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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한시인의 발자취

법정 2014. 3. 5. 19:58

 

나의 삶 나의 문학 | 문학이라는 종교에 묻혀 외톨이

 

      강 인 한

 

 

 

 

 

  한국문협도, 민족작가회의도 아닌 무소속 문인으로

 

 

   문학을 하는 건 어쩌면 숙명이 아닌가 싶다. 지금 나는 문인이면서 한국문인협회 회원이 아니다.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고서 곧바로 한국문인협회에 가입하였으나 1972년 시월 유신 이후 나는 문인협회와 인연을 끊었다. 헌정을 중단시키며 박정희 개인의 종신 집권을 위한 획책이 ‘10월 유신’이었다. 그 유신을 맨 처음 지지하는 성명을 내고 보란 듯이 가두시위를 벌인 건 육군사관학교였다. 그리고 뒤이어 여기저기 사회단체에서 눈치를 보아가며 마지못해 유신 지지 성명을 내었다. 한국문인협회도 유신 지지 성명을 냈는데 당시 한국문협 이사장은 서정주 시인이었다.

 

   냉정한 머리로 판단할 때 어떤 가치개념에 수식어가 붙을 때 그건 순수성을 상실한다고 본다. 아무리 화려한 수식어를 붙여도 그건 순수한 게 아니다.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말로 유신을 합리화하였으나 그것은 민주주의를 배반한 변명에 불과한 것이었다. 나는 ‘시월 유신’에 개인적으로 도저히 찬동할 수 없었으므로 그 단체와 인연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십 년 뒤 민족문학 작가회의가 태동하였으나 문학단체의 집행부에서 단체 명의로 어떤 사안에 대하여 사회적인 의견을 표명할 때 개인의 의사는 묵살되기 십상이라는 생각이 들어 굳이 나는 새로운 문학 단체에 가입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나는 사실상 문단에서 외톨이가 된 셈이었다. 강인한이라는 이름은 한국문인협회 주소록에도 없고, 작가회의 수첩에도 없다. 이것저것 다 물리치고 뒤늦게 한국시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을 뿐.

 

 

  알렉산더 뒤마를 존경한 초등학생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르는 날은 추웠다. 2월이었으므로 겨울이 다 간 건 아니었다. 필기시험을 본 다음날 구두시험을 치렀다. 네가 존경하는 사람은 누구냐, 선생님이 물었다. 알렉산더 뒤마입니다. 소년의 대답이 하도 뜻밖이었는지 선생님은 이것저것 한참 동안 많은 것을 물었다. 사실 《삼총사》,《암굴왕》만큼 재미있게 읽은 책은 없었던 터라 나는 그 소설가의 이름을 똑똑히 기억했던 것이다. 존경하는 인물로 이순신 장군, 백범 김구 선생, 이승만 대통령 등의 시시껄렁한 대답만 천편일률로 듣다가 뜬금없이 알렉산더 뒤마라는 프랑스 작가 이름을 초등학교 6학년생(며칠 후에 중학교 신입생이 되지만)에게서 듣는 건 의외였을까.

 

   생활기록부 작성을 위한 '장래의 희망'란에 나는 언제나 의심 없이 '소설가'라고 썼다. "소년이로학난성(少年易老學難成)하니 일촌광음불가경(一寸光陰不可輕)이라"는 구절을 배우며 중학생인 나는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소년에서 곧바로 노인이 되는 것이 쉽다니, 청년과 성인의 시기를 생략한 채 노인으로 비약한다는 게 석연치 않아서였다. 그런데 나는 지금 내 인생의 후반에 와 있다. 그리고 옛날의 소년을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머금어진다. 소설가를 꿈꾸었으나 시인이 된 건 그렇게 큰 차이가 났다고 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그 때 그 시골 중학교의 한쪽 벽에는 눈 덮인 알프스 산에서 말을 탄 채 칼을 뽑아 앞을 겨누고 있는 나폴레옹의 그림이 있었고, 그림 아래쪽에 큼직한 필기체의 영문으로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표어가 쓰여 있었다. 나중에야 알게 된 것이지만.

 

 

  문학이라는 종교

 

 

   대학 시절, 지방대학교에 다니는 자격지심을 씻기 위하여 나는 죽어라고 썼다. 닥치는 대로였다. 시, 소설, 희곡, 무어라고 이름 지을 수 없는 잡문도 턱없이 써댔다. 쓰는 것만이 내 유일한 삶의 증거였다. 그렇게 쓰면서 문득 느껴지는 게 있었다. 인간이 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창작 행위라고. 글을 쓰는 것은 가장 숭고한 창조 행위라는 것. 스스로를 준엄하게 돌아보고,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신의 눈으로 바라보고, 그리하여 가당치 않은 불의와 부정에 대해서는 침묵해선 안 된다는 것.

