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마무리(3) 시의 마무리에 대한 강의는 사실상 어제 끝내야합니다. 그러나 사실 어느 강의에도 시의 마무리에 대한 강의는 없기 때문에 선배시인들의 이야기를 여러분께 전달해드리고 싶어서 한 시간을 더 잡았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시를 쓸 때 첫 시작 보다는 마무리에서 늘 곤혹스러움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시의 시작은 이미 마음속에 정해져 있기 때문 이지요. 그러나 시의 마무리에서는 여기서 그치 면 너무 짧아 하고 싶은 말이 다 들어가지 않는 것 같고, 더 길게 쓰려면 중언부언하여 시가 그 맛을 잃는 것 같거든요. 그래서 한 시간 더 시간을 잡아 선배들 이야기를 해보자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럼 우선 홍윤숙 시인의 견해를 들어보겠습니다. 작년에 예총 초청으로 목포에 오셔서 제가 사회를 보고 강연회를 하셨는데 한 마리의 홍학처 럼 고고하게 늙어가는 여성 시인의 모습을 지켜본다는 것은 경이 그 자체이었습니다. "누구의 말이던가. [포에지는 지속하기를 원하는데 포엠은 완결을 운명으로 한다. 거기에 시의 종결의 어려움이 있다]고 한 것은, 한 편의 시에 흐르는 포에지는 연소하는 불이다. 어디서 어 떻게 그 불을 잡아서 꺼뜨리지 않고 더욱 압축하며 안으로 영롱하게 마물러야 할 것인지.....자 칫하면 산문으로 타락하고 해설로 죽여 버리기 쉬운 그것을, 하여 시의 마무리 문제는 열편의 시에 열 번의 진통을 안고 번번이 새롭게 등장한다. 그야 물론 시의 종결부 몇 줄이 그 시 전체를 흘러온 포에지에 완성의 불을 점화하는 결정적 작업으로써 해설이나 산문으로 타락하지 말아야 하며 계속 연소도를 높여 보다 강하고 농밀하 게 압축해야 한다고 이론으로 알고 있지만 아는 것과는 상관없이 가끔 나는 초등학교 학생의 도화지처럼 마지막 부분을 엉망으로 망가뜨리곤 한다. 기실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한편의 시 속에 끊임없이 포에지를 충전시켜 가야 한다는 일은 나는 그 긴장과 피로에 나도 모르게 왕왕 종결을 서두르며 안일하게 불을 끄는 과오를 범하려 고 한다 결국 시의 마무리를 짓는 몇 줄을 위해 나는 나의 남은 축전기를 최대한 높여 놓고 혼신의 힘 으로 투신해야 한다. 대상을 향해 마지막 집중을 시도해야 한다. 무수한 언어와 이미지를 동원하고 다시 그 것들을 휴지처럼 버린다. 불과 두 세 줄을 위해 열 번 스무 번 원고지에 옮겨 쓰고, 50번 백번 입속으로 읽어본다. 전편으로 흐르는 포에지의 혈 맥을 놓치지 않고 다시 생생하게 되살리기 위해 이렇게 진통하는 어느 순간 나는 문득 감전되 듯 충전이 된다. 사실 한 편의 시 가운데 내가 만들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첫 줄과 마지막 줄 이다. 어쩌면 그것은 신과 교감하는 영감적인 순간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성교 시인의 주장까지 들어보고 가지요. "이 마무리 단계는 곧 연극에 있어서 닫는 막과 같다. 닫는 막이 좋지 않을 때는 전체 인상이 흐리고 만다. 흐린 인상은 곧 실패작이란 뜻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에 있어서 마무리가 잘 되어야 그 시의 빛이 나고, 향기가 난다. 다시 말해 서 그 마무리는 곧 시의 성패 여부를 좌우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마무리하는 시간처럼 엄숙한 시간은 다시없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이 순간 은 하나의 작품이 바로 완성 직전에 있기 때문이다. 이 엄숙한 순간은 지극히 짧은 것 같지만 그와 반대다. 제일 많이 시간이 걸린다. 그것은 그저 헐줌하게 처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마무리하는 순간처럼 신경이 곤두세워지는 시간도 다시없다고 하겠다. 