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한의 비평에세이) 박재삼 (가난의 골목에서는)
박재삼의 「가난의 골목에서는」감상 / 황인숙
가난의 골목에서는
박재삼
골목골목이 바다를 향해 머리칼 같은 달빛을 빗어내고 있었다. 아니, 달이 바로 얼기빗이었었다. 흥부의 사립문을 통하여서 골목을 빠져서 꿈꾸는 숨결들이 바다로 간다. 그 정도로 알거라.
사람이 죽으면 물이 되고 안개가 되고 비가 되고 바다에나 가는 것이 아닌 것가. 우리의 골목 속의 사는 일 중에는 눈물 흘리는 일이 그야말로 많고도 옳은 일쯤 되리라. 그 눈물 흘리는 일을 저승같이 잊어버린 한밤중, 참말로 참말로 우리의 가난한 숨소리는 달이 하는 빗질에 빗겨져, 눈물 고인 한 바다의 반짝임이다.
출전_ 시집『천년의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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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삼 / 1933년 일본 동경에서 태어남. 시집 『춘향이 마음』『햇빛 속에서』『천년의 바람』『어린 것들 옆에서』『뜨거운 달』『비 듣는 가을나무』『추억에서』『대관령 근처』『찬란한 미지수』『해와 달의 궤적』 등. 시조집 『 내 사랑은』. 수필집 『슬퍼서 아름다운 이야기』『빛과 소리의 풀밭』『노래는 참말입니다』『샛길의 유혹』『바둑한담』『아름다운 삶의 무늬』『미지수에 대한 탐구』. 1997년 지병으로 영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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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골목이 바다를 향해 머리칼 같은 달빛을 빗어내고 있었다. 아니, 달이 바로 얼기빗이었었다. 흥부의 사립문을 통하여서 골목을 빠져서 꿈꾸는 숨결들이 바다로 간다.’
입술을 달싹이며 절로 한 번 더 읽어보게 되는 시다. 아, 얼마나 흥건한 아름다움인가…….
‘흥부의 사립문’이 일러주듯이 가난한, 바닷가 그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삶의 터전이 바다이니 골목골목이 바다를 향해 나 있을 테지. 삶의 터전이기도 한 그 바다는, ‘사람이 죽으면 물이 되고 안개가 되고 비가 되고 바다에나 가는 것이 아닌 것가’, 우리 넋이 결국에 가는 곳이기도 하다. 즉 죽음의 터전이기도 하다. 그래, ‘눈물 흘리는 일을 저승같이 잊어버린 한밤중’, 고된 하루를 마치고 단잠에 빠져든 이들의 ‘꿈꾸는 숨결들이 바다로 간다’……. 미묘하고 심오해서 독자의 마음은 아스라이 헤맨다.
‘우리의 골목에 사는 일 중에는 눈물 흘리는 일이 그야말로 많고도 옳은 일쯤 되리라.’
죽으면 육신은 결국 흙이 되고 안개가 되고, 물질의 형태만 그렇게 변할 뿐이고 넋이라든가 혼이라든가는 바다 같은 것으로 일렁이고 반짝이게 될 텐데, 그렇게 생각하면 삶이라는 게 별 게 아닌데, 이 삶을 살아내기가 그토록 힘들구나! 해방촌에 있는 독일식 빵집 ‘더 베이커스 테이블’ 벽에 이런 말이 적혀 있다. “빵만 있으면 어지간한 슬픔을 견딜 수 있다.” 우리 삶에는 눈물, 즉 슬픔이 많은데 그 슬픔의 이유는 주로 가난이다. 휴…… 가난!
그런데 눈물 흘리는 일이 많다는 건 금방 수긍이 가는데, 그게 ‘옳은 일’이라니 무슨 뜻일까? 무슨 뜻일까! 무슨 뜻일까…… 마땅하다…… 그러니, 운명이다? 운명이라면 정면에서 맞아라, 맞서라, 뒤통수 맞지 말아라…… 팔자에 복무해라……. 어쨌거나, 가난한 어촌의 밤풍경을 얼레빗 같은 달빛으로 하염없이 빗어 내리는 참으로, 참으로 아름다운 시!
‘얼기빗’은 ‘얼레빗’이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빗살이 굵고 성긴 큰 빗’인 얼레빗의 다른 이름은 월소(月梳)다. 월소라니! 옛사람들의 작명 센스나 박재삼 선생님의 시 감각이나 어찌 이리도 절묘한가! 내친 김에, ‘빗살이 아주 촘촘한 대빗’은 참빗이라고 하는데, 참빗의 다른 이름은 진소(眞梳). 진(眞) 대 월(月)이라……. 진은 지구, 이 땅, 현실일 테고, 월은 달, 저 곳, 꿈? 국어사전은 참으로 내게 세계를 보는 창이어라!
황인숙 (시인)
신현락의 「고요의 입구」감상 / 황인숙
고요의 입구
신현락
개심사 가는 길
문득 한 소식 하려는가
나무들 서둘러 흰 옷으로 갈아입는다
추위를 털면서 숲 속으로 사라지는
길도 금세 눈으로 소복하다
여기에 오기까지 길에서 나는
몇 번이나 개심(改心)하였을까
한 송이 눈이 도달할 수 있는 평심(平心)의 바닥
그것을 고요라고 부를까 하다가
산문에 서서 다시 생각해 본다
어느 자리, 어느 체위이건 눈은 불평하지 않는다
불평(不平)마저 부드러운 곡선이다
설경이 고요한 듯 보이는 건 그 때문이다
허지만 송송 뚫린 저 오줌구멍을 무엇이라고 해야 하나
마을의 개구쟁이들이 저지른 저 고요의 영역 표시
경계 앞에서도 어쩔 수 없는 방심(放心) 뒤에 진저리치던
나의 불평이란 기실 작은 구멍에 불과한 것
하물며 개심(開心)이라니!
그 구멍의 뿌리 모두 바닥에 닿아 있으므로
길은 불평의 바닥이다
불평하지 않으며 길을 다 갈 수는 없다
그러니 애써 한 소식 들은 척 하지 말자
눈이 내렸을 뿐 나는 아직 고요의 입구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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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락 / 1960년 경기 화성 출생. 시집 『따뜻한 물방울』『풍경의 모서리, 혹은 그 옆』『히말라야 독수리』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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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한 소식 하려는가’를 ‘문득 한 깨달음 주려는가’로 읽어도 좋을까? 시에 두 개의 개심이 나온다. 개심(開心)과 개심(改心). 앞의 개심은 ‘지혜를 열어 불도(佛道)를 깨우친다’ 즉 ‘마음이 열린다’는 뜻으로 굉장히 높은 경지의 말이고, 뒤의 개심은 ‘마음을 바르게 고친다’는 뜻으로 범상한 우리네 경지의 말이다.
별안간 소낙눈이라지만, 눈이 쏟아지기 전에도 하늘은 끄무레했을 것이다. 개심사를 찾아가는 시인의 마음처럼. 범상한 한 사람인 시인은 깨달음과 번민, 용서와 상처 사이에서 진자처럼 움직이는 마음의 불평에 처해 있다. 울퉁불퉁한 그 마음바닥이 눈경치를 바라보면서 둥글어지는 듯하다. 곡선은 고요하다. 한 송이 한 송이 눈이 내리고 쌓여 이루는 설경은 부드러운 곡선이다. 설경은 그러하나, 나(시인)는? 나는 기실 뾰족뾰족하다.
‘불평하지 않으며 길을 다 갈 수는 없다/그러니 애써 한 소식 들은 척 하지 말자’
뭐, 눈이 오기에 잠시 취해 있었을 뿐, 호락호락 개심(開心)할 내가 아니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다! 마음의 고요, 평심의 입구 산문에서 그저 설경을 바라볼 뿐이로다.
소박하고 단아한 시인데, 호락호락 깨달은 척하지 않는 총명함이 톡 쏘는 맛을 낸다.
황인숙(시인)
문인수의 「공백이 뚜렷하다」감상 / 장석남
공백이 뚜렷하다
문인수 (1945~ )
해 넘긴 달력을 떼자 파스 붙인 흔적 같다.
네모반듯하니, 방금 대패질한
송판 냄새처럼 깨끗하다.
새까만 날짜들이 딱정벌레처럼 기어나가,
땅거미처럼 먹물처럼 번진 것인지
사방 벽이 거짓말같이 더럽다.
그러니 아쉽다. 하루가, 한주일이, 한달이
헐어놓기만 하면 금세
쌀 떨어진 것 같았다. 그렇게, 또 한해가 갔다.
공백만 뚜렷하다.
이 하얗게 바닥난 데가 결국,
무슨 문이거나 뚜껑일까.
여길 열고 나가? 쾅, 닫고 드러눕는 거?
