봄이 오는 방향으로 비스듬 마중을 나가 있다
날짜를 세는 가지는 문맹(文盲)이다
개울이 키우고 있는 것이 물푸레인지 물푸레가 개울을 키우고 있는 것이
개울인지 알 수 없지만
나뭇잎 하나 얼음 위로 소금쟁이처럼 떠 있다
이 시에서 감각의 남다른 점은 일단 인정할 만하다. 다시 이 시 '물푸레 동면기'와 이서빈의 ‘오리시계’를 비교 검토해 본다. '뭉툭한'이라는 감각적 형용사는 누구나 널리 사용하는 시어라고 하긴 어렵다. 두 사람이 이 단어를 따로따로 썼다기보다 동일한 한 사람의 솜씨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손마디가 뭉툭한 나무는 실을 푸느라 팔이 아프다 (이여원, 물푸레동면기)
오리는 손목이 없는 대신 뭉툭한 부리의 시간을 (이서빈, 오리시계)
얼음 언 물에 들어 겨울을 나는 물푸레 (이여원, 물푸레 동면기)
시침과 분침이 걸어 나간 연못은 점점 얼어간다 (이서빈, 오리시계)
날짜를 세는 가지는 문맹文盲이다 (이여원, 물푸레 동면기)
오리 날아간 날짜들, 어느 달은 28마리, 어느 달은 31마리 (이서빈, 오리시계)
이제 이야기를 매듭지어 보면 이서빈의 ‘오리시계’는 처음부터 이여원의 시 ‘오리의 계절’에서 그 발상과 시의 전체적인 구성을 가져왔다. 표절의 정황들은 정확하게 일치하는 시어나 이미지가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교묘한 유사 표현으로 포장하여 ‘오리시계’가 ‘오리의 계절’, ‘물푸레 동면기’를 이용한 표절 내지 유사 이미지들을 짜깁기(혼성모방) 한 표절작품으로 입증된다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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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 지능적인 표절의 한 대목
누군가 돌을 던지면
흔들리는 수면 위로 겁먹은 숫자들이
제 발자국을 가슴에 붙이고 날아오르죠
(오리의 계절)
결빙된 시간을 깨면
수 세기 전 물속에 스며있던 오차들이
꽥꽥거리며 걸어 나올 것 같다.
웅크렸던 깃털을 털고
(오리시계)
우리 카페 회원 ‘가을시’님의 매서운 지적입니다. 게시한 글에 두 작품을 비교해 보라고 색깔을 구분해서 표시한 것들 중 한 가지만 예로 들어 봅니다.
위 아래 두 부분을 읽어보면 이상하게도 이미지의 유사함이 느껴지지 않나요. 분명치는 않지만 왜 이리 비슷한 느낌일까요.
*호수에 돌을 던진다(오리의 계절) — (연못의) 얼어붙은 시간을 깬다(오리시계)
*겁먹은 숫자들(오리의 계절) — 스며있던 오차들(오리시계)
*수면 위로 날아오르죠(오리의 계절) — 깃털을 털고 (물 밖으로)걸어 나올 것 같다(오리시계)
약간씩 방향을 튼 표현. 그러나 앞에 있는 대상을 베낀 듯 안 베낀 듯. 참으로 교묘한 손놀림이 보이는 듯합니다. 정말 지능적인 표절입니다.
개여울 14.01.20. 12:24

제 시가 표절논란에 휩싸이게 된것에 대해서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저 또한 당선작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 부분은 동아일보측에서 공정하게 처리해줄꺼라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선생님께서 저와 이서빈씨가 실제로 친한사이라 하셨는데 전 그 사람과 일면식도 없는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비슷한 생각이나 이미지들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 아니지요.
또 선생님께선 물푸레 동면기 까지 들추시면서 의심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셨습니다.
그 점에 대한 명확한 근거도 없이 제시하시는것은 더 이상 아닌것 같아 말씀드립니다.