그만치 고통스러운 시간임엔 틀림없다. 갑자기 무슨 생각이 문득 떠올라 시를 마무리 하려고 오랫동안 묵혀두었 던 초고를 꺼내놓고 앉으면 신기하게도 그 생각이 한 마리 새처럼 포올 날아가 버린다. 이때 처럼 안타까운 순간은 없다. 아무리 머리를 짜내어도 그 생각이 다시 떠오르지 않을 때는 부득이 덮어버리고 만다. 나는 이것을 최소한도 방지하기 위하여 미리 한 생각 한 생각에다 번호를 매겨둔다, 그래서 글을 최종적으로 마무리 할 때, 이 번호를 가지고 앞뒤를 꿰맞춘다. 그럴 때 제일 마지막 번호(끝 구절)에 온통 신경을 더 쓴다. 이 끝 구절을 그 작품의 결론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끝 귀정에 생명감을 불어넣기 위하여 되도록이면 상징적인 어휘를 쓰려고 한다. 그래 야만 운치를 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어휘도 두 번 사용하기를 꺼려한다. 어쨌든 이 마무리 단계는 임부가 해산하는 단계와 같이 지극히 고통을 겪는 과정이다. 송찬호님의 <나뭇잎 배>입니다. 나뭇잎이 푸른 물결로 출렁거릴 때 강물은 부챗살처럼 하늘로 퍼져 흐르고 떠도는 땅에서 땅으로 사람들도 정처 없이 흘렀다 마주 보며 눕던 여자의 좁은 이마에 실핏줄같이 흐르던 작은 슬픔도 돌아누우면 먼 파도로 밀려와 흐득였고 깨어 보면 건널 수 없는 깊은 강이 되어 흘렀다 거친 손금 속에 일확천금의 비밀을 숨긴 채 일엽편주를 타고 뿔뿔이 흩어져 떠나가던 사람들도 허리에 묶인 그물을 풀며 이마에 굵은 주름살을 지으며 흘러갔고 긴 강 돛에 매달려 벌레 먹은 바람으로 펄럭였다 가지마다 붉은 노을이 걸릴 때면 그들이 흘러간 강 한 줄기씩 어깨에 메고 돌아와 지나간 내력을 독한 입담으로 걸러내며 강물이 마르도록 술을 마셨다 나뭇잎이 푸른 물결로 출렁거릴 때 강물도 끊임없이 흘러갔지만 강물도 강을 찾기 위하여 뜨내기의 몸속으로 흘러갔는지 먼 길을 가는 물고기들도 쉬어가는 나무 밑에 물결이 철썩철썩 밀려와 쌓여도 한번 흘러간 강물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남진우님의 해설을 싣습니다. "<일엽편주>라는 말이 있다. 이 고풍스러운 사자 성어가 이 시에선 상상력이 촉발되는 수원지가 된 다. 물 위에 떠내려가는 작은 나뭇잎처럼 세파에 시달리는 가련한 인생사. 시인은 이 표현이 품고 있는 비유적 의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거 기에 더 확장된 상상력을 투여함으로써 삶의 이면 을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들고 있다. 세상의 강물과 그 위를 떠도는 나뭇잎은 실은 하나다. 그 작은 나뭇잎에서 길고 긴 강물이 출렁이며 뻗어 나온 것이다. 모든 존재는 <정처 없는> 흐름 속에서 서로 덧없이 멀어져 가고 있을 뿐이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서 선배시인들의 마무리에 대한 견해를 듣기로 하겠습니다. 유경환 시인의 이야기입니다. "내 나름의 습관이지만 자꾸 새 원고지에 베껴가며 고쳐 쓰기 때문에, 한편의 글을 마무리 짓 기 위해선 열배 이상의 원고지가 든다. 정서를 해가며 마음에 걸리는 낱말을 솎아 내다보면 생각의 체중이 해소되는 수가 많다. 때로는 아무리 새 원고지에 옮겨 써도 스스로 만족에 미 흡감이 있어, 그대로 며칠 동안 깨끗이 잊어 버려 본다. 내 글을 타인의 눈으로 보듯 하기 위해서는 깨끗이 한 번 잊어 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다. 그러나 우연한 때에 대부분 길을 가다가(걸으면서 생각하는 습관 때문에) 문득 표현의 이미지 를 얻게 된다. 이것은 엄격히 말해서 우연한 것은 아니다. 언젠가 읽었던 것, 언젠가 보았던 것, 또 언젠가 생각했다가 접어 두었던 의식이 무의식처럼 소생해주는 것이리라. 마지막 구절이 되지 않아 마무리를 못하고 생각을 않는 것 보다는 시어를 제대로 못 골라 마 무리를 못 맺는 경우가 더 내겐 많다. 