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자료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권혁웅

법정 2013. 8. 12. 12:27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권혁웅

 

 

 

 

 

장마가 들어올린 벽지에 도마뱀이 숨어 있었다

난 네가 흘린 얼룩이야, 습기가 꼬물꼬물

정충들처럼 기어다니고 있었다

우리는 당신이 버린 도마뱀이에요,

정충들이 없는 입을 모아 말했다

팔베개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과

백지 아래 흐르는 실개천은 어느 것이 더 가려울까?

추억은 몸의 끝에서 엄청난 속도로 빠져나가고

폐허를 증거하듯 중언부언이 찾아왔다

도마뱀은 이동할 때에는 폐가 눌려 숨을 멈춘다지?

조그셔틀 돌릴 때처럼

빠르게 걷고 멈춰서 숨 쉬고 다시 걷고

어린 시절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하고

급히 고개 돌리듯

언뜻 벽지가 숨 쉬는 것을 본 듯도 하다

도마뱀은 지금 벽지 위의 꽃을 흉내 내고 있다

그런데 그때 너는 화라고 꽃이라고

어떻게 두 번씩이나 발음했니? 어쩌면 네게도

다 피우지 못한 참화가 있었던 거니?

그것도 꽃이라고 너는

달아나지도 움직이지도 못하고

 

 

 

 

                       —《문학사상》2013년 8월호

 

-------------

권혁웅 / 1967년 충북 충주 출생. 고려대 국문과와 동 대학원 졸업. 96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97년 『문예중앙』에 시가 당선되며 등단했다. 시집『황금나무 아래서』『마징가 계보학』『그 얼굴에 입술을 대다』『소문들』.

 

로봇_러브(robot_love)/ 신두호|좋은 시 읽기

강인한 | 조회 64 |추천 0 |2013.08.14. 19:54 http://cafe.daum.net/poemory/JW6F/5029 

로봇_러브(robot_love)

 

   신두호

 

 

 

기술적인 문제로 우리는 헤어집니다

우리는 헤어지고 남은 기술적인 문제들입니다

지는 해가 유리 커튼에 결부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펄럭이는 창문을 지나치지 못합니다

당신의 이름을 걸기에 못은 늘 서툴렀습니다

전산상의 오류로 오리들은 연못 안에 남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라는 이름의 저항력을 깨닫습니다

하나의 눈은 0 다른 하나의 눈은 1

감기지 않는 눈의 회로가 명령합니다

착지하는 새의 날개가 어둠을 감추는 무렵입니다

당신이라는 개념의 오차를 계산하지만

다시 만나지 못할 때에는 악수할 수 있습니까

나는 실행되지 않는 명령어만 깜빡거립니다

헤어지는 데 따른 정교한 결함 때문입니다

표정을 탓하려 필요 이상의 전력을 소모할 수 없습니다

유리 커튼이 잘게 부수어져 떨어지는 중입니다

펄럭이던 창문으로 새가 걸어옵니다

발끝의 전류를 내다보는 당신이 있습니다

떨어진 못이 떨어질 못을 기다립니다

기술적인 오류들로 우리는 정의되지만

정의는 우리의 오류들의 기술입니다

하나의 눈은 0 하나의 눈은 0

여전히 오리들은 연못에서 헤어 나올 줄 모릅니다

벽의 내부에서는 당신에게 인사하고 싶습니다

늘 서투른 못들을 밀어내며

 

HELLO

 

 

 

                       —《발견》2013년 가을호

-------------

신두호 / 1984년 광주 출생.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재학 중. 2013년《문예중앙》신인문학상 당선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