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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영모정 탐구.탐방 답사보고서

법정 2013. 10. 23.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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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보고서 응모원고 최종 교정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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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제 목 : 나주 영모정 탐구.탐방기

           영모정과 임제 선생을 중심으로

 

1. 서 론 .................... 2쪽 

2. 본 론  

    영모정과 임제 선생을 중심으로

     (1) 영 모 정 ...... 3쪽

     (2) 백호 임제선생 ...... 8쪽 

3. 답사를 마치며 ............ 12쪽

4. 참고문헌 및 임제 詩 ....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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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 문화와 역사, 그리고 인물에 관하여 탐방 답사 보고서

    제목 : 나주 영모정 탐구.탐방기

              탐방 및 자료수집 글쓴이 김 면 수

...................................................................................................................

 

1. 서 론

 

오랜 세월 속에 다양한 문화와 예술의 역사가 흐르고 있는 영산강 주변 평야지대를 따라, 옹기종기 촌락을 이루며 전통이 이어져 내려왔던 마을들, 그 마을들중 가장 크게 번성했던 나주고을은 천년의 목사골 이다. 지금은 행정구역상 영산포읍 과 나주읍이 통합되어 나주시로 지명되어 있으며, 영산강 유역을 따라 유서 깊은 유적지와 문화재들이 산재해 있다. 그 중에서도 당대 문인들과 연관되었던 문화 유적지를 답사하여 탐방 보고서를 작성한다. 조선 500년 동안 가장 뛰어난 문필가로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과 일본, 러시아에서까지 회자되는 대 문호 “백호 임제 선생”의 흔적을 찾아 영모정을 탐방하여 옛 정취와 문화재들을 꼼꼼히 살펴보려 한다. 백호 임제 선생은 세월을 뛰어 넘어 황진이의 詩를 칭송 하면서“완사천의 아름다운 사연이 마치 영산강변 나주고을”을 품었다라고 표현할 만큼 고향을 사랑 하셨던 분이었다. 백호 선생의 자취가 진하게 베여있고 빼어난 풍광을 지닌 정자 영모정(永慕亭)과 함께 그 주변을 탐구 대상으로 삼았다. 영모정은 전남 나주시 다시면을 거쳐 유유히 흐르던 강 이었지만, 지금은 상류에 장성댐이 들어서 있고, 하류에는 영산강 하구둑을 막아 물 흐름이 정체 되어 안타까울 뿐 이었다. 영산포 방향에서 강변을 따라 구진포 방향 옛 길인 국도변을 달리다 보면 우측에 ‘백호 문학관’과 염색문화 단지가 눈에 들어온다. 백호 문학관 못미처 우측 산기슭 오르막길 방향에 정자가 보이는데, 그 정자가 “영모정” 이었다. 근처 입구에는 염색단지 증축 공사가 한창 진행 되고 있었다. 답사 탐방은 “회진리 마을과 백호 문학관” 그리고 “영모정” 을 중심으로 역사의 흔적을 돌아보고 백호 선생에 관한 자료를 수집해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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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본 론 

영모정과 임제 선생을 중심으로 

(1) 영모정(永慕亭)

   영모정은 주변 경관이 매우 뛰어나 강변 풍치가 매우 아름다우며 전라남도 기념물 제112호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전남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 91번지 동촌마을에 자리하고 있고, 나주임씨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었으며 1520년(조선 중종15년) 임붕이 창건하여 귀래정이라 불렀으나 임붕의 두 아들 임북과 임진이 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해 재건하면서 영모정(永慕亭)라 하였다. 백호 임제 선생이 글을 배우고 시작(詩作)을 즐기던 유서깊은 건물이다. 영모정은 단층 팔각 골기와의 건물로 建坪이 18평 敷地가 2,600평, 으로 정면 삼간 측면 두간으로 영산강변에 위치하면서 동남방향으로, 근래에 보수한 흔적이 있었다. 영모정은 사람들의 발길이 잦지만 굳게 잠겨있었고 영모정 내부를 살펴 볼 수 없어 안타까웠다. 잠시 주변을 맴 돌다가 영모정 뒤편 아래쪽에 단아하게 꾸며진 집 한 채를 발견하고 그 곳에 찾아가 보았다. 현재 거주 하시는 분은 백호 임제 선생의 먼 후손 인척이라 하시면서, 반갑게 맞이하여 주셨다. 임제 선생에 대한 질문에 많은 이야기를 들려 주셨고, 선생에 관한 자료 책자도 몇 권 안내 해 주셨다. 2-3년 전 영모정은 보수공사 당시 주변에는 나무가 숲처럼 우거져 있었는데, 그 나무가 꽝꽝나무라는 왜색종(倭色種)이었는데, 조경수로 마땅치 않아 대부분 베어내 버렸다고 한다. 언덕길 양 옆으로 남아있는 몇 그루 꽝꽝나무 와 뒤뜰에 환하게 피어있는 한 쌍의 배롱나무 그리고 목백일홍 두 그루만이 옛 정취와 역사를 말해 주고 있었다. 영모정 주변 옆 뜰에는 약쑥과 잡초들이 오백년 수령의 나무들과 어울려져 율스년스럽게 자라고 있었으며, 후손 이라는 분께서 말 하시기를 “노인처럼 낡아가던 영모정 뜰은 고즈넉하면서 때론 애틋한 연사(戀史)의 정감을 느끼게 했던 옛 모습이 좋았다고 하셨다. 영모정 빗장이 열리는 날이면 출입문과 천정무늬목의 우람한 서까래가 ”노익장의 서슬퍼런 기개” 같았다면서, 따뜻하고 인자함이 베어있는 노선비 처럼 엄숙함이 공존했다고 열변을 토하시기도 하셨다. 헐리기전 영모정에 대해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詩 구절 읆듯이 잔잔하고 힘차게 설명 해 주시면서, 지난 보수공사 전 입구 쪽에 한그루 나무가 우뚝 솟아 있었는데 공사차량의 진입을 위해 그 나무를 베어 버렸다고 한다. 일 년에 두어 번 임씨 문중 회의 때 나 개방 된다는 영모정, 주변을 재차 살펴보면서 그분의 안내를 받았다. 친절한 분이셨고 박식하신 분이었다. 장성한 나무와 거센 바람 속에 의연하게 자라는 식물들, 울퉁불퉁 솟은 바위, 먹이 찾는 작은 벌레에 이르기까지, 그 생명체들의 삶을 돌이켜 생각 해 보면서,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이어 내려온 생명체의 움직임에 경건한 마음이 들었다. 이곳을 찾는 사람 중에는 정자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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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앉아 넘실대는 영산강물을 바라보면서 사연들을 강물에 띄워 보내는 시를 지으며 풍광을 즐겼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보면서...굳게 닫혀진 출입문이 답답함으로

