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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신달자

법정 2014. 3. 12. 16:49

 

살 흐르다 (외 2편)

 

 

   신달자

 

 

 

 

 

거실에서는 소리의 입자들이 내리고 있다

살 흐르는 소리가 살 살 내리고 있다

30년 된 나무 의자도 모서리가 닳았다

300년 된 옛 책장은 온몸이 으깨어져 있다

그 살들 한마디 말 없이 사라져 갔다

살 살 솰 솰 그 소리에 손 흔들어 주지 못했다

소리의 고요로 고요의 소리로 흘러갔을 것이다

조금씩 실어 나르는 손이 있다

멀리 갔는가

사라지는 것들의 세계가 어느 흰빛 마을을 이루고 있을 것

 

 

거기 가늘가늘 소리 들린다

 

 

다 닳는다

 

 

다 흐른다

 

 

이 밤 고요히 자신의 살을 함께 내리고 있다.

 

 

 

 

 

스며라 청색

 

 

 

 

 

여명 속 어둠 한 스푼을

흰 쟁반에 살짝 놓으니

새벽 속살이 엷은 청색으로 살살 흐르더라

아슬아슬 쟁반에 차오르더라

 

 

그 빛!

 

 

모닝커피에 달달하게 스며들면

굳은 것들 자근자근 풀리고

새잎 돋우는 나무의 첫인사도 솔솔 들리면서

보이면서

온몸을 따스히 흐르다 차오르더라

 

 

어둠은 빛을 깊이 안고

하루를 걸어가는데

그 고단함을 견디느라 힘 꽉 주면

그때 살아나더라 진한 청색으로 불끈 일어나더라

 

 

 

 

 

 

지나가는 것

 

 

 

 

 

한 아주머니가 긴 복도 저쪽에서

긴 막대 걸레를 쑥쑥 밀고 온다

한 손으로 핸드폰을 받고 입으로 껌을 딱딱 씹으며

발로는 이것저것 장애물을 치우며 가끔 웃고 때로는 무표정하게

무조건 밀고 들어오는 탱크처럼 그 막대 걸레 아줌마 먼지를 밀고

쓰레기를 밀고 밀고 밀고 내 어깨 옆을 쑤욱 지나가는 그 순간

개울 지나가고 강 지나가고 바다 지나가고

봄 여름 가을 겨울 지나가고

한 무리 개 떼가 지나가고 한 무리 태풍이 지나가고

탄생과 죽음이 지나가고 지나가고 지나가고

화들짝 꽃들이 와르르 피고 주루룩 꽃들 떨어지며 지나가고

걸레 아래서 무참히 지워지는 더러운 무늬들

무작위로 쳐들어오는 광고지 같은 소식들 뭉개지고

한 문장으로 말할 수 없어 더듬거리는 입술 터지고

거기 내가 잃어버린 시계 초침 하나 어디론가 쓸려가고

귀 멍멍히 아스라이 빛 부스러기와 그늘이 멀어지고

쑤욱 쑥 밀고 내 어깨 옆을 무심히 지나가는

저 흰 구름들.

 

 

 

 

                       —시집『살 흐르다』(201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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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달자 / 1943년 경남 거창 출생. 숙명여대 국문과 졸업, 동 대학원 박사 학위. 1964년 《여상》여류신인문학상 당선, 1972년《현대문학》에 박목월 시인 추천으로 등단. 평택대 국문과 교수, 명지전문대 문창과 교수 역임. 시집 『봉헌문자』『雅歌』『아버지의 빛』『오래 말하는 사이』『열애』『종이』『살 흐르다』등.

 

 

한 수 위

 

 

   복효근 (1962~ )

 

 

 

 

 

어이, 할매 살라먼 사고 안 살라먼 자꼬 만지지 마씨요

—때깔은 존디 기지가 영 허술해 보잉만

먼 소리다요 요 웃도리가 작년에 유행하던 기진디 우리 여편네도

요거 입고 서울 딸네도 가고 마을 회관에도 가고

벵원에도 가고 올여름 한려수도 관광도 댕겨왔소

물도 안 빠지고 늘어나도 않고

요거 보씨요 백화점에 납품하던 상푠디

요즘 겡기가 안 좋아 이월상품이라고 여그 나왔다요

헹편이 안 되먼 깎아달란 말이나 허제

안즉 해장 마수걸이도 못 했는디

넘 장사판에 기지가 좋네 안 좋네 어쩌네

구신 씻나락 까묵는 소리 허들 말고

어서 가씨요

—뭐 내가 돈이 없어 그러간디 나도 돈 있어라

요까이 껏이 허면 얼마나 헌다고 괄씨는 괄씨요

마 넌인디 산다먼 내 팔처 넌에 주지라 할매 차비는 빼드리께

뿌시럭거리며 괴춤에서 돈을 꺼내 할매 펴 보이는 돈이

천 원짜리 구지폐 여섯 장이다

—애개개 어쩐다요

됐소 고거라도 주고 가씨오 마수걸이라 밑지고 준 줄이나 아씨요 잉

못 이긴 척 배시시 웃는 할배와

또 수줍게 웃고 돌아서는 할매

둘 다 어금니가 하나도 없다

 