   '목숨을 걸고' 나는 쓰기로 작정하였다. 문학 수업을 나처럼 치열하게 하는 친구가 내 주변에는 별로 없었다. 고전 문학을 전공하는 교수님이 무의미하게 보였다. 그것은 일생을 걸 만큼 가치가 있는 게 아닌, 죽은 학문이었다. (외람되고 한참 건방진 생각이었지만) 펄펄 뛰며 살아서 숨 쉬는 학문— 그게 현대 문학이며, 창작이었다. 그리고 많은 습작의 훈련을 통해서 문학이나 철학 또는 수학까지도 궁극에 가서는 하나로 귀결되리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 무렵 내가 읽은 헤세의 《싯다르타》는 그런 점에서 내게 시사해준 바가 컸다. 지식보다 지혜가 더 높은 자리에 서야 한다고 믿게 되었고, 한 편의 시가 장편소설 한 권에 필적할 수 있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사실, 내 습작기에는 치열하게 쓰고 읽는 것 말고는 다른 것은 별로 가치가 없었다. 그러므로 문학은 나에게 하나의 종교였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읜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내가 크게 뒤틀리지 않고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문학이라는 종교의 힘이 컸다. 그래서 나는 '목숨을 걸고' 문학 수업을 닦는 것이 결국 자기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글을 쓰면서 스스로의 몸가짐을 돌아보고 구부러진 길과 곧은길을 판단할 수 있는 눈이 생긴 것이었다.

 

 

  인터넷 카페와 시

 

 

   요즘은 인터넷의 카페 〈푸른 시의 방〉에 그간에 써서 발표한 시, 새로 쓴 시, 기타의 잡다한 산문 등을 올리는 작업을 즐겁게 하고 있다. 열 손가락을 피아노 치듯 자유자재로 움직여서 자판을 두드리는 실력은 아니고, '독수리 타법'에서 약간 발전한 단계일지라도 그다지 불편을 느끼지 않으며 자판을 친다.

   카페에 내 손으로 찾아 읽은 좋은 시들을 약 7천~8천 편쯤 올려놓았다. 자비 출판으로 간행한 시집 《이상기후》,《불꽃》도 워낙 발행 부수가 적어 카페에 올리는 게 잘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친 김에 출판사가 없어져 버렸거나 절판된 시집의 시들도 그냥 다 올렸다.

   어떤 이는 그렇게 인터넷 카페에 모조리 올려 버리면 누가 시집을 사서 읽어보겠느냐고 걱정하는 말을 해 준다. 그러나 시집이 엄청나게 팔려서 내가 부자가 될 사주팔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터넷의 시를 읽으면 그 때문에 시집을 사서 읽지 않는다? 그럴싸한 논리지만 모니터의 화면에 떠 있는 시를 대충 눈으로 '훑어보는' 것과 종이에 인쇄된 시를 '읽는' 것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본다.

 

   컬러텔레비전이 막 방송되기 시작할 무렵 세상의 영화관은 다 망해서 없어질 것이라고 사람들은 예상했었다. 하지만 지금도 영화관은 버젓이 존재하고 텔레비전에서 한참 지난 영화를 방송으로 내보낼 때도 있으나 영화관에 앉아서 보는 것과는 크게 느낌이 다르다는 것을 실감한다. 역시 영화는 영화관에 가서 보았을 때 제대로 영화 속에 몰입하여 보게 마련이다.

 

   책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인터넷에 띄워진 글일지라도 책으로 읽는 것과는 상당히 다르다. 연구나 독서는 책을 통해서이지 인터넷으로는 가능하지 않으리라는 게 나의 믿음이다. 인터넷에 올린 시를 읽음으로써 시집 안내와 홍보도 겸하는 이점도 없지 않을 것이다. 인터넷에 작품을 띄우게 되면 독자가 줄어들 거라는 생각은 공연한 피해망상이 아닐까 싶다.

   요즘 또 이(e)북이란 것도 나오는 모양이나 그렇다고 인쇄 문화가 멸절될 조짐은 없어 보인다. 오디오 시집도 마찬가지다. 중학교 시절에 나는 희한한 연극 한 편을 본 일이 있다. 무대에서 배우가 연기를 하는데 어느 한 순간 스크린과 무대가 한 장면에서 만나는 연극이었다. 여주인공이 언니를 부르며 무대 한쪽으로 달려 나가더니 스크린 속 나룻배를 탄 언니에게 반지를 빼서 건네주는 대목이 있었다. 그런 연극을 키노드라마라던가. 표현 매체는 얼마든지 실험적으로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실험은 실험일 뿐 본질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성균관대 고교백일장의 추억

 

 

 

   “술에 강한 자 소주 2홉, 술에 보통인 자 소주 1홉, 술에 약한 자 소주 반 홉.” 수치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소주, 약주, 탁주로 구분하여 개인의 적절한 주량을 술에 강한 자, 보통인 자, 약한 자 등으로 세분하여 써놓은 안내판이 술집 앞에 의무적으로 세워져 있었다. 또한 그 주량을 초과한 술꾼은 적발되는 즉시 체포될 것 같은, 어찌 보면 코미디 같은 포고령의 시대. 그게 단기 4294년이었다. 아니, 새벽의 방송국을 점령함으로써 쿠데타를 성공시킨 그들은 단기를 곧바로 서기로 바꿔 쓰도록 하였으니 1961년이란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들의 힘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높은 산허리에 돌무더기를 쌓아 '재건'이란 구호를 먼 데서도 잘 보이게 써놓았으며, 각급 교원들에게도 모택동복 같은 재건복을 입게 하였고, 인사말도 "재건합시다."로 간단히 통일시켰다. 연말에 전주로 내려온 고려대 국문과 신입생 오홍근 형은 '거꾸로 읽어도 청산이 되는 1961년이여'라는 대학생 김재원의 시를 들려주기도 했었다.