가슴을 짓눌러 왔다.

 

  영모정은 명종10년(1555)羅州 林氏 林復(1521~1576, 文科 承政院正字)가 건립한 정자로 원래 이 터가 선친 林鵬(號 歸來亭, 1486~1553, 文科 參議 承旨 慶州府尹)이 歸來堂을 짓고 지방 문우들과 錦江十一契를 조직하여 자주 詩會와 정자 앞 錦江에서 船遊도 한 곳이며 1553년에 卒함에 次子 復과 三子 晉(兵使)이 이 터에서 부친의 居喪을 三年居廬로 脫服하고 선친을 길이 사모하여 정자를 새로 짓고 永慕亭이라 명명하였다 한다. 영모정 내부에는 연유와 중수기 그리고 출입 하였던 분들의 詩가 걸려 있었는데, 그 글을 옮겨 보면서 자료를 찾아 부분 해설을 곁들여 본다.

 

「謹次 永慕堂韻」

是堂也 開基於嘉靖壬子築堂於乙卯灰燼於 丁酉倭寇盖昔王父承旨公有意於此地者久矣 仕宦于朝竟卒于官先君痛其末就晩構一堂以永慕揭號 一時名卿鉅公文人寸子之過是境者 莫不登覽 而詩賦揭 諸楣間多至百餘篇 而丁酉兵火之沒 傳家書籍無一存者使先君追慕之跡 不得傳於後也 豈非孱孫之至 通余嘗目遊而心誦者十忘八九只記 宋安朴三相公之作 重刊于板以述往事仍謹次韻者非敢爲詩棠爲求當 世作者之語也 有觀者恕之

林㥠

삼가 영모당의 원운 을 따라 지음

이 집이 嘉靖 壬子年인 1552년에 최초의 터를 닦아 乙卯年인 1555년에 집을 지어 1597년 丁酉倭亂때 불에 타 없어지는 이러한 事蹟이 있다. 옛날 나의 組考이신 承旨公이 이 땅에 대한 오랜 관심을 가지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承旨公이 조정의 벼슬에 나아가 그의 일생을 마친 관계로 미처 그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先君께서 항시 이에 대한 많은 痛恨을 가진 나머지 그의 晩年에 이 집을 지어 돌아가신 어버이를 길이 생각하여 잊지 않는다는 뜻으로 永慕라는 이름을 붙이었다. 이 때문에 그 당시의 名卿鉅公 文人才子들이 이 지역을 지나면서 모두 이 정자에 올라 先君의 이러한 뜻을 찬미하는 백여 편의 많은 詩文을 남기었다. 그러나 丁酉年의 兵火로 傳家의 옛날 書籍을 비롯한 先君의 追慕之跡이 모두 불에 타 후세에 전하지 못한 사실을 생각할 때 그의 뒤를 이은 자손의 처지로 어찌 이에 대한 깊은 애통을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 일찍 직접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외운 당시의 문헌 가운데 십중팔구의 많은 망실이 있다할 지라도 오직 宋, 安, 朴 세 相公의 작품에 있어서는 이에 대한 분명한 기억이 있기 때문에 이를 다시 현판에 새겨 지난날의 事跡을 서술한 후 삼가 그의 韻字에 따라 오늘의 이 시를 남기게 된 것이다. 어찌 감히 나의 이러한 詩를 참다운 詩라 할 수 있겠는가? 오직 當世의 높은 안목을 가진 여러 作者들의 바른 評論을 얻기 위해 이러한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이 詩를 보는 여러 사람들의 많은 용서를 바랄 뿐이다.

