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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국화 / 천상병

법정 2013. 10. 28. 22:10

 

천상병의 「들국화」감상 / 황인숙

 

 

 

 

들국화

 

 

   천상병(1930∼1993)

 

 

 

 

산등성 외따른 데,

애기 들국화.

 

 

바람도 없는데

괜히 몸을 뒤뉘인다.

 

 

가을은

다시 올 테지.

 

 

다시 올까?

나와 네 외로운 마음이,

지금처럼

순하게 겹쳐진 이 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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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님의 생몰(生沒) 연대를 옮겨 적으며 무심히 나이를 계산하다가 깜짝 놀랐다. 정말 63세에 돌아가셨어? 인사동에서 우연히 몇 차례 뵈었던 모습을 떠올리며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틀림없다. 서른 안팎 사람의 눈에는 예순 안팎 사람이 한참 노인으로 보이기 십상이지만, 그걸 감안해도 선생님은 십년 세월은 더 지나간 모습으로 기억된다. 가슴이 시리다. 선생님의 창창하게 젊은 시절을 짓밟은 모진 시대, 그 뒤에 만신창이가 된 선생님의 삶…. 그래도 천진하고 선한 성품을 잃지 않으셨다. 사회인으로 세상 안에 계실 곳은 없었지만 보석 같은 시를 계속 쓰셨다. 들국화, 나이 들어서도 애기 들국화 같았던 시인.

 

   들국화 꽃은 가을에 피어나 가을에 진다. 그래도 들국화 꽃은 봄도 모르고 여름도 모르는 저를 슬퍼하지 않는다. ‘가을은/다시 올 테지’ 고개를 갸웃이 기울인 들국화의 애잔한 속내가 들리는 듯하다. 져가는 들국화의 가녀린 모습에 시인의 모습이 겹친다. ‘다시 올까?/나와 네 외로운 마음이,/지금처럼/순하게 겹친 이 순간이……’ 내가 내년 가을에도 살아 들국화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아니, 내 마음이 이렇게 순하게 살아나는 순간이 또 올까? 고마워라, 들국화! 시인의 지순하고 맑은 마음과 만나 들국화, 이렇듯 향기로운 시로 자취를 남겼네. 이 시를 기약 없는 이별을 애달파 하는, 들국화 같은 연인의 짧은 조우로 읽어도 좋겠다. 이제 들국화를 보면 천상병 선생님 생각이 날 것 같다.

 

 

   황인숙 (시인)

 

12월

 

 

   김이듬(1966~)

 

 

 

 

 

 

저녁이라 좋다

거리에 서서

초점을 잃어가는 사물들과

각자의 외투 속으로 응집한 채 흔들려 가는 사람들

목 없는 얼굴을 바라보는 게 좋다

너를 기다리는 게 좋다

오늘의 결심과 망신은 다 끝내지 못할 것이다

미완성으로 끝내는 것이다

포기를 향해 달려가는 나의 재능이 좋다

나무들은 최선을 다해 헐벗었고

새 떼가 죽을힘껏 퍼덕거리며 날아가는 반대로

봄이 아니라 겨울이라 좋다

신년이 아니고 연말, 흥청망청

처음이 아니라서 좋다

이제 곧 육신을 볼 수 없겠지

움푹 파인 눈의 애인아 창백한 내 사랑아

일어나라 내 방으로 가자

그냥 여기서 고인 물을 마시겠니?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널 건드려도 괜찮지?

숨넘어가겠니? 영혼아,

넌 내게 뭘 줄 수 있었니?

 

 

 

                  —시집 『말할 수 없는 애인』(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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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생이 자유로운 영혼은 몸과 마음을 비끄러매 둘 수 있는 곳을 찾아다닌다. 겉보기엔 분방해 보이지만 속내는 어딘가에 묶이고 싶은 것이다. 결핍은 그쪽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생래로 정돈된 영혼은 일탈에 대한 갈망이 크다. 겉으로는 틀에 박혔지만 속내로는 무한한 자유를 갈망한다. 출구가 그쪽이기 때문이다.

 

   두 부류는 서로를 향해 달려가는 기차다. 교차하는 중간 지점에는 시가 없다. 발과 꿈의 거리가 멀수록 시의 파격과 낯섦의 정도가 도출하는 울림이 크다. 최선을 다해 꿈을 멀리 보낼수록, 달려가 거세게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울컥울컥 선혈처럼 시가 피어난다.