올해도 역시 한국투자증권,
새 달력을 걸어 쓰윽 덮어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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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눈과 함께 새해가 시작되었다. 지난해의 궂은 일들이 저 눈 온 설원(雪原)처럼 지워졌으면 좋겠다. 빈 벽 하나 가지기가 힘들다고 탄식한 작가가 있었다. 웬 붙일 것, 걸어둘 것은 그리 많은지. 이발소 그림부터 수건에 달력이나 잡지 부스러기들도 모두 거기 걸어놓고 기대놓고들 산다. 가난한 집 식구 많듯이. 문득, 달력 바꾸느라 떼어놓고 바라보는 벽면은 화사한 맨살이다. 우리네 일년살이가 벽에 때를 묻히는 일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세상을 깨끗이 하는 일이 아니라 때를 묻히는 일이라니! '헐어놓기만 하면' 금방 바닥이 드러나는 한 달 혹은 일생! 그 빈 바닥에 '쾅, 닫고 드러눕는' 것이 일생이라면 허망하기 그지없다. 하나 허망을 공부하자. 제가 묻힌 때만 지우고 가도 인생 성공이다. 저 설원처럼.
장석남 (시인, 한양여대 교수)
비단길 2
강연호
잘못 든 길이 나를 빛나게 했었다 모래시계는
지친 오후의 풍광을 따라 조용히 고개 떨구었지만
어렵고 아득해질 때마다 이 고비만 넘기면
마저 가야할 어떤 약속이 지친 일생을 부둥켜 안으리라
생각했었다 마치 서럽고 힘들었던 군복무 시절
제대만 하면 세상을 제패할 수 있을 것 같았던
내 욕망의 신록이 지금 때절어 쓸쓸한데
길 잘못 들수록 오히려 무모하게 빛났던 들끓음도
그만 한풀 꺾였는가, 미처 다 건너지 못한
저기 또 한 고비 신기루처럼 흔들리는 구릉이여
이제는 눈 앞의 고비보다 그 다음 줄줄이 늘어선
안 보이는 산맥도 가늠할 만큼은 나이 들었기에
내내 웃목이고 냉골인 마음 더욱 시려오누나
따숩게 덥혀야 할 장작 하나 없이 어떻게
저 북풍 뚫고 지나려느냐, 길이 막히면 길을 버리라고
어차피 잘못 든 길 아니더냐고 세상의 현자들이
혀를 빼물지만 나를 끌고가는 건 무슨 아집이 아니다
한때 명도와 채도 가장 높게 빛났던 잘못 든 길
더 이상 나를 철들게 하지 않겠지만
갈 데까지 가보려거든 잠시 눈물로 마음 덥혀도
누가 흉보지 않을 것이다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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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럭에 가득 실린 보따리 위로 등 돌리고 앉은 여인의 모습이 보인다. ‘보따리 작가’로 불리는 김수자 씨다. 그는 1997년 11일 동안 보따리를 짐칸에 싣고 유년시절 살던 곳을 찾아가는 이동의 여정을 기록한 비디오 작품 「움직이는 도시: 보따리 트럭 2727km」를 발표한다. 2007년 프랑스 파리에서도 같은 퍼포먼스를 펼쳤다. 화물차에 몸을 맡긴 채 중국 인도 아프리카 이민자들이 모여드는 동네를 돌면서 낯선 땅으로 흘러온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려 한 것이다. 그의 퍼포먼스가 널리 알려지면서 ‘보따리’(Bottari)는 그대로 해외 미술계에서 통하는 우리말이 됐다.
예술가, 혹은 사막을 건너 비단길을 오갔던 대상(隊商)이 아니라도 유랑의 삶은 인간에게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우리는 각기 할당받은 희로애락의 보따리를 이고 진 채 날마다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타박타박 걸어가는 나그네들이다. 그 길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내비게이션’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다. 어디쯤이나 왔는지 위치 정보를 파악하고 적절한 때 경로를 수정하는 일이 쉽지 않다. 강연호 시인의 「비단길 2」는 그렇게 정처 없는 순례길이 차츰 두려워질 때, 자기 체중을 웃도는 등짐 무게에 무릎이 후들거릴 때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길 없는 길을 헤매고 길을 잘못 들 때 삶의 지도가 만들어진다고 위로를 건넨다.
런던 올림픽에서 한국에 패한 영국 축구 대표팀의 스튜어트 피어스 감독은 인터뷰에서 시인과 비슷한 말을 했다. “이번 시련은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다.” 승부차기에서 실축한 대니얼 스터리지 선수를 지목한 얘기였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의 준결승에서 맞붙은 옛 서독과의 승부차기에서 실패한 자기 체험에서 우러나온 증언이란 점에서 울림이 묵직하다.
혼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메달리스트의 그늘에 가려 소외된 국가대표 선수들을 생각하며 시를 읽는다. 지금은 기대했던 여정에서 벗어나 좌절할지 몰라도 바로 거기서 지도가 탄생할 것을 믿는다. 멈추지 않고 자신의 삶을 추구하는 한, 길은 빛나는 미래로 다시 이어진다.
고미석 (동아일보 논설위원)
조정의 「박무(薄霧)」감상 / 이은봉
박무(薄霧)
조 정
사방이 부드러운 종이 같았어요
엷고 따스하게 풀어진 안개 겨드랑에서 흰 나비 몇 마리 날아오고
동백 숲 너머 소나무 네댓 그루 중 두 번째 나무 왼쪽 가지에
산비둘기가 울었어요
울음으로 만든 산비둘기 알이 모시풀 잎사귀 사이로 흩어져 내렸어요
늙은 거미 손바닥이 축축해지고
울어야 할 일 쓸어 모아 전생에 다 울고 온 끝이라
마른 내처럼
울지 않아도 견딜만하던
나마저 흐릿해졌어요
반대편 가지에
혀가 두 겹인 새들이 날아와 여러 가지 말로 이야기를 했으나
안개가 속속 삼키고
산비둘기 울음만 대팻밥처럼 창틀에 쌓였어요
비탈 아랫집 개 짖는 소리도 바람에 닳아 묵묵한 목질이에요
오늘 기상 예보는
흰 상여 같은 날
나비 떼가 지붕보다 높이 날아다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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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에는 운무, 해무, 연무, 농무, 안개 등이 있다. 이 시의 제목인 ‘박무(薄霧)’도 안개의 한 종류이다. 매우 작은 물방울이 대기 중에 떠돌아다니는 현상으로 수평의 시정 거리가 1킬로미터 이상에서 10킬로미터 미만인 경우를 가리키는 말이다. 바닷가, 특히 서해바다에서 따뜻한 공기가 내륙으로 이동하는 과정에 맑은 하늘에 갑자기 박무가 몰려와 시야를 흐릴 때가 많다. 이 시는 이런 자연현상과 관련해 느끼는 세련된 정감을 섬세한 언어로 표출하고 있어 특히 주목이 된다.
우선은 엷게 낀 안개인 박무를 “사방이 부드러운 종이 같았”다는 표현이 돋보인다. 독자들도 충분히 “엷고 따스하게 풀어진 안개 겨드랑에서 흰 나비 몇 마리 날아오”는 느낌을 알 수 있고, “소나무 네댓 그루 중 두 번째 나무 왼쪽 가지에서 / 산비둘기가” 우는 느낌을 알 수 있으리라. 이어지는 구절도 박무(薄霧)의 현상, 즉 몽롱하고 혼몽한 착종의 자연현상에서 느끼는 심리현상을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울어야 할 일 쓸어 모아 전생에 다 울고 온 끝이라/ 마른 내처럼/ 울지 않아도 견딜만하던/ 나마저 흐릿해”진 화자가 느끼는 것들을 묘사하고 있다는 뜻이다. “반대편 가지에/ 혀가 두 겹인 새들이 날아와 여러 가지 말로 이야기를 했으나/ 안개가 속속 삼키”는 정서적 분위기를 공감하지 못할 독자는 없다.
이은봉(시인, 광주대 교수
심보르스카의 「두 번은 없다」감상 / 고미석
두 번은 없다
비스와바 심보르스카(1923∼2012)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
가장 바보 같은 학생일지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낙제란 없는 법.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어제, 누군가 내 곁에서
네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을 때,
내겐 마치 열린 창문으로
한 송이 장미꽃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을 때,
난 벽을 향해 얼굴을 돌려버렸다.
장미? 장미가 어떤 모양이었지?
꽃이었던가, 돌이었던가?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너는 존재한다―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그러므로 아름답다
미소 짓고, 어깨동무하며
우리 함께 일치점을 찾아보자.
비록 우리가 두 개의 투명한 물방울처럼
서로 다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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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1초도 부족하거나 넘치지 않는다. 꼬박 하루 24시간이 걸린다. 미국의 미디어작가 크리스천 마클리의 영상작품 ‘시계’의 러닝 타임이 그렇다. 지난해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작가는 동서고금의 영화 4000여 편에서 시간을 알리는 대사나 시계가 등장하는 장면만 절묘하게 편집해 하루가 그대로 응축된 작품을 만들었다. 2년 전 서울 리움미술관에서 이 작품을 상영했을 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스크린 속으로 빠져들었다. 내가 숨쉬는 현실 속 시간이 오전 11시 45분이면 화면 속 시간 역시 오전 11시 45분, 어김없이 일치하는 순간순간이 경이로웠다.
