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2013. 2. 17. 11:43

 

진진/김면수 | 조회 3 |추천 0 |2013.02.10. 22:01 http://cafe.daum.net/ejdhfma/P4z4/9 

 

 

모닥불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니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랑잎도 머리카락도

헝겊 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 깃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門長)도 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땜쟁이도 큰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상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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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갓신창 : 부서진 갓에서 나온, 말총으로 된 질긴 끈

  개니빠니 : 개의 이빨

  재당 : 서당의 주인

  초시 : 초시에 합격한 사람 혹은 늙은 양반

  문장 : 문중의 가장 어른

  갓사둔 : 새사돈

  몽둥발이 : 손발이 불에 타버려 몸뚱아리만 남은 상태의 물건


* 김형준 /감상 평 


 1. 감상


 처음 이 시를 읽고 몇 가지 이유 때문에 강한 충격을 받았었다.

 

 1연과 2연에서 의도적으로 ‘도... 도... 도...’로 끊임없이 이어지면서도 할 말 다하고, 시로서도 결코 부족함 없이 완결성을 이루고 있는 점과


 결코 동시가 아닌데도 동시처럼 읽혀지기도 하고, 한편의 동화처럼 느껴지기도 하면서도, 어른이 읽기에도 부족함 없는 이 시를 읽고 강한 충격을 받은 기억이 새롭다.


 그리고, 좀 더 세월이 흐른 후에는 ‘찢어지게 궁핍했던’ 우리 선조들의 생활상이 떠올라 눈시울을 붉히게 되었다. 그것은 3연 때문이었다. 만일, 이 시가 2연에서 끝났다면 나는 동시로도 읽고 이 시의 재미난 음률에 즐거워만 했을 것이다.


 그런데, 3연에서 시인은 모닥불에 어린 아이가 손발이 모두 불에 타버려 몸뚱아리만 남은 ‘슬픈 역사가 있다’고 끝을 맺는다. ‘전설도 아닌 역사’가.

 

 그래서 이 시는 3연이 없다면 그저 재미난 동시 정도에서 끝났을 것이 자명하다. 이처럼, 백석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사람들과 자연과 풍물들을 자세히 관찰해서 ‘철저하게 사실적인 묘사’를 통하여 기록으로 남겼다. 그것도, 내 나라 모국어로써 가장 아름답고 서정적으로 남긴 것이다.


그러한 점들이 내가 백석을 천재라고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새끼 조각도 끈 떨어진 짚신도, 쇠똥도, 신발 밑바닥도, 개 이빨도, 머리카락도, 넝마도, 나무 막대기도, 기왓장 조각도, 닭털도, 개털도 다 태우는 모닥불’은 땔감이 없어서였다. 궁핍한 농가의 구석구석을 다 찾아내어 쓸어 모은 것이다.

 그러하니, ‘서당 주인으로부터 마을에 있던 모든 사람들뿐만 아니라 개들까지도’ 모두 모여 모닥불가로 모여드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이 1990년대 들어와서 북한에서 재현되었다. 당시 북한 전역은 극심한 가뭄과 굶주림이 창궐했었다. 거리에는 부랑자가 넘쳐나고 경제적인 이유로 가정이 붕괴되고 마을이 폐허화되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었다.


2. 백석의 아동문학관


 백석은 자신이 아끼던 제자이자 아동문학가 강소천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

“그 나라 말을 오래 보존하는 길은 오직 한 가지, 그 나라 문학을 높은 수준에 올리는 것이다. 또 하나 우리나라 말을 후세에 이어가는 방법은 좋은 아동문학 작품을 남기는 것”이라고.

 

 그러면서, 1956년도 <조선문학> 5월호에 ‘동화 문학의 발전을 위하여’라는 평론에서 “시정(詩情)으로 충일되지 못한 동화는 감동을 주지 못하며, 철학의 일반화가 결여된 동화는 심각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 이러한 동화는 벌써 문학이 아니다. 동화에 있어서 시정이라 함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감동적 태도이며 철학의 일반화라 함은 곧 심각한 사상의 집약을 말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이어서, 그해 9월호에서 ‘아동시와 관련하여, 아동 문학의 새 분야와 관련하여’라는 평론에서는 말미에 몇 가지 제안을 한다.