 

임서(林㥠)

◇ 詩 原韻

永慕先親處 그 옛날 어버이를 그지없이 사모하며

流傳指一臺 당시의 노닌 곳에 이 정자를 지었네

堂存依昔賞 때가 없이 올라가서 이곳저곳 살펴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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思貌幾時廻 그지없는 감상으로 오랜 시간 보냈노니

錫類綿宗望 종중 소망 이어가는 많은 효자 배출하고

紹聲篤後來 후손 장래 열어주는 높은 명성 떨쳤구나

服膺吾祖意 우리 선조 어진 뜻을 마음깊이 간직하니

悲痛亦難裁 이 마음의 비통함을 억제하기 어렵도다

林復(임붕의 二子. 호는 風巖, 文科及第, 承文院正字) 삼가 이글을 씀

 

◇ 永慕亭作亭年記

維我八世祖參判公七世祖歸來亭公天性甚孝逮于其胤長水公正字公

節度公僉知公亦以孝著於鄕其至行德盖有所受也及其居憂哀毁踰

禮關制後取徐孝子思亭 之義逐築亭于永慕壇歸來亭舊址額之曰永慕

以寓終身之慕實嘉靖三十五年明廟十一年丙辰也 前後此亭爲吾家

居廬之地則其子孫孰不追感先德以寓羨墻之慕哉 天啓二年光海十四

年壬戌卽作亭後六十七年而 始爲重修又歷一百十六年崇禎後 再丁

巳我聖上十三年春又修之自始建及再政甁三築年記己經一百八十二年

丁巳三築後十年丙寅(1746)十月不肖孫) 澤夏 謹識

 

永慕亭의 作亭年記

나의 八世組 參判公, 七世祖 歸來公은 원래 효행의 천성을 가지었고 그의 아들인 長水公 正字公 節度公 僉知公에 있어서도 모두 뛰어난 효행의 이름을 떨치었다. 이러한 점을 생각할 때 네 아들의 이와 같은 지행 자덕이 모두 그의 家品에 의해 이루어진 傳受의 所致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 네 아들이 어버이의 초상을 만나 그의 몸이 야윌 정도의 깊은 哀痛을 다하였고 또 喪期를 마친 뒤에 옛날 徐孝子의 思亭之義를 본받아 永慕壇이 있는 歸來亭의 옛터에 永慕라는 이 정자를 지어 終身之慕의 깊은 효성을 다하였다. 이 정자를 지은 그의 시기가 嘉靖 35年인 明宗 11年 丙辰으로 이 정자를 전후한 이 터가 우리 가문의 居廬之地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어찌 자손의 처지로 그 당시의 先德을 기리어 추모하는 깊은 성심을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 天啓 2年인 光海 14年 壬戌은 이 정자를 지은 67년째의 해로 이에 대한 최초의 重修를 하였고 또 116年이 되는 崇禎紀元後 再丁巳인 우리 聖上 13年 봄에 두 번 째의 補修를 가하였다. 최초의 건립연대로부터 再병三築의 기간을 산정할 때 이미 182年의 오랜 세월이 경과되었다.

 

丁巳年 三築을 마친 十年째 되는 丙寅年 十月에

不肖孫 澤夏가 삼가 이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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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韻 삼가 원운을 따라 지음

 

孝子開堂處 부모위한 효심으로 이 정자를 일으키어

先人憶舊臺 옛날 先人 노닌 곳을 그지없이 기렸도다

登臨非好賞 맑은 경치 즐기려고 登臨함이 아닌지라

思慕不知廻 지난 옛날 생각하며 돌아갈 줄 몰랐구나

雲絶太行望 아름다운 맑은 하늘 구름없이 청명하니

風從庭樹來 섬돌가의 나무위에 맑은 바람 불었네

終身無限意 추모하는 그 마음을 무어라고 말할건가

衰境定難裁 늙은 晩年 오늘까지 그지없이 기렸구나

雪江 安玹(순천인, 조선 중종 左右議政 역임. 청백리, 전라감사)

 

次韻

不任終身慕 종신토록 추모하는 그지없는 마음으로

重營舊日臺 지난 옛날 그 자리에 이 정자를 지었네

歲終流水逝 그침 없는 빠른 세월 유수처럼 흘러가고

江帶夕陽廻 아름다운 저녁노을 강물위에 비추었네

高臥成長往 속세 아닌 맑은 땅에 높이 누워 은거하여

浮名愧倘來 이 세상의 뜬 이름 아낌없이 버렸거늘

秋霜春雨露 가을서리 봄 이슬을 바라보는 그때마다

僾僾若爲裁 흐느끼는 그 마음이 한없이 깊었네

 

市西 金璇(광산인,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두문불출 학문에 몰두)

 

次韻

殘年踰五十 오늘날의 이내 몸이 오십 넘은 잔 세월로

悲慕獨登臺 깊은 추모 느끼면서 이 정자에 올랐도다

風樹停無日 돌아가신 부모생각 한없이 간절하고

江流去不廻 흘러가는 강물 다시 오지 않구나

浮名眞夢幻 이 세상의 헛된 이름 꿈결처럼 느끼나니

白首不歸來 이 가운데 몸을 숨겨 늙은 만년 즐기었네

繼述吾何敢 계술(繼述)이란 두 글자를 어찌 감히 올릴손가

遺墟意未裁 옛 흔적 바라보며 많은 감회 느끼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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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村 林㥠

