샛강에 서서 / 허정분
허정분의「샛강에 서서」해설 / 권순진
샛강에 서서
허정분
수수만년 누대를 흐른 강물에 눈이 내린다
눈보라치는 혹한 아랑곳없다는 듯
강물은 눈을 먹으며
촤르르, 촤르르, 제 몸에 죽비를 친다
분분한 눈발들이 적막에 길들여진 강기슭에
켜켜이 쌓이는 어스름 녘
가난을 제 부리에 묻힌 새 몇 마리가
직선과 곡선의 골격으로 허공을 받드는
아카시아 나무에서 졸고
자폭하듯 뛰어내리는 눈발들을 끌어안은 이 강물은
어느 산골짝 샛강 여울을 돌아 흘러
초경 터트리듯 저리 순결한 신음소리로 앓는 것일까
소리 벽을 치는 물살들로 깨어 있는
강바닥의 크고 작은 돌들이
제 몸의 무늬들을 선명히 마모시키며
둥글게 사는 법을 배워가는 이 강은
아직 강 밖 더러운 세상을 모른다
낙동강, 영산강, 금강, 남한강, 반도의 母川들을
한 물살로 수장시켜 죽이려는
운하인지 시궁창인지 그 음모를 모른다
다만 이렇게 깨어있는 정신으로
늘 새 물길로 흐르면서
주름 깊고 부드러운 어머니의 자궁 같은
큰 물길에 보태져서 그 젖줄에
삶의 호적을 둔 숱한 생들을 기르고
새파랗게 낯선 꿈을 날마다 흘려보낼 뿐이다
—시집『울음소리가 희망이다』(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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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분 시인은 예순을 훌쩍 넘긴 분이시다. 대뜸 나이를 들먹이는 무례를 감행한 이유는 그 연세에 이토록 치열한 시를 쓸 수 있다는 것이 우선 놀라웠기 때문이다. 좋은 시는 시를 쓴 사람의 신분이 베일에 가려져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즉 시를 봐가지고서는 20대가 쓴 시인지 60대가 쓴 시인지 분별이 어려워야 하고, 그 시인이 남성인지 여성인지도 아리송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 시가 꼭 그러하다.
세상을 살아가며 직접 보고 겪고 느낀 현상과 사물을 시인이 지닌 언어의 프리즘으로 반사하는 행위가 시를 쓰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허정분 시인이 지닌 그 프리즘의 성능은 예사롭지 않다. 시인은 1996년 등단하여 이미 두 권의 시집을 낸 바 있고, 이번 세 번째 시집을 펴냄으로써 중견 시인의 반열에 들어섰다고 해도 허언은 아니다. 특히 시적 역량을 오롯이 드러낸 이번 제3시집의 시편들은 대충 훑어보고 넘길 시가 단 한 편도 없었다.
시인에게 시는 그리움과 사랑, 그리고 꿈이 오롯이 담긴 생의 기도이며 처방전이다. 시인 자신에겐 시가 종교이며 고독과 억압을 완화하는 상설 위로역임은 물론이지만, 그리하여 그 시를 읽는 사람들에게까지 삶을 겸허와 공경으로 받들도록 전이시키고 있다. 그만큼 시인의 시에는 인격이 고스란히 구현되어 있어 웅숭깊은 혼이 느껴진다. 삶의 한 방편으로만 구실하지 않고 영육이 온전히 투신되었음을 본다.
운명의 한 순간 혹은 영혼의 한 순간을 드러내는 시와 행간에서 시인의 밀도 높은 삶을 짐작할 수 있으며 삶에 대한 시인의 진정을 읽어낼 수 있다. 시는 시인을 닮는다고 한다. 시품은 곧 인품에서 나온다는 말도 있다. 문단에서는 사람과 시를 별개로 취급하는 관용적 분위기가 실재하고 일정 부분 동의 못할 바도 아니지만, 사람의 등급에 따라 시의 등급도 매겨진다면 감히 허정분 시인의 시는 일등급이라 해도 좋으리라.
‘샛강에 서서’ 삶을 성찰하는 모습은 그에겐 일상의 포즈라 할 수 있다. 속살로 흐르는 강의 물길 위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탐구와 삶에 대한 태도가 읽힌다. 그리고 바탕의 정신에서 환경에 대한 염려를 들을 수 있고, 서정의 울림통 안에 담겨있는 시인이 지향하는 가치도 어렴풋이 엿보인다. ‘순결한 신음소리’같은 울음이 희망임을 긍휼히 받아들이면서, 그 낱낱의 소망과 희망을 담은 글들이 모여 이번 시집으로 묶여 나왔다.
권순진 (시인)
여뀌들
정병근(1962∼)
다 필요 없어
제발 버려줘 잊어줘
우리끼리 잘도 자랄 테니깐,
눈 밖에서 더 잘 크는 놈들
모가지에 벌겋게 독 오른 놈들
목젖 가득 차오는 폐단을 주체할 수 없어
아무나 잡고 맞짱 뜨자는 놈들
모래밭에 떼거리로 서서
온몸을 긁고 있었다
무서워서 아들놈을 재촉하며 돌아오는데
야, 그냥 가냐. 그냥 가!