 

   대체로 사람들은 태생에 따라 생래에 따라 디딘 발, 뿌리 뻗은 곳에서 산다. 그러나 시인이란 존재는 발과 꿈의 이격 정도가 멀고, 호기심 또한 만만찮은 사람들이다. 시는 그런 무모한 여정의 종점을 향해가는 불쌍한 기록이다. 언젠가는 다시 발로 돌아갈, 그러나 (시를 버리지 않는 한) 기약할 수도 없는.

 

 

  안상학 (시인)

 

 

 

 

중심을 비운 것이 도넛이다 (외 1편)

 

 

   이심훈

 

 

 

 

 

중심을 비운 것이 도넛이다

베이킹파우더처럼 중심을 향하여

자고새면 끝없이 부풀어 오르는 욕망

 

 

지구 온난화로 뚫린 오존층의 고리를

붙들어 맬 잘 빠진 구멍이 도넛이다

도넛 구멍은 때로는 묵시적 바라보기

우산으로 그 작은 구멍을 가릴 수 없다

 

 

우산 하나로 모든 것

가려 주고 싶은 사람이라면

마음의 성층권 밖에서 내려다보라

습성처럼 그 작은 도넛 구멍 안에서도

갑이나 을이 되어 베이킹파우더는 부푼다

 

 

머리기사부터 비슷해도 같은 날이 없는

조간신문은 빵 굽기 전에 오고

되짚어가는 달빛이지만 지루한 적 없는

마감 뉴스는 빵 굳은 후 끝나지만

잘 익고 마른 고추처럼

속까지 다 보이는 특별한 구멍이

기억의 중심이어야 맛깔스런 도넛이다

 

 

도넛 안에서 자생하는 의식의 팡이실

바이러스처럼 의미가 스멀대야 도넛이다.

 

 

 

 

 

자드락밭에서

—신례원역

 

 

 

 

 

가을 씨앗 묻은 철로변 자드락밭

오목하게 패인 고만고만한 흔적들

팔분음표 같은 참새들이 날아와

늦가을 고운 흙 목욕을 한다

 

 

달걀껍질에 들어앉은 듯

제 몸에 맞는 목간통

겨울맞이로 돋은 솜털

허공에 털며 재잘거린다

 

 

한때는 직물공장이 들어서

참새 떼 같은 누이들이

파 싹처럼 비비대던 신례원

공순이 누이도 참새처럼 부산했다

 

 

새털처럼 날아가는 게 세월이라

흘러가는 구름 그림자가 떼어놓은

자드락밭에 파 싹처럼 돋아나는 상념

새털구름 떠가는 밭둑 억새꽃 같은 누이

종재기 하나 잦혀놓은 듯

그거면 넉넉하니 편하겠다

손아귀에 쥔 것도 없이 포르르

날아오르면 되니 개운하겠다.

 

 

 

 

                          —시집『장항선』(2013)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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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심훈 / 충남 부여 출생. 1988년 시집 『못 뺀 자리』로 작품 활동 시작. 2003년 《시사사》등단. 시집 『안녕한가 풀들은 드러눕고 다시 일어나서』『시간의 초상』『장항선

 

 

      나 무 / 류 시 화


      나무는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는 걸까

      그러나 굳이 바람이 불지 않아도
      그 가지와 뿌리는 은밀히 만나고
      눈을 감지 않아도
      그 머리는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있다.

      나무는
      서로의 앞에서 흔들리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는 걸까

      그러나 굳이 누가 와서 흔들지 않아도
      그 그리움은 저의 잎을 흔들고
      몸이 아프지 않아도
      그 생각은 서로에게 향해 있다.

      나무는 저 혼자 서 있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는 걸까

      세상의 모든 새들이 날아와 나무에 앉을 때
      그 빛과
      그 어둠으로
      저 혼자 깊어지기 위해 나무는
      얼마나 애를 쓰는 걸까.