“우리 아동 문학에서 풍자 문학 분야를 개척하자”, “아동 문학에서 향토 문학 분야를 개척하자”, “낭만적인 분야를 개척하자”, “구전 문학의 분야를 더욱 개척하자”, 끝으로 “우리 아동 문학 작가들이 높은 문학 정신에 살기를 바란다” 등의 주장을 했다.

 지금 생각해도 실로 매우 선진적이고, 진보적인 아동 문학관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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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닥불’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평가와 전파>

 

 

 ‘모닥불’은 원래 백석이 1936년 1월에 발간한 시집 <사슴>에 수록된 시이다.


  백석이 일본에까지 널리 알려지게 된 시 중 하나는 이 시 <모닥불>이다.


 100부 한정판으로 발행된 <사슴>시집을 구할 수 없었던 윤동주는 1937년 8월에 자신이 필사한 <사슴> 시집에서 모닥불을 읽고 끝마디에 붉은 연필로 ‘걸작(傑作)이다’라고 적었다.

 1939년 임화는 <현대조선시인선집>을 발간하면서, 조선의 대표적인 시인들을 선정한 후, ‘1인 1편의 원칙’을 세우고 백석의 <모닥불>을 선정하였다. 그의 선정 기준은 서문을 통하여 “예술적인 또는 정신사적인 의미에서”라고 밝혔다.

 일본에서 발행되던 유명 잡지 <모던일본> 조선판 1939년 11월호에도 <모닥불>을 일역하여 <분화(焚火)>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그 잡지에는 조선 시인 3명을 소개했는데, 정지용의 시 <백록담>과 쥬요한의 <봉선화>등이 실렸다. 시의 번역은 당시 일본 동경에서 활동하던 평론가이자 시인 김종한이 했다.

 이로써, 백석은 일본에 ‘조선의 3대 시인’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에서 더 유명했던 평론가 김종한은 1943년도에 자신의 시를 포함하여 한국 시인들의 시를 추려, 일본어로 된 자신의 선(選)시집 <설백집>에도 ‘모닥불’ 등 세 편의 시를 실으면서,

“백석 사형(舍兄)의 특이한 샤머니즘은 <머리카락>, <탕약>, <모닥불> 같은 작품에 그의 일류의 섬세한 애정을 배치해가며 묘사를 하고 있다.”고 평했다.

 1940년 김소운도 일본에서 <젖빛구름>이라는 일역(日譯) 시집을 내면서 백석 등을 일본에 알렸다. 당시 학생이었던 前 도쿄대 교수 이마미치 도모노부(今道友信) 교수는 이 시집을 보고, 훗날 “백석의 시를 즐겨 읽는 문학청년이 되었다.”고 고백했다.

 임학수는 1949년 4월 시집 <시집>을 펴내면서 ‘모닥불’을 비롯하여 백석의 시 세 편을 실었다. 주로 남한의 시인 50여 명의 자선시(自選詩)들을 추려서 발간했는데 여기에 백석도 들어간 것이다. 다만, 당시 발표한지 얼마 되지 않은 백석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이 총 32행의 절반가량인 15행만 실린 것은 크나큰 실수였다.

나중에 따로 소개하겠지만,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은 평론가 김현이 ‘한국시의 최고봉’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은 백석의 절창이다.

 1949년 평론가 백철은 <조선신문학사조 현대편>이라는 책을 내면서 “백석이 평북 사투리를 살려서 일특색(一特色)을 만들었다”면서, “백석의 시에서 우리는 눌박한 민속담을 듣고 소박한 시골 풍경화를 보고 구수한 흙냄새를 맡을 수 있다”고 평했다. 다만, 백철은 김종한에 비하여 백석 시에 대하여 깊이있는 평론을 다루지 않았다. 이는 백철뿐만 아니라, 당시 문학 작품을 제대로 읽지 않고 ‘함부로’ 평론을 하는 평론가들의 한계였다.

 

분단 후 북한에서 백석이 조심스럽게나마 평가되기 시작된 것은 1990년대 이후이다. 김일성이나 사회주의 사상 등 체제 순응하거나 찬양하는 문학 창작을 단호히 거부했던 백석은 남한에서 뿐만 아니라, 북한에서도 소위 ‘왕따’를 당했던 것이다.