 

   * 기지 : 옷감. 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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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문도 대사도 시추에이션도 재밌어서 읽는 즐거움을 주는 시다.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랬다’는 속담이 있는데, 옷 장수 할배와 손님 할매가 서로 살살 속을 긁는 게 아슬아슬 싸움 근처여서 한층 생동감 있는 흥정, ‘밀당’의 풍경이 익살스럽게 펼쳐진다. 정가제와 대기업슈퍼마켓(SSM)에 밀려 요새는 거의 사라진 재래시장의 이런 풍경, ‘천 원짜리 구지폐 넉 장’처럼 시골장터에서나 볼 수 있을까.

 

   부르는 값의 반은 뚝 깎아야 흡족하실 할머니의 괴춤이 궁금하다. 그럴 줄 알았을 할아버지의 푸근한 합죽웃음이여. 할배, 진짜 밑지고 주신 건 아니었죠?

 

 

  황인숙 (시인)

 

 

 

 

   구수한 고향 풍경은 “어이, 할매 살라먼 사고 안 살라먼 자꼬 만지지 마씨요”라는 할배의 첫수부터 시작한다. “때깔은 존디 기지(옷감)가 영 허술해 보잉만”, 할매가 한 발을 빼면서 받는다. 다음 수는 중중모리 속사포에 강도가 센, “어서 가씨요”다. 이쯤에선 눙과 너스레의 변화구가 필요하다. 흥정과 무관한 “괄시” 운운이 또 한 수다. 그러니 “차비는 빼드리께” 정도의 쓰리쿠션으로 받고 친다. 여기서 흥정이 끝난다면 할매할배의 장구한 연륜을 간과한 리얼리티의 실패다. 괴춤에서 밑천을 드러내듯 눈꼬리를 길게 낮추며 마지막 패를 던지는 할매, 급기야 ‘마수걸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한발 물러서는 할배!

   헌데 할배는 왜 ‘못 이긴 척 배시시 웃는’ 것이며 할매는 왜 ‘또 수줍게 웃는’ 것인가, 수작(酬酌)하는 연인들처럼. 치고 들어갈 때와 빠질 때, 한발 물러설 때와 돌아설 때, 눙쳐야 할 때와 너스레 떨 때를 아는 감이야말로 모든 흥정의 기본이다. 연륜이 힘이기도 하다. 둘 다 어금니가 하나도 없어 서로에게 생채기 낼 일은 없으리니, 우리들 사랑 또한 이리 ‘한 수 위’라면!

 

 

  정끝별 (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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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치스코 교황
ⓒ EPA-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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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님, 로마의 날씨는 어떤가요? 저희 집 마당에는 수선화와 둥굴레 새순이 솟았습니다. 땅이 보내는 소식입니다. 이 무렵 한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감기에 걸립니다. 따스해진 햇살과 솟아나는 새순을 보며 옷을 얇게 입기 때문이지요. 한국의 저녁 뉴스 앵커들도 자주 "환절기 감기 조심하십시오"라는 인사를 하곤 합니다. 교황님께서도 감기에 걸리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교황님, 저는 교황님의 8월 방한 소식을 봄소식처럼 반가워했던 한국의 시인입니다. 취임 후 1년 동안 교황님께서 보여주신 사제적 의지에 무척 공감하고 큰 갈채를 보내는 사람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물론 한국 신임 추기경이 교황님의 의지에 반하는 발언을 거침없이 하실 때는, 제가 알고 있는 '사제적 의지'에 대한 원칙이 순간 헛갈리기도 합니다.

저는 지난해 11월 중순, 로마에 갔습니다. 여느 관광객과 마찬가지로 이른 아침부터 긴 줄을 서서 바티칸 입장권을 샀고, 오후에는 베드로 대성당의 돔까지 헉헉거리며 올라갔습니다. 돔을 빙 돌며 내려다본 로마는 퍽 아름다웠습니다.