                     

                    김종삼의 「물통」감상 / 김민정

                     

                     

                     

                     

                    물통

                     

                     

                       김종삼(1921~84)

                     

                     

                     

                     

                     

                    희미한

                    풍금 소리가

                    툭 툭 끊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무엇을 하였느냐는 물음에 대해

                     

                     

                    다름 아닌 인간을 찾아다니며 물 몇 통 길어다 준 일밖에 없다고

                     

                     

                    머나먼 광야의 한복판 얕은

                    하늘 밑으로

                    영롱한 날빛으로

                    하여금 따 우에선

                     

                     

                     

                                  -시선집『북 치는 소년』(민음사,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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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이면 습관처럼 꺼내드는 시집 한 권이 있습니다. 제목이 라팜팜팜을 연상시키는 『북 치는 소년』이어서만은 아닐 겁니다. ‘김종삼’이라는 참으로 시답다 싶은 이름 때문만도 아닐 겁니다. 얼음 같은 차가움이, 송곳 같은 날카로움이, 쉽게 삐쳐버리는 이처럼 모난 데를 짐작하게 하는 팽함이 분명 느껴지는 짧은 시편들 속에서 묘하게도 시가 참 온기를 남기더란 말입니다. 왜 할 말만 하는 이를 일컬어 그 사람 얄짤없네, 라는 표현을 쓰곤 하지요. 시 한번 쓸라치면 주저리주저리 구시렁구시렁 서두부터 사람 잡아먹고 보는 내 시와는 반대로 아 이제 시작되나보다 준비 자세를 갖추는데 마침표를 찍어버리고 유유히 돌아서는 그의 시가 그럼에도 글쎄 두고두고 마음 한구석에 짠함으로 남더라는 말입니다. 온기와 짠함, 대체 이 밑도 끝도 없는 애정은 어디에서 샘솟는가, 그 연원을 찾고 보니 욕심을 모르는 자에게 향하는 나침반의 자연스러운 지침이 아니었을까 싶은 것이었습니다. 오로지 나, 나, 나를 드러내기 위해 그런 과신을 위해 애꿎은 힘을 쏟지 않고 나도 너도 세상도 그런대로 놓고 봐주면서 함께 흘러버리는 것, 그렇게 하얗게 지워져 가는 것… 눈이 오는 날, 온 세상이 하얗게 뒤덮인 날 왜 이 시집을 가방에 넣어 집을 나서는지 그 알쏭달쏭한 대목에 대해서는 여러분의 해석에 맡겨보렵니다.

                     

                     

                      김민정 (시인)

                     

                     

                     

                    고은, 「문의(文義) 마을에 가서」감상 / 허연

                     

                     

                    문의(文義) 마을에 가서

                     

                       고 은

                     

                     

                     

                     

                     

                    겨울 문의(文義)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닫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쪽으로 뻗는구나.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끼어서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겨울 문의(文義)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

                    끝까지 사절하다가

                    죽음은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본다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文義)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시집 『문의(文義) 마을에 가서』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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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대 초반 어느 겨울날 이 시를 처음 읽었던 날을 기억한다.  휴가병이었던 필자는 귀대하는 고속버스 안에서 이 시를 읽었다.  때마침 눈이 내렸다.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시를 읽었고 몇몇 구절이 가슴에 와서 박혔다.

                     

                       "겨울 문의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빼어난 명시다.  고은 시인이 동료 시인 상가에 갔다가 쓴 시라고 전해지는데, ’문의마을’은 충청북도 청원군에 실제로 존재하는 마을 이름이다.  온 세상을 하얗게 덮는 함박눈이 지상으로 쏟아지고 바로 그날 누군가는 하늘로 떠났다.  눈이 내리는 작은 마을을 소재로 삶과 죽음의 공존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그렇다.  세상은 낮아서 눈이 내리고 오늘 또 누군가의 영혼은 하늘로 올라가 별로 박혔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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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연 / 1966년 서울 출생. 시인.  매일경제 문화부장.