‘두 번은 없다’는 이맘때 독자 여러분과 함께 읽고 싶은 시다. 째깍째깍 잠시도 머물지 않고 흐르는 세월의 존재감을 숫자와 이미지가 아닌 언어로 일깨운다. 199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폴란드의 여성시인 비스와바 심보르스카의 시선집 <끝과 시작>에 실린 작품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그냥 한 줄 한 줄 찬찬히 읽으면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무게에, 한 번뿐인 삶의 소중함에 절로 가슴이 뭉클해진다.
신이 우리에게 공평하게 보내준 선물. 보내고 싶지 않다고 매달려도 제멋대로 떠나고, 와달라고 초대하지 않아도 어느새 찾아오는 것. 바로 시간이다. 지루한 일상인 듯싶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빠른 강속구에, 예측보다 낙차가 너무 큰 변화구에 적응하느라 올해 역시 허둥지둥 진땀을 빼야 했다. 그래도 그건 다 땅 위에 발 딛고 사느라 일어나는 마찰. 끝과 시작이 포개지는 지금 이 시간은 여일한 자세로 보내고 맞을 일이다. 당당하고 담담하게.
고미석 (동아일보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임곤택의 「플라타너스」평설 / 홍일표
플라타너스
임곤택
나무에게는 생활이 없다
다만 정중해서 저게 나를 위해 서 있다는 생각
온종일 나를 기다렸다는 생각
오늘 아침 하늘은 가을 하늘 같고
계단을 오른 무릎이 다음 계단의 모서리같이 단단할 때
모서리가 숨이고 근육이고 얼굴이라는 생각
누가 나를 기다린다는 생각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
그렇게 한없이 정중한 나무를 보고
울컥 눈물 쏟아지려는데
내 안에는 그늘도 빛도 없어 슬플 이유도 없고
맹장을 떼어낸 자국이 가장 큰 상처인, 나를
누가 기다려 주고 있다는 생각
그가 기다린 것은 뻣뻣한 몸이고 단단한 모서리라는 사실
그렇게 계속 기다려 나무가 풍선이 된다면, 나무가 하얀 사탕이라면
세상은 변하는 것이어서 나도 달라질 수 있겠다는 생각
달라지고 달라져서 문득 나무인 내가 무엇을
기다리고 섰다는 느낌
앉지도 눕지도 않고 단단한 모서리로 꽉 차서는
기다린다는 기다렸다는
그 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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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의 무화
시는 늘 현실의 공고한 질서를 파괴한다. 둘 사이는 상극이다. 나무를 나무로 한정하지 않고 그 너머를 기웃거린다. 그리고 멀어진다. 관습과 변화를 모르는 습성으로부터 일탈을 시도하여 가장 멀리까지 나아간다. 그곳엔 이곳의 표정과 이곳의 감정이 없다. 낯설고 이물스러운 풍경들이 곳곳에서 살아 꿈틀거리고 있는 난장이다. 멋대로다. 길들여지지 않은 야성과 원시의 숨결이 뜨겁게 붐비는 곳이다.
하나의 사물에 시선을 집중하는 시는 답답하다. 단정하고 가지런한 모습을 형상화하지만 고정된 이미지에 갇힌 시는 광장을 잃고 골방에 스스로를 유폐시킨다. 시는 무한히 확장하는 생물인데 하나의 틀을 만들어 대상을 가두어버리는 경우 시는 질식사한다. 물고기가 아니라 생선이나 동태가 되는 순간이다. 시 안에서 대상이 자유롭게 숨 쉬고 뛰어놀게 해야 하는데 수족을 잘라버리고 규정해버리는 순간 그곳에 시는 없다.
임곤택 시인은 나무에 대한 생각을 시작으로 포문을 연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정조준이다. 시의 밀도가 높고 치밀하여 화자에게 포획된 나무는 부동의 자세다. 그런데 그 부동이 왠지 슬프고 아프다. 나무가 사물의 한계에 구속되지 않고 정서의 분열을 일으키며 파장을 일으키는 순간이다. 이때 나무는 나무를 떠나 제3의 공간으로 이동한다. “온종일 나를 기다렸다는 생각”을 갖게 한 나무, 그래서 화자가 “눈물”까지 짓게 하는 나무의 정체는 무엇일까. 독자의 상상력이 자유롭게 발동한다. 그러므로 답은 각자의 몫이다.
이어서 아무 조건 없이 한없이 정중하게 화자를 기다려주는 나무에 대한 사유는 반전의 전기를 맞는다. 나무가 “풍선”과 “하얀 사탕” 으로 몸을 바꾸는 변신의 국면이다. 시의 숨통이 탁 터지는 순간이다. 몸이 무거웠던 시가 날개가 돋아 날아오른다. 화자의 상상력은 현상의 이면으로 더 깊이 진입하여 “나”가 “나무”로 돌변한다. “앉지도 눕지도 않고 단단한 모서리로 꽉 차서는”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도발적 사유가 경이롭게 빛을 발하는 찰나이다. “나무”와 “나”의 자리가 전도되어 현상의 질서는 새롭게 재편되고, 두 사물의 경계가 사라지는 지점에서 존재의 생기가 이채롭게 반짝인다.
플라타너스를 바라보면서 화자는 오랜 시간 여러 가지 생각을 궁굴린다. 주체의 시선으로 바라본 대상이 의식의 층위로 유입되면서 발효와 생성의 과정을 거쳐 나타난 새로운 존재의 얼굴은 단순한 현실 복제나 재현이 아니라 창조의 영역에 나타난 낯선 풍경이다. 임곤택 시인이 변신 모티브에 착안하여 유연한 상상력으로 그려낸 “플라타너스”는 해방과 초월의 표지이며 제한적 존재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욕망의 표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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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일표 /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詩로 여는 세상》 주간
남진우의 「모자 이야기」평설 / 홍일표
모자 이야기
남진우
내 낡은 모자 속에서
아무도 산토끼를 끄집어낼 수는 없다
내 낡은 모자 속에 담긴 것은
끝없는 사막 위에 떠 있는 한 점 구름일 뿐
내 낡은 모자 속에서 사람들은
파도 소리도 바람 소리도 들을 수 없다
그러나 깊은 밤 내 낡은 모자에 귀를 갖다 대면
기적 소리와 함께 시커먼 화물 열차가 달려 나오기도 한다
내 낡은 모자를 안고 오늘 나는 시장에 갔다
하지만 해 저물도록 아무도 사는 이 없어
나는 구름과 놀다가 기차를 타고 훌쩍
머나먼 사막으로 떠났다
누군지 모르는 그대여
내 낡은 모자를 사다오
달리는 화물 열차 끝에 매달려 오늘도 나는
내 모자를 쓸 그대를 찾아 헤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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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와의 불화
시가 보편성에 의지할 때 일상적 문법과의 냉전을 포기한다. 그곳에는 익숙한 세계가 익숙한 표정으로 서 있다. 안정적인 보법으로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노류장화(路柳墻花)처럼 위무와 위안의 기능을 한다. 시의 대중들이 쉽게 다가가 환호하며 박수를 친다. “그래, 시는 이래야 돼.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은 암호에 지나지 않아.” 그러나 시는 세상과의 냉전을 통해 몰락과 좌절의 끝에서 최초의 표정으로 최초의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싸우지 않고 타협과 순응만으로는 세계를 전복할 수도 없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도 없다. 이것이 시의 운명이다.
화자는 모자를 들고 있다. 그러나 마술사처럼 모자 안에서 토끼를 꺼내들고 관객을 놀라게 하지 않고 그럴 의도도 없다. 관객들은 “파도 소리”나 “바람 소리”처럼 편안한 자연의 부드러운 손길을 기대하지만 화자는 여지없이 그 기대를 저버린다. 모자 안의 내용물은 단지 “끝없는 사막 위에 떠 있는 한 점 구름일 뿐”이다. 영원한 시간 위에 잠시 내려앉은 한 점 티끌에 지나지 않는 것. 대신 모자 안에서는 “시커먼 화물 열차”가 달려 나온다. “바람 소리”와는 전혀 다른 역동적이고 거친 삶의 육체가 육박한다. 화자의 시선이 단순한 즐거움이나 호기심의 충족에 있지 않고 피와 근육이 살아 꿈틀대는 실체로서의 삶을 향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관객의 기대에 대한 배반이다. 관객은 달콤한 위안과 편안한 자연의 품을 기대하지만 화자는 그 기대에 등 돌리고 서서 다른 방향으로 향한다. 여기서 세계와의 불화가 발생한다.
아무도 화자의 모자를 사지 않는다. 이미 모자는 상품성을 잃은 사물에 지나지 않고, 소용 가치를 잃은 사물은 가차 없이 외면되거나 폐기되는 것이 현실의 냉혹한 논리다. 화자와 세계는 결국 극과 극으로 대치한다. 현실에서 거부된 모자의 주인은 “머나먼 사막”으로 “기차를 타고” 떠난다. “사막”은 현실의 질서가 부정되고 몰각되는 공간이다. 정신의 고양이 이루어지는 형이상학적 자리인 셈이다.
