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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를 이렇게 쓴다

법정 2012. 7. 26. 05:44

시] 나는 시를 이렇게 쓴다 / 최영철|♧ 시/소설 이론 ♧

김옥순 | 조회 56 |추천 0 |2011.03.15. 10:39 http://cafe.daum.net/kjbsd/NqDa/64 

 

나는 시를 이렇게 쓴다

 

최영철

 

 

- 제1장 -

 

다른 모든 일도 그렇지만 시를 쓰는 데는 자신감이 필요하다. '나는 시를 잘 쓸 수 있다'

정도로는 안 되고 '나는 시를 잘 쓴다'고 자신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되기란 쉽지 않다.

습작시절에는 자기 시의 어쭙잖음에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시의 완벽함에 곧잘 절망한

다. 그래도 자신감을 가지자. 안되면 매일 아침 '나는 정말 미치도록 시를 잘 쓰는 놈이야'

하는 자기 최면을 반복해도 좋다. 그러나 자만심은 금물이다. 자신감은 작품을 완성할

때까지만 필요한 강정제 같은 것이다. 일단 다 쓴 작품에는 일이 끝난 뒤 거시기가 스르르

풀이 죽듯이 기가 죽어 있어야 한다. 그것을 긍휼하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더 나은 작품을 쓸 수 있다.

 

출판 일을 하다 보면, 가끔 대학노트 몇 권 분량의 시를 자랑스럽게 내보이는 천재시인들이

있다. 하루에도 수십 편을 갈겨쓰며 집에는 이만한 분량의 작품이 또 있다고 묻지도 않은

말을 혼자 떠벌린다. 이런 시인일수록 자기 시가 한국 시사를 바꾸어 놓거나 출간만 하면

공전의 대히트를 칠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다. 이것은 자신이 아니라 자만이다. 자기 시가

어디까지 와 있는지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르고 흥에 겨워서 계속 써 갈기고 있는 것이다.

이런 천재시인들에게는 약도 없다. 계속 천재로 착각하며 살도록 내버려두는 방법뿐이다.

그 천재시인 출판사 문을 나서면서 혼자 중얼거린다. '아, 천재는 외로워.'

 

이렇게 말하는 나 역시 자신감은 없고 자만심만 있는 엉터리 시인인지 모른다. 아니 나는

아직 그런 알량한 자만심조차 없다. 쓰기 전이나 쓰고 나서나 내 재능에 대한 의심 때문에

주눅이 든다. 그러나 이런 의심조차도 없었다면 지금까지 버티기나 했을까.

 

신춘문예 최종심에서 계속 턱걸이하며 낙방의 쓴잔을 마시고 있을 때 가장 나를 괴롭힌

것이 '나는 도대체 시를 쓸 재주나 있는 놈인가?'하는 의문이었다.

그때마다 나의 자문자답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했다.

10년을 하면 사법고시라도 붙을 판인데 돈도 명예도 안 되는 시인 자격증 하나 못 따는 걸

보면 글렀구나 싶다가도, 사법고시에 되는 것보다 시인이 되고 싶었으니 이런 초지일관이면

뭐가 되도 되지 않겠는가 싶었다.

 

그래서 나는 재능이란 말의 뜻을, 하고자 하는 일에 집착하는 능력이라고 새롭게 정의

해버렸다. 즉, 재능은 그 분야의 특별한 재주를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하고자 하는 의지를

부여받는 것이라고 결론지은 것이다. 그것 때문이라면 추위와 굶주림도 참을 수 있고

멸시와 외로움의 고통도 참을 수 있는 것, 그것 이외에는 세상 모든 것이 별 볼일 없어

보이는 것, 이런 경지가 바로 천부적인 재능이 부여된 경지라고 나는 믿기로 했다.

 

그때는 그랬는데, 재능도 세월 따라 닳아 없어지는 모양이다. 지금은 그 믿음이 조금밖에

없다. 그 시절은 시 때문에 겪는 고통이 즐거웠는데 이제는 그 고통이 조금씩 고통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요즘 나는 반성하고 있다.

 

<요점정리>

 

1.자신의 재능을 추호도 의심해 본 일 없는 천재시인들은 이제

부터 자신의 재능을 열심히 의심하라.

2.자신의 재능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나 같은 어중개비 시인들

은 매일 아침마다 '나는 시를 너무 미치도록 잘 쓴다'는 최면

을 걸어라. 그 최면이 통하지 않으면 계속 절망하라. 시 때문

에 절망하는 한 당신은 누구보다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시인

이다.

 

- 제2장 -

 

시 창작 강좌 같은 데 어쩔 수 없이 나가서 씨 뿌릴 때마다 나는 말할 수 없는 비애를

느낀다. 우선 내가 지독히도 말을 못하기 때문이다. 내 체형이 숏다리이기 때문이고,

남에게 시를 이렇게 써라 저렇게 써라 할 만큼 아는 게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더럽게 '시를 못 쓰기 때문이다. 되지도 않는 말을 한참 떠들다가 말문이

막힐 때는 수강생 중에 누가 속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 들린다.

 

'야, 그만해라. 너는 뭐 짜다라 잘 쓰니.'

그러나 나도 할 말은 있다.

'시는 배우는 게 아닙니다. 배워서 쓰는 시는 엉터립니다.

배워서 쓰는 시는 자기 게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대충 주워섬기고 나는 단에서 내려온다.

이것이 우둔한 강의를 은폐하는 비법이다.

 

나는 순전히 혼자서 시를 썼다.

그 흔한 문예반도 백일장도 한번 해보지 않았다.

시 잘 쓰는 법에 대한 책을 읽은 적도 없다. 유치한 대로 써 나가다 보니 그런대로

최영철적인 언어와 최영철적인 어법이 자리를 잡았다.

남의 시의 장점을 흉내 내고 고운

말을 달달 외우기라도 했다면 내 시가 지금처럼 험악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후회는 없다. 시 잘 써서 100점 받으려고 한 게 아니니까.

시는 몸 전체에서

우러나는 것을 받아쓰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시는 소설처럼 작업이 될 수 없다.

 

시를 잘 쓰려는 노력보다 무엇을 쓸 것인지에 대해 노력하는 게 좋다. 자기 몸 전체가,

생의 편편들이, 웅웅거리는 가슴이,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를 주목하는 게 좋다.

자신의 변덕스러운 마음이 주로 무엇에 기뻐하고 무엇에 슬퍼하고 무엇에 분노하는지를

관찰하는 것이 좋다. 남들이 무수히 쏟아놓은 애찬과 탄식의 언어를 동어 반복할 것이

아니라 많고 많은 시인 중에 '내가 또 있어야 하는'이유를 빨리 찾는 게 좋다.

그것이 자기 것이며 자신이 가장 잘 서낼 수 있는 것이며 자신의 주제에 어울리는 것이다.

고상하지도 않으면서 고상한 시를 쓰는 시인들이 우리나라에는 너무 많다.

 

<요점정리>

1.시는 배우는 것이 아니다.

자기 몸이 부르는 대로 받아 적어라.

그래도 시가 안 되면 자기 몸에 이상이 있는 것.

 

2.시를 알기 전에 자신의 주제부터 알아라.

자기 주체가 성스러우면 성스러운 시를,

자기 주체가 상스러우면 상스러운 시를.

그 파동으로/ 모든 날빛을 물들이니/ 마음이여/ 동트는 그곳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