<술 취한 노파>의 비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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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 취한 노파>
ⓒ 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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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마음이 좀 쓸쓸해졌습니다. 오랫동안 나지막하게 자기 키를 유지하고 있는 로마가 부러웠기 때문입니다. 한국에도 오래된 도시들이 있지만, 기품 있는 집과 골목 그리고 나무들은 큰길과 고층건물들에 밀려 사라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다와 산과 강을 지키려 애쓰고 있는데 쉽지 않습니다.

교황님, 제게 로마 여행은 오래된 꿈이었습니다. 꿈이라고 해서 거창한 것은 아니었고, 늦가을 보르게세 공원에 가보고 싶다는 바람이었습니다. 지난해 저는 보르게세 공원에 갔고, 미술관에 가서 <아폴로와 다프네> <플루토와 페르세포네>를 봤습니다.

그러나 여행 중 보았던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은 카피톨리니 미술관에서 본 <술 취한 노파>였습니다. 술병을 끌어안은 노파는 웃고 있었지만, 그녀의 무릎과 술병에는 비애가 가득 차있었습니다. 하늘을 향한 그녀의 웃음은 기도 같기도, 원망 같기도 했습니다.

교황님. 수많은 그림과 조각 덕분에 저의 로마 여행은 '압도당함'이라는 말로 축약됐습니다. 복된 시간이었습니다. 교황님의 8월 한국 여행도 복된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아니, 솔직히 털어놓자면, 교황님의 방문이 저희에게 실제적인 복이 되길 바랍니다. 죄송합니다. 손님에게 뭔가 받으려는 태도는 매우 무례한 것이지만, 사제에게 손을 내미는 일은 용납되리라 믿습니다.

"교황님, 밀양과 강정에 가주세요"

교황님께 편지를 쓰기 전, 저는 페이스북을 통해 제 친구들에게 물었습니다. "제가 교황님께 편지를 씁니다, 교황님께 바라는 게 있으면 댓글로 남겨주세요"라고. 제 친구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생각이 복잡해진다. 교실에서 떠드는 아이를 선생님께 이르는 것처럼 교황님께 우리 사정을 일러야 하는 건가. 교황님이 우리 문제를 얼마나 해결해 줄까?"(가장 긴 글을 남긴 조아무개님)
"교황님, 부정선거로 당선된 대통령에게 청와대 비우고 나가라고 말씀해 주세요."(현 정부에 잔뜩 화가 나 있는 배아무개·이아무개님)
"추기경…, 다시 뽑아주세요."(차아무개님)
"밀양 할매들과 강정 주민들에게 가 주세요. 안 되면 한 곳이라도."(신아무개님)
"정치적인 것은 제쳐놓고 북한에 좀 가주세요. 교황님이 가시기만 해도 북한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거예요."(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박아무개님)
"먼저 청와대로 가지 마시고…, 꼭! 제주도 강정에 먼저 가셔서 교황님의 평소 의지를 보여주세요."(늘 마음이 가난하고 아픈 김아무개님)

해양생태 과학자인 황아무개님은 "교황님께 전해주세요, 문 열어달라고…"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고, 제주교구 염미카엘라님은 "교황님, 사랑해요"라는 고백을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제주도를 또다시 전쟁 제물로 내줘선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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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3월 7일 해군은 구럼비 바위 지역의 발파를 시작했다. 사진은 이날 제주도 서귀포시 강정마을 해군기지 정문 앞에서 마을 주민들과 시민사회단체 활동가자들이 해군기지 건설에 항의하고 있는 모습. 경찰들이 이들을 막고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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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님께서는 제 친구들이 전하는 말을 잘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솔로몬왕 이후 남북으로 나뉜 이스라엘처럼, 한국과 북한은 한 민족이면서 60년이 넘도록 분단돼 있습니다. '김씨 왕조'가 된 북한에서는 주민 대부분이 인간 존엄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형제자매인 저희는 가슴이 아픕니다.

그런가 하면 한반도 남쪽 한국에서는 상위 1%를 위한 부의 재편성이 견고해지고 있습니다. 초법적인 존재가 되려는 부자와 권력자들은 동북아 패권다툼에 영토 일부분과 그곳에 사는 주민들을 내주고 있습니다. 그곳이 제주도 강정마을입니다.

교황님. 세상은 저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모르는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혀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마치 먹이사슬과 같다지요.

