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의 아픔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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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의 아픔
眞進 김 면 수
유년시절 오월에는 날 잡아
대인시장 순대집 기웃거리며
금남로 충장로 가로질러
남 광주시장 역전통 봇짐장수 구경하고
광주천따라 오르던 증심삿 길
배고픈다리 건너 숲섶
겨우내 움추렸던 여울물 소리
달뿌리풀 갈대마을 깨우고
버들치 모래무지 수초와 노닐던
운곡(雲谷)리 장구목 길
덕산골 마산골 육작골 사립골 통적골
선바우 굴바우 상사바우 안장바우
중보 웃들보 말씨보...
산까치 멧비둘기 종달새 노래하던
옛마을 산천 어데가고
떡갈나무 조팝나무 때죽나무 둘러쌓여
보호받는, 오백년 당산나무
너 헤아리지 못한 객들은 지쳐가고
약사암 여래좌불 찾는 이
증심사 오백전은 알리오 삼층석탑 심오함을
빛고을 희노애락 끌어안은 무등산
진달래 철쭉만이 나를 반길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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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 4일 / 지난 유년시절 추억속에
"석가탄신일과 5.18 광주민주화의날"을 맞이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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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무등산 증심사주변 참고자료
광주광역시 학동 3거리서 부터 증심사 주변까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때
운곡리와 신림리를 합하여 운림리가 되었으며, 1955년 광주시에 편입되면서
운림동으로,1986년 광주직할시 동구 운림동, 1995년 광주광역시 동구 운림동이
되었다. 운림동 행정구역은 현재 학운동(鶴雲洞)으로 동 이름은 운곡리와 신림리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까끔골·덕산골·마산골·물통골·육작골·텃골·붓당골·불묵골·사립골 등의 골짜기,
굴바우·상사바우·선바우·안장바우·탕건바우 등의 바위, 동산(東山)·운곡(雲谷)
통적골 등의 옛마을, 장구목 등의 야산, 말씨보·웃들보·중보 등의 보(洑)가 있었다.
지금부터 30∼40년전의 학동 삼거리는 광주 남쪽 끝으로 시골마을 변두리였다.
남광주시장 철길 넘어 증심사 가는길에 위치한 지금의 홍림교인 배고픈다리
주위는 온통 밭이요 논이었다. 상가건물과 아파트가 들어서서 옛날의 모습을
찾을 길이 없지만, 학운동 증심천에 놓인 세월교(洗越橋)인 이 배고픈 다리는
공사비가 105푼 들었다 하여 '백오픈'에서 배고픈이 되었다는 말도 있다.
1990년에 이백순씨가 발견한 조선중기때 사람인
이도화 선생 효비에 '虹臨永里'(홍림영리)라고 음각되어 있어
홍림이란 마을은 '무지개골'을 한자로 표기 하면서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이 다리도 '虹林橋'나 '무지개다리'가 잘못 전해 졌다고도 한다.
오백전은 증심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며,기록에 따르면 철감선사
도윤(798∼868)이 신라 헌안왕 4년(860)에 지었다고 한다.
1970년 대웅전을 시작으로 각종 부속 건물들을 차례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 오백전, 지장전, 비로전을 비롯하여 스님들이 기거하는
요사채가 있다. 오백전은 대웅전 뒤에 있는 건물로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이다.
안쪽에는 오백 나한상을 모시고 있는데 조선 세종 25년(1443)년 절을 고쳐 세울 때
지은 것이라 전하고 있다. 대웅전은 절의 중심 건물로 석가모니불상을 모시고 있다.
증심사에는 철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131호)을 비롯하여 삼층석탑(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과 석조보살입상(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4호)이 있다.
증심사 입구에서 약사 계곡을 따라 새인봉 쪽으로 오르다보면 비교적 규모를 갖춘
약사암이 모습을 드러낸다.
약사암은 증심사의 부속 암자로 철감선사 도윤이 증심사를 세우기 직전인 850년경
‘인왕사(人王寺) ’라는 이름으로 지었고, 고려 충렬왕 32년(1306)년 절을 고쳐
세우면서 ‘약사암 ’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어 재복원했음.약사암 여래좌불상은 중생을 모든 병고에서
구하고,무명(無明)의 고질까지도 치유하여 깨달음으로 인도한다고 전한다.
정식으로는 약사유리광여래(藥師瑠璃光如來)라고도 하는데,
보통 약사여래 또는 약사불이라고 부른다.
경전에서는 병을 고쳐주는 위대한 부처란 뜻으로
대의왕불(大醫王佛)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이 부처는 과거보살로서 수행할 때에 12가지 서원(誓願)을 세웠는데,
이를 이른바
‘약사십이대원(藥師十二大願)’이라고 한다.
① 내 몸과 남의 몸에 광명이 비치게 하려는 원,
② 위덕(威德)이 높아져 중생을 깨우치도록 하려는 원,
③ 중생이 바라는 바를 충족시켜 결핍하지 않게 하려는 원,
④ 중생으로 하여금 대승(大乘)의 가르침으로 돌아오게 하려는 원,
⑤ 중생으로 하여금 좋은 일만을 하여 삼취정계(三聚淨戒)를 다 갖추게 하려는 원,
⑥ 불구자의 모든 근(根)이 완전해지게 하려는 원,
⑦ 몸과 마음이 안락하여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증득(證得)하려는 원,
⑧ 여인으로 하여금 남자로 태어나게 하려는 원,
⑨ 모든 유정(有情)들의 그릇된 소견을 없애고 부처의 바른 지견(知見)으로 포섭하려는 원,
⑩ 모든 중생을 나쁜 왕이나 강도 등의 핍박으로부터 구제하려는 원,
⑪ 모든 중생의 기갈(饑渴)을 면하여 배부르게 하려는 원,
⑫ 가난하여 의복이 없는 이에게 좋은 옷을 입게 하려는 원 등이다.
이 부처의 상(像)은 흔히 왼손에 약병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 많은데,
한국에서는 백률사(柏栗寺)의 금동(金銅)약사여래상이 유명하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