오리의 계절과 물푸레 동면기 두 작품을 내려 주실것을 정중하게 요구합니다.
내려 주시길 바랍니다.

이서빈씨와 일면식도 없는 사이라면 이여원씨 작품을 표절한 것을 게시한 것에 대해 불쾌해 하실 필요는 없으신 듯합니다. 이여원씨가 표절한 걸로 논란이 있는게 아니지 않습니까? 이서빈씨가 시인님 작품을 표절한 논란이니 저 같으면 오히려 본인의 작품을 표절한 이서빈씨에 대해 불쾌해 하고 그걸 게시한 측에 불쾌함을 느끼진 않을텐데요. 작년 광주일보 이덕규시인 표절 게시했을 때 이덕규시인이 게시자에게 불쾌하다고 한 적은 없거든요. 표절당한 사람이 자기 시 표절당한 것이 불쾌해야지 표절을 밝혀주는 걸 불쾌하다고 하는 건 처음 본 경우라 의아합니다. 얼핏 보면 마치 이여원씨가 표절한 것처럼 말이예요

십수년전 조선일보 시조에 제가 아는 시인이 당선되었다가 뒤늦게 이근배 시인이 본인작품 표절을 제기해서 검토결과 몇 행에서 상당부분 표절이 드러나 당선취소 되어 상금까지 회수당하고 그랬습니다. 표절당한 작가가 보통 더 이걸 제시하고 하는데 이여원씨 태도는 의외라 표절당한 이서빈씨와 일면식 없는게 맞나하는 의구심까지 듭니다.
그러나 본인의 작품에 대한 의구심을 거론한 부분으로 불쾌하실 수 있으리라 여깁니다. 그 부분은 그럴실 것 같습니다.


이게 꿈꾸었던 우리 문단의 현실인가요. 밤새 공부해도 30번 씩 낙방하는 이들의 아픈 마음을 한번이라도 생각해보았나요.위의 댓글만 안 달아도 더는 무관심의 배를 타고 본업을 향해 떠나려 했습니다. 오히려 이 바쁜 시간에 퇴근하여 본인을 위하여 진상을 철저이 파악하려고 하는 분들에게 커피라도 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시는 시, 우리나라 3대 환상파 시인, 김경주, 박해람, 강영은 입니다



(앞으로 더 이상 자신의 작품들을 비교, 언급하지 마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짐)고 하는 데에 더욱 의문이 듭니다.
지켜보는 사람들은 <왜일까?> 라는 생각만 더 들 수 있다는거죠.

더 이상 <표절 의심에 대해서 파고 들지 말고, 중단하라>는 실제적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원작자의 작품을 언급하지 않고 어찌 표절 의심에 대한 토론, 이의제기 등이 가능하겠습니까?
따라서 실제적인 표절 의심 추궁에 대한 중단 요청의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저라면 당연히 이에 대한 명명백백한 표절 판정을 진행할 것이며
저 자신이 밝혀내는 것 이외에 어떠한 문단의 문학인이 그에 대한 토론, 추론, 입증, 비교 등의 행위에 대해
제지하지 않을 것이며 제지할 이유도 없고 오히려 나의 작품에 대한 명예를 확립하는데 대한
도움으로 생각하고 감사해할 것입니다.

그건 정말로 더 이상 창작을 하지 않는것보다 더 치욕스럽고 불명예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개의 작품이 함께 떠돌아 다닌다면 과연 일반 독자들이 <원작품>과 <표절작품>을 구분할까요?
문단의 전문가들이나 되어야 알 수 있을 법한 것을 일반 독자들이 과연 알까요?
더군다나 어느 것이 먼저 쓰여졌는지 일반 독자들이 그런 것까지 찾아가며 시를 읽을까요?