북한에서도 내로라하는 문학인들도 역시 백석에 대해 알고는 있었지만 함부로 그에 대하여 거론할 수가 없었다. 남한이나 북한이나 분단체제가 낳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1995년 6월에는 북한의 국문학자 유만이 <조선문학사>에서 “백석은 세태 풍속을 기본으로 노래하면서 민족적 정서를 진하게 체현하고 독특한 시풍을 보여준 시인이다. 시 <모닥불>에 이르기까지 그의 시들은 대체로 하나의 풍속도라 할만치 세태적인 생활감정으로 일관되어 있다”고 평함으로써, 그동안 해방 후 북한에서도 소외되거나 애써 외면해왔던 백석에 대하여 서정시인으로서, 새롭게 평가하기 시작하였다.

 

만일, 분단에 상관없이 백석의 시를 묶어 놓지 않았더라면, 문학인들 만이 아니라, 진작에 남북한 국민들로부터 백석의 시와 문학 작품들이 대중화되었을 것이고, 한국문학은 더 높은 경지에 오르고 한국어는 진작에 한류바람을 일으켰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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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갈대의 독백(獨白) / 백석 詩 /신경림의 시 <갈대>- 김형준 감상평 | - 감평.합평.심사평.자료 -
진진/김면수 | 조회 5 |추천 0 |2013.02.10. 22:13 http://cafe.daum.net/ejdhfma/P4z4/10 

 

백석 詩 감상

 

 

늙은 갈대의 독백(獨白)





해가 진다

갈새는 얼마 아니하야 잠이 든다

물닭도 쉬이 어늬 낯설은 논드렁에서 돌아온다

바람이 마을을 오면 그때 우리는 설게 늙음의 이야기를 편다



보름밤이면

갈거이와 함께 이 언덕에서 달보기를 한다

강(江) 건너 물과 같이 세월(歲月)의 노래를 부른다

새우들이 마름 잎새에 올라 앉는 이때가 나는 좋다


어늬 처녀(處女)가 내 닢을 따 갈부던을 결었노

어늬 동자(童子)가 내 잎닢 따 갈나발을 불었노

어늬 기러기 내 순한대를 입에다 물고갔노

아― 어늬 태공망(太公望)이 내 젊음을 낚어갔노


이 몸의 매딥매딥

잃어진 사랑의 허물자국

별 많은 어늬 밤 강(江)을 날여간 강다리ㅅ배의 갈대피리

비오는 어늬 아침 나루ㅅ배 나린 길손의 갈대지팽이

모두 내 사랑이었다


해오라비 조는 곁에서

물뱀의 새끼를 업고 나는 꿈을 꾸었다

― 벼름질로 돌아오는 낫이 나를 다리려 왔다

  달구지 타고 산(山)골로 삿자리의 벼슬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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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새 : 개개비. 첫 여름 번식기에 갈대밭에서 시끄럽게 ‘개개’하고 우는 휘파람샛과에 딸린 작은 새


물닭 : 비오리. 뜸부깃과의 물새


설게 : 섧게. 서러웁게


갈거이 : 옆으로 기어가는 게의 평안도 방언. 평안북도 정주에서는 가을에 나오는 게를 말하며, 봄에는 ‘칠게’라고 한다. 둘 다 바닷게로 ‘갈게’는 등껍질이 아주 매끈매끈한 게로 칠게보다는 크다.


갈부던 : 갈잎으로 엮어 만든 장신구. 갈잎 세 개로 서로 엮어 가운데는 빈 공간으로 된 두툼한 갈잎 덩어리. 갈부던 같다는 말은 복잡하고 얼기설기하다는 뜻.


갈나발 : 갈대의 잎으로 만든 나발. 갈대피리 보다는 갈대의 굵기나 길이가 크다.


잎닢 : 대롱이처럼 구멍이 있는 줄기닢.


순한대 : 순하고 부드러운 갈대.


태공망(太公望) : 중국 주나라 초기의 이름난 신하. 본명은 여상(呂尙). 흔히 강태공(姜太公)이라고 많이 부른다. 여기서는 그가 낚시질을 즐긴 데서 ‘낚시질을 좋아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


매딥매딥 : 마디마디


날여간 : 내려간


강다릿배 : 배안에 받침을 많이 하여 작은 지붕을 덮은 꼴을 한 튼튼한 베. 또는 강의 다리와 다리 사이를 연결하여 주는 배.


나린 : 내린


해오라비 : 해오라비난초(Habernaria radiata)


벼름질 : 무디어진 쇠붙이 연장을 불에 달구어 두들겨 날카롭게 하는 행위. 낫과 같은 연장을 만들 때 특히 벼름질을 많이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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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형준 감상평 

1. ‘물심일여’(物心一如)의 경지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것이리라.