次韻

吾祖居廬地 지난 옛날 우리 선조 이 곳에서 머무시니

思亭卽此臺 思亭같은 이 정자를 이 가운데 지었구나

靑鳥佳兆近 아름다운 푸른 새 무덤 앞에 모여들고

白鷗弔庭廻 한가로운 하얀 백구 뜰 가운데 날았네

歲暮松楸冷 해가 저문 끝 겨울에 소나무와 가래나무 모습 차가워

春深雨露來 봄이 깊은 春三月에 비이슬이 내리누나

永言追慕切 추모하는 이 마음이 그지없이 간절하니

風樹之痛難裁 솟구치는 어버이 정 가늠하기 어렵구나

 

象老(나주 임씨 승지공 임붕의 후손. 좌승지)

次韻

江上一亭子 아름다운 강물위에 이 정자가 자리하여

百年林氏臺 나주 林氏 백년간의 오랜 옛터 되었네

後人長有慕 오늘날의 여러 後人 그지없이 追慕하고

前輩去無廻 돌아가신 옛날 선배 다시 오지 않지만

天理如根漑 뿌리 깊은 나뭇가지 그지없이 무성하여

雲孫折桂來 뒤를 이은 여러 후손 많은 벼슬 하였네

徒然千里客 천릿길을 멀다않고 이 정자에 올라오니

憑欖義難裁 아름다운 그 느낌이 한이 없이 깊구나

 

蒼岩 朴師海(반남 박씨. 영조 때 대사간승지를 역임한 문신)

 

次韻

吾亭名以慕 永慕라는 두 글자로 이 정자를 이름하여

濯錦江之臺 錦江가의 맑은 물에 그의 몸을 씻었네

霜露千年感 서리 이슬 밟으면서 옛날 생각 느껴지니

風煙一水廻 아름다운 風烟속에 맑은 물이 흘렀구나

諸孫今祈許) 이곳저곳의 여러 후손 서로 함께 힘을 모아

皆祖我歸來 우리 선조 歸來公을 그지없이 모셨고

斜日憑欖處) 저녁노을 석양처럼 난간위에 올라서니

悠然興不裁 일어나는 맑은 흥취 억제하기 어렵구나

傍七代孫 濟遠(나주 임씨. 영조 때 감사, 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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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백호 임제 선생

 

  시가 생긴 이래 가장 뛰어난 성당(盛唐)의 시인 두보(杜甫)를 시성(詩聖)이라 하였고 그와 쌍벽을 이룬 이태백(李太白)을 시선(詩仙)이라 하였다. 그들이 떠난 800년 후 조선의 시인 임백호 선생이 태어났다. 율곡선생께선 ‘백호는 동방의 두보다.“라고칭찬 하셨으나 안타깝게도 39세에 요절하신 분이다. 노산 이은상 시인도 ’조선 왕조 500년 동안 가장 뛰어난 천재 문인이 누구냐?’ 고 묻는다면 서슴없이 ’임백호 선생이다.’ 라고 대답 하셨다고 한다. 호방한 기질에, 섬세한 필치로 시를 쓰시면서, 세월을 넘나들며 읊은 사랑 詩로 독자들의 가슴을 사로잡았던 분으로 전라도 고을뿐 아니라 그 시대의 문필가 인물 중 가장 높은 거봉(巨峰)이라 칭송이 자자 했 다고 한다. 내가 탐방 하려는 목적은 백호 선생의 흔적과 선생의 시를 중심으로 살펴 보고저 함이다. 백호 임제 선생은 1549년(명종4년)에 나주 회진에서 절도사 임진의 장남으로 출생 하셨고, 스무 살 때 대곡 성운 선생 문하에서 수학한 후 27세에 왜구가 침입하자 관원 박계현을 찾아가 포의종군하기도 하셨다. 28세에 진사에, 29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선다. 고산찰방, 북도평사, 해남현감 등을 거쳐 평안도 도사에 부임하러 가는 길에 황진이 묘에 바친 시 한 수로 조정의 비평을 받았다. 36세에 예조정랑국지제교를 마지막으로 벼슬을 접고 전국의 명승대천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많은 시와 소설 등을 남긴다. 선조 20년 39세를 일기로 임종하시면서 후손들에게 ‘작은 나라의 일개 이름 없는 인물로 살다가는 것이 무엇이 그리 억울하겠느냐, 그러니 내 죽음을 슬프다 울지 마라,’는 저 유명한 물곡사(勿哭辭)를 남긴다. 다음은 선생의 후손에게서 추천 받은 시혼이 남아있는 몇 편의 글을 살펴보고 감상해 보며 자료를 찾아보았다.

 

雙璧堂(쌍벽당)

素心違末路 白屋占淸區 (소심위말로 자옥점청구)

野入遙天大 川從斷岸紆 (야입요천대 천종단안우)

松篁含晩翠 煙雨展新圖 (송황함만취 연우전신도)

春到梅花塢 佳期莫遣孤 (춘도매화오 가기막견고)

 

본디 마음 말로라 어기어지니 조촐한 곳 가려서 집을 삼았소

들은 먼 하늘로 들어가고 냇물은 뚝 따라 얽혔어라

송죽은 늦도록 푸른 빛 띠고 안개비는 그림 새로 펼치는구나

봄은 하마 매화 언덕에 이르렀거늘 좋은 기약 헛되이 보내질 마오.