                     

                     

                     

                    김수영의 「性」해설 / 권순진

                     

                     

                     

                     

                     

                     

                     

                       김수영

                     

                     

                     

                     

                     

                    그것하고 와서 첫 번째로 여편네와

                    하던 날은 바로 그 이튿날 밤은

                    아니 바로 그 첫 날 밤은 반시간도 넘어 했었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그년하고 하듯이 혓바닥이 떨어져나가게

                    물어제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지간히 다부지게 해줬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이게 아무래도 내가 저의 섹스를 槪觀(개관)하고

                    있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똑똑히는 몰라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나는 섬찍해서 그전의 둔감한 내 자신으로

                    다시 돌아간다

                    憐憫(연민)의 순간이다 恍惚(황홀)의 순간이다

                    속아 사는 憐憫의 순간이다

                     

                     

                    나는 이것이 쏟고 난 뒤에도 보통 때보다

                    완연히 한참 더 오래 끌다가 쏟았다

                    한 번 더 고비를 넘을 수도 있었는데 그만큼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곧 속고 만다

                     

                     

                     

                     

                                                              (1968. 1. 19)

                                                 —김수영 전집(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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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민망한 시를 쓴 사람이「풀」의 시인 김수영이란 사실에 깜짝 놀라는 독자도 계실 것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한 김수영은 도시적 삶의 공간에서 어룽대는 모든 것들을 시적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대표적 모더니즘 시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 시는 1968년 1월에 발표되었고, 이 시 때문만은 아니지만 그해 3월인가에 이어령과의 ‘불온시 논쟁’을 벌였으며, 같은 해 6월 술에 취해 길을 가다 버스에 받혀 48세에 세상을 떠났다. 김수영은 정치현실에 대한 문학의 실천적 책무를 강조하는 문학 경향을 선도한 한편으로는 이렇듯 생활인으로서 설움과 절망, 자유와 꿈을 노래한 시인이기도 했다.

                       자칫 외설 시비를 불러올 수 있고, 지금의 관점으로는 여성 비하의 혐의를 뒤집어쓸지도 모르는 이 불편한 시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을 것인가. 그런데 소설이나 영화 연극 등에서는 외설 시비가 심심찮게 있었지만 여태 시의 외설 논란은 듣지 못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시를 읽으며 헐떡거릴 고감도 위인은 없기 때문이다. 성을 소재로 한 현대시 가운데 문학성 여부에 대한 논의는 있었지만 다행히 외설로 낙인찍힌 사례는 없었다. 19세기 보들레르의『악의 꽃』이 외설죄로 피소된 사실이 있으나 엄숙주의를 가장한 삶의 태도가 만연한 케케묵은 옛날 남의 나라 이야기로 그마저도 나중에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솔직히 적나라한 내용이 좀 거시기하여 얼굴이 붉어질 만큼 불편하다. 정부와의 정교한 섹스와 아내와의 시큰둥한 섹스를 비교하며 벌이는 눈물겨운 아내와의 ‘크라잉게임’인데, 무엇보다 '여편네'니 '그년'이니 하는 여성의 지위를 낮게 취급할 때 쓰는 인칭대명사의 비속성이 지나치게 나이브하다. 그리고 아무리 시인이라지만 외도를 하고 들어와서 행한 아내와의 '의무 방어전'을 이렇게 버젓이 까발려도 되냐는 점이다. 뒤이어 시인의 부인은 이 시를 어떻게 이해할까 하는 호기심이 작동한다. 평소 시인의 모든 작품들은 부인에게 다 보여주었는데, 이 작품만은 사후에 부인이 보았다는 말이 있다.

                       얼마 전 그의 부인 김현경(1927-)이 쓴 에세이『김수영의 연인』이란 책이 나왔다.

                       "어느 겨울인가 아침 일찍 돌아온 수영에게 씻을 물을 가져다주려는데 새로 산 고급내복이 없는 것이었다. 내가 어디에 두고 왔냐며 다그치자 그는 불같이 화를 냈다. 동대문 어느 여인숙에서 여자와 잠을 자고 왔는데 방이 하도 더러워서 나올 때 벽에 걸어둔 걸 까맣게 잊고 나왔다는 것이다. 나는 새로 내복을 사주겠노라며 아이를 어르듯 수영을 달랬다."

                       김수영의 아내는 살아서와 마찬가지로 그의 시가 더 빛날 수 있다면 어떤 수모와 치욕도 달게 받을 수 있다면서 그와의 일화들을 낱낱이 공개했다.