백석의 빼어난 수작 중 하나이다.


이 시는 갈대를 빗대어 인간의 사랑과 운명의 본질을 갈파해 낸 것이다.


사랑하는 여인을 두고 자기 자신은 ‘속절없이 늙어가는’ 갈대‘ 라고 자기 자신을 표현한 것이다.


늙은 갈대는 강물과 같이 무심하게 세월을 보낸다. 새우들이 마른 잎새에 오르는 가을, 어느 처녀가 갈대의 잎을 따서 갈부던을 만들었는지 궁금했다. 그런 사랑의 매듭을 지어준 처녀를 기다리다 못해 늙은 갈대는 결국 지쳐서, 낫질에 베어지고, 산골로 가서, 삿자리가 되고 결국에는 사람들이 깔고 앉는 갈대 방석이 되고 만다는 내용이다.


당시 주로 소녀들과 어린 아이들은 ‘갈부던‘이라는 장식을 좋아하여 만들어 가지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때로는 기다란 갈잎에 각양각색 예쁜 조개를 엮어 끼우고 다니기도 했다.


2. 1935년 11월 <조광(朝光>지 창간호에 <주막>·<나와 지렝이> 등 네 편과 함께 실린 백석의 초기 작품이다.


백석은 1935년 친구 허준의 결혼식에서 신부의 친구로 참석한 박경련을 보고 한 눈에 반하고 만다. 그리고 그녀를 ‘란’(蘭)이라 부르기로 한다. 사랑에 지쳐있는 시적화자 즉, ‘란’과의 사랑에 다소 지쳐있는 백석의 마음을 노래한 것이다. 그녀를 사랑하지만 뚜렷한 어떤 진척도 아직 없었다. 


여기서는 가능하면 詩 원문에 충실하고자 하여 시의 맛을 그대로 느끼도록 했다. 현대의 문법에서는 약간 어색한 부분들이 더러 눈에 띌 것이다.


때로, 백석의 시들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옛 고어(古語)적인 표현들과 함께 당시 평안도·함경도 산골의 토속어나 사투리를 그대로 쓴 것들이 많기 때문에, 현대 표준어에서 보면 더욱 어렵게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석의 시는 비록 그러한 뜻을 일일이 몰라도 자꾸 읽을수록 묘한 매력에 빨려들고 만다. 해서, 처음에는 백석의 시어들이나 토속어의 뜻을 모른 채로 소리 내어 읽다보면 재미가 생겨난다. 그 후에 단어의 뜻을 익히고 다시 읽으면 더 재미가 있다.


97년도부터 백석의 시들을 읽어왔다. 백석의 시들은 읽으면 읽을수록 ‘묘한 감칠맛’이라고 할까, 끊임없이 되새김질해도 질리지 않는 마력을 늘 가지고 있다. 아마도 조만간 백석의 시 중 추려낸 100편은 저절로 암송될 날이 머지않은 듯싶다.


백석은 국어 외에 영어와 일어, 불어, 러시아어에 능통한, 가히 언어의 천재였다. 특히, 불어와 러시아어는 일본 유학 시절부터 거의 스스로 익힌 것이었기에 더욱 놀랍다. 그러한 그가, 최고의 모더니스트 멋쟁이이기도 했던 그가 왜 토속어-특히 북쪽 지방의 사투리-에 집착하여 시와 작품들을 썼던 것일까.


당시 정지용이나 김기림 등 많은 시인들과 문인들은 일본을 통하여 수입한 외국 시와 문학 등에 크게 영향을 받아, ‘국적 불명의 작품들’도 많이 쓰고 있었다. 백석은 어설픈 모더니즘을 추구하기보다는, 우리 민족 고유의 독창성을 우리 민족 고유의 언어의 맛으로 맛깔지게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백석의 그러한 시도와 노력은 역설적으로, 당시 가장 ‘모던한 문학’으로 최고의 호평을 받게 된 것이다. 문단의 호평에 용기를 얻은 백석은 더욱 더 그러한 방향으로의 창작에 열심을 냈다. 더불어, 백석은 정주의 오산소학교·오산고보 시절부터 이미 민족의식이 강하게 자리 잡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3. 백석의 시<늙은 갈대의 고독>과 신경림의 시 <갈대> 비교


 갈 대 / 신경림

언제부터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날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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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詩는 신경림 시인이 동국대 영문학과에 재학 중이던 1956년도에 <낮달>과 함께<문학예술>지에

추천받은 등단작품이다.