 

달팽이집에 살며 좀 벌레가 나오는 책이나 훑으며 지내는 보잘 것 없는 삶, 그래도 목침, 명아주지팡이, 죽부인, 퉁소와 비파, 그들과 함께 이 세상에서 선비가 취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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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는 정결한 기물 여든 가지 중 늙은 매화 한 그루도 당당히 끼어 있었다.

매화는 바깥채에 은밀히 숨겨 심으라 권했던가. 봄 언덕 도처의 매화나무 가지 끝에 편편히 매화꽃이 하얗게 맺히면 천하가 온통 매향 분분한 봄, 그 속 살짝 붉음의 비밀을 시인만이 알아차리나니 꽃술 피어나기 전에 삼키면 신선이 되고 열매 맺어 바라만 보아도 세상의 갈증을 잊는다는 매화, 그 꽃 만발한 봄에 곰곰 되새김직한 시가 ‘쌍벽당’이다.

 

경남 산청군 단속사의 정당매를 비롯해 남사 마을의 원정매(元正梅) 산청재의 남명매(南冥梅)를 산청 삼매라 하는데, 그 당시 백호선생은 전하는 곳곳의 매화 탐방기에 경도되어 아직 기척 없는 선생의 집 앞 영모정 자락의 매화를 살피다가 매화 구절을 소재로 쓴 글 중에서 “화사(花史)” 소설을 소개 한다.

‘도국 열왕의 성은 매씨요, 자는 선춘, 이름은 화다.’로 시작되는 백호 선생의 화사(花史)를 읽는 동안 작품에 감동을 받았다. 봄의 왕국인 도국, 고대 중국의 한 나라였던 도당씨(陶唐氏)를 빌어 질그릇 도(陶) 나라 안에서 일어나는 왕위 쟁탈전을 흥미진진하게 구상하여 만든 작품이다. 절기마다 피어나는 꽃들을 빗대어 역사 속 등장인물들이 나타났다 사라진다는, 인걸들의 덧없음을 패러디한 백호선생 특유의 재기발랄한 필치는 감탄을 터트리게 한다. 왕의 자가 선춘(先春)이니 매화야말로 맨 먼저 봄을 맞이하는 꽃이라는 뜻 아닌가라고 표현 하였고, 초나라 대부인 굴원에게 배척을 당했다는 대목에선 고소(苦笑)를 머금지 않을 수 없다. 굴원의 이소에는 수많은 꽃들이 나오지만 오직 매화만이 빠졌다는 걸 포착한 백호선생의 절구(絶句)다.

설신(雪神), 등륙(滕六)의 횡포에 인품이 맑고 마음을 비워 욕심이 적어서 재상으로 등용되었던 고죽군(孤竹君) 오균(烏筠)이 과감히 나섰다던가. 매서운 기세의 겨울 바람처럼 포학을 일삼는 악한 군주로, 검은 대나무, 즉 오죽(烏竹)을 천하의 충신으로 묘사해 놓은 것이다. 계절의 바뀜, 즉 공을 이룬 후엔 떠나야한다는 자명한 수순에 따라 선정을 베풀다가 매화 왕이 죽음을 맞는 곳은 춘초궁(春初宮)이며, 절개 굳은 오균도 죽장망혜(竹杖芒鞋)에 의지해 정처 없이 길을 떠나는 것과, 연호가 가평(嘉平)이었던 매화나라는 중화(中和), 즉 버드나무에게 대권을 넘기며 가멸 없이 사라진다는 상상적 묘사에 더욱 매료되었다.

또 다른 매화에 관한 글 에는 이른 바 봄맞이 행차에서 선두를 두고 설왕설래 다투는 유흥매쟁춘(柳興梅爭春)이란 작품에는 “체격이 여위고 정신이 맑아 보이는 매생(梅生)과 물가에서 거주하며 키가 훨씬 크고 지체가 유약해 보이는 유군(柳君)”의 경쟁과 “매화와 버들과의 동황알현(東皇謁見)”길, 역시 매화에 쏟는 백호 선생의 남다른 애착이 엿 보였다.

 

절친한 벗 제봉 고경명 선생께 보낸 시 구절

‘하늘은 사계절을 펼치고 사람은 꽃으로 사계절을 분간하니 사람이 어찌 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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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있다 하겠는가. 꽃은 번화해도 그 번화를 봄바람에 감사드리지 아니하며, 떨어져도 그 떨어짐을 가을바람에 원망하지 않으니 사람이 어찌 그처럼 어질 수 있으랴. 꽃은 섬돌 위에도 피어나고 혹 똥간에서도 자라나매 귀천을 다투지 아니하며 영고성쇠를 함께 하고 있다. 이로 보면 그 공평한 마음 또한 사람과 다르다. 꽃의 세계는 지극히 어질고 지극히 미덥고 지극히 공평하며 수다하고도 수명을 길게 누리니 천성(天性)의 바름을 얻은 것이라 하겠다. 저 언어 문장에 구구하게 매달리고 공리(功利)와 사무(事務)의 사이에서 급급하게 쫓는 자들이여, 어찌 그 품성을 보전하여 바른 데로 돌아올 수 있으리요.’라고 읆으셨다 한다.