                       아닌 척 안 그런 척 가면을 쓰는 것보다는 이런 솔직함이 오히려 친근하고 인간적인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성'은 위선적인 인간과 세상에 대한 일종의 조롱이자 도발이다. 어떤 위장도 한계가 있으며 그 뒤끝은 쓸쓸한 연민만 남길 뿐이다.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곧 속고 만다'는 시인의 자탄. 어려운 현실 속에서 사물과 현실을 바로 보려는 그의 정신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래서 김수영은 '우리문학의 가장 벅찬 젊음'이란 평가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나저나 김수영 시인의 일대기나 에피소드를 소재로 한 영화가 배우 안성기가 더 늙기 전에 한 편 만들어져도 좋으련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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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설명 : 1960년 김수영 시인의 동생인 김수환 씨 결혼식에 참석한 김수영 시인이 부인인 김현경씨(왼쪽)와 뒷줄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다.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시인의 어머니시다. (실천문학사 제공)

                     

                     

                     

                      권순진(시인)

                     

                    김영태의 「콘트라바스」감상 / 강현덕

                     

                     

                     

                     

                    콘트라바스

                     

                     

                       김영태(1936~2007)

                     

                     

                     

                     

                    허풍쟁이 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나

                    숨 쉬는 악기樂器, 너그러운

                    인간 같은 이 악기가 나는 좋다

                    비 오는 날은

                    내 몸이 퉁퉁 부었다

                    콘트라바스도 부었다

                    너를 껴안고 싶다

                    둘이 웃었다

                    가브리엘 포레 곡은

                    그 뚱뚱한 몸에서

                    흘러나왔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사람도 그날은

                    그날따라 아름다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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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레’의 콘트라베이스 곡이라면 아무래도 ‘꿈 꾼 뒤에’가 아닐까요. ‘게리 카’가 들려주는 이 곡은 꿈보다 더한 꿈을 꾸게 만들지요. 마음을 다 열어놓아도 될 것 같지요. 편안한 저음을 만들어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뚱뚱한 악기에서 나오는 풍성한 화음 때문에 더 그렇겠지요. 사람도 그런 거 같아요. 뚱뚱한 사람이 아름다워요. 몸이 뚱뚱하거나 마음이 뚱뚱하거나 생각이 뚱뚱하거나. 김영태 시인은 어디가 뚱뚱하였는지 잘 알겠네요.

                     

                     

                      강현덕 (시조시인)

                     

                     

                     

                      이하석(1948~)

                     

                     

                    나무 사잇길이 밝게 부르는 것 같다.

                    흐르는 마음이 닦아서 편편해지는 게 길의 힘이어서

                    산비탈도 길로 내려서면 나른해진다.

                    길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인 집에서 나와

                    가출의 그림자가 길어지는 오후,

                    아무도 내다보지 않는 기척에도 귀 기울이며

                    사람들은 제 설렘들을 몰래 그 길에 내어 널어 말린다.

                    사람들이 오간 기억으로 길은 굽이친다.

                    아침에 길 쓸며 제 갈 길 닦은 이는 제 길의 은짬에서 낮에 죽고

                    누가 그를 길 없는 비탈로 밀어 올리는지 가파른 산길이 새로 생겨난다.

                    그 길은 추억들로 환해지다 닫히리라

                    바람도 한동안은 그 길로 해서 산자들의 마을길을 기웃거리리라.

                    아침에 또 누가 그런 바람이 부산하게 다녀간 길을 쓴다.

                     

                     

                             —시집 『상응』(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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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인 집”을 무심코 오고가는 일상을 삶의 일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소한 일상도 느닷없는 곳에서 멈추고 나면 다시는 오갈 수 없는 소중한 길로 남을 것이다. 김소연 시인의 시 「막차의 시간」에는 이런 일상을 “아침이면 방에서 나를 꺼냈다가/ 밤이면 다시 그 방으로 넣어주는 커다란 손길/ 은혜로운” 그 무엇이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은혜로운 손길도 유한한 인생의 손목을 영원히 잡을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 손길을 놓치고서야 사무칠 손길이다.

                       이 시를 읽다 보면 어느 ‘은짬’에 가서는 느닷없이 구성진 상엿소리가 요령 소리를 타고 들려온다. 일상으로 오고 가던 길 위의 인생이 사설로 풀어지고, 한 번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가파른” 북망산 노정이 꿰어진다. 다시 말해서 이 시는 어떤 드라마틱한 삶의 이승과 알지 못할 저승의 이야기를 길이라는 이미지에 농축한 상엿소리다. 이하석 시인 특유의 묘사가 가진 힘이다.

                     

                      안상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