화자는 자신의 낡은 모자의 효용 가치를 알아줄 사람을 대중 속에서 찾고자 한다. 외롭고 고단한 사유의 노정이다. 현실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세계와의 충돌은 늘 비극적 색깔을 띤다. 그러나 시인이라는 존재는 무용성의 가치에 일찌감치 눈뜬 존재들이다. 그것이 그들의 불행이면서 행복이다. 오늘도 무수히 많은 시인들이 무용성의 놀이에 기꺼이 자기 생의 중요한 부분을 헌납하고 창조의 신열로 뜨겁게 달아올라 밤의 사막을 횡단하고 있다. 그들의 고단한 역정은 언제나 세계를 배반하고, 그 자리에 낯선 세계를 건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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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일표 /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詩로 여는 세상》 주간.
김기택의 「겨울새」평설 / 강계숙
겨울새
김기택
새 한 마리 똑바로 서서 잠들어 있다 겨울 바람 찬 허리를 찌르며 지나가는 고압선 위 잠속에서도 깨어 있는 다리의 균형 차고 뻣뻣하게 굳어지기 전까지는 저 다리는 결코 눕는 법이 없지
종일 날갯짓에 밀려가던 푸른 공기는 퍼져나가 추위에 한껏 날을 세운 뒤 밤바람이 되어 고압선을 흔든다 새의 잠은 편안하게 흔들린다
나뭇가지 속에 잔잔하게 흐르던 수액의 떨림이 고압선을 잡은 다리를 타고 올라온다 불꽃이 끓는 고압은 날개와 날개 사이 균형을 이룬 중심에서 고요하고 맑은 잠이 된다
바람이 마음껏 드나드는 잠속에서 내려다보면 어둠과 바람은 울부짖는 한 마리 커다란 짐승일 뿐 그 위에서 하늘은 따뜻하고 환하고 넉넉하다
힘센 바람은 밤새도록 새를 흔들어대지만 푸른 공기는 어둠을 밀며 점점 커가고 있다 날개를 펴듯 끝없이 넓어지고 있다
—시집『태아의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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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택은 미세하고 정밀한 투시력의 소유자이다. 대상의 감춰진 본성을 파고드는 그의 눈은 시가 다만 내면의 고백이나 미사여구의 잔치가 아니라 주밀한 관찰력에 바탕을 둔 지적 소산임을 말해준다. 감정적 치장이나 수식을 동반하지 않기에, 그의 언어를 따라 사물들은 직접적 현상으로 새롭게 깨어나고, 우리의 진부한 예상이나 느낌, 상식적 기대는 사물의 낯선 발견 앞에서 무력해진다.
그러나 물기 없이 적막한 어조와 달리, 김기택의 시는 차가운 열정으로 뒤척인다. 존재하는 것들의 두꺼운 꺼풀을 벗겨 내는 집요함과, 무의미한 움직임에서 격렬한 운동성과 생명력을 찾아내는 타고난 직관은 지루하게 포복하는 세계에 고요하지만 역동적인 힘을 부여한다. 시집 [태아의 잠]은 김기택이라는 시인의 등장을 알린 최초의 계기였지만, 현미경으로 보는 듯한 치밀한 관찰과 건조한 묘사가 어떻게 시적인 것에 달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 새로운 스타일의 출현이기도 하였다.
‘겨울새’는 시인 특유의 투시적 상상력이 소리 없이 물결치는 섬세한 정경의 창조로 나아간 시이다. 찬바람을 견디며 한 줄 고압선에 내려앉은 새는 목숨을 건 위태로운 직립의 존재이다. 허공을 버티는 가냘픈 다리의 긴장과 집중은 추락의 전조처럼 느껴져 아슬아슬하다. 하지만 새의 잠은 평온하고, 공기의 흐름과 더불어 부드럽게 흔들린다. 그 발아래서 고압선은 더 이상 고압선이 아니다. 스스로 비운 잠의 여백과 가볍게 트인 공간의 여운에 전이된 듯, 날카로운 물질성을 상실한 고압선은 수액 가득한 나뭇가지가 된다. 새가 머문 그곳은 지금 무한한 정지이면서 영원한 흔들림이고, 고독의 거처이면서 공생의 균형이며, 이제 막 살아나 환해지는 자연의 출발점이다. 그렇기에 “불꽃이 끓는 고압”은 “고요하고 맑은 잠”으로 변해, 새의 날개를 타고 밤의 어둠을 벗어나 따뜻하고 넉넉한 하늘에 닿는다. 거기엔 푸르른 자연의 기운이 가득하다. 팽팽하게 당겨진 몸의 무게를, 그 둔중한 육체의 중력을 거둬내며, 겨울새는 이렇게 시인을 통해 끝없는 고요의 진원지로, 혼곤한 아름다움으로 다시 태어난다.
강계숙(문학평론가)
이현승의 「있을 뻔한 이야기」감상 / 황인숙
있을 뻔한 이야기
이현승
유령들 낮에 켜진 전등처럼 우리는 있으나마나.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파리채 앞에 앉은 파리의 심정으로 우리는 점점 더 희박해진다.
부채감이 우리의 존재감이다. 따귀를 때리러 오는 손바닥 쪽으로 이상하게도 볼이 이끌린다.
파리를 발견한 파리채처럼 집요하게 돈을 빌려주겠다는 메시지가 온다.
미션-임파서블 40대 되기 전에 해야 할 것들이 있다. 그게 뭘까? 서점에 가봐야겠다.
삶은 여전히 지불유예인데, 우리는 살면서 한 가지 역할놀이만 한다. 채무자채무자채무자채무자채무자 우리는 아직 올라가보지도 못했는데 벌써 내려가라고 하네요.
40대가 되기 전에 해야 할 일은 30대가 되기 전에 했어야 할 일들이다
귀신들 하긴 딴 사람은 없는데 잃은 사람만 있는 판돈 같은 이야기, 혹은 빌린 사람은 없는데 빌려준 사람만 있는 신체포기각서 같은 이야기. “내 다리 내놔” 하면서 따라오던 귀신은 어쩌다 다리를 간수하지 못했을까?
하긴 때린 사람은 없는데 언제나 아픈 사람만 있는 폭력적인 이야기, 끈덕지게 따라붙는 귀신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 눈코입도 없이 자꾸만 따라다니는 달걀귀신 같은 이야기.
———— 이현승 / 1973년 전남 광양 출생. 시집『아이스크림과 늑대』『친애하는 사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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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사물들』은 매력적인 시집이다. 지적이면서 무겁지 않고, 재기 넘치면서 가볍지 않은 시편들이 처처에 포진해 있다. 그 중에서 이 시를 고른 건 ‘채무자’니 ‘판돈’이니 소재들도 친근하고, 시구에서 즉각적으로 전해지는 심경이 어째 딱 내 이야기 같아서이리라. 문제는, 화자와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세상의 대부분 사람이 이런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있을 뻔한 이야기’는 시집 해설자가 간파한 대로 ‘있을, 뻔한 이야기’, ‘뻔하게’ 있었던 이야기, 있는 이야기!
자기존재의 왜소함과 수동성, 그 바스라질 듯한 상태를 질깃질깃하게 보여주는 시, 「있을 뻔한 이야기」에서 ‘부채감이 우리의 존재감이다.’라는 시구를, ‘부채감’이라는 말이 비유적으로 쓰였을 수도 있을 테지만, 실제 빚쟁이의 심사로만 풀어보자. 물질이 마음을 지배하는 세태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 마음이 물질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 큰 빚을 지면 기가 죽어서 몸도 쪼그라드는 듯해진다. 존재감이 크게 위축된다. 시의 화자는 자발적,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어떤 일을 해낼 방도도 없고 힘도 없다. 운명이 남에게 달려 있다. 운명이 남에게 달려 있으니 그건 산다고도 볼 수 없다. 유령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존재감 없는 화자한테 ‘집요하게 돈을 빌려주겠다는 메시지’, 대부업체 스팸메일 같은 것이 따라붙는다. 아무것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유령을 따라붙는 귀신들이라니, 얼마나 지독한 귀신들인가. 유령도 벗어날 수 없는 귀신들!
물(物)로나 심(心)으로나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복되도다! 빚을 진다는 건, 영혼을, 심장을 저당 잡힌다는 것이다.
존재가 희미해져 가는 절망감 속에서도 귀신들을, 그 상황을 유유히 지켜보는 시인이여!