저희가 믿고 의지하는 황금률은 저희 자신의 존귀함이 하늘로부터 왔다는 사실입니다. 먹이사슬의 최하위에 속한 사람도 함부로 해직당하거나, 돈이 없어서 학교나 병원에서 내쫓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농사지을 땅과 바다와 마을을 빼앗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한국은 19세기 이후 지금까지 열강의 동북아 패권다툼의 희생양으로 살아왔습니다. 미국의 묵인하에 일본의 식민지가 됐고, 동서 냉전의 인질로 민족이 나누어졌습니다. 그로 인해 동족 간 처참한 전쟁이 치러졌고, 강대국의 요구를 뿌리칠 힘이 없어 베트남 전쟁과 이라크 전쟁에 수많은 생명을 내줬습니다.

오늘 밤에도 제주도 강정마을에서는 제주도 해군기지 야간공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제주도 해군기지는 미국의 대중국 전진기지나 다름없습니다. 제주도는 아픈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 전진기지로 수탈당했고, 미군의 좌익척결 정책에 의해 3만여 도민이 학살당했습니다. 많은 한국인들이 제주도를 다시 전쟁의 제물로 내줘서는 안 된다는 데 공감하고 있습니다.

교황님, 저희는 제주도가 동북아 분쟁의 비무장평화지대 (DMZ)가 되기를 원합니다. 전쟁기지나 외국 군인들을 위로하는 유흥가 대신 유엔 평화대학과 같은 각종 평화기구들이 제주도에 세워지길 바랍니다. 제주 남쪽 바다를 둘러싼 한국·중국·일본·대만이 전쟁 대신, 평화로운 외교적 합의를 이뤄나가야 합니다. 교황님께서 전쟁을 거부하는 저희의 꿈과 평화적 저항에 힘을 보태주시기 희망합니다.

한국의 '버림받은 사람들'을 만나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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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수하라! 제주 해군기지. 교황님은 평화의 메신저십니다. 우리 곤경을 도와주세요'라고 적힌 피켓.
ⓒ 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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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여행 당시 피렌체의 아카데미아와 우피치 미술관을 보고 로마로 돌아온 다음날은 마침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 대성당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그 대열에 함께했습니다. 교황님께 드릴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직접 만나뵐 수는 없었으므로 피켓을 준비했습니다.  

저는 교황님의 창문에서 가장 잘 보일 법한 곳에 자리를 잡고 피켓을 들었습니다. 저는 피켓에 이렇게 적어놨습니다.

'철수하라! 제주 해군기지. 교황님은 평화의 메신저십니다. 우리 곤경을 도와주세요.'

제 호소는 교황님이 나오시기 직전, 경찰에 의해 차단됐습니다. 하지만 제 기도는 그곳에 남았습니다.

교황님, 저희는 언론에 보도되는 교황님의 소식을 매일 듣습니다. 힘센 자들이 유포한 규칙에 포박된 사람들은 교황님의 선포에 귀를 기울입니다. 카피톨리니 미술관의 <술 취한 노파>처럼 스스로 살아가기 힘든 이들이 더욱 그럴 것입니다.

교황님께서 한국에 오신다는 소식이 언론에 보도되자 많은 사람들이 기뻐했습니다. 부자와 권력자들과 그들의 편에 선 사제들은, 억압된 이들의 기다림으로부터 교황님을 차단하려고 할 것입니다. 보기 좋게 꾸며놓은 행려자들의 집 같은 곳에 교황님을 모시고 언론의 카메라 앞에 서시게 할 것입니다.

물론 그곳도 소중한 곳이긴 합니다. 그러나 교황님, 하실 만하거든, 버림받은 사람들의 마당인 대한문 앞에 와주시기를 바랍니다. 땅과 바다와 미래를 전쟁으로부터 지키고 있는 강정마을 사람들을 꼭 찾아주시기 바랍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드는 손들을 잡아주시기 바랍니다. 교황님의 소식을 듣게 된 이 봄이 기쁩니다. 뵐 때까지 늘 건강하십시오.

 

봄비

 

 

   이경임

 

 

 

 

 

새벽 2시에서 3시를 향해 움직이는

커다란 초침소리처럼

 

 

나의 출생신고에 사용된 숫자들처럼

나의 사망신고에 사용될 숫자들처럼

 

 

천진한 울음처럼

발랄한 체념처럼

 

 

그렇게 무엇인가가 땅으로 내려와

하늘을 향해 속삭였다

 

 

시계 우물 속 개구리처럼

마음 우물 속 개구리처럼

 

 

분주하게 폴짝거리며 힘 빼지 말고

 

 

하늘을 꼭 껴안고 더 많이 놀아야지

땅과 뒹굴며 더 많이 놀아야지

 

 

차갑고 메마른 입술 위로

흘러내리는 봄비의 촉감처럼

 

 

죽음의 촉감과 더 친밀해져야지

 

 

 

 