 

   전주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나는 그 해 10월 성균관대학교에서 주최한 전국 고교생 백일장 대회에 나갔었다. 명륜당의 아름드리 은행나무 이파리가 세상모르고 황금빛으로 아름다웠다. 서울에서 열리는 전국 고교생 백일장은 고등학생으로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주어진 제목은 '오늘'이었다. 김구용, 정한모 시인 등이 심사위원들이었다.

 

 

         오는 날을 위한 꽃

         꽃다움은

         공명할 수 없는 항아리

         속으로 지는

         잎새.

 

 

         지난날을 잊기 어려워

         차마

         버릴 수 없는

         곳

         그 점을 두고

         까악

         까악

         우짖는

         갈가마귀.

 

 

         —배앵 돌다

         아래로 떨어진다.

 

 

         아아,

         꿈처럼

         걷잡을 수 없이

         날개를 퍼덕이다

         가루 된

         심장.

 

 

         나갈 수 없는

         구멍으로

         바람

         바람

         불어와

 

 

         오는 날을 앗아가는

         항아리 안

         벽.

 

                 ―〈오늘〉전문

 

 

   오후 늦게 강평을 곁들여 입상자가 발표되었다. 입선에 내 이름은 들지 못했고 가작 입선된 몇 사람 중에도 내 이름은 없었다. 차하, 차상, 그리고 맨 마지막 장원에 이르러 "전주고등학교 강동길"이라는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상을 받는 자리에서야 나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걷잡을 수 없었다.

   전주고등학교 입학식 날, 교장 선생님이 교사 소개를 하면서, "우리 학교에는 시인 선생님이 네 분이나 계신다."고 자랑스레 소개할 때 나는 그저 덤덤히 들었었다. 신석정, 김해강, 백양촌(신근) 선생님과 《현대문학》으로 막 등단한 박희연 선생님이 그분들이었다. 생전 처음 듣는 시인들이라 나는 그저 이름 없는 향토 시인인가 보다고 혼자 생각하고 말았었다. 그러다가 1학년 여름방학 작문 숙제로 처음 써 본 소설이 계기가 되어 나는 미술반에서 문예반으로 끼이게 되었다.

 

   신석정 선생님은 전북대학교에도 출강하시면서 우리 학교 문예반을 맡아 지도하고 계셨다. 과분하게도 문예반 소년들에게 맥랑시대(麥浪時代)라는 동인의 이름까지 지어주시고 선생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해 주셨다. 3학년 오하근 형은 서라벌예술대학 주최의 전국 고교생 문학 콩쿠르에 시가, 2학년 강일부 형은 같은 문학 콩쿠르에서 소설이 당선된 쟁쟁한 서클이 전주고 문예반인 맥랑시대였다. 그 무렵 학생 잡지 《학원》은 고교생의 소설을 원고지 30 매 분량으로 싣고 있었으나, 맥랑시대 동인들은 보통 70 매 이상 1백 매 이상도 곧잘 써냈다. 2학년 때 낸 국판 총 110 쪽의 《맥랑시대》 2집에는 이한기, 오하근, 오홍근, 강일부, 강동길, 송준오, 박기운, 이추원, 김준일의 시, 수필, 소설이 실렸고 '젊은 문학도에게'란 제하의 신석정 선생님의 다음과 같은 서문이 얹혀 있었다.

 

   ……나는 일찍이 프랑스가 나치의 더러운 발길에 온갖 억압을 받았을 때, 국민과 더불어 젊은 문학도들은 지하에서 얼마나 치열한 투쟁을 감행했던가를 생각해 볼 때마다 문학은 선구하기에 피투성이의 싸움을 했고, 그러기에 조국을 구원했던 것을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문학이 걸어야 할 형극의 길인 동시에 또한 영광의 길이 아니었던가 한다. 불행하게도 맥랑시대 동인이 호흡하는 오늘의 역사는 그렇게 평탄한 길이 아니다. 항상 의연한 모습으로 탁류에 항거하여 그대들이 요구하고 그대들이 살아야 할 명일을 위하여 그대들의 노래와 이야기는 역사에 앞장서서 우리 이웃과 나아가서 인류 역사에 새롭고 억센 기록이 되기를 충심으로 바라는 것이다…….