황인숙 (시인)
貝柱
김영식
그러니까 지금 나는 몰락한 왕조의 비애를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잘게 썰려 접시 위에 누운 조개의 중심 젓가락으로 집어 불빛에 비춰보며 나는 왜 혼란의 대륙에 바람처럼 일어섰다 바람처럼 스러진 패왕이 생각났는지 몰라 광야를 달리는 말발굽 소리가 들리고 城 위론 붉은 깃발이 나부끼고 패각의 갑옷을 입고 천하를 호령하던 왕의 지극한 통치 나는 아직 한 나라를 세우지 못했지만 그 나라의 변방만 초라하게 떠돌지만 왕조의 기둥 같은 질긴 패주를 씹으며 황하 속 부초처럼 휩쓸려간 나라를 생각한다 천하를 호령하던 그 결연한 의지와 금강과 같았을 치국과 평천하와 세상과 결코 타협하지 않았을 불굴의 자세를 차라리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 몸을 던질지라도 불의 앞에선 한 치의 기개도 꺾지 않겠다는 신념을 그런 굳은 大義 하나쯤 가슴에 품고 이 풍진 세상을 독야청청해야 하지 않겠냐고 우희*의 눈물 같은 소주 한 잔 털어 넣으며 쓸쓸한 왕조의 기둥에 내 몸을 기대어보는 것이다
———— * 초패왕 항우의 애첩.
—《현대시학》2012년 11월호 ------------- 김영식 / 1960년 경북 포항 출생. 2007년 강원일보, 동양일보 신춘문예 당선. 2007년 《현대시학》 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 『숟가락 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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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와 가짜, 짝퉁 가려내기
철부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신춘문예에 응모했다. 그리고 깨끗이 낙선. 3학년 가을, 성균관대 주최 전국 고교생 백일장에 나가 우연히 장원을 했다. 나는 그때 간이 커지기 시작했다. 두고 보라지. 고등학생이 신춘문예에 당선하면…천재…. 그런 생각만 해도 행복했다. 나는 천재가 아니었다. 대학교 1학년, 2학년, 3학년. 그때 지방신문 신춘문예에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입선한 적이 있다. 가능성을 본 것 같았다. 그리고 4학년. 겨울에 잠시 신춘문예 당선의 영광이 내 손에 잡혔다가 그만 사라졌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야 비로소 나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할 수 있었다. 햇수로는 죽을 둥 살 둥 7년 만인가.
내가 천재 문학 소년이었더라면 대학 1학년 때 당선했으리라. 다시 말하지만 나는 천재가 아니었다. 적어도 시에 뜻을 두고 한 길로 매진한다면 줄잡아 5년 이상 코피 나게 시와 씨름해야 그 문은 열린다.
요즘 대학교 부설 사회교육원 같은 데서 시 창작을 가르치고 배운다. 일찍이 문청이었지만 굳어진 손으로 시를 쓰는 일이 조련치 않다. 그 굳어진 손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3년 이상 소요될 것이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다. 그 시 창작반에서 중간쯤 되는 실력의 소유자가 한 서너 달 동안 보이지 않더니 보란 듯이 권위 있는 신인상 또는 신춘문예에 당선한 것이다. 이런 것을 가리키는 말이 있다. 괄목상대(刮目相對), 선비는 서로 헤어졌다 사흘 뒤에 만나면 눈을 비비고 상대방을 본다는 뜻으로, 남의 학식이나 재주가 놀랄 만큼 향상된 것을 이르는 말. 그러나 천만에, 어림없는 소리. 문학의 성취는 그리 만만한 게 아니다.
펌프 물을 길어 올릴 때 마중물을 부어주고 재빨리 펌프질을 해야 물이 콸콸 쏟아진다. 40대나 50대, 혹은 60대의 시인 지망생은 생각한다. 누군가 내게 그 마중물만 되어준다면 그 힘으로 죽을 때까지 시를 멋들어지게 쓸 수 있겠거니. 그렇게 해서 마중물의 힘을 받아 물이 끊임없이 세차게 나온다는 건 착각이다. 펌프질을 그치는 그 순간 ‘시’라는 이름의 물은 저 아래로 쿨럭쿨럭 잦아들고 말게 된다. 시는 스스로의 힘으로 분출하는 샘이라야 한다. 물이 솟아날 자리를 여기도 파보고 저기도 파보고…… 그렇게 해서 문득 샘물이 분수처럼 터질 때를 기다려야 한다. 자력으로 솟지 않는 샘은 샘이 아니다.
1. 예전에는 표절이 큰 이슈가 되어 시 한 편 안에서 몇 군데 같은 표현을 사용하면 당선이 취소되기도 했다. 그러나 발상이 같은 경우는 표절이라고 보기 어렵다. 열차가 레일을 달려가(오)는 것을, 열차가 지퍼를 채운다는 식으로 다음과 같이 여러 시인들이 표현하고 있다. 이들은 누가 누구를 표절한 게 아니다. 우연히 같은 발상을 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질주하는 춘천행 무궁화호 열차
지퍼를 채우듯 튿어진 자리를 꿰매며 달려가는 것은 열차의 속도였다
—2008 한국일보 신춘 당선작 정은기/ 차창 밖, 풍경 빈곳
기차는 두 줄로 된 지퍼 채우듯/ 갈라진 것들을 깁는다
마을과 내(川)를 깁고(…) / 남북으로 터진 지도를 깁는다
—전태련, 기차는 깁는다
건너편 사람들 틈에 환영처럼 그녀가 있다// 한 번 벌어지면 쉽게 채워지지 않는다//
선로 위 끊임없이 지하철이 달려온다
—송승환, 지퍼
2. 요즘의 가짜 신인 혹은 짝퉁 신인은 제조 공장에서 맞춤 생산을 한다는 것. 그 제조공장의 특색을 알면 가짜를 가려내고 찾는 건 아주 쉽다. 항간에는 제조 공장이 둘이 있다고도 한다.
3. 한 번도 어디 응모해서 본심(최종심)에 올라본 적 없이, 대단한 등용문(상금 백만원 이상)을 단번에 돌파하는 신인. 그것도 40대부터 60대에 걸친 원로 신인(?)의 경우. 대체로 가짜일 가능성이 크다. 젊은 시절에 감각적인 시를 써온 시인도 나이 들면 무뎌지게 마련인데 하물며 60대 신인이 젊은 감각과 기교를 능숙하게 구사한다는 건 어딘가 수상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2011년 <**신인시인상> 당선자는 어디 응모해서 최종심에서 떨어진 흔적이 없음.
(**대 식품영양학과 졸업)
2012년 <**신인시인상> 당선자는 작년, 금년 문학과사회, 문학동네 등 최종심에서 일곱 번 떨어진 흔적이 있음.
(**대 문예창작과 대학원 석사과정 수료)
4. 공장장은 참신하며 독특한 공감각의 비유를 잘 구사한다. 그리고 일부러 서툰 표현이나 어눌한 표현을 살짝살짝 끼워 넣기도 한다. 심사위원들에게 재능 있는 신인이긴 하지만 아직 세련미가 없어보이도록 꾸민다. 그 엉성한 듯, 서툰 표현들에서 신인의 성장 가능성을 점치도록 하는 장치를 설치함을 잊지 않는다.
5. 요즘 대부분의 신인들이 시의 본문에 한자를 쓰지 않음을 알기에 일부러 한자를 간간이 섞어 쓴다. 할 수 있으면 의도적으로 국어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이상한 한자 어휘를 만들어 쓰거나, 괴팍하고 구석진 한자어를 구사한다. 천문, 지리, 고대의 전설 등 현학적인 지식을 활용한다. 비슷한 발음을 이용한 언어유희, 한자어로 된 동음이의어의 언어유희도 곧잘 즐긴다.
6. 특별히 공장장이 기호(嗜好)하는 다음과 같은 시어들 또는 어법이 있음을 기억하고 있으면 가짜를 가려내기에 아주 편리하다. (강호의 소문에 의하면 이러한 공장이 남쪽과 북쪽 최소한 두 곳에 있다는 설이 유력하다. 따라서 공장장은 최소 둘 이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바람, 유목, 새, 나무, 꽃, 경전, 통증, 허기, 맛, 소리, 귀, 혀, 문, 손잡이, 문고리, 허공, 글자, 씨앗, 어둠,
황도(黃道), 황경(黃經), 계절, 절기, 경칩, 입춘, 상강, 요일,
수면(水面), 수피(水皮), 음절, 음계, 음조, 부위, 방위, 표식(標識'표지'의 틀린 말), 동색(同色),
감정, 편애, 애완, 버릇, 풍습, 습성, 습관, 봉인, 장기, 내장,
떨어지다, 떨어뜨리다, 흔들리다, 기울어지다, 달그락거리다, 환하다, 접다, 접히다, 있겠다, 하겠다,
xx는 y가 없다. xx는 y뿐이다. A는 B를 C하는 것.
~과(科 고양이科, 자작나무科), ~의 왼쪽, 안쪽, 바깥, 중심, 네모, 모서리……
7. 이상의 판별 척도를 숙지한 다음 학습한 내용을 실제에 응용해 본다.
가령 금년 어느 신문 신춘문예에 60대(혹은 40대) 신인이 요란뻑적지근하게 등단했다고 치자. 과거엔 듣도보도 못한 신인(전에는 중고등학교 문예반 학생 수준)인데 그는 불과 몇 달 사이에 괄목상대할 지경의 대학원 석박사 수준으로 향상하여 그 표현의 초식이 갑자기 공교하고 세련되어 눈부실 지경이다.