                       —《시와 표현》2014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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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임 / 1964년 서울 출생. 1997년〈동아일보〉신춘문예 당선. 시집『부드러운 감옥』『겨울 숲으로 몇 발자국 더

 


      


너무 (외 2편)

 

       이준규

 

 

 

   ……너무 적은 나의 새들 너무 적은 나의 커피 너무 적은 나의 노트 너무 적은 나의 운명 너무 적은 나의 겨울 너무 적은 나의 새들 너무 적은 나의 한숨 너무 적은 너의 웃음 너무 적은 나의 기찻길 너무 적은 나의 묘비명 너무 적은 너의 무릎 너무 적은 너의 부츠 너무 적은 너의 단두대 너무 적은 너의 말 너무 적은 너의 매 너무 적은 나의 숲 너무 적은 나의 손가락 너무 적은 나의 운명 너무 적은 나의 술 너무 적은 나의 시 너무 적은 나의 호흡 너무 적은 나의 산책 너무 적은 나의 축구 너무 적은 나의 커피 너무 적은 나의 운명 너무 적은 나의 나 너무 적은 나의 한옥 너무 적은 나의 언덕 너무 적은 나의 초당 너무 적은 나의 적지 너무 적은 나의 연못 너무 적은 나의 나무 너무 적은 나의 네모 너무 적은 나의 동그라미 너무 적은 나의 물고기 너무 적은 나의 장소 너무 적은 나의 책 너무 적은 나의 섹스 너무 적은 나의 차 너무 적은 나의 새들 너무 적은 나의 너 너무 적은 나의 우리 너무 적은 나의 길 너무 적은 나의 책상 너무 적은 나의 서재 너무 적은 나의 서재 너무 적은 나의 주전자 너무 적은 나의 새들 너무 적은 나의 해 너무 적은 나의 달 너무 적은 나의 별 너무 적은 나의 대지 너무 적은 나의 겨울 너무 적은……

 

 

 

   관념

 

 

 

   관념은 조금 빈 잔이고 모서리가 있다. 모든 관념은 딱딱한 모서리를 가진다. 바람은 불었다. 언덕은 부드럽게 무너진다. 나는 언덕 아래로 내려가 언덕 위를 바라보는 하나의 뚜렷한 관념이었다. 관념은 두부 같고 관념은 두부를 찍어 먹는 간장 같아서 나는 조랑말을 끌고 산을 넘었다. 만두가 있을 것이다. 관념적인 만두. 봄이다. 강은 향기롭다. 봄이고 강은 향기롭고 홍머리오리는 아직 강을 떠나지 않는다. 흰죽지도 그렇다. 물 위엔 거룻배. 하늘엔 헬리콥터. 그것은 모두 사라진다. 관념적인 동그라미와 함께. 어떤 연인들처럼. 비처럼. 눈물처럼. 봄은 향기롭다. 나는 길을 갔다. 어려운 네모와 함께. 아네모네를 물고. 너를 향하여. 언제나 그윽한 너를 향하여. 너의 잔을 마시러. 나는 길을 떠난다. 마른 것. 떨어지는 것. 그것처럼. 더는 없었다. 네모는 구름. 관념은 조금 빈 잔이고 모서리가 있다. 닳고 있다.

 

 

 

   나는 너의 일곱시다

 

 

 

   나는 너의 일곱시다. 너는 나로부터 멀어진다. 나는 너의 잠으로 들어간다. 너의 일곱시는 잠 속에 있다. 나는 너를 잡으러 너의 잠에 들어간다. 나는 너의 일곱시다. 나는 지금 시를 쓰고 있다. 나는 지금 시를 쓰며 너를 생각한다. 나는 지금 시를 쓰며 너를 생각하며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운다. 나는 네가 마실 수도 있는 커피를 마시고 네가 피울 수도 있는 담배를 피운다. 네가 좋아하는 에그 타르트는 지금 내 앞에 없다. 하지만 나는 네가 좋아하는 에그 타르트를 상상할 수 있다. 나는 지금 내가 상상한 네가 좋아하는 에그 타르트를 먹으며 너의 잠 속에 있다. 나는 지금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피우며 시를 쓰며 에그 타르트를 먹으며 너의 잠 속으로 들어가 너를 가지고 있다. 너는 나의 소유다. 너는 나의 일곱시가 되었다. 너는 나의 일곱시다.

 

 

 

                       —시집『반복』(201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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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규 / 1970년 경기도 수원 출생. 2000년《문학과사회》여름호에 「자폐」 외 3편을 발표하며 등단. 시집『흑백』『토마토가 익어가는 계절』『삼척』『네모』『반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