백호 선생께서 절친한 벗 제봉 고경명 선생께 보낸 시 구절 속 매화의 깊은 뜻을, 이런 화사의 구절로 마음을 전 했다니, 당시 대단한 문장가라 칭송했던 걸 새삼 알 수가 있었다. 백호 선생의 또다른 글 속에는 이런 문구가 있었는데. “저 새와 곤충은 천지의 문장이니 사람이 자신의 문장을 장식하고자 한다면 이런 천지에 있는 문장을 빌려 쓰지 않을 수 없다” 하면서 다양한 구절로 표현 하였다. 그 묘사 문구를 살펴보면 “후르르 떨어진 매화 꽃잎이 하필 공주의 이마 위에 붙었다. 매화꽃잎 화장의 시초란다. 그 모습에 반한 백봉거(白鳳車:흰나비)가 그녀와 사랑에 빠져 마침내 혼인을 맺었다” 이렇듯 의인화 대상은 산천초목은 물론 물상의 유무를 초월한다. 매화에서 버들로 버들에서 모란으로 “꽃으로 지칭되는 왕조가 바뀔 때마다 따끔한 어조인 사신의 논평”이 곁들여진 의미가 깊이 부여된 이런 묘사처럼 우화소설이자 액자형태의 소설작품이 많았다. 작품 말미에는 총론이라는 결론의 말도 친절히 덧붙여 매듭지었으니 이는 백호 선생의 배려라 생각된다.

 

舟中

 

偶逐(海鴻去

帝鄕安(可期

水寒秋氣逼

天遠夕陽遲

世上千年事

舟中一局棊

五胡煙景好

怊愴憶鴟夷

 

배안에서

우연히 기러기를 쫓아간다고

제향(帝鄕)을 어찌 기약하랴

물이 차가워 가을 기운 다가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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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멀어 저녁노을은 더디네

이 세상 천 년의 일들이 모두

배 안의 한 판 바둑일세

오호(五胡)의 풍경이 정녕 좋기에

서글피 치이자(鴟夷子)를 그리워하네.

 

백호 선생의 시에서 느껴오는 풍광들, 여름의 폭염을 피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천국이 아니겠는가 새가 안내하는 곳이 제향, 즉 옥황상제가 계신 곳이니 이른 바 仙界요, 理想鄕, 즉 유토피아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제 아무리 꿈꾸어도 지상에 발 붙여서 다다를 수 없는 세계. 그래서 새라는 異種의 몸에 우리는 정처 없이 방랑하는 마음을 한 자락에 싣는다고 했다. 새는 백호 선생이 즐겨 등장시키는 글의 소재였다. 학, 제비, 두견새, 까마귀, 갈매기... 때론 봄의 전령사로, 때론 금슬의 상징으로, 새는 자유와 이상의 상징, 아니 지상보다 더 넓은 세계를 꿈 꾼 지도 모른다. 임제 선생은 이들의 벗 이였는지도 모른다.

백호 선생의 시 구절에 담겨있는 다양한 암시내용을 내가 깨닫기에는 아직 어려운 구석이 많은 것 같다. 다음은 詠病鶴贈邀月堂主林浩 시를 감상 해보자

 

詠病鶴贈邀月堂主林浩

 

矯矯靑田物 相知舊姓林

霜嶊籠裡翮 玉裂怨時音

野月三淸夢 秋風萬里心

仙人不可見 碧海暝雲深

 

병 든 학을 노래해 요월당 주인 임호에게 드리다.

머리 높이 쳐든 청전의 학을 옛 성 임씨라서 서로 아네

조롱 속의 날개는 서리에 꺾어지고 원한 맺힌 소리는 옥처럼 깨어 지네

한밤중 달은 삼청세계를 꿈꾸고 가을바람은 만 리를 생각하는데

신선을 만날 길 없어 푸른 바다에 구름만 깊어라

 

요월당은 ‘달을 맞는 집’이란 뜻이다. 그 집 주인이 낮 동안 분주한 시간 이었다면 애써 달뜨기를 기다려 그 달을 고요하게 맞을 수 있었을까. 집 이름만으로도 시 속 임호라는 이는 한직(閒職)에 종사한 분이거나 어떤 연유로 벼슬길에서 물러난 신분

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게다가 병든 학을 노래한 시를 백호가 바쳤다면 임호의 세상사를 향한 백호선생의 심정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청전의 깨끗한 밭은 이상

향으로 표현한 은유다. 그 맑고 푸른 밭에 어느 날 고결한 자태의 백학 한 쌍이 날

아들었다. 그리고 해마다 새끼를 낳았는데 창공을 향해 날개짓 하도록 자라면 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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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전설이 있어 학을 일러 청전옹(靑田翁)이라 하였다고 한다.

임제 선생은 친구 임포에게도 이제는 그만 억울함 잊으시고 저 투명한 달 속의 삼청 세계나 꿈꾸세 라고 조언 했다. 삼청세계는 천상계, 인간계 외에 깨끗한 경지의 선계가 삼청계로 옥청(玉淸), 태청(太淸), 상청(上淸) 이라고 한다.