아, 이게 혹시 가짜거나 짝퉁이 아닐까, 가슴 두근거리며 조심스레 의심해 본다. 그렇다, 당신의 그 의심은 타당한 준거에 의해서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으며 구십 프로 이상 적중한 것이다. 하하하, 이건 눈물나게 우스운 코미디다. 가짜 신인의 당선소감에 거론된 고명한 시인이며 덕망 높은 교수 시인(평론가)의 이름은 낙선자들을 주눅들게 하며 끽소리 못하게 제압함에 아주 각별한 효력을 발휘한다. 거룩한 존함 뒤에 공장장을 감추는 이 방법이야말로 호가호위(狐假虎威)의 고전적인 병법임에랴.
그런데 사실 그 고명한 분들은 몇 차례 강의실인지 어디에선지 소 닭 보듯 조우한 적 있을 뿐인 이 뻔뻔천만한 가짜 신인의 실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잘 모르고 다만 살짝 기분 좋게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고영민의 「극치」평설 / 홍일표
극치
고영민
개미가 흙을 물어와
하루 종일 둑방을 쌓는 것
금낭화가 핀 마당가에 비스듬히 서보는 것
소가 제 자리의 띠풀을 모두 먹어
길게 몇 번을 우는 것
작은 다락방에 쥐가 끓는 것
늙은 소나무 밑에
마른 솔잎이 층층 녹슨 머리핀처럼
노랗게 쌓여 있는 것
마당에 한 무리 잠자리 떼가 몰려와
어디에 앉지도 않고 빙빙 바지랑대 주위를 도는 것
저녁 논물에 산이 들어와 앉는 것
늙은 어머니가 묵정밭에서 돌을 골라내는 것
어스름녘,
고개 마루에 오토바이를 세워놓고
우체부가 밭둑을 질러
우리 집 쪽으로
걸어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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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극치
우주의 지극한 경지다. 천연의 시가 보여주는 만물의 조화이며 공생의 따듯한 광장이다. 여기에 덧보태는 말은 사족이요 췌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 시에는 아홉 개의 풍경이 나열되어 있다. 시의 주체는 시종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모습을 드러냈다면 시의 울림은 반감되었을 것이다. 눈앞의 정경을 제시하고 뒤로 물러서 있는 화자는 얼핏 작품에 개입하지 않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각각의 정경을 하나의 고리에 꿰어 시를 장악하고 또렷한 시의 혈점을 완성한다.
이 시에는 식물, 동물, 인간이 경계 없이 어우러져 전일적 삶의 구경을 보여주고 있다. 우주 공동체의 삶의 진경이 자연스럽게 펼쳐진다. 구분도 없고 경계도 없다. 하나의 덩어리로 숨 쉬고 하나의 유기체로 운동하고 있다. 개미, 소, 쥐, 사람이 각각의 생존 방식에 따라 움직이고 있지만 거기에 대한 시비나 호불호의 시선은 보이지 않는다. 고유의 정체성이 조용히 빛을 발하고 있을 뿐이다. 인간의 분열된 시선이 아닌 일체화 된 신의 따듯한 시선이 빚어낸 지상의 아름다운 풍경이다. 낫고 못함도 없고, 미추도 없고, 선악도 없다. 오직 하나의 생명이 각자의 위치에서 존재의 향기와 광채를 내뿜고 있다. 개별화된 고유성이 소중한 가치로 자리하고 있는 시다. 생명의 다름을 배격하고, 단지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핍박하고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 그 자체의 소중함을 시의 공간에서 각성케 하는 따뜻한 작품이 바로 「극치」다.
이어지는 솔잎, 잠자리 떼, 산, 늙은 어머니, 우체부 역시 이 시를 빛나게 하는 주인공들이다. 조연도 없고 엑스트라도 없다. 곳곳에서 삶의 극치를 이루는 존재의 형상들이다. 삶의 풍경 하나하나가 모두 극치요 지존이다. 말 그대로 하나의 존재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서 살아 율동하는 거룩한 생명들이다. 이들에 대한 화자의 시선은 공평하고 구별이 없다. 있는 그대로 끌어안고 대지의 모성으로 감싸 안는 크고 넉넉한 품이 있을 뿐이다.
그것이 이 시의 전체를 관류하는 시의 온기이며 부드러움의 힘이다. 일체의 목숨을 아우르는 크고 온화한 손이 「극치」의 안에 있다. 생명과 환경을 시의 전면에 내세우는 시들의 거친 목소리가 이 작품에는 없다. 이러한 점이 고영민 시의 미덕이며 품격이다.
문명의 이기를 저만치 내려놓고 사람의 집으로 걸어오는 누군가가 있다. 사람이 온전히 사람으로만 만나는 거룩한 장소에는 지금 눈 내리고, 참새 몇 마리 빈 나뭇가지에 앉아 말곳말곳 지상의 목숨들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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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일표 /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詩로 여는 세상》 주간.
쓸쓸한 화석
이창기(1959~ )
겨울비 내린 뒤
언 땅 위에 새겨진
어지러운 발자국
발자국 위에 또 발자국
뉘 집 창문 앞일까?
결코 놓칠 수 없었던,
끝까지 벗어나려고 발버둥쳤던,
그러다 끝내
서로에게 스미지 못하고 뒤엉켜버린
순대 같은
아니 식은 떡볶이 같은
저 지독한 사랑의 흔적
그 진창의 발자국 속에는
아직 대답을 듣지 못한 말들이
살얼음처럼 간략하게
그러나 서로를,
힘껏 당기고 있다
밟아봐, 얼음 깨지는 소리, 경쾌하지?
둘러봐라,
내 생각엔
이 근처 어딘가에 그들의 무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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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명물 중 하나는 눈 녹은 진창을 빼놓을 수 없으리라(그게 무슨 명물이냐고?). 날씨가 잠시 풀려서 질척대는 길을 걷는 것은 얼굴 찌푸려지는 일이다. 하나 다시 추위가 몰리면 발자국들이 꽁꽁 얼어 엉켜 있다. 그럴 때 그 흔적들은 예사롭지 않다. 그 '쓸쓸한 화석'은 우리 내면의 자화상과 똑 닮아 있는 것이다(그래서 명물이라고 하면 너무 작위적인가?). 우리 욕망의 무늬가 그렇고, 사랑의 무늬가 그렇고, 이른바 성공의 무늬가 그렇다. 그중 나의 것도 찾아본다. 크고 어지러운 것! 누군가의 발자국을 밟고 있고 또 여기저기 누군가의 것에 짓눌려 있다. 그 '겹침'이 사랑뿐이라면 오죽 좋으랴. '발자국' 뒤꿈치 안에 낀 살얼음, 그것이 우리의 삶을 새긴 비문(碑文)일 것이다. 날이 풀리면 '화석'도 '비문'도 그저 한물건일 뿐이다. 모두 '무덤'으로 간 흔적이라서 아름답다.
장석남 (시인, 한양여대 교수)
정확하게 사랑하기 위하여 [2013.02.18 한겨레21 제948호] [신형철의 문학사용법] 비평가를 이해해줄 것 같은 시인 장승리의 <무표정>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비평이나 비평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시간이 없겠지만, 비평가 자신들은 꽤 많은 시간을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데 보낸다. 어떤 비평가가 되길 원하느냐는 질문을 몇 번 받은 이후 나는 간결하고 명료한 대답을 준비해둬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최근 어느 대담에서 같은 질문을 받고는 이렇게 답했다. 정확하게 칭찬하는 비평가. 이 대답은 곧바로 두 개의 추가 질문을 유발할 것이다. 길게 답할 수 없으니 오해를 사기 쉽겠지만 그래도 답해보자. 첫째, 왜 칭찬인가. 어떤 텍스트건 칭찬만 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칭찬할 수밖에 없는 텍스트에 대해서만 쓰겠다는 뜻이다. 그런 글을 쓰고 나면 내 삶이 조금은 더 가치 있어졌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내 노트북에는 쓰고 싶은 글의 제목과 개요만 적어놓은 파일이 수두룩한데 이 파일의 수는 자꾸만 늘어난다.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도대체가 시간이 너무 없다. 이것은 인생의 근본 문제다. 비판이 비평의 사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판은, 비판을 할 때 만족감을 느끼는 비평가들의, 사명이다. 둘째, 왜 정확한 칭찬인가. 비판이 다 무익한 것이 아니듯 칭찬이 늘 값있는 것은 아니다. 부정확한 비판은 분노를 낳지만 부정확한 칭찬은 조롱을 산다. 어설픈 예술가만이 정확하지 않은 칭찬에도 웃는다. 진지한 예술가들은 정확하지 않은 칭찬을 받는 순간 자신이 실패했다고 느낄 것이다. 정확한 칭찬은 자신이 칭찬한 작품과 한 몸이 되어 함께 세월의 풍파를 뚫고 나아간다. 그런 칭찬은 작품의 육체에 가장 깊숙이 새겨지는 문신이 된다. 지워지지도 않고 지울 필요도 없다. 이런 생각이 보편적인 설득력을 가질 것이라고 자신하지 않는다. 동의해달라고 떼쓸 생각도 없다. 누군가는 왜곡 없이 이해할 것이라고 믿을 뿐이다. 그러던 중에 장승리의 두 번째 시집 <무표정>(문예중앙시선 23)을 읽었다. 좋은 시가 많았지만 특히 어떤 시가 나를 반갑게 했다. 그 시를 읽고 나서 나는 이 시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시인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이해해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이중의 착각일지라도, 이런 착각은 어떤 에너지가 된다.