아스팔트 산책로에 들어설 때까지
등 뒤에서 감자를 먹였다
중랑천변 모래밭, 여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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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뀌는 물을 따라 씨를 퍼뜨리는 한해살이풀로서 물가에서 자란다. 강한 매운 맛이 있어서 향신채로 쓰이는 그 잎을 짓찧어 물에 풀면 물고기가 배를 뒤집고 떠오른단다. 물고기같이 작은 생물에게는 독초일 테다. 사람의 입김이 닿지 않는 곳에 돋아나 거칠게 자라는 여뀌 같은 풀들을 우리는 잡초라고 부른다. 어른의 따뜻한 눈길에서 벗어나 잡초처럼 크는 아이들. 그들은 사람들이 자기들을 잡초라고 부르건 산야초라고 부르건, 여뀌만큼이나 관심 없다. ‘다 필요 없어/ 제발 버려줘 잊어줘’ 부르짖을 뿐이다. 그 아이들은 ‘눈 밖에서 더 잘 크는 놈들’이다. 눈에 띄면 뽑아버릴 테니까. ‘목젖 가득 차오는 폐단을 주체할 수 없어/ 아무나 잡고 맞짱 뜨자는 놈들’이 ‘모래밭에 떼거리로 서서/ 온몸을 긁고 있다’. 가진 것은 독기뿐인 무서운 아이들, 불량기 넘쳐 보이는 패거리를 중랑천변을 거닐다 맞닥뜨린 화자는 아들을 재촉하며 모래밭을 벗어나 아스팔트 산책로로 도망친다. 아이들의 독기가 화자의 등 뒤에서 잉잉거린다.
이 시가 실린 정병근 시집 『번개를 치다』에는 서울의 ‘아스팔트 산책로’ 밖 사람들의 초상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때로 고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그들은 위험한 타자가 아니다. ‘좋은 경치 바위에게 다 주고/ 사지가 뒤틀린 채/ 사람 발 닿을 때마다/ 다부지게 몸 받치는 소나무’(시「업(業)」에서) 같은 삶이나 ‘죽는 순간까지 필사적으로 기어가는’(시「나팔꽃」에서) 삶이 시 속 아이들의 주위 어른들 모습이다. 힘없고 기죽은 그들이 누구를 해친다면 그건 그 자신일 테다. 저 아이들의 여뀌 시절이 그저 한때이기를….
황인숙 (시인)
점박이꽃
손진은
발을 헛디뎠을까
차가 향기의 벼락 속으로 뛰어든 걸까
지품에서 진보로 넘어가는 국도변에
만삭의 노루가 앉은 듯 누워 있다
금방 어린것이 나올 듯한 황갈색 배를 꿈틀거리며
기품 있는 목은 든 채
하트 모양의 발굽 향기를 찍으며
저 순한 어미는 알까
곧 어룽이는 빛살 속에 찬 기운이 섞이고
화사한 생을 거두어갈 것을
가장 먼저 알아볼 개미가 몰려들 것을
쿡쿡 독수리가 발톱으로 찔러볼 것을
귓불 도톰한 상수리 잎도 읽지 못하는
아직 구름이 놀고 있는 가랑가랑한 눈의 호수
아지랑이의 현기증 일으키는 젖은 코
저 일렁이는 꽃시간
아무것도 모르고 까치는 날아와
발끝에 향기 찍어 상수리나무 어깨로 날아간다
건듯거리는 바람이 왜 그래, 어깰 툭툭 치며
부신 햇살에 타는 털을 오래 만진다
저 빤히 쳐다보는 눈동자가 사라질 거라곤
곧 이곳을 방문할 죽음의 그림자도 생각 못할 것이다
생의 아른한 둘레가 한 획 쉼표로 편안해질
한 마리 순한 짐승이 만드는 눈의 경전 앞에
내가 지은 경계가 사정없이 무너진다
이제 곧 길 가던 농부가 저 꽃향기를 수습해갈 것이지만
저 곳의 햇살은 노루가 떴던 눈을 감는 속도로 저물어갈 것이다
둘레도 풍경도 될 수 없는 난
조각구름만도 못한 안부를 던져놓고 갈 뿐
—《시사사》2014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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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은 / 1959년 경북 안강 출생. 1987년 〈동아일보〉신춘문예 당선. 시집 『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눈먼 새를 다른 세상으로 풀어놓다』『고요 이야기』. 현재 경주대학교 문창과 교수.
촉
나태주(1945~ )
무심히 지나치는
골목길
두껍고 단단한
아스팔트 각질을 비집고
솟아오르는
새싹의 촉을 본다
얼랄라
저 여리고
부드러운 것이!
한 개의 촉 끝에
지구를 들어올리는
힘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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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내 움츠러들었던 것들이 풀리는가, 온몸이 으슬으슬하다. 또 봄 병을 앓는 것인가, 마음도 천 갈래 만 갈래 심란하다. 미세먼지에 시야가 가려 앞산 뒷산 분간 못할지라도 저 산하에도, 이 도심 아스팔트 아래에도 넘치는 봄기운에 감동해 이 몸과 마음이 앓는 것이 봄 병일 터. 새봄 새로 솟는 힘, 삼라만상 신생의 그 기운과 이물감 없이 어우러지는 감기(感氣)가 봄 병인 것을. 시인은 ‘얼랄라’라는 감동으로 그런 봄기운과 어우러지고 있네. 여리지만 지구를 들어올리는 저 봄 새싹의 한 촉 같은 게 바로 우리 사회와 시대의 시일 것을. 삶의 각질을 뚫고 피어오르는 시의 깊이와 무게, 존재의 위의(威儀)일 것을.
이경철(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