옥 같이 맑고 크고 높은 경지이며 그 경지에 이르는 삶이 곧 티끌 없는 신선의 세계 라 말한다. 임포는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벼슬길에 나아간 적이 없었다. 오직 장강과 회수 사이를 유랑하다 나중에는 서호고산에서 일생을 마친 고고한 시인 이었다. 평생 결혼하지 않고 매화를 재배하고 학을 키우는 걸 낙으로 삼았다하여 훗날 그를 일러 매처학자(梅妻鶴子), 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자식으로 삼은 학자라 전하고 있다. 백호선생은 임포 친구에게, 억울 해 하지 마라. 날개를 다쳐 옥 깨어지는 아픔의 신음도 이제 그만 거두어라. 그 따위 한 자락 물거품 같은 벼슬길도, 세상의 좋지 못한 이름 얻기에 연연해하지 마라고 조언 시를 썼으며, 그 외에도 수많은 휼민(恤民)의 시에서 세상길의 무정함을 노래한 시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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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답사를 마치며 

 

‘빛 가람’이라는 아름다운 도시 나주,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도시로 새 도약을 꿈꾸는 지역에 적지 않은 문화재 중 영모정을 답사했다. 영모정과 임제 선생은 깊은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회진이라는 영산강변에서 명가(名家)인 나주 임씨의 마을에 위치한 영모정과 백호 기념관을 탑방 하며, 백호 임제 선생의 생애와 작품을 중심으로 선생의 흔적들을 좀더 가까이에 깊이 있게 접하고 싶었다. 또한 우리 옛 선인들의 문향(文香)과 우리나라의 최고 덕목으로 꼽히는 효(孝)의 발자취를 살펴보고자 했지만 아쉽게도 효에 대한 자료는 접하지 못했다. 우리 선조들이 남긴 문화재는 그 보존 가치가 무엇보다 우선이며 그 문화재를 후손들에게 널리 알려 원활 하게 소통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소신으로 답사 보고서를 작성했다. 선인들의 맥이 면면히 살아 움직이며 여과 없는 문화로 전해질 수 있는 문화재가 더욱 보존 가치가 있다고 생각 한다. 이번 답사를 계기로 나주 영산강변에 자리한 영모정과 백호 선생에 대한 더욱 폭넓고 깊이 있는 다양한 자료들을 보다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싶으며, 아직 부족함이 많지만 이번 답사기회를 통하여 작성한 보고서 영모정과 임제 선생에 대해, 더욱 많은 사람들이 관심 주기를 희망해 보면서, 임제 선생의 다양한 詩 중에서 제목을 찾아 176편을 참고문헌 다음장에 첨부 하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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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참고문헌 및 임제 詩

 

참고문헌

*나주목향문화연구회 刊 國譯 樓亭題詠

*백호전집 상 하–신호열, 임형택 공역(1997년 창작과 비평사 刊)

*詩聖 임백호 그 문학과 생애와 사상- 임인채 편저(2011년 정은출판사 刊)

*수필집 ‘초록그림자’ 중 백호 시와 수필-김현임(2011년 대상출판사 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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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호 임제 선생 시(詩) ( 제목 )

 

1,贈潛師-세속 양분 탄식

2,留別成而顯-세로의 탄식

3,無語別-처녀의 애틋한 연심

4,,漢江舟中-자연풍광

5,靜戎江-세속의 시끄러움

6,冒雪到任實懸-관원의 야박함, 쓸쓸한 세로

7,旅枕一夢-벼슬길의 한탄

8,滿月臺別友-친구와의 이별

9,成佛庵邀靜老語-서산대사와의 만남(승의가사 건 진세의 의관이 건)

10,木蓮峽 -풍광

11,次法禪軸-법선과의 대화

12,在錦里留別諸弟-동생과의 이별

13,出塞行-변방에 출정하며

14,枕虛樓 次韻-호국의 시

15,晩翠亭十詠-풍광

16-永恩堂 八詠-풍광

17-醉贈朴使相-벗 관원에게 주는 시

18,苦熱-小路의 신세 한탄

19,府灌園詩-벗 관원에게

20,到佳雲庵-가운암의 풍광

21,法住寺有得-법주사 심회

22,仲父楓巖先生輓-큰아버지 풍암을 그리며

23,風雪中過鼓巖-풍광

24,侍中臺-원주의 시중대에서 어버이를 그리며

25,元師臺-호국의 시

 

-13-

 

26,慶興府-호국시

27,道中逢雨-호국

28,悼灌園선생-벗 관원을 애도하며

29,舟中-세사의 덧없음

30,雙碧堂次霽峯韻-풍광

31邀月堂,次道楓巖伯父韻-큰아버지 풍암어르신을 읊음

32,別淸溪之京-서울가는 청계 양대박을 송별하며

33,輓陳提學女-진제학 따님 만사

34,不思議庵-불사의암의 풍광

35,渡淸川江-고향을 그리며

36,三春體-세사한탄

37,聞鶯-세탄

39,蔥秀山-풍광

40,贈邀月堂林浩-매처학자 임포를 읊음

41,大芚寺-대둔사 풍광

42,喜慶樓-광주의 객사 희경루를 빌어 벼슬길의 덧없음을 읊음

43,過雙忠廟-호국시

44,山家-풍광

45,練光亭-풍광

46,代人作-지조있는 여인의 마음

47,贈陳秀才景門-후배 진경문을 읊음

48,新春寄諸弟-새봄에 아우들에게

49,濟州冲庵詞-기묘사화를 입은 김정선생을 추모하며

50,見山上杜鵑花-고향을 그림

51,安心寺 -묘향산의 절 풍경

52,妓輓- 기생만사

53,途眞師還山-중 진사를 송별하며

54,黃草嶺-호국

55,大行大妃輓詞-명종비 인순황후만사

56,紀行-애민

57,狎歐亭-한명회 벼슬길의 애환

58,遊五百將軍洞-호국충절

59,大谷先生輓詞

60,仰巖舟中-회진의 앙암바위 풍광

61,三浦靑作蕩槳曲-고향풍광

62,南塘-남녀의 정

 