정확하게 말하고 싶었어 했던 말을 또 했어 채찍질 채찍질 꿈쩍 않는 말 말의 목에 팔을 두르고 니체는 울었어 혓바닥에서 혓바닥이 벗겨졌어 두 개의 혓바닥 하나는 울며 하나는 내리치며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었어 부족한 알몸이 부끄러웠어 안을까봐 안길까봐 했던 말을 또 했어 꿈쩍 않는 말발굽 소리 정확한 죽음은 불가능한 선물 같았어 혓바닥에서 혓바닥이 벗겨졌어 잘못했어 잘못했어 두 개의 혓바닥을 비벼가며 누구에게 잘못을 빌어야 하나
—「말」전문
화자는 세 개의 소망을 말했다. 정확하게 말하고 싶고,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고, 정확하게 죽고 싶다는 것. 이 모든 것의 출발은 우선 말이다. 그녀는 정확하게 말하고 싶었으나 말을 하고 나면 그것은 늘 부정확한 것처럼 여겨졌고 그래서 했던 말을 또 해야만 했다. 니체는 채찍질당하는 말(馬)을 끌어안고 울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말(言)이 정확해지길 바라며 채찍질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그것이 고통스러워 우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두 개의 혓바닥”이 있다. 하나는 때리고, 하나는 운다. 정확하게 말하고 싶다는 욕망은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과 연결돼 있다. 나는 “부족한 알몸”이 부끄럽다. 그런데 네가 나를 안으려 들까봐, 혹은 내가 너에게 안기고 말까봐, 했던 말을 하고 또 하면서 딴청을 부려야 했다. 내 알몸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도록, 네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주면 좋겠다. 그때 나는 ‘정확하게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겠지. 어쩌면 그것은 정확한 죽음만큼이나 “불가능한 선물”일까. 비평가인 나는 세상의 모든 훌륭한 작가와 시인들에게 바로 그 ‘불가능한 선물’을 주고 싶은 것이다. 정확한 칭찬이라는 정확한 사랑을.
신형철 (문학평론가)
정지용의 「인동차(忍冬茶)」감상 / 곽효환
인동차(忍冬茶)
정지용(1902~?)
노주인(老主人)의 장벽(腸璧)에 무시(無時)로 인동(忍冬) 삼긴물이 나린다. 자작나무 덩그럭 불이 도로 피여 붉고, 구석에 그늘 지여 무가 순돋아 파릇하고, 흙냄새 훈훈히 김도 사리다가 바깥 풍설(風雪)소리에 잠착하다. 산중에 책력(冊曆)도 없이 삼동(三冬)이 하이얗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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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시 가운데 가장 뛰어난 면모는 동양적 은일의 정신세계로 귀결한 후기시의 세계이고 이 작품은 그 중심에 있다. 노주인은 엄동의 풍설(외부세계)을 피해 산수에 몸을 의탁해 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작나무 덩그럭 피운 붉은 불을 바라보며 인동차를 삼키는 일이다. 은둔한 노주인은 친일도 배일도 못하는 시인 자신의 모습이다. 그의 장벽을 타고 내리는 것은 혹한을 견디며 삼킨 찻물인 것이다. 하얀 겨울을 책력도 없이 견뎌야 하는 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어디 그것뿐이겠는가마는. 무시로 인동차를 마실밖에는.
곽효환(시인·대산문화재단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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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송찬호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입안의 비린내를 헹궈내고
달이 솟아오르는 창가
그의 옆에 앉는다
이미 궁기는 감춰두었건만
손을 핥고
연신 등을 부벼대는
이 마음의 비린내를 어쩐다?
나는 처마 끝 달의 찬장을 열고
맑게 씻은
접시 하나 꺼낸다
오늘 저녁엔 내어줄 게
아무것도 없구나
여기 이 희고 둥근 것이나 핥아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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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하염없는 사랑이라니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은 감각적 이미지가 돋보이는 시다. 달과 고양이를 한줄에 엮다니! 달이 뜨자 고양이는 돌아온다. 달과 고양이의 두 행위는 공교롭게 동시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공교로울 것도 없는 사건이다. 진실은 이렇다. 달은 하늘의 고양이, 고양이는 변신한 집 안의 달이다. 둘 사이에 아무런 피의 연대는 없지만 둘은 이복형제처럼 엮인다. 달은 수시로 모양이 바뀐다. 하현 때 야위고 보름 때 둥글어진다. 야생의 부름에 고양이는 자주 집을 나간다. 무단가출했다가 어느 날 불쑥 돌아온다. 고양이는 여자의 숨은 내면이고, 달은 여자의 드러난 외면이다. 그 둘은 변심하기 쉬운 여자의 표상이다.
달은 차고 일그러지고, 파도는 오고 감을 되풀이한다. 여자는 그런 달이고 파도다. 여자는 항상 영혼의 가장 위험한 상태다. 여자들의 내면에는 고양이들이 한 마리씩 들어 있다. 남자들은 한 생애 동안 얼마나 많은 고양이들을 만나는 걸까. 고양이들은 “어둠과 추위로부터 쫓겨온 무리”고, 이 고양이는 깜찍하게 “한때는 방 안을 뒹굴던 털실 몽상가와 잘도 놀았답니다 / 현기증 나는 속도의 바퀴와 아찔한 연애도 해봤구요”(<고양이>)라고 말한다.
이 세상의 모든 남자들은 파멸을 감수하면서 이 변심 잘하는 고양이에게 제 모든 것을 걸고 연애에 투신한다. 고양이는 바람의 딸이다. 늘 모든 것은 갑자기 사라진다. “앗,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방 안 모서리, 손거울, 집 열쇠, 어항의 물고기가 사라지고 없어요 / 다그쳐 물어도 종알종알 털만 핥을 뿐 모른다 도리질만 하네요”(<고양이>) 다그쳐 물어도 모른다 모른다 도리질만 하는 이 고양이를 사랑하는 건 수컷들의 가혹한 운명이다. 이 가혹한 운명에 들린 수컷들이 할 수 있는 건 무얼까. 니체는 이렇게 적는다. “추억이 고름이 되어 아침마다 침대를 더럽힐 때 그는 지나간 삶을 원망하게 된다.” 송찬호 시인은 이렇게 적는다. “달이 해를 가리고 지나가는 그 짧은 순간, / 나는 늑대 속으로 뛰어들고 싶었다 복면을 하고 / 은행원들을 개처럼 바닥에 엎드리게 하고 / 불이야, 소방차가 불난 꽃집으로 달려가게 하고 / 유명한 불륜 남녀를 맨홀 속으로 내려가 사라지게 하고 / 앵무새가 되어 엽기적 살인 사건의 배후로 등장하고 싶었다”(<일식>). 그러나 그러질 못한다. “세상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도시는 다시 환해졌다 / 웅덩이의 물이 바지에 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나는 횡단보도를 건넜다 / 나는 오랫동안 다른 이름으로 살기를 원했다”(<일식>). 겨우 웅덩이 물이 바지에 튀지 않도록 조심하며 걷고, 오랫동안 다른 이름으로 살기를 원할 따름이다. 그런 남자들에게 괴테는 이렇게 말한다. “이런 꼴로 살아간다는 것은 개라도 비웃을 일이다!”
달이 뜨고 고양이가 돌아온 이때는 궁기가 사무치는 저녁이다. 변덕스럽고 제멋대로 굴던 고양이는 이제 다정하다. 집 나갔던 여자가 돌아온 것일까? “손을 핥고 / 연신 등을 부벼”댄다. 고양이는 사랑을 갈구하며 ‘나’를 애무한다. 애무는 정사의 전 단계다. 그러나 ‘나’는 식물성이므로 고양이의 적극적 구애 행동에도 발기가 일어나지 않는다. 발기가 없는 육체에게 섹스의 달콤하고 넘치는 쾌락도 없다. 이 저녁은 금욕주의로 일관한다. 이 다정한 고양이에게 ‘나’는 줄 게 없다. 그래서 겨우 할 수 있는 게 “처마 끝 달의 찬장을 열고 / 맑게 씻은 / 접시 하나 꺼”내는 일이다.