 

 

  누가 봐도 떳떳한 등단을 하고 싶었다

 

 

   1962년 봄, 나는 가정 형편상 서울로 진학하지 못하고 전북대학교 국문과에 들어갔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자 우리 집은 급격하게 가세가 기울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수학여행을 나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전북대 국문과 선배들은 각 학년 40 명 내지 50 명쯤 북적거렸으나 우리 1학년은 군사 정권의 대학생 정원 축소 정책의 희생물이 되어 10 명 정원을 채우지 못하고 기껏 여섯 명이 전부였다. 대학에서 처음으로 학생 기자를 뽑는다기에 나는 대학신문사에 시험을 치르고 들어갔다. 대학 생활은 강의실보다 대학신문사가 더 좋았다. 나는 강동길이라는 본명과 여러 개의 필명으로 시, 소설, 수필을 가리지 않고 써서 대학신문에 발표하는 게 재미있었고, 때때로 필요한 삽화나 컷도 그렸다. 1학년 겨울방학이 끝나가는 1963년 2월에 전라북도 공보관 전시실에서 〈맥랑시대 동인 시화전〉을 열었다. 선후배가 망라된 자리로 이상렬, 손풍삼, 양선섭, 이철건 등 후배들도 함께 있었다. 그 팸플릿에 신석정 선생님의 〈온실〉이라는 작품명도 보인다.

   내가 신문의 신춘문예나 잡지의 신인 작품 공모에 열을 올리고 도전하기 시작한 것이 아마 이 무렵부터가 아니었나 싶다. 시만 써서 응모한 게 아니었다. 소설도 쓰고, 동화도 쓰고, 시조도 쓰고… 한 마디로 닥치는 대로 나는 썼고, 번번이 나는 낙선했다. 《현대문학》과 《자유문학》 두 문예지가 추천 제도로 신인 작품을 모집하고 있었는데도 나는 좀 더 당당하게 큰길을 가고 싶었다. 《사상계》의 신인상이나 신춘문예가 아니면 내 길이 아닌 것이다. 그게 신석정 선생님께 대한 제자의 도리라 생각했다.

   대학신문 기자였으므로 각 대학의 대학생 현상문예 소식을 쉽게 접할 수 있었고 그것은 습작기의 내게 항상 좋은 표적이 되었다. 대구에 있는 청구대학의 청구춘추사 대학생 현상문예에 시와 소설이 당선 없는 가작으로 뽑힌 게 2학년, 그리고 이듬해에도 같은 곳에서 시가 또 당선 없는 가작으로 뽑혔는데 소설은 오영수, 시는 신동집 선생의 심사였다. 3학년 늦가을 경북대학보사의 대학생 문예에 나는 처음으로 시가 '당선'되었다. 김춘수 선생이 심사한 자리였다.

 

   대학신문사에서 받는 적은 월급과 고료로 나는 《현대문학》이나 《문학춘추》 같은 문예지를 읽어보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고서점을 들락거리며 백수사에서 낸 한국단편문학전집 두어 권을 사서 읽기도 하고 월부로 큰맘 먹고 산 신구문화사의 《세계전후문학전집》 몇 권은 내 알뜰한 문학 교과서가 되기도 했다. 시론(詩論)을 강의해 줄 교수가 없었으므로 학교에서는 김현승 시인을 초빙해서 특강 형식으로 강의하기도 했고, 4학년 여름에는 고려대 김종길 교수를 초빙하기도 했다. 그 해 봄 나는 고대신문사의 대학생 현상문예에 〈내 이마의 꽃밭에서〉라는 시가 또 당선 없는 가작으로 뽑혔었기에 김종길 교수와의 만남은 정말 뜻있는 것이었다. 한 번은 그 작품에 대해서 선생님께 조용히 여쭤 보았더니 빙그레 웃으시며 "그건… 가작(佳作)이지."하는 한 마디뿐이었다.

 

 

  스물두 살 때의 처녀작 ‘귓밥 파기’

 

 

   시 창작에 관한 이론서가 지금은 넘쳐날 정도로 많지만 당시로서는 《시의 원리》나 《문장강화》 그리고 유치환, 박목월, 장만영 시인들의 자작시 해설집이 고작이었다. 그 가운데 내가 읽은 것으로는 장만영 시인의 책이 그래도 쉽고 인상 깊었었는데, 김종길 교수의 동 ․ 서양을 활달하게 넘나드는 시론 특강은 내게 벼락 치듯 눈이 번쩍 뜨여지는 탁월한 시론이었다. 시의 이미지, 운율, 비유, 상징을 비로소 나는 알게 된 것이었다. 여태껏 그런 기본조차 모르면서도 나는 무작정 쓰기만 해왔던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신석정, 김수영 두 분 시인을 내 시정신의 스승으로 흠모하는 동시에 김종길 시인을 시론의 은사님으로 마음속에 깊이 모시고 있다.