시인은 이 짧은 시를 통하여 ‘삶의 근원적인 슬픔과 비극적인 삶의 인식‘을 노래한다.


1연에서는 갈대의 깃든 내면의 슬픔을 노래한다.

2연에서는 갈대의 흔들림을 통한 외면의 슬픔을 노래한다.

3연에서는 ‘갈대의 온몸이 흔들리는 것’이 ‘바람’도 ‘달빛’도 아닌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전까지는 까맣게 몰랐다고 고백한다. 즉, 외부에서 오는 갈등이 아니라 ‘내면에서 우는

존재론적인 울음’인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는 고백에 다름 아니다.

4연은 이 깨달음을 통하여 ‘삶=울음’이라는 삶의 의미를 설파하여 고백하면서 끝을 맺는다.


어떠한가?


백석의 시에서처럼 비록 사랑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 언급이 되어있지 않지만,

갈대를 통하여 인생과 운명의 본질에 대해서 갈파하고, 설파한 두 시인의 시는 놀랄 만큼

닮아있기도 하지 아니한가.


이 시를 발표하던 즈음, 신경림 시인의 친구 한 명이 진보당 사건으로 검거되는 일을 겪고

자신도 수사를 받는다. 충격을 받은 그는 평소에 품고 있던 문단에 대한 강한 불신감과 함께

낙담을 하고 고향으로 낙향해버린다. 심지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무력감과

절망감과 친구에 대한 죄책감 등으로 그간 소중하게 간직해온 시집들과 문학잡지 등마저

몽땅 버리기도 한다.


시인은 1999년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그 때를 회상하며 “이때 내게 남은 것은

오직 증오뿐이었다 ···(중략)··· 더욱 미워한 것은 시인들이었다. 나는 이들의 성실성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의 얘기는 전부가 거짓으로 느껴졌다.”며 동료시인들에 대한

불타는 증오심도 있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기도 했다.


그가 등단하던 1956년 그해 5월 조봉암은 제3대  대통령 후보로 나서 ‘남북총선거에 의한

평화통일안’을 내놓는다. 정적으로서 위기를 느낀 이승만은 ‘진보당 사건’으로 용공조작을 한다.

신경림은 평소 조봉암을 존경해마지 않았다. 그 후 3년 후 조봉암은 국가보안법에 의한

 ‘간첩’으로 몰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만다.


해방 후 동족상잔의 비극의 후유증은 물론이요, 복잡한 정치 내외적 상황에 시인을 울분을 삼킨다.


그런 저런 복잡한 시기에 이 시는 탄생한 것이다.


신경림은 어릴 적부터 문학을 꿈꾸어오고, 막상 시인으로 정식 등단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절망한 그는 시골의 이곳저곳을 떠돌면서 절필을 하고 만다. 그 후 1970년이 되어서야

시집<농무>로 혜성처럼 한국문단에 재등장한다.


오랜 절필에서 벗어나는 계기는, 진작에 신경림의 시재(詩才)를 알아차린 시인 김관식이 1등

공로자였다. 김관식은 1965년 신경림이 충주의 한 사설학원에서 영어 강사 노릇을 하고 있을 때,

“신경림, 네가 안 쓰면 나도 안 쓰겠다”며 충주까지 내려와 신경림에게 압박을 가했던 것이다.


하마터면, 신경림이라는 또 한 명의 걸출한 대시인을 우리는 잃을 뻔했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는,

한국 전체 시사(詩史)를 통틀어서는 ‘백석’을,

현재 생존한 시인 중에서는 ‘신경림’을 최고로 생각한다.


신경림 또한 문학소년 시절부터 지금까지도 백석을 제일로 치고 있고 그 외에는

임화와 이용악 등을 친다.


그간 신경림은 “시에서 백석을 뛰어넘고자” 한다는 고백을 여러 번 했다.

나도 역시 마찬가지다.


글이 길어졌다.


신경림의 <갈대>를 이성부의 시<벼>와 비교해보는 것도 꽤 의미 깊을 것으로 생각한다.

다만, 신경림에 대해서는 따로 기회가 된다면 시론(詩論) 혹은 시인론(詩人論)을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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