오늘 저녁엔 내어줄 게 아무것도 없구나, 라고 말하는 이 저녁은 잔인한 저녁이다. 가난은 우리의 마음에서 비롯한다. 여자들은 다시 돌아오지만 이미 헐벗고 가난한 남자는 여자에게 줄 것이 남아 있지 않다. 서로의 마음이 엇갈린다. 엇갈리는 두 마음 사이로 차고 축축한 달빛이 흐른다. 여자는 다이아몬드를 원했으나, ‘나’는 숯을 주었다. 니체는 숯과 다이아몬드는 ‘동족’인데, 이토록 다른 ‘동족’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가장 아름다운 사랑도 약간은 쓰다.”(니체) 이 하염없는 사랑의 시라니 ! 가난한 연인은 배고픈 제 애인에게 빈 접시를 주고 이것이나 핥아 보렴, 하는 수밖에 없다. 송찬호는 여자/고양이를 발명한다. 그 여자/고양이와의 사랑이 하염없음을 노래한다. 이 지구 위에서 사랑은 그 하염없음 때문에 멸종하지는 않을 것이다. “돌로 찧은 여뀌즙 사랑은 여전히 물고기 눈을 찌르고 갈라진 시멘트 틈에서라도 아이들은 분수처럼 솟고 그대의 어미들은 천 일의 밤을 팔아 아침 한때를 맞이하리니”(<사과>). 이 세상에 사랑이란 사랑은 다 말라 비틀어져서, 더는 새로 태어나는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오지 않을까, 그리고 새 아침이 영원히 오지 않을까, 염려하지 않아도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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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찬호(1959~ )는 충청북도 보은 사람이다. 고향인 보은에서 중학교를 마친 뒤 대전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교는 대구에서 마쳤다. 동해안에서 초병으로 군대 생활을 하며 그이는 심심할 때마다 김춘수 시집을 꺼내 읽으며 시인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대학을 마친 뒤 아주 짧은 기간동안 직장 생활을 한 적이 있지만 몸에 맞지 않았다. 직장을 1년 만에 그만두고 그이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것은 1992년이다. 그 뒤로 고향에 붙박이로 눌러 살고 있지만 한일한 은둔자가 아니라 수족을 바쁘게 놀리는 농사꾼으로 뿌리를 내렸다. 그이는 겉으로는 부드러우나 속으로는 강한 사람이다. 시인의 아내는 중학교 교사다. 그이는 아내의 소망을 이뤄 주기 위해 고향에 한옥을 지었다. 아무 경험 없이 인부들과 함께 한옥을 짓는 일은 아주 고단한 일이었다. 얼마 전 대전역 앞 한 소줏집에서 그이와 소주잔을 기울였는데, 한옥이 4년 반 만에 완공되었다고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쁘냐고 물었더니, 기쁠 것도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이는 어떤 시에서 “그 소용돌이치는 여울 앞에서 나는 백 년 잉어를 기다리고 있네”(<임방울>)라고 쓴다. 나는 그이가 기다리는 “백 년 잉어”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이가 얼마 전에 집필을 끝냈다는 첫 장편소설이 금빛 비늘이 찬란한 잉어일까. 송찬호가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문학과지성사, 2009)이라는 새 시집을 펴냈다.
_ 장석주 (시인, 문학평론가)
신현림의 「나의 싸움」감상 / 황인숙
나의 싸움
신현림(1961∼ )
삶이란 자신을 망치는 것과 싸우는 일이다
망가지지 않기 위해 일을 한다
지상에서 남은 나날을 사랑하기 위해
외로움이 지나쳐
괴로움이 되는 모든 것
마음을 폐가로 만드는 모든 것과 싸운다
슬픔이 지나쳐 독약이 되는 모든 것
가슴을 까맣게 태우는 모든 것
실패와 실패 끝의 치욕과
습자지만큼 나약한 마음과
저승냄새 가득한 우울과 쓸쓸함
줄 위를 걷는 듯한 불안과
지겨운 고통은 어서 꺼지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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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는 외로움과 슬픔에 취약한 사람이다. 그래서 ‘외로움이 지나쳐 괴로움’이 되고 ‘슬픔이 지나쳐 독약’이 되는 지경이다. 이러다간 내 삶이 망가질 거야! ‘망가지지 않기 위해 일을’ 하는데, 우울하고 쓸쓸하고 불안하기만 해서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러니 속이 까맣게 타고 죽을 맛이다. 그래도 일은 해야 먹고살지. 이럴 때 따뜻한 생기를 나눠 줄 한 사람이 그립구나. 내 처지가 어쩌면 이리도 외롭고 슬픈가. 마음이 습자지처럼 나약해진 화자, 삶을 갈아엎을 결연한 의지도 실행할 힘도 안 나니까 소리를 빽 지른다. ‘지겨운 고통은 어서 꺼지라구!’ 힘없는 사람이 악이나 쓰지 뭐. 그러고 나서 다시 첫 행으로 돌아가 투지를 다진다. ‘삶이란 자신을 망치는 것과 싸우는 일이다.’ 두둥! 박수치고 싶게 멋진 말!
일하는 건 망가지지 않은, 버젓한 사회인으로 사는 기본 조건일 테다. 그런데 대다수 사람은 망가지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돈이 생기기 때문에 일을 한다. 일하다 몸이나 정신이 망가지기도 한다. 망가져도 일을 한다. 그게 생업(生業)이라는 거다. 생업에 시달리는 사람은 그다지 외롭지는 않다. 괴로울 뿐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버는 사람은 행운아다. 그들은 일을 하면 할수록 튼튼해진다.
황인숙 (시인)
김언희의 「더럽게 재수 없는」평설 / 홍일표
더럽게 재수 없는
김언희
더럽게 재수 없는 수태고지
초장부터 똥 밟은 나는
아침저녁 살충제에 제초제를 섞어 마시고
줄담배를 피우며 수음을 하네
(내 눈이 걸려보지 않은 임질이라고는 없지만, 내 입이 걸려보지 않은 매독이라고는 없지만)
징글맞게 재수 없는 수태고지
구역질 구역질 애도의 헛구역질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한번 박혀볼래?
박아줘?
더럽게 지분거리는 벌건 십자가의 이름으로
나는 내 자궁에 불을 지르고
그 불길에 담배를 붙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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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자의 힘
시인은 극한까지 가보는 자이다. ‘높고 외롭고 쓸쓸하게’ 가는 그 길은 대중들의 시선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외진 곳이어서 누구나 쉽게 가는 길은 아니다. 그러나 많은 시들이 그 길 위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상당수의 시인들이 주저하고 망설이는 곳. 귀신이 나올 것 같아 슬금슬금 피하는 곳. 어릴 적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당집이나 상여집 같은 곳. 그래서 아무도 근접하지 않는 곳. 바로 그 자리에서 시는 죽음을 먹고 태어난다. 주체가 소멸하고, 인습과 관례가 사라지는 낯설고 기이한 곳. 소위 정상적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절대로 근접할 수 없는 곳. 내던지고 저질러야 간신히 도달할 수 있는 곳.
그곳에서 발아한 시 한 편을 본다. 사회적 통념, 가치 체계와는 먼 시다. 김언희 시인의 「더럽게 재수 없는」은 ‘수태고지’ 자체를 재수 없는 일로 규정한다. 누가복음에 기록된 수태고지의 내용은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두려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이다. 그러나 시적 주체는 이러한 종교적 언술에 반기를 든다. 동정녀 마리아는 아이를 유산시키기 위해 제초제를 마시고 “줄담배”와 “수음”을 하며 눈과 입은 이미 임질과 매독에 걸린 상태다.
이러한 진술은 부정하고 타락한 세계에 대한 거부를 전제로 한다. 즉 임질과 매독에 걸렸다는 것은 세계는 이미 구원 가능성이 없을 정도로 부패했다는 것이고 어떠한 희망도 없다는 단호한 판단의 결과이다. 화자는 계속 “징글맞게 재수 없는 수태고지”에 몸서리를 친다. 이러한 내용은 종교적 사실을 시적 상황으로 변이시켜 진술한 것이다. 신성모독과 종교에 대한 왜곡과 폄훼로 지탄받을 수도 있는 내용이지만 시적 주체는 성경 속의 이야기를 통해 현실 종교의 문제를 비판적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연에서 화자는 통렬한 풍자의 칼을 꺼내든다. “벌건 십자가”가 성기로 묘사된다. 십자가는 그럴듯한 종교적 명분을 내세워 개인에 대한 폭력을 일삼는 하나의 상징물이고, 종교는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더럽게 지분거리는” 대상일 뿐이다. 자유도 사랑도 구원도 아닌 다만 겁탈과 강탈을 저지르는 범죄의 도구로 그려지고 있다.
이처럼 이 작품의 요체는 종교에 대한 정면적인 비판과 풍자이다. 거룩한 십자가를 세속적 욕망으로 발기된 물건으로 읽고 있는 시적 주체의 시선에 “더럽게 재수 없는 세계”는 거대한 지옥의 형상으로 나타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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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일표 / 1958년 충남 입장 출생.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詩로 여는 세상》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