 

   1965년 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당신 앞에서〉로 또다시 당선 없는 가작에 머물렀던 나는 김광림 시인이 주재하는 《현대시학》이라는 월간 시지에 〈귓밥 파기〉를 응모하여 신인 작품으로 처음 문예지에 활자화되는 기쁨을 얻었다.

 

 

         나는 아내의 귓밥을 판다.

         채광가(採鑛家)처럼 은근히

         나는 아내의 귓구멍 속에서

         도란거리는 첫사랑의 말씀을 캔다

         더 멀리로는 나에 대한 애정(愛情)이 파묻혀 있는

         어여쁜 구멍

         아내의 처녀 적 소문을

         들여다보다가

         슬며시 나는 그것들을 불어버린다.

         아, 한숨에 꺼져버리는

         고운 여인의 은(銀)부스러기 같은 추억(追憶).

 

 

                —〈귓밥 파기〉전문

 

 

   돌아보면 내 젊은 날은 문학 말고는 다른 아무것도 내가 목숨을 걸고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게 없었다. 어느 해 여름방학 기간 중에는 하루에 한 편씩 50 펀의 시를 써 보기로 작정하고 또 그렇게 쓰기도 했었다. 대학 졸업 전까지는 기필코 문단에 당당히 나서리란 일념으로 나는 고집스레 쓰기만 했다.

 

   졸업을 앞둔 1965년 겨울의 크리스마스 전날을 잊을 수 없다. 동아일보사에서 신춘문예 당선 통지서를 보내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 눈부신 기쁨은 사흘 만에 사라져버렸다. 열흘 전 전북대학신문에 발표된 작품이므로 당선을 취소한다는 사연과(그런 규정이 명문화된 것은 그 다음해부터지만) 내가 보낸 당선 소감이 반송되어 온 것이었다. 미등단의 학생이 기껏 교내 신문에 발표한 시가 당선 취소의 사유가 된다는 건 무척 억울하였다. 지금도 신문에 따라 그런 경우 그냥 당선시키는 것도 있고 취소시키는 경우도 있다.

 

 

            1

 

 

         일천구백육십오년의 가을이 부두를 떠날 때

 

 

         겨울은 점령군(占領軍)처럼 급히 왔다.

 

 

            2

 

 

         부러울 게 없어야 할 시절에

         교정에서, 그 커다란 미루나무 아래서 모표(帽標)를 반짝이며

         애당초 글러먹은 기후(氣候)와 시(詩)를 이야기하던 친구가

         몰래몰래 막걸리를 마시더니

         무섭게 자라버린 그 친구가

         애당초 글러먹은 나라의 특등 사수가 되어

         터지는 포화(砲火) 속으로 달려간다 하지만

         우리들은 말릴 수가 없다.

         사랑하는 친구가

         떠난다 해도

 

 

         사랑하는 친구가 우리를 떠난다 해도

         하나 안 기쁘고 하나 안 슬픈

         그것은 일천구백육십오년.

         하나도 하나도 안 기쁜 환송(歡送)을 받으며

         친구는 웃었다.

 

 

            3

 

 

         일천구백육십오년의 가을이 부두를 떠날 때

         잠도 안 오는 이국 산천(異國山川)이 한꺼번에 빨려들어

         풍선 속을 팽창하다가 수천의 비둘기 똥에 짓눌렸던 게지.

         짓눌려 터지는 소리가 우리들의 방

         문풍지를 울렸던 게지. 그것은 일천구백육십오년.

 

 

         사랑하는 친구가 젊디젊은 나이를 총구(銃口)에 달고

         가버렸을 때,

         겨울은 무심히

         우리들의 텅텅 빈 가슴에 무심히

         겨울은 닻을 내렸다.

 

 

            4

 

 

         칫솔에 묻어난 피를 닦는 일상(日常)의 어느 아침

         문득 받아든 에어 메일,

         친구의 얼굴이 두 손바닥으로 감쌀 수 있는

         그래서 안녕(安寧)이 더 그리운 수만리 밖의 체온

         체온을 만질 수 있는 문명을

         감사해야 할까,

         날아온 친구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사랑하는 친구는, 하늘이 뜻한다면

         고향 집 마당도 쓸고

         보리밥 된장찌개도 먹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낯선 바람에 깎여 코가 커지고 눈알이 파래진다고

         사랑하는 친구는 웃고 있지만

         그것은 일천구백육십오년.

 

 

            5

 

 

         일천구백육십오년의 겨울이

         우리들의 내장 속에서 정박(碇泊)을 하고

         우리들은 지금, 글러먹은 땅에서 어차피 굴러먹는다.

         창자 속에 얼어붙은 겨울을 꺼내어

         개선장군처럼 웃는다.

         산다는 것이 즐거워서 웃는다.

 

 

         그것은 일천구백육십오년.

 

 

            6

 

 

         일천구백육십오년의 가을이 부두를 떠날 때

 

 

         우리가 떠나온 그 교정의, 그 미루나무 아래에선

         우리들의 동생이 글러먹은 기후와 시(詩)를 마시며

         아, 무섭게 자란다.