그것은 마치 바닷가 모래 속에서 내가 꿈꾸어 오던 조개나 심산 천에서 내가 생각해 오던 돌 을 찾아내는 그런 것에 비유할 수 있으리라. 자물쇠에 제 열쇠가 들어맞아야 열리듯이 꼭 맞는 낱말이어야 맥이 통하고 나타내려는 것이 그대로 담겨질 수 있다고 속으로 우기기 때문에 이건 괴로운 추적이 아닐 수 없다. 좋고 나쁜 글을 쓴다는 것은 독자의 입장에 선 타인이 판단할 것이고, 쓰는 내 입장에선 우선 내 스스로가 만족스러워야 마무리가 지어진다. 스스로 만족스러워 지려면 [내 생각이 충분히 전달될 수 있는] 그런 가능성이 나 자신을 납득시킬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내 생각이란, 전연 단절된 분위기나 또는 단속된 상황의식에서도 그대로 공감될 수 있 는 의도를 말한다. 시인은 결코 자기만을 위한 언어의 연금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몇 분의 자료가 있으나 너무 지루할 것 같아서 생략합니다. 그러면서도 세 시간이 나 시의 마무리를 강의한 것은 어느 책에서도, 어느 강의록에서도 시의 마무리에 대한 강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보아온 것처럼 시의 마무리는 여러 가지의 형식과 형태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습 니다. 아무리 많은 선배 시인의 이야기를 들어도 우리는 거기 에서 하나의 공식을 도출해 낼 수도 없습니다. 그 것은 오로지 우리 작가 한 사람, 한 사람에 게 맡겨진 책무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시의 마무리가 결코 수월하지 않다는 것과 그 것이 첨삭 퇴고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많 은 변화를 가져 온다는 사실만을 엿볼 수 있을 뿐입니다. 때론 최초의 작품이 완전히 다른 엉뚱한 작품의 모습으로 변질되는 것도 알 수 있었습니다. 마무리란 결코 부분적일 수만 없고 오히려 전체적일 수 있다는 것을 마음에 두시고, 시를 쓸 때 마무리에도 신경을 쓰시기 바랍니다. 이로써 시의 마무리에 대한 강의는 마치겠습니다. 좋은 시 한 편을 소개하겠습니다. 신경림님의 <떠도는 자의 노래>입니다. 외진 별정우체국에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다 어느 삭막한 간이역에 누군가를 버리고 온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문득 일어나 기차를 타고 가서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좁은 골목을 서성이고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린 저잣거리도 기웃댄다 놓고 온 것을 찾겠다고 아니, 이미 이 세상에 오기 전 저 세상 끝에 무엇인가를 나는 놓고 왔는지도 모른다 쓸쓸한 나룻가에 누군가를 버리고 왔는지 모른다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 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 모른다 남진우님의 해설입니다. "누구나 나이를 먹어가다가 한 번씩은 문득 사로잡 히게 되는 상념의 한 대목을 이 시는 간명하고 절 제된 어조로 형상화해 놓고 있다. 삶은 추구나 획 득의 여정이 아니라 끊임없는 상실과 망각의 과정 임을 이 시는 알려 준다. 그 상실과 망각은 보다 확대하면 이 현생에서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전 생과 후생을 이어 윤회를 거듭하며 진행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인의 연륜이 자연스럽게 묻어 나는 수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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