-14-

 

63,柳蕠-벼슬길의 덧없음

64,優談-벼슬길의 덧없음

65,亡女尊詞

66,乃季弟烢初度日-막내동생의 생일에

67,伏巖寺偶成庵體-복암사 경치

68,道岬寺洞門-영암 도갑사 풍정

69,錦城曲-고향풍정

70,楚山曲-남녀의 정

71,敬占絶句錄贈棠幕-호국

72,次酒隱-나주목사 김명원의 시에 차운

73,寄舍弟子忱恂-아우에게

74,宿淸原村店-호국

75,過韓明澮之墓-역사

76,朝坐無憀自遣-한탄

77,南橋-풍광

78,到高唐江-회상

79,重賞仙臺峯瀑布-풍광

80,思歸-부모님 생각

81,春暮在皇華坊-풍정

82,述懷贈 灌園-벗에게

83,次 李達韻-벗에게

84,無題-정한

85,季弟之思-동생생각

86,紀行-변방에서

87,泛九龍潭玩翠壁-풍정

88,聚勝亭謾吟-풍정

89,一禪講堂-스님칭송

90,水月亭 八詠-풍정

91,磨雲領-풍정

92,向無爲寺次子中韻-풍정

93,投宿光山城中-풍정

94,生涯洞寓舍-객고의 풍정

95,鞦韆曲-여심

96,過松都-애민

97,定州客館別子枕-애민

98,登百祥樓-부친을 그리며

 

-15-

 

99,浿江歌十首-서정

100,贈別梁大樸-벗에게

101,浿江泛碧-풍정

102,感懷詩-풍정

103,婆猪江-변방에서 감회

104,到朔州見父親手簡-부친을 그리며

105,舟中卽事-풍정

106,昌寧溪邊醉別金大中-벗과 작별하며

107,亡女輓-죽은 딸에게

108,代人作-여심

109,自輓-자신의 만사

110,月出山下大處-사나이의 기개

111,步虛寺-풍정

112,送郞曲-여심

113,迎郞曲-여심

114,在鍾谷贈祥雲道 者-겸허한 마음

115,自述-심회

116,過松楸寫懷-풍정

117,題贈子中체-아우에게

118,立春帖字大殿-애민

119,淸映亭-풍정

120,隱一客臺望嬋娟洞-덧없는 영화

121,病中自遣-고향을 그리며

122,戊辰秋向湖南-고향을 그리며

123,別意-애국

124,兩堂書事-심회

125,仙臺憶東洲-덧없음

126,福泉寺懷古-덧없음

127,高唐道中-애민

128,梁松川赴京別章-우정

129,龍城廣寒樓酬唱-덧없음

130,慶興望敵臺-애국

131,贈灌園-우정

132,元師臺-사나이의 기개

133,逍遙亭-풍정

134,贈郭眉叟-우정

 

-16-

 

135,宿無爲寺-풍정

136,在麟州父親節度麾下-애국

137,效西昆體-풍정

138,贈節度兄孤竹仁峯求和-형제의 정

139,迎祥帖字大殿-애국

140,聚勝亭-고향의 정

141,次舍弟慣韻-아우생각

142,陜中遇雨-덧없음

143,上土鎭-애국

144,次受降亭韻-애국

145,舟中卽事-풍정

146,牧丹峰-고향의 정

147,無題-덧없음

148,營中偶題-아버님을 뵈옵고

149,附松巖-벗에게

150,輓東皐-애국

151,次高興縣板-덧없음

152,聞新鶯-춘정

153,送舍弟㤞-아우를 보내며

154,亡女輓詞-죽은 딸에게

155,宿永明舍-애국

156,舟中詩-어버이를 뵈러가며

157,耽羅旅館偶成-근친시

158,茂朱寒風樓-덧없음

159,伽智寺-풍정

160,登頭崙峯望耽羅-덧없음

161,有人-고향을 그리며

162,代箕城娼贈王孫-연정

163,漫題漢拏山-풍정

164,舒別於舟中-사촌형과 이별

165,夢仙謠-연정

166,行路難-풍경

167,淸江詞-고향생각

168,滄浪曲-초탈의 시

169,記事-애민

170,勿踰領-풍정

 

-17-

 

171,田家怨-애민

172,具監司思孟別章-벗에게

173,白玉峯輓詞-벗의 죽음

174,浮碧樓觴詠錄-풍정

175,法主寺二十詠-풍정

176,五言律詩-풍정

 

                                         - 백호 선생 詩 자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