         미루나무는 이파리도 없이 무섭게 자란다.

 

                 —〈1965〉전문

 

 

   아마 심사평을 다시 썼을 것이었다. 심사위원 조지훈, 김현승 시인이 내 시 〈1965〉와 〈빙하기〉에 대해 알쏭달쏭한 선후평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런 사정에서였다. 1966년 1월 1일.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 궁금했다. 이가림(이계진)의 〈빙하기〉! 이가림, 그는 바로 내 고교 동창 친구가 아닌가. 친구의 카추샤부대 주소가 너무도 낯익었다. 문예반을 기웃거리지도 않고 아무도 몰래 혼자서 문학의 외길을 밟던 그 친구였다.

   그 해 봄 교직에 들어선 나는 여름철에 문고판 크기의 첫 시집 《이상기후》를 냈다. 물론 〈1965〉를 포함한 30여 편의 시를 담았고 3백부밖에 못 찍은 처녀시집이었다. 그 참담한 기쁨이란 어쩌면 미혼모 같은 심정과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1967년 〈대운동회의 만세소리〉가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었다. 김수영, 박태진 시인이 심사위원이었다.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두 군데 신문이 더 있었다. 그토록 열망했던 당선의 기쁨은 그러나 하나도 눈부시지 않고 왠지 허허롭기만 할 뿐이었다.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는 시에 강인한의 〈대운동회의 만세소리〉, 단편소설에 최인호의 〈견습환자〉, 희곡은 오태석의 〈웨딩드레스〉가 각각 당선되었다. 시상식이 지난 뒤, 동인지가 없어질 때까지 몇 년 동안 나는 이가림 등과 신춘시(新春詩) 동인으로 참여하였다.

   1969년 12월에 마지막으로 간행된 《신춘시》19집에 참여한 동인 명단을 여기 적어본다. 강인섭, 강인한, 강희근, 권오운, 권일송, 김원호, 김종철, 노익성, 박봉우, 박정만, 박이도, 신명석, 신세훈, 윤삼하, 이가림, 이근배, 이탄, 장윤우, 조태일, 채규판, 황명.

 

 

  음치가 부르는 노래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는 음치다. 무슨 클리닉으로도 교정이 불가능한 완벽한 음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노래를 불러야 하는 자리라면 딱 질색이다. 옛날엔 여행을 좋아했는데 요즘은 그게 시들해졌다. 단체 여행의 경우, 장시간의 버스를 타고 갈 때면 으레 돌아가면서 노래를 부르게 하여 흥겨워하건만 이럴 때 나는 차라리 버스를 내리고 싶을 만큼 참담한 심경이 된다. 단체 여행에서의 고역으로 인해 내게는 은연중 여행 기피증이 생기게 되었다.

   노래방에서 구성지게 노래를 잘하는 사람을 보면 부럽다. 학창시절 교과 성적표를 보면 음악은 항상 '미'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나는 가수들보다 술자리에서 노래 잘 부르는 사람이 더 부럽다.

 

   우리 집 식구들은 이상하게도 나만 빼놓고 노래를 썩 잘 부르는 편이다. 아내는 패티김의 노래를 근사하게 잘 부르고 아들 녀석도 김종서 뺨치게 노래를 잘 불러 대학 축제 때는 여학생들 팬도 많았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 두 딸들도 제 엄마 이상으로 노래를 잘 부른다. 어쩌다가 내가 혼자 흥에 겨워 집에서 노래를 흥얼거리면 막내딸이 제일 성화를 댄다. 제발, 괴롭히지 말라는 거다. 음정도 박자도 엉망인 내 노래를 듣는 건 고역 이상의 정신적인 고문이란다.

   나는 그러나 음악을 좋아한다. 이건 그러니까 짝사랑이다. 고교 시절엔 스테파노의 〈별은 빛나건만〉이나 카니 프란시스의 〈말라게니아〉를 즐겨 흥얼거리기도 했었다. 물론 나 혼자만의 공간이 보장되는 자리에서였다.

 

   시를 쓰면서 이따금 내 시가 노래로 작곡되면 좋겠다는 소박한 소망을 가져본 때가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기욤 아폴리네르의 많은 시가 작곡되어 프랑스 국민들에게 널리 사랑받고 있노란 얘기를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순수시와 대중가요 사이에는 얼마나 깊은 골이 있는 것인지. 그래서 나는 대중가요의 가사를 내가 직접 써 본 적이 있었다.

   1972년 무렵이다. 그 당시 동양방송(TBC)에서는 청취자들을 상대로 건전 가요의 노랫말을 공모하는 프로가 있었다. 매주 토요일 오후의 《신가요 박람회》라는 프로였다. 한 주일 동안 응모된 가사들 중에서 한 편을 뽑아 세 사람의 작곡가에게 작곡을 의뢰한 뒤, 다음 주에 한 곡을 선정하고 그것을 보급하는 프로였다. 우수작으로 뽑힌 가사에는 시 한 편의 열 배쯤 되는 고료를 주었다.