표절에 대한 명백한 판정이 가급적 빨리 있지 않으면 원작자에게도 여러가지 피해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 피해는 물질적, 정신적 다방면으로 발생할 수 있으며 잘못될 경우 불명예가 뜻하지 않는 사람에게 뒤집어
씌어질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해당 분야에서 영원히 아웃될 수 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불명예가 잘못 씌어질 경우 평생 본인(어쩌면 가족들까지 포함)에게 돌아올 손가락질과
그에 따르는 고통들이 얼마나 될지 과연 추측 가능할까요?

빵 하나 도둑 맞았다면 그냥 빵 한개만 잃은 것이죠.
그러나 자신의 창작품이 표절당한 것은 자신의 작품 한개만 치명타를 당하는게 아니라
잘못하면 사람이라는 존재 전체에 불명예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것도 평생에 걸쳐서 말이죠.
또한 당한 사람이 받는 고통도 결코 작은 것이 아니죠.

불특정 다수의 독자들(전문가 포함)에게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겠다고 스스로
인지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자신의 작품들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읽힐지 모릅니다.
일반 독자들이 읽고 행복해할 수도 있고 혹평을 할 수도 있고
전문가들이 읽고 추천을 하거나 비평을 하거나 또는 다른 작품과 비교하거나 표절 추궁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무섭다면 어떻게 무대에 설 수 있을까요?

등단해서도 안되죠.
오로지 자신의 독방에서만 혼자서 보아야죠.

이여원씨 댓글의 말이 사실이라면 당연히 동아일보에 전화해서 오리시계는 나의 작품 오리의계절 표절혐의가 있으니 조치해달라고 제의할 것입니다. 동아의 결과를 지켜보고만 있을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본인이 나서야지요 그래야 이서빈과 한 통속이라는 의혹을 벗을 수 있겠죠.
그러지 않는다면 강선생님의 의심 즉 오리계절도 박모시인 손 냄새며 이서빈과 가깝다는 말이 신빙성을 지니는 듯 합니다.
내일 동아일보로 전화를 해서 이여원씨로부터 표절 항의가 들어왔는지 확인해보면 진실성 여부가 드러나겠지요

해당 신문사에 표절 판정을 해달라는 적극적인 항의 표시를 할 것입니다.
아울러 문단의 여러 문인들의 의견과 행동을 함께하며 연대를 해서 더욱 힘있게 행동할 것입니다.
현재의 해당 신문사의 검토 <종결 판정>과 같은 상황에서 <기다린다>는 것은 저의 경우에는 <포기>와 마찬가지입니다.
이 정도는 문인으로서 문단의 정화와 선의의 피해자를 보호하는 <최소한의 조치>라고 생각됩니다.
뿐만 아니라, 더 적극적인 조치로서
표절 의심자를 대상으로 표절이 확실할 경우 <민, 형사상>의 적법 조치도 검토할 수 있을것입니다.
저라면 그렇게 하겠다는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별스런 방법으로 이서빈의 표절 의혹을 거론하지 않도록 종용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데, 문단에서 표절 문제를 당사자들이 아닌 제3자가 밝히려는 것은 문단 기강을 세우려는 공익적 업무로 볼 수 있을 겁니다. 고의로 그것을 훼방하려는 것은 그러므로 공익적 업무 방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과는 일면식도 없다고 하니 두 사람 사이에 대한 관계를 언급한 그 구절은 지웠습니다.

그 강단 있는 용기와 꼼꼼한 분석 그리고 열정에 박수를 드리며
위 댓글들을 살피며 공부 많이 합니다.
특히 표절 논란의 중심이 된 이여원 시인 님의 시에 대해
본인이 글을 내려달라는 의사표시는 여러 측면에서 썩 이해가 가지 않는 군요. ^^.

자신의 작품을 게재한 사람한테 불쾌감을 표시하고 작품을 내려달라고 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네요.
그건 본인의 작품도 표절에서 자유롭지 못하니 거론하지 말아달라는 고백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떳떳하면 왜 불쾌할까요? 정말 희한한 일입니다.^^

강인한 시인이 올해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오리시계]가 표절과 대필이라고 지적하였다 잠이 달아날 정도로 꼼꼼하게 잘 비교하셨다
17시간전>
2012경향신문당선자 최호빈시인이 트윗한 글입니다.

강인한 선생님이 아니면 누가 이런 지적을 하겠습니까.
** 전체적인 발상과 전개, 소재, 배경은 물론 특히 두 작품의 같은 색으로 표시된 부분을 비교해 보세요.**
오리의 계절/ 이여원
열 두 개의 숫자들, 둥근 시계 안에 흩어져 있다
시침 밑으로 분주한 초침이 물 갈퀴질 중이죠
계절풍과 물가의 산란産卵을 끝낸
몸속의 시계가
징검다리처럼 물을 건너고 있죠
물의 상피, 굳어져가는 호수는 단호하다
새 을乙 자의 숫자들,
모두 아랫배 쪽이 젖어 있지만
햇빛 얹혀 있는 곳은 모두 등이죠
숫자가 숫자를 앞지르지 않듯이
아무리 거센 물살에도 뒤로 가지 않는 시간들
언젠가는 다 날아갈
추운 계절의 시간들이죠
누군가 돌을 던지면
흔들리는 수면 위로 겁먹은 숫자들이
제 발자국을 가슴에 붙이고 날아오르죠
쥐눈이콩 같은 까만 눈으로
별이 춤을 추는 것, 구름이 집을 넓혀 가는 것,
바람이 아이를 낳는 것, 나무가 이사를 가는 것
다 본 매서운 눈
그 눈으로
수만리를 날아와 천연스레 엉덩이를 세운 채
계절을 고르고 있죠
물 뒤를 오리가 따라갔다고 생각했으나
오리가 물을 끌고 가는 것을 보았죠
(문학청춘) 2012 여름
오리시계 /이서빈
겨울, 오리가 연못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저녁이면 다시 걸어 나온다.
연못으로 들어간 발자국과 나간 발자국으로 눈은 녹는다. 시침으로 웅덩이가 닫히고, 방수까지 되는 시간들.
오리는 손목이 없는 대신 뭉툭한 부리의 시간을 가지고 있어 무심한 시보(時報)를 알린다. 시침과 분침이 걸어 나간 연못은 점점 얼어간다.
여름 지나 가을 가는 사이 흰 날짜 표지 건널목처럼 가지런하다.
시계 안엔 날짜 없고 시간만 있다.
반복하는 시차만 있다.
오리 날아간 날짜들, 어느 달은 28마리, 어느 달은 31마리
가끔 붉거나 푸른 자국도 있다.
무게가 덜 찬 몇 마리만 얼어있는 웅덩이를 보면
손목시계보다 벗어 놓고 간 시계가 더 많을 것 같다.
결빙된 시간을 깨면
수 세기 전 물속에 스며있던 오차들이
꽥꽥거리며 걸어 나올 것 같다.
웅크렸던 깃털을 털고
꽁꽁 얼다 풀리다 할 것 같다.
오늘밤 웅덩이는 캄캄하고
수억 광년 연대기를 기록한 저 별빛들이 가득 들어있는 하늘은
누군가 잃어버린 야광 시계다.
(201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오리시계(제목), 시침, 연못, 건널목, 겨울 (오리시계)
* 그밖에도 발상이나 시상 전개 등 유사한 내용들이 너무 많아 표절로 판정해도 억울하다고 말할 수 없겠군요.
이게 완전히 똑같은 거냐고 조심스레 그런 위험을 피하려고 재주를 부리긴 했지만... 그 교묘한 손길이 너무나 눈에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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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도 보는 눈이 있어야 할 수 있으니 먼저 눈을 키우시고.


표절당선자, 심사자, 이를 넘기는 동아일보 공동의 하자품입니다.
하자보수는 늦더라도 바르게 하고 넘어가야하지 않을까요? 똥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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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넘어갈만한 문제가 아닌것 같습니다.
이런 정도를 그냥 인정해준다면 신춘은 없어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