   나는 그 《신가요 박람회》의 단골 응모자였다. 시인으로서의 이름이 아닌 내 본명(강동길)으로 응모했는데 아마 열 편쯤 가요로 작곡되었다고 기억된다. 그러나 정작 음반으로까지 남은 건 딱 두 편뿐이다. 박인희가 부른 <하얀 조가비>와 영사운드가 부른 <등불>의 두 곡이 그것이다. 가사 한 편 고료는 시 열 편에 맞먹는 값이었다.

 

 

         고동을 불어 본다 하얀 조가비

         먼 바닷물 소리가 다시 그리워

         노을 진 수평선에 돛단배 하나

         루루루 하얀 조가비 꽃빛 물든다

 

 

         귓가에 대어본다 하얀 조가비

         옛 친구 노랫소리 다시 그리워

         황혼의 모래밭에 그림자 한 쌍

         루루루 하얀 조가비 꿈에 잠긴다

 

 

   조가비란 조개껍데기의 순우리말이다. 한자어로는 패각(貝殼). 박인희가 불러준 이 노래는 그 무렵 꽤 많이 전파를 탔고, 길거리의 레코드 가게를 지나치면서 그 노래를 들을 때도 많았다. 맞물린 조개껍질의 볼록한 부분을 시멘트 바닥에 벅벅 갈아서 두 개의 구멍을 내고, 그걸 입에 물고 불어보면 뱃고동 소리 같은 듣기 좋은 소리를 내었다. 어린 날의 그런 추억과 바다를 향한 그리움을 나는 그 노랫말에 담은 것이었다. <하얀 조가비>는 듣기엔 아름다운 곡이었으나 내가 따라 부르기에는 왠지 음정을 맞추기가 어려운 노래였다.

 

 

         그대 슬픈 밤에는 등불을 켜요

         고요히 타오르는 장미의 눈물

         하얀 외로움에 그대 불을 밝히고

         회상의 먼 바다에 그대 배를 띄워요

         창가에 홀로 앉아 등불을 켜면

         살며시 피어나는 무지개 추억

 

 

         그대 슬픈 밤에는 등불을 켜요

         정답게 피어나는 밀감 빛 안개

         황홀한 그리움에 그대 불을 밝히고

         회상의 종소리를 그대 들어 보아요

         창가에 홀로 앉아 등불을 켜면

         조용히 들려오는 님의 목소리

 

 

   이 노래는 조명이 은은한 분위기의 멋스런 카페에 가면 심심찮게 들을 수 있었다. 노랫말에 시적 은유를 곁들여선지 많은 이들이 영사운드의 <등불>을 좋아하였다. 이 무렵 내 시에는 '등', '등불', '램프' 같은 시어가 많이 쓰였던 시기였다.

   어쩌다가 술자리가 2차, 3차로 옮겨지고 노래방에 떼 지어 몰려가는 게 보통인데, 그런 자리에서 짓궂은 친구들이 하필 내 노래를 강권할 때면 나는 괴로워진다. 음치가 여러 사람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은 차마 제 정신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나는 내 앞의 술을 거듭 두 잔쯤 들이켠다. (*)

 

 

 

           —월간《유심惟心》2013년 7월호

 

 

현대시 편지 릴레이>

신춘문예에 대한 생각
―이가림 시인에게

강인한



가림.
참 오랜만에 친구에게 편지를 쓰게 되었군요. 친구가 일하는 사무실로 한 번 찾아가 보려니 하면서도 막상 쉽게 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어요. 전에 카피라이터 친구 이만재의 말처럼, 나이가 들면 행동이 느려지는 때문인 것 같아요.
이 편지를 받아볼 때쯤이면 신춘문예의 결과가 발표되고 있을 무렵이겠네요. 가림, 생각나요? 내가 조선일보 당선 한 그 해던가, 그 다음 해던가 1월 하순 무렵이었을 거요. 김원호 시인, 그리고 가림과 나, 또 누가 더 있었는지 기억이 희미하지만 조지훈 선생님 댁을 찾아간 일. 우리는 그 때 푼돈을 각자 털어서 둥근 알미늄 통에 든 백설표 설탕을 한 통 선물로 사들고 성북동 골짜기를 찾아갔지요. 골목은 보안등도 없이 어두워서 성냥불을 켜서 문패를 더듬어보니 거기 '趙芝薰'이라는 명함 한 장이 달랑 붙어 있었던 것 기억하고 있을까요?
선생님은 한복 바지저고리에 마고자를 입고 계셨고 반가이 젊은 후배시인들을 맞아주시었지요. 생각해 보면 당신의 연세가 40대 중반을 막 넘어섰을 때였는데 우리는 마치 60대의 대선배 시인을 대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어요. 그건 아마도 대가의 풍모로 인해서 그런 착각을 불러일으킨 것 같아요.
그 무렵 신춘문예 광고가 신문에 나기 시작하는 게 보통 11월 초였어요. 그 때부터 우리 젊은 문학도들은 신문의 신춘문예광고를 무슨 표어처럼 책상 앞에 붙여놓고 결의를 다지곤 했지요. 나이 스물을 막 넘긴 새파란 문학청년 시절.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시에 매달렸던 그 시절. 40년도 훨씬 전의 일이오. 보통 50 행을 넘는 시들이 신춘문예 당선작들이었고, 그만한 길이를 소화해 낼 수 있는 힘을 심사위원들이 눈여겨보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마치 기미독립선언서처럼 두루마리로 길게 덧붙여서 쓴 시를 읽고 고치고… 그러기를 족히 열 번도 더했을 거요. 아마 그런 기억은 나 말고 가림도 다른 우리 또래의 친구들도 다 마찬가지였을 거라고 생각해요. 현실 의식이 비교적 강한 성향에 모더니즘의 색채를 입힌 시들. 지금 돌아보면 오늘까지 시의 동아줄을 놓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절반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아요. 그 때는 '신춘 고아'란 말이 그렇게 적절할 수가 없었지요. 불과 두세 개 문학지밖에 발표 지면이 없었고, 신문에서는 기껏 한두 차례 행사시로 지면을 내주는 게 자사 출신의 당선시인에게 베푼 혜택의 전부였으니까요. 아마도 그런 까닭에 '신춘시' 동인지나 '현대시' 동인지가 주요 활동 무대가 되었고 그런데 실은 그게 또한 후배들에게는 부러움을 샀던 것이기도 하였지요.
그리고 또 한 가지. 해마다 새로운 신춘 당선시인들을 '신춘시' 동인들이 모두 한 자리에 초대하여 그들에게 술 한 잔씩 권하며 어깨를 두드려주기도 하였던 일. 어쩌면 험난한 길을 가겠다고 나선 그들이 측은해서 알은체해 주는 동병상련의 선후배 대면식이 아니었던가요. 지금도 그런 일을 선배 시인들이 나서서 해준다면 좋을 텐데.
요즘 생각하면 신춘문예 당선자들은 예전보다 훨씬 수월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여건이 좋아졌다고 보여요. 굳이 주머니를 털어 동인지를 만들 필요 없이 여기저기 잡지에서 특집으로 초대해서 새내기 시인들에게 떠들어보라고 마련하는 자리가 얼마나 많은가요? 8년 전 에 당선한 어느 신춘문예 출신 시인이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신춘문예 당선자는 적어도 20 편 정도 당선작 수준의 작품이 비축돼 있어야만 한다고. 그래야만 이후에 초대되는 지면에 빠지지 않고 작품을 공급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미처 그것을 다 댈 수 없는 시인은 하나둘 경쟁에서 낙오되어 가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꼭 그렇지만은 않겠지만 모처럼 어려운 관문을 통과한 신인이 스스로 탈진해버리는 일은 애석한 일이겠지요.
이상한 일이지만 요즘 시를 쓰겠다고 이를 악물고 나서는 20대 문학청년을 보기가 참 어렵데요. 오히려 30대 후반부터 40대 중반에 이르는 이들이 옛날의 문학청년인 것 같아요. 그리고 시인이 되기 위해서 대학원에 진학하고 더러는 박사과정을 밟는 이들도 있지 않던가요? 이건 학력의 낭비 같아요. 시가 지식의 축적이 아닐진대 굳이 대학원까지 이수해야 한다는 것은 어쩐지……. 물론 개중에는 좀더 다른 포부가 있어서 그러기도 하겠지만. 아무튼 문학청년들이 40대에 많다는 사실 이것을 좋게 보아야 할지 나쁘게 보아야 할지 쉽게 판단하기 어려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신문사들이 실정을 고려치 않고 신춘문예 응모 요강 중에 굳이 응모자의 주민등록번호를 기재하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볼까요. 모르면 몰라도 은근히 젊은 당선자를 뽑겠다는 저의가 들어 있는 듯하지요. 예나 이제나 신춘 당선자는 적어도 1천 대 1의 경쟁을 뚫는 것이 현실인데, 당선자가 10대면 어떻고 설령 60대면 어떻겠어요. 자기들이 열심히 뒷받침해주지도 않는 처지에 말이지요. 응모작 가운데 가장 저력 있고 뛰어난 한 편을 뽑는 일인데 그런 작품을 응모한 신인이 물론 젊은 사람이면 좋겠지만, 허나 나이 많다고 경쟁에서 불이익을 받는다면 그건 고약한 일이 되겠지요.
이태 전 내가 서울로 이사와서 좀더 자세히 알게 된 어떤 문학잡지들의 등단에 관한 뒷 이야기들은 믿고 싶지 않을 정도로 구린 게 많더라고요. 그런 걸 생각하면 신춘문예는 청정구역을 표방하는 등단제도라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어요.
가림. 이 겨울 감기 조심하시고, 친구가 좋은 시 계속해서 많이 쓰시기를 빌게요.

